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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236화 (236/250)

VVIP 영주님의 품격 23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36화

236화

【 과도기 】

“폐하. 포로를 데려왔습니다.”

문서를 처리하고 있던 도중 루시우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여보내라.”

허가를 내리자 문이 열리며 네르바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전쟁에서 패배한 포로이나 네르바의 상태는 무척이나 깔끔했다.

감옥이 아니라 저택 하나를 비워서 감금했고 감시를 위해서지만 네르바를 살펴줄 시종까지 여럿 붙여뒀기 때문이다.

보통의 포로에게는 절대 보일 수 없는 호사스러운 대접이었으나 상대가 상대였기에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짚을 건 짚어야 했다.

“고개를 숙여라.”

루시우스가 네르바를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승리했고 네르바는 패배했다.

황태자라는 신분은 애초에 사칭이었으나 이제는 그런 표현조차 맞지 않다.

나라가 없는 왕이나 귀족은 있을 수 없으니까.

“네패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네르바는 의연한 모습으로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굴욕감이나 분노는커녕 평온하기 그지없는 음색이었다.

그리 새롭지는 않다.

자신의 영지나 국가를 점령당한 이들이 무조건 감정을 드러내며 달려들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네르바에게는 나름대로 믿을 만한 구석도 있었다.

로스니아 제국과의 전쟁은 깔끔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국경을 넘어 수도까지 진격해서 일전을 펼쳤고 적측의 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네르바를 생포하며 승리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가 생포되었기에 곤란해진 부분이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네르바를 처형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것이다.

로스니아 황실 자체에 대한 지지도는 많이 낮아진 편이지만 제국이라는 이름값에 대한 그리움까지 어쩔 수는 없었으니까.

민중의 인식에서 네패스 제국이 로스니아 제국을 대체하려면 반드시 시간이 필요했다.

“나가보도록.”

루시우스에게는 축객령을 내린 뒤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네르바를 어떻게 처리할지는 사실 이미 결심을 마친 상태였다.

이번에 네르바를 부른 것은 그런 내 결심이 흔들릴 여지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릴 거 같지?”

루시우스가 나가자마자 나는 네르바를 향해 어떤 처우를 내릴지 물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구걸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네르바는 그럴 녀석이 아니었다.

“선택은 내가 아니라 그대의 몫이겠지.”

그나마 예의를 차리던 모습조차 버린 채 네르바는 선택권을 되돌려주었다.

그러면서 도리어 내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 기대된다는 듯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왔다.

역시나 호락호락한 녀석은 아니었다.

“피레타 공작가를 뒤져봤다.”

그래도 한번 흔들어 보고자 피레타 공작가를 언급했다.

네르바가 신분을 숨긴 채 자라났던 곳이며, 피레타 공작은 이번 전쟁에서 네르바를 도우려 했다가 희생된 인물.

어떤 식으로든 동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뭔가 찾았나?”

하지만 네르바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우선 피레타 공작가에 자신이 진짜 아드리안 황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낼 증거가 없다는 걸 확신하는 듯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피레타 공작가 전체를 뒤지고 그곳에서 일한 이들을 불러 모아 정보를 캐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대부분은 네르바의 존재조차 몰랐고 그나마 알 만한 고위층들은 죄다 죽거나 행방이 묘연했다.

네르바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부터 일찌감치 준비했고 피레타 공작이 뒷정리까지 끝마쳤던 모양이다.

남은 공작가의 핏줄을 잡아다 네르바를 협박하는 방법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네르바가 사실 자신이 아드리안 황태자가 아니라고 말한들 그걸 믿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진짜 아드리안 황태자를 만나봤을 이들조차 네르바가 가짜란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찾았으면 이 자리에 부르지도 않았겠지.”

“그렇겠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반응이 나왔다.

“피레타 공작가의 사람들을 인질로 잡을까 고민해 봤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을 잡는다고 인질이 될까?”

“피레타 공작가에서 자랐으니 그들에게 피해가 가는 걸 원하지는 않겠지.”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이미 죽었어.”

피레타 공작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도 그를 죽인 건 아쉽게 여긴다.

하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네르바가 행세하고 있는 아드리안 황태자만큼이나 피레타 공작은 제국의 상징적인 위치에 있는 귀족이니까.

기회가 있을 때 깔끔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지금의 네르바처럼 내 발목을 붙잡았을 것이다.

‘그나마 나라를 잃은 상황이니 조금은 흔들리기를 기대했는데.’

의연한 태도에서 짐작했지만 역시나였다.

어설픈 흔들기가 먹히기에는 네르바의 정신이 너무 멀쩡했기에 하는 수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로스니아 제국은 다른 국가와는 규모가 다르지. 제대로 소화하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이 필요해.”

