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34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34화
234화
* * *
“그랜트가 위험한 것 같습니다.”
정면의 공세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나와 달리 후방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키스타 자작이 생각지도 못한 소식을 전해왔다.
기껏 보내놨던 그랜트가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이었다.
“상대는?”
“체임버스 백작일 겁니다. 북부의 국경을 책임지는 자로 뛰어난 기사라고는 들었지만 설마 그랜트가 저렇게 밀릴 줄은…….”
체임버스 백작이라면 게임에서도 언급만 될 뿐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대단한 실력자였다.
그랜트를 밀어붙이는 것으로 봐서 5티어는 확정적일 것이다.
국경에만 처박혀 있었을 것이니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지금껏 로스니아 제국의 주축이었던 영웅들은 빌헬름 또는 카시안 공작에게 붙은 이들이니까.
“릴리아나 경. 지원에 나서도록.”
나는 급하게 릴리아나를 불러냈다.
릴리아나 역시 아인츠발트를 도와서 공세에 나서야 했지만 그렇다고 그랜트가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자칫 아군의 후방이 위험에 처할지도 모르고.
“알겠습니다.”
릴리아나는 곧장 병력을 이끌고 그랜트에게 합류했다.
다행히 키스타 자작이 빠르게 정보를 전달해 준 덕분에 늦지 않게 그랜트를 구할 수 있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키스타 자작은 순식간에 그랜트를 구해내고 체임버스 백작을 몰아붙이는 릴리아나를 보며 감탄했다.
이미 릴리아나의 실력이 카시안 공작마저 넘어섰다는 건 내 측근이라면 다 아는 내용이지만 그것을 실감하기는 어려웠다.
게다가 키스타 자작은 대련이나 시합에 모습을 보이는 자도 아니었고.
그의 관심사는 돈에 있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언젠가는 아인츠발트 공작과도 대등하게 겨룰 날이 올 거야.”
난 그런 키스타 자작의 반응에 호응해 주며 릴리아나를 호평했다.
아인츠발트와 동급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 정도면 검사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나 마찬가지였다.
“미리 투자를 조금 해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군요.”
그에 키스타 자작의 눈이 장사꾼의 것으로 변했다.
어떻게 릴리아나에게 은혜를 입히거나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 될 일이다.
다른 귀족이라면 모를까 내 측근들은 전적으로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해서 움직여야 하니까.
귀찮게 정 같은 걸로 다른 귀족과 얽매이는 건 나로선 하나도 달갑지 않았다.
그런 뜻에서 시선을 보내자 키스타 자작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걸로 후방 문제는 일단락되었으니 전방에 집중하지.”
남은 북부의 지원군은 그랜트와 릴리아나가 어떻게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전방에 있는 제국의 수도를 보았다.
아인츠발트는 성공적으로 벽을 무너트리고 내부로 들어섰으나 그 앞에서 다소 시간을 끌고 있었다.
다수의 마법사들과 궁병들이 아인츠발트가 들어올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미리 대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이들은 무시한 채 오직 아인츠발트만을 노리고 공격을 집중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아인츠발트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았으나 잠깐 발을 묶는 정도는 되었다.
뒤를 따라온 기사단 때문에 아인츠발트의 운신이 다소 제약되었기 때문이다.
‘실수했군. 아인츠발트를 기사단과 같이 보내지 말 걸 그랬어.’
차라리 아인츠발트 혼자였다면 상황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인츠발트는 어떤 책임감을 느꼈는지 아군 기사단을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피해를 무시하고 돌격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인츠발트가 좋아할 명령은 아니었다.
“저쪽도 지원이 필요하겠군.”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기서 릴리아나를 보내 아인츠발트를 돕게 했을 것이다.
릴리아나 정도의 실력이라면 얼마든지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테니.
하지만 그 릴리아나는 후방으로 간 상태였다.
“더는 보낼 만한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그런 내 말에 근처의 귀족들이 의아해하며 서로를 살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아인츠발트의 발목을 붙잡지 않을 정도로 활약할 수 있는 실력자는 드물다는 사실을.
어설픈 자를 보내봐야 아인츠발트가 보호해야 할 사람만 늘어날 뿐이었다.
굳이 보내자면 루시우스나 탈론처럼 지휘를 맡고 있는 인물을 빼내야 하는데 자칫 지휘체계에 혼란이 생길 수도 있었다.
“지원이라는 게 꼭 사람이 갈 필요는 없지.”
* * *
‘작정하고 나를 붙잡고 늘어지는군.’
아인츠발트는 자신이 넘어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달라붙은 로스니아 제국의 병력을 상대하며 난처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가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실력 있는 마법사나 기사라고 해봐야 벽을 넘지 못한 자들이었고, 그에 근접한 수준도 아니었다.
