VVIP 영주님의 품격 23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37화
2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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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니아 제국을 점령하고 몇 주 정도가 지났을 때, 나는 꽃들이 만개한 아름다운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로스니아 제국의 어딘가가 아니라 네패스 제국의 황궁에 있는 정원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곁에는 보폭을 맞추며 따라오는 레일리가 있었다.
“많이 피곤하실 텐데.”
레일리는 나를 걱정했고 나는 괜찮다며 억지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레일리는 그게 가짜 웃음이라는 걸 알았다.
내 연기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겉모습에 피로감이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로스니아 제국을 정복하고 돌아오자마자 레일리를 만난 상황이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지.’
전쟁에서 돌아오자마자 황후를 찾아서 시간을 함께 보낸다.
황제의 사랑을 받는 황후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는 지극히 정치적인 행동이었다.
물론 하루쯤 푹 쉰 다음에 만나도 되지만, 이런 피로한 상황에서 굳이 레일리를 만나는 것에 의의가 있었다.
원래 사랑이라는 게 굳이 안 해도 될 것을 해주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서 내가 레일리에게 의자를 빼주지 않아도 어차피 시종들이 다 알아서 해줄 것이다.
굳이 음식을 잘라주거나 먹여줄 이유도 없고, 무언가 선물을 보내는 것도 직접 알아보지 않고 아랫사람을 시키면 그만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런 행동들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다.
‘일부러 소문을 통제하고 있지는 않으니까.’
나와 레일리의 만남은 어떤 식으로든 남들에게 퍼질 것이다.
레일리가 직접 사람을 시켜서 소문을 퍼트리든 우리를 목격한 이들을 통해서 빠져나가든.
귀족은 물론이고 백성들까지 예외 없이 알게 된다.
실제로도 황족들의 사생활은 생각보다 잘 알려지는 편이었다.
과연 높으신 분들이 어떻게 사는지 귀족, 평민, 농노 구분 없이 한 번쯤은 호기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어머나, 폐하!”
그런데 그때 생각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대편에서 이데아가 정말 반갑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이데아를 바라보는 나와 레일리의 표정은 전혀 좋지 못했다.
레일리야 이데아를 좋아할 이유가 없었고 나는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절대 조용히 넘어갈 리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피곤한 상황이었기에 최악의 타이밍이라고 볼 수 있었다.
“황후마마와 함께 정원을 둘러보고 계셨군요.”
이데아는 흠잡을 곳 없이 예의를 표한 뒤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 이데아를 바라보는 레일리의 눈동자는 동요가 보일 정도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분명 정원에 아무도 들이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을 텐데?”
내가 피곤한 것을 알기에 레일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찾아 정원으로 오지 못하도록 진입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린 상태였다.
그런데 이데아는 황후인 레일리의 명령을 받은 이들을 뚫고 이 자리에 있었다.
‘설마 황후인 레일리의 명령을 무시할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는 건가?’
잠깐 그렇게 생각해 봤지만 아무리 이데아라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원을 둘러싸고 있는 이들은 레일리의 측근이고 그들은 황비에 불과한 이데아를 굳이 들여보내 줄 이유가 없었으니.
레일리의 분노를 사고 싶지 않다면 더욱 그래야 하고.
물론 이데아 역시 레일리의 사람들을 건드리는 간 큰 짓을 섣불리 저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성격이 포악하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레일리로선 이데아를 공격할 좋은 구실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선 발상을 바꿔야 했다.
‘레일리의 명령이 있기 전에 먼저 정원으로 들어왔군!’
레일리의 사람들을 뚫고 들어온 게 아니라 내가 레일리를 만나 정원을 돌 것을 예상하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것이라면?
실제로 이데아가 나타난 방향은 정원 깊숙한 곳이었다.
레일리가 사전에 정원의 출입은 막은 건 아니니 미리 들어왔다면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정원에 올 것을 예상할 수 있었던 건 이게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만남이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겠지.’
나와 레일리는 일부러 출입이 자유로운 외부의 정원을 선택했다.
멀쩡히 잘 이용할 수 있던 정원을 갑자기 막으면 누구나 이유가 궁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와 레일리가 만나고 있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퍼지게 된다.
이데아는 그걸 이용한 것이고.
‘지독하군.’
아무리 그래도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빼내려고 한 번 훑기는 했었을 것이다.
이는 이데아가 황비씩이나 되어서 사람을 빼내려는 눈길을 피해 숨었다는 이야기고.
체면을 생각하면 절대 하지 못할 일일 텐데 이데아는 그야말로 지독했다.
“황비. 미안하지만 지금 정원은 폐하와 나를 제외하면 출입 금지랍니다?”
레일리는 이데아와 나를 가로막듯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리고 당장 나가라는 의사를 표시했다.
“황후마마. 외람되지만 폐하께서는 큰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셨습니다. 진정 폐하를 생각하신다면 정원으로 오실 게 아니라 침실에서 편히 쉬시도록 하시는 게 옳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이데아는 그런 레일리의 행동에도 전혀 주눅 들거나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내 피곤함을 이용해서 레일리의 행동을 지적했다.