짧게 잡아도 2년이다.

이마저 로스니아 제국을 제대로 흡수하는 데 걸리는 기간이 아니라 저항하는 자들을 없애 안정된 상태를 만드는 기간이다.

다음 전쟁을 위해서는 장담할 수 없을 정도의 긴 헤아림이 필요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협화음도 많이 날 거고.”

내 이야기를 듣는 네르바는 여전히 여유로웠다.

어떠한 이유로 자신을 찾았는지 익히 짐작하고 있기에 보일 수 있는 태도였다.

“거절하지.”

그리고 그걸 증명하는 대답이 나왔다.

로스니아 제국을 점령한 것.

그 덕분에 대륙의 절반을 손에 넣은 것.

다 좋은데 지금까지 너무 서둘렀다.

특히 로스니아 제국은 덩치가 커서 체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내실을 다져야 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높은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빠르고 안정적으로 내실을 다지려면 로스니아 제국 출신에게 신망 받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네르바였다.

만약 계속 나를 적대한다면 역효과가 나겠지만 조금이라도 나에게 협력할 마음이 있다면 나도 네르바를 살리는 쪽을 고려해 볼 여지는 있었다.

“조국을 멸망시킨 적에게 협력해 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하지만 네르바는 나에게 협력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피레타 공작의 죽음 때문이 아니더라도 아스카에 대한 것, 개인의 자존심 등.

네르바가 내 손을 잡아야 할 이유는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서 하나뿐이지만, 잡지 말아야 할 이유는 산더미였다.

상대가 겁쟁이에 소인배라면 모를까 네르바는 아드리안 황태자를 사칭하며 카시안 공작과 맞선 몸이다.

당연히 그런 부류의 인간이 아니었다.

“아쉽군.”

네르바의 영웅 정보는 훌륭했다.

적이 아닌 아군이 된다면 나름대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부터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내가 그 제안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조금이나마 있다고 생각했나?”

“설마.”

네르바의 물음에 난 고개를 내저었다.

애초에 가능성이 없는 일이었다.

굳이 네르바를 불러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건 그걸 증명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인츠발트를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네르바 본인의 의지를 보여주는 게 최고였으니까.

실제로 이 방에는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없었으나 복도에는 아인츠발트가 대기하고 있었다.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아인츠발트라면 나와 네르바의 대화 정도는 바로 알 것이다.

“단지 바로 죽이기에는 부담스러워서.”

처형은 안 된다.

설령 눈 가리고 아웅이라고 해도 나와는 관련 없는 방식으로 처리하는 게 맞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조국을 지키지 못한 것에 분노한 로스니아 제국민이 네르바를 죽이는 것이다.

네르바를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비난하는 목소리와 배후에 내가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은 있겠으나 물증만 없으면 된다.

자기도 죽게 될 텐데 어떤 미친놈이 목숨 내놓고 남을 죽일까 생각도 할 거고.

그러나 나로서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암살자 출신 기사 하나를 이용한 다음에 붙잡혀 있는 죄수 중 하나와 도중에 바꾸기만 하면 되니까.

“네가 죽는 건 다음 전쟁이 시작된 이후가 되겠지.”

내가 근처에 있는 상태에서 네르바가 죽는다면 귀찮아진다.

게다가 아직은 네르바의 생사에 대한 관심이 많을 때고.

그러니 우선은 묵혀둔다.

모두가 네르바의 존재를 잊을 때쯤, 아마 내가 다음 전쟁에 나설 때가 될 것이다.

내가 출정해서 제국에 남아 있지 않을 때 네르바가 죽으면 나를 의심하는 목소리는 많이 줄어들 테니까.

그게 나로서는 가장 부담 적게 네르바를 죽이는 방법이었다.

“기한은 나도 알 수 없다. 몇 년 뒤가 될지.”

“그걸 미리 말해주는 건 마음의 준비라도 하라는 건가? 아니면 언제 죽을지 몰라 하루하루를 두려워하면서 살라고?”

네르바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떤 목적이라도 절대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듯이.

“아니.”

하지만 그런 네르바의 당연한 생각을 나는 단번에 부정했다.

“너 말고 네 조국과 네 백성들을 걱정하라고.”

“무슨 의미냐?”

자신이 아닌 다른 것들을 걱정하라는 말에 네르바의 인상이 험악해졌다.

“내 목표는 대륙을 통일하는 거다. 앞으로도 점령해야 할 땅은 많고 흘러야 할 피도 많지. 그 길의 선봉을 로스니아 제국이 맡아줘야겠다.”

