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3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35화
235화
“겨우 그 잠깐 사이에…….”
네르바는 아인츠발트의 무력에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가 아트라시아 후작을 무찌르고 제국군을 몰살한 아스카와 한참을 겨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과연 어느 정도로 강한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수련해 온 기사들을 한 명당 1초도 걸리지 않고 베어낸 건가?’
맨몸으로 내던져지더라도 일반인 정도는 얼마든지 해칠 수 있을 정도로 고도로 훈련된 기사들이었다.
하물며 장비를 모두 갖춘 상태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로스니아 제국이 근래 들어 사정이 나빠졌다고 하지만 기사들은 전성기 때부터 이어져 온 좋은 장비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무용했다.
이름 있는 장인이 만든 걸작을 걸치고서도 아인츠발트의 일검을 받아내지 못한다.
갑옷도, 투구도, 방패도 깔끔하게 절단된 흔적만 남아 있었다.
‘진짜 괴물이로군.’
상식을 아득하게 벗어난 무력이었다.
이러한 공포감은 홀로 제국군을 학살했던 아스카 이후로 처음이었다.
“대체 그대는 정체가 뭐지? 요정족이라고 해서 다 그대 같지는 않을 텐데?”
만약 아인츠발트 같은 강함이 요정족에게 있어 특별한 게 아니었다면 그들은 마족조차 몰아내고 대륙의 패권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이전까지 대륙의 패자는 마족이었고 이제는 인간이었다.
아인츠발트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지나치게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저 소명을 이루지 못한 검사일 뿐입니다.”
네르바의 물음에 아인츠발트는 씁쓸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시대에 아스카를 제대로 처치했더라면 후대에 아스카가 부활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대 같은 자가 굳이 네패스 제국을 위해서 헌신할 이유가 있나?”
“하지 못했던 일을 덕분에 끝낼 수 있었으니 은혜는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혹시 그 마족에 대한 이야기인가?”
네르바는 아인츠발트와 아스카가 어떤 연결 고리가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양쪽 모두 상식을 아득하게 벗어난 존재.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할 것이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었군요. 항복해 주시겠습니까?”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자 아인츠발트는 네르바의 목덜미에 검면을 갖다 댔다.
분명 수많은 피를 머금었어야 할 칼날이 별다른 이물질 없이 깨끗하게 빛나며 예리함을 드러내자 네르바는 다시 한번 공포를 느꼈다.
‘소름 끼치는군. 피 한 방울 제대로 묻어 있지 않아.’
눈앞에서 물리친 기사의 숫자만 수십이다.
이곳까지 오느라 처치한 이들의 숫자를 합하면 이미 백 단위는 넘어갈 터.
그런데도 검은 전혀 상하지 않았고 피조차 묻지 않았다.
이건 그저 명검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네패스 황제는, 그는 대체 어디까지 갈 생각이지? 정말 대륙을 통일하는 걸 꿈꾸나?”
“그렇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여기십니까?”
“아니, 그대 같은 자가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
네르바는 지금까지 대륙 통일 같은 건 바보 같은 꿈이라고 여겼다.
세상은 너무 넓어 로스니아 제국이라고 해도 미칠 수 있는 영향력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아인의 행적이나 눈으로 목격한 저력을 보니 그런 생각이 흔들렸다.
어쩌면 아인은 정말 대륙을 통일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거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그러나 네르바는 그런 아인을 옹호해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륙을 통일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들이 치켜세워 주는 것도 잠시일 뿐.
결국에는 세월에 스러져 갈 평범한 인간일 뿐이었다.
마족들이 오랜 세월 패권을 쥐고 있다가 인간에게 빼앗겼듯 영원한 권력은 없기 때문이다.
“영원한 건 없어. 네패스 황제의 야망도 결국에는 역사에 남겨질 한 줄의 기록일 뿐이겠지. 어쩌면 그마저 세월에 잊힐지도 모르고.”
“저도 그러면 좋겠습니다.”
네르바의 정론에 아인츠발트는 진심으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범차원 세력들의 존재나 위니스가 말해준 단서는 그런 당연한 상식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있었다.
“그냥 거짓말이었다면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인츠발트는 아인이 대륙 통일로 멈출 생각이 없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오히려 그건 시작점이다.
아인은 군주라는 존재가 되어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게 범차원 세력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말일 가능성은 없겠지요.”
그런 존재들이 구태여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대체 무슨 의미냐?”
네르바는 아인츠발트의 말에 불길함을 느꼈다.