그 와중에 레일리의 말을 무시한 건 덤이고.
‘억지로 누르려고 하면 누를 수 있겠지만.’
레일리에게는 일전에 마련한 확실한 목줄이 있었다.
그러니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데아를 찍어 누를 수 있다.
하지만 그 선택은 반드시 피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레일리로서도 황비가 잘못했기로서니 그 목을 날려버리고 싶은 마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지 황후가 황비를 죽이거나 해를 끼쳤다는 소문이 나면 사람들이 레일리를 무서워할 테니까.
이는 레일리가 나에 맞춰서 쌓아온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 일이었다.
이데아가 겁도 없이 레일리에게 당당하게 굴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고.
아무리 신경에 거슬려도 레일리의 성격이라면 이 정도로 목을 날리지는 않을 거라고 파악을 끝낸 것이다.
‘숙청이라는 게 정치적인 리스크도 있으니까.’
반역을 저질러서 처치했다.
얼핏 듣기에는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정치 싸움에 익숙한 귀족들은 이면을 볼 줄 알았다.
반역자의 상황과 이를 적발해 낸 황실의 앞뒤 관계를 고려할 것이다.
그러면 레일리가 칼을 갈고 있다가 빼 들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겠지.
지금 이데아의 행동은 그런 부담을 감수해야 할 정도로 선을 넘은 건 아니었다.
“황비의 말이 맞는 것 같군요.”
레일리는 이데아의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황후에게 황제를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우면 어떻게 그걸 부정하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는 않았다.
레일리는 황후로서 이데아보다 훨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으니.
아무리 이데아의 능력이 좋다고 해도 레일리 역시 무능하지 않고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 상태에서 밀릴 이유는 없었다.
“그럼 이만 폐하를 침실로 모셔야 하니 황비는 별궁으로 돌아가세요.”
당장 꺼지라는 소리를 애써 돌려 말하며 레일리는 다시금 이데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설마 본인이 폐하를 위해서 침실로 모시라고 해놓고 쓸데없는 소리나 늘어놓으며 폐하를 붙잡으려고 하지는 않겠죠?”
게다가 이데아가 나에게 말을 걸 구실마저 차단했다.
본인이 꺼낸 명분이니 이데아도 여기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제가 그럴 리가요. 전 누구처럼 폐하께 부담을 드리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그렇다고 이데아가 자기 꾐에 스스로 넘어가서 무너질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데아는 예상했다는 듯 가뿐히 받아치며 레일리의 신경을 긁었다.
자신은 나에게 아무런 부담도 주지 않지만, 황후인 레일리는 이런 만남을 통해 내게 부담을 주고 있다는 걸 지적한 것이다.
“황궁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게 입이라는 걸 황비는 모르는 모양이군요?”
레일리의 목소리가 조금 변했다.
단단히 화가 난 것이다.
이쯤 되면 이데아로서도 슬슬 줄타기를 멈출 때가 아닌가 싶었다.
“폐하보다 더 신경 쓰고 두려워해야 할 게 있다니, 참 기이한 일이군요.”
그러나 이데아는 한 번 더 줄타기를 감행했다.
대단한 배짱이었다.
나조차 과연 레일리가 폭발할까 하지 않을까 자신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이데아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한 번 더 들어가기를 선택했을까?
그때 레일리의 시선이 잠깐 나를 향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데아가 그런 레일리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 또한.
‘나 때문이군.’
그제야 이데아의 과도한 줄타기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레일리 혼자였다면 결코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리에는 나도 함께 있었다.
레일리는 황후로서 자신이 이데아에게 밀리는 모습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데아가 다소 과한 줄타기를 하더라도 어떻게든 능력으로 이기려 하지 전가의 보도처럼 프레시아 대공의 반역을 들먹이지는 않을 테고.
‘내가 함께 있다는 것까지 이용한단 말이지. 대단하긴 하군.’
그렇게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두 사람의 다툼을 얼마나 지켜봤을까?
갑자기 이데아가 레일리에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기민한 몸놀림으로 레일리를 제치고 내 앞에 섰다.
순식간에 돌파당한 레일리는 무척 당혹스러워했으나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군주가 되기 위하여 문무를 모두 겸비했던 이데아와 달리 레일리는 몸 쓰는 일엔 그리 익숙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화려한 복장의 드레스를 입고도 이런 몸놀림을 할 수 있다는 건 놀라웠지만.
“내가 없는 동안 늘 이런 분위기였나?”
난 내 앞으로 다가온 이데아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평화롭게 잘 지내주리라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런 행동이 거듭되어서 좋을 건 없었다.
굳이 프레시아 대공의 반역 혐의가 아니더라도 레일리가 이데아를 공격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니까.
과하지 않은 선에서 제재를 하는 것 정도는 황후의 권한으로 충분히 가능했다.
문제는 그렇게 한번 눈에 보이는 제재가 시작되면 이데아를 지지하는 구 사트리안 왕국의 파벌이 어떤 식으로든 반응을 보일 거란 사실이다.