네르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거짓말. 지금까지 네가 점령한 국가를 차별했던 전례는 없어. 오히려 어떻게든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애써왔지.”

네르바의 말은 옳다.

점령지의 영토와 재산, 사람은 모두 내 것이었다.

그러니까 괜한 차별이나 배척이 발생하면 나로서는 절대적인 손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경우가 다르다.

로스니아 제국은 내가 차별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기에 감동할 상대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해주는 게 낫다.

고마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이다.

“이제부터 생길 거다. 그렇게 해야만 되거든.”

로스니아 제국을 누른다.

귀족들은 이런 내 의견에 적극적으로 동의해 줄 것이다.

어떤 국가든지 로스니아 제국과 사이가 좋았던 적은 드물고, 그들도 이들이 쉽게 숙이는 성향이 아니라는 걸 알 테니까.

“그리고 예로부터 차별받는 이들이 인정받는 제일 좋은 방법은 공을 세우는 것이었지.”

네르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수년 뒤에 다시 시작될 전쟁에서 가장 많은 피를 흘리게 될 이들이 누구인지를 안 것이다.

“이건 나도 어쩔 수 없어.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은 모르거든.”

겉으로는 로스니아 제국에도 우호적으로 나가겠지만 내부에서는 배척이 이뤄질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로 나를 의심하기는 어렵다.

딱히 티를 낼 것도 아니고.

로스니아 제국민들도 타국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싫어하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그걸 이해하는 것과 견뎌내는 건 다른 문제다.

억울하고 부당하다고 느껴지는 차별이 거듭되는 상황.

그때 전쟁에서 공을 세울 기회가 온다면 차별을 벗어나고자 하는 많은 이들이 적극적으로 선봉에 나서려 할 것이다.

“누군가 로스니아 제국의 불만을 잠재우고 네패스 제국으로 병합되는 걸 적극적으로 협조해 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내 제안은 여기서 끝이었다.

네르바를 살려주겠다거나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네르바도 알 것이다.

자신은 죽어야만 한다는 걸.

그러나 죽기 직전에 선택해야 했다.

향후 흐르게 될 많은 피를 무시할 것인지 조금이나마 줄여보고자 노력할지.

하지만 후자의 방법은 결과적으로 네르바가 나에게 협력하여 네패스 제국의 기반을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일이 되어버린다.

이게 내가 생각한 네르바를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

네르바는 탄식을 내뱉었다.

“대체 누가 널 영웅이라 부른 거지?”

“난들 아나?”

네르바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악랄한 방법이지만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네르바도 로스니아 제국이 쉽게 흡수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내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도 이해할 것이다.

나라고 로스니아 제국에 감정이 있어서 이런 방식을 선택한 건 아니니까.

그냥 이게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뭐, 누가 먼저 그렇게 불렀는지는 몰라도 앞으로 날 그렇게 부를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거 같은데?”

은근한 어조로 묻자 네르바는 똥 씹은 표정이 되었다.

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면 네르바는 네패스 제국을 위해서 일해야만 했다.

당연히 정복자이자 조국의 원수인 나를 좋게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러니 추후 네르바가 나를 영웅으로 부르게 될 사람이란 걸 비꼰 것이다.

“그냥 처형해 주면 고맙겠는데.”

“그럴 거면 전장에서 죽었어야지. 나도 이런 비효율적이고 귀찮은 방법은 좋아하지 않아.”

나도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다 아인츠발트 때문이다.

굳이 그 상황에서 네르바를 생포할 필요는 없었다.

물론 이게 로스니아 제국을 흡수하는 것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네르바를 잘 관리하고 감시해야 하는 리스크도 남는다.

정치적인 능력이 부족한 상대라면 또 모르겠지만 네르바는 그런 부분에서 매우 우수한 4티어의 외교형 영웅이었다.

귀찮게 계속 감시하고 의심할 바에야 흡수가 어려워도 죽이는 쪽이 깔끔하고 정신적으로도 더 편하다.

네르바도 차라리 그편이 낫다고 생각할 거고.

깔끔하게 죽었으면 더러운 꼴은 안 봐도 됐을 텐데.

“따지려면 아인츠발트에게 따져라.”

“설마 당장 시작하라는 건 아니겠지? 역겨운 소리를 들어서 속이 많이 안 좋은데.”

“가능하면 빨리 움직이는 게 좋지.”

네르바는 죽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끝없는 감시 속에 나를 위해서 열심히 움직여 줘야 하니까.

그리고 그 쓸모를 다한 뒤에야 처리될 것이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먼저 가 있으라고.”

네르바의 저주를 가뿐히 받아쳤다.

어차피 첫 자리는 이미 예약 상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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