그저 개인의 야망으로 끝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뉘앙스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어떤 수를 쓰더라도 아인을 막을 수 없다는 소리였다.
“설명은 여기까지 하지요. 항복해 주십시오.”
아인츠발트의 재촉에 네르바는 한숨을 내쉬었다.
더 싸워야 했다.
피레타 공작의 원한과, 억울하게 죽어나간 40만의 목숨을 생각한다면.
하지만 그들은 이미 죽은 뒤였다.
반면 자신이 항전을 선택한다면 앞으로 죽어나갈 목숨이 아직도 수만에 달했다.
“더는 로스니아 제국민의 피를 흘리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줄 수 있나?”
“제가 간청드려 보겠습니다.”
“그 약속을 믿겠다.”
네르바는 몸을 돌려 뒤를 살폈다.
몰려오는 네패스 제국군과 그들을 막고 황궁으로 피신하려는 로스니아 제국군의 싸움이 아직도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네르바를 비롯한 수뇌부가 먼저 물러나려고 했기에 대부분의 병력은 아직 달아나지 못한 채였다.
“멈추어라!”
네르바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목청껏 소리쳤다.
그러나 드넓은 전장에서 네르바의 목소리가 닿을 수 있는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다.
이미 전장의 광기에 휩싸인 병력들에게 네르바의 목소리는 전혀 닿지 않았다.
그때 아인츠발트가 행동에 나섰다.
“멈춰라!”
네르바의 목소리와 달리 아인츠발트의 목소리는 드넓은 전장에서도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정신없이 뒤엉켜서 싸우고 있던 양측의 군대가 세력의 구분 없이 전투를 멈췄다.
정확히는 아인츠발트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흡사 거대한 맹수 앞에 맨몸으로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고맙네.”
네르바는 아인츠발트의 협력에 순수하게 고마움을 표했다.
덕분에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듯했다.
“로스니아 제국의 황태자 아드리안의 이름으로 명한다!”
“황태자 전하? 그 옆에는 네패스 제국의 기사인가?”
“설마?”
아인츠발트에게 붙잡혀 있는 네르바의 모습을 본 로스니아 제국군은 절망이 엄습해 왔다.
반면 네패스 제국군은 그와 상반되는 미소가 그려졌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더 이상의 전쟁은 없다.”
네르바의 말에 로스니아 제국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전세가 기울었고 네르바마저 붙잡혔기에 그들도 전투를 이어나갈 능력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철그렁!
누군가가 무기를 내던진 것을 시작으로 한동안 병장기를 버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네르바는 소란스러웠던 전장의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에 안도했다.
“잘하셨습니다.”
아인츠발트는 네르바에게 겨눴던 검을 회수했다.
이것으로 제국의 전투 역시 끝이었다.
“이제 난 어떻게 되지?”
“글쎄요.”
네르바가 자신의 처우에 대해 질문하자 아인츠발트도 여기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리지 못했다.
아인의 지금까지 행보를 본다면 왕족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결코 높지 않았다.
로스니아 제국은 그 특성상 네르바를 살리려고 할지도 모르나 그것도 확신할 정도는 아니었다.
네르바는 그저 상징성이 강한 존재가 아니라 그 능력까지 출중했으니까.
뒤탈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인이라면 이용하다가 제거하거나 차라리 전장에서 제거하는 쪽을 선호할 것이다.
“거기까지는 저도 어쩔 도리가 없군요.”
살려달라고 간청을 할 수는 있으나 실제로 네르바의 존재가 불화의 씨앗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군의 희생이 나올 것이고 아인츠발트는 그걸 책임질 각오는 들지 않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은 더 이상의 피가 흐르지 않도록 막는 것뿐이었다.
“솔직한 대답이군.”
네르바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네패스 제국군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괴로웠던 싸움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 *
아인츠발트가 네르바를 사로잡는 것으로 로스니아 제국과의 전쟁은 승리로 막을 내렸다.
지금까지 많은 국가를 점령해 왔지만 그중에서도 로스니아 제국이 가지는 의미는 특별했다.
대륙의 절반이 넘어왔다는 뜻이기도 하고 수백 년 동안 이어지던 시대 하나가 막을 내린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는 반대로 말하자면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소리였다.
“황제 폐하 만세!”
나를 향해 만세를 외치는 목소리가 바깥에서 간간이 들려왔다.
간밤에는 로스니아 제국과의 승전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는데 그 분위기가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로스니아 제국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은 그만큼 컸으니까.