로스니아 제국을 흡수해 가는 이 시기에 새로운 내부 문제가 나오는 건 그리 바람직하지 않았다.
하물며 두 사람 사이의 일은 내가 반드시 끼어들어야 하니 더욱 그렇고.
“그럴 리가요. 아침에 문안 인사를 드릴 때 말고는 도통 대화할 틈도 없는걸요.”
그런데 이런 내 물음에 이데아는 뜻밖의 대답을 꺼냈다.
사이좋게 같이 웃으며 수다를 떤다거나 다과를 즐기는 관계를 기대하지는 않았으나 아예 대화할 틈도 없었다니.
이는 레일리 쪽에서 의도적으로 이데아를 피해왔다는 소리였다.
“계속 저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그렇게 애쓰시니 폐하께서 함께 계신 지금을 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데아는 억울하다는 듯 투정을 부렸다.
“그런 것치고는 아주 잡아먹을 기세던데?”
“황후마마와의 대화가 너무나도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버렸네요.”
누가 봐도 변명이 분명한 대답이다.
얼굴에 철판을 깐 정도로 뻔뻔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여기서는 이데아를 확실히 꾸짖을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이데아가 빙글 몸을 돌려 레일리와 시선을 마주쳤다.
레일리는 그런 이데아를 향해 눈에 힘을 팍 주었다.
그렇지만 이데아의 뻔뻔함을 생각해 봤을 때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황후마마. 마마께서는 절 피하시거나 어려워할 이유가 없으십니다.”
이데아는 레일리를 향해 이전과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극도로 공손하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낮추려는 듯한 모습.
레일리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어차피 제 목숨은 마마께 달려있고, 이 황궁에는 마마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가득하니까요. 심지어 제 곁에도 말이지요.”
이데아의 곁에 있는 사람.
시녀들을 말하는 게 분명했다.
이데아의 시녀들은 사트리안 왕국 출신이 아닌 영애들을 따로 선별해서 배정했다.
그리고 그 선별을 주관했던 게 황후였던 레일리였고.
따라서 황궁에서 이데아를 모시고 있는 시녀들은 모두 레일리의 손을 탄 이들이었다.
“하지만 이런 말뿐인 해명으로 믿을 수는 없으실 테지요.”
레일리의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자 이데아도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그러니 납득시켜 드리겠습니다.”
“납득?”
“저는 믿지 못해도 폐하는 믿으실 테니까요.”
갑자기 왜 내 이야기가 나오는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제가 황비가 아니라 군주가 되었다면 가질 수 있는 영토는 사트리안 왕국의 것이라는 건 이미 알고 계시겠지요.”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사트리안 왕국의 면적은 지금 네패스 제국 면적의 1할조차 되지 않습니다.”
로스니아 제국을 병합하기 이전에는 그래도 1할에는 가까웠다.
그러나 로스니아 제국을 손에 넣으면서 네패스 제국의 영토는 두 배로 넓어졌다.
사트리안 왕국이 아니라 기존의 어떤 왕국도 이 신생 네패스 제국의 광활함에 비할 수는 없었다.
대륙 전체 면적의 절반을 손에 넣었다는 건 그런 의미였으니까.
“그 상태로 제가 군주로 남아봤자 무엇 하나 할 수 있는 게 없겠지요. 하물며 네패스 제국이 대륙을 통일한 이후라면 그보다 더 작아질 테고요.”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나 의문이 들 때였다.
“하지만 폐하께서 아무리 대단해도 혼자 대륙의 모든 영토를 통치할 수는 없겠지요. 그때 저에게 통치할 땅을 주겠다고 약조해 주시면 성심껏 폐하와 마마를 보필하겠습니다.”
이데아의 말에 나와 레일리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영토를 달라는 말은 곧 자신을 제후로 삼아달라는 소리였으니까.
황비가 제후인 경우가 어디 있나 싶지만, 네패스 제국에는 이미 전례가 있었다.
바로 황후인 레일리가 마이어드 후작가의 영토와 재산을 물려받은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데아라고 프레시아 대공가를 받지 못할 이유는 없다.
“거래를 하자는 거군.”
황비로서 충실하게 지낼 테니 훗날 제후로 삼아달라.
즉 나에게 빼앗겼던 것들을 나중에 다시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당장 달라는 것도 아니고 대륙을 통일한 이후라면 나로서도 손해될 건 없었다.
이는 전적으로 이데아가 불리한 거래였다.
내가 말을 바꾸거나 대륙 통일에 실패한다면 그걸로 끝이니까.
리스크는 없고 리턴만 있다고 볼 수 있다.
“폐하께도, 마마께도 나쁜 제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나쁜 제안이 아니다.
레일리와 잠깐 시선을 교환했고 서로의 생각을 읽었다.
“받아들이지. 그런데 그대는 괜찮겠나? 이 약조가 지켜질 것을 어떻게 믿지?”
“지키지 않으실 건가요?”
이데아는 도리어 반문했다.
“통일 제국의 황제란 자가 부인과 한 약조도 지키지 못하는 반푼이라면 그것대로 재미는 있겠네요.”
자존심을 건드린다라.
예상은 못 했으나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