그들을 쓰러트리고 심장부에 내 깃발을 꽂았다는 것에 감격한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중 일부는 나보다도 더 이 상황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게 그저 승리가 기쁜 것인지 이후에 떨어질 콩고물을 기대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황제 폐하께서 나오셨다!”
“네패스 제국이여!”
황궁 바깥으로 몸을 내밀자 빼곡하게 들어찬 로스니아 제국의 백성들이 보였다.
간밤에 우리의 승리 연회가 있었다면 오늘은 이 땅이 네패스 제국의 영토가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포하는 자리였다.
물론 그 땅이라는 건 수도뿐만이 아니라 로스니아 제국 전체 영토를 포함했다.
어차피 각 국경의 방비를 맡았던 이들까지 무너졌기에 산발적인 저항이라면 모를까 제대로 된 군대가 우리를 막는 건 불가능해진 상태였다.
그러니 부담 없이 얼마든지 선포가 가능했다.
“로스니아 제국은 각국에 선전포고를 날리며 자신들의 야욕을 드러냈다.”
난 우선 내 통치의 정당성을 이야기했다.
다행히 빌헬름이라는 훌륭한 명분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로스니아 제국민들에게는 그런 빌헬름의 행동이 지지를 받았을지도 모르나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내용은 아니었으니.
하지만 단지 그것만을 명분으로 삼아서는 로스니아 제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에게 졌다.”
나는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기존 로스니아 제국의 시대보다 내가 이끌어 나갈 네패스 제국의 시대가 더 낫다는 사실을.
“로스니아 제국의 칼날은 우리의 칼날보다 무뎠다. 수백 년 동안 지도층의 부패로 칼날이 녹슬어 버린 것이다.”
첫 번째로 지목한 건 지도층의 부패.
증명 또한 어렵지 않았다.
각국의 군주들을 초청하며 사치스러운 연회를 열어줬던 빌헬름이지만 로스니아 제국은 기나긴 내전과 전쟁으로 고통받고 많은 고아와 빈민이 생겼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로스니아 제국이 엇나갔다는 방증이었다.
“그 증거로 옥좌를 노리고 황좌를 노렸던 반역자도 나오고 말았지.”
두 번째로 지목한 건 카시안 공작의 행보였다.
빌헬름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고, 선전포고를 이어받아 이웃 국가를 침략했다.
그러다 그 폭주를 참지 못한 네르바에 의해 반역자가 되어 처단당했지만, 이 또한 로스니아 제국의 어둠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아드리안 황태자는 어떤가?”
이어서 나는 아드리안 황태자를, 정확히는 그 행세를 했던 네르바까지 공격했다.
“그는 로스니아 제국에 두 번째 내전을 가져온 자이다.”
네르바가 저지른 잘못이라면 역시 내전이었다.
기득권층이었던 카시안 공작의 파벌을 정리하기 위해서 네르바는 큰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리고 이는 로스니아 제국이 가지고 있던 힘을 크게 떨어뜨렸다.
외부와의 전쟁도 아닌 내전이었기에 실책은 더욱 크다.
물론 네르바로서는 억울할 따름이겠지만 나는 이 부분을 이용해 로스니아 제국이 약해진 책임을 그에게 떠넘겼다.
어차피 말이라는 건 아 다르고 어 다른 거니까.
“마족과의 전쟁을 시작으로 로스니아 제국의 지난 역사는 모두 전쟁으로 점철되었지.”
제대로 싸워서 이겼더라면 모를까 결과는 패배였다.
그렇기에 이전의 행동은 모두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중요한 건 결과였으니까.
결과를 내지 못한 모든 행동은 저평가받는 게 역사의 성질이었다.
역사가 승자의 것인 이유다.
“하지만 이제 그런 비극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난 기존 로스니아 제국의 시대를 부정한 뒤 내 정당성을 설파했다.
더는 내전이 없을 것이다.
쓸데없는 일로 국력을 잡아먹지도 않을 것이다.
전쟁으로 무너져 간 문화도 모두 되살릴 것이다.
공수표를 남발하는 건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대부분의 것들은 진실이었고.
다만 더 이상 전쟁이 없으리라는 약속만큼은 하지 않았다.
예전에 크레시안 왕국을 점령했을 때처럼.
대신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른 이야기가 추가되었다.
“오늘 그대 모두의 앞에 선포한다! 짐이 손에 거머쥐게 될 모든 것들을 그대들에게 나누리라고!”
대륙 통일을 위한 나의 야망.
그리고 그 대가로 백성들에게도 과실을 나눠주리라는 약속.
비록 그것이 그들이 진정으로 바라던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내가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들뿐이었다.
빅터에게도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