설령 목숨을 버려가며 덤벼든다고 해도 아인츠발트는 자신을 지켜낼 능력이 충분했다.
하지만 아군을 보호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죄송합니다!”
아인츠발트와 함께 벽을 돌파해 온 기사들은 적들의 집중포화 앞에 그대로 표적이 되고 말았다.
선두에서 아인츠발트가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기에 무사할 수 있었지만 더 들어가지도, 뒤로 빠지지도 못하는 곤란한 처지였다.
“걱정할 필요 없다.”
아인츠발트는 그런 기사들을 달랬다.
아무런 해결책도 없이 그저 아군의 피해를 막으려고 여기서 시간을 끄는 바보짓을 한 게 아니었다.
그는 분명 지원이 이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대로 전황을 파악한 아인이 적절한 지원에 나섰다.
콰르르릉!
쉴 새 없이 공격을 퍼붓던 로스니아 제국 마법사들을 상대로 번개가 날아들었다.
공격에만 집중하고 있던 로스니아 제국의 마법사들은 그 기습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그들 정도의 수준으로 막을 수 있는 공격은 아니었지만.
‘한순간의 틈이면 충분하다.’
그렇게 잠깐 드러난 빈틈.
아인츠발트로서는 넉넉하기 그지없는 기회였다.
콰콰쾅!
적들이 드러낸 빈틈을 향해 그는 거침없이 검기를 쏘아냈다.
마법사들이 대응을 위해서 마나 실드를 펼쳤으나 그 누구도 일격을 감당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마법사들이 피를 흩뿌리며 나자빠지자 그들의 지원만 믿고 앞을 막아섰던 기사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런 괴물 같은!”
“저 번개는 갑자기 어디서 날아온 거야?”
그렇게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오던 균형이 깨지자 로스니아 제국은 혼란에 빠졌다.
아인츠발트를 따르는 기사단은 수모를 갚겠다는 듯 맹렬하게 상대를 몰아붙였다.
“완전히 뚫렸다! 승리가 눈앞에 있다!”
“적들이 이 이상 안으로 들어오게 하면 안 된다! 목숨을 바쳐서 막아내라!”
양쪽 모두 상황을 파악하고 무너진 틈을 향해 병력을 더욱 밀집시켰다.
공격하기 좋게 뭉친 적들을 향해 마법사들의 공격이 날아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수십, 수백의 목숨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다시 그 위를 더욱 많은 숫자가 뒤덮는 소모전.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로스니아 제국군만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인츠발트에 의해 실력 있는 기사와 마법사들이 모두 죽어버린 것이다.
“저, 적들이 들어온다! 막을 수가 없어!”
“외벽을 포기해라! 황궁으로 후퇴한다!”
“황태자 전하를 모셔라!”
패색이 짙어지자 로스니아 제국의 귀족들은 병력을 후퇴시키기 시작했다.
수도로 적들이 들어오는 걸 막지 못했으니 다음 벽이 있는 황궁까지 물러서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승리가 아닌 패배를 지연시키는 행위에 불과했다.
황궁은 아름답고 화려했지만 전장으로 쓰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 돼! 여기서 물러나면 뒤는 없다!”
네르바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대로 자신들이 황궁으로 몸을 피하면 네패스 제국군은 잔당을 찾겠다며 수도를 들쑤시고 다닐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이 전쟁과 관련 없는 이들까지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죽더라도 이곳에서 죽어야 한다!”
네르바가 퇴각을 거부하자 네르바를 돕던 귀족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황태자 전하! 아무리 전세가 불리하다지만 최후까지 항전하셔야 합니다! 전하께서 포기해선 안 됩니다!”
“포기하려는 게 아니다! 이 뒤는 수도란 말이다! 그곳에 있는 백성들이 몇이나 되는 줄 아느냐?”
“그들 역시 제국민이라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희생입니다!”
귀족의 말에 네르바는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수도의 백성들을 포기하라는 말을 하는 귀족에게서 국경을 비우라고 명령했던 자신의 행동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 리처드 백작은 자결하고 서부의 지원군은 전투도 못 해본 채 참패하고 말았다.
“아아…….”
네르바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항복을 해야 했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라는 걸 알고서도 자신이 무리하게 싸우려고 했기에 제국민들도 그를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희생만 더 늘어날 뿐.
“이곳에 나선 병사들을 보십시오! 모두가 황태자 전하를 보고 있습니다!”
귀족은 네르바를 설득하는 데 필사적이었다.
이기고 지고는 둘째 문제다.
그들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적들에게 맞서 싸워야 했다.
그것이 제국의 귀족다운 행동이었고 한때나마 최강국을 자처했던 로스니아 제국 황태자가 지녀야 할 품위였다.
“어찌 이제 와서 일말의 희망조차 놓으려고 하십니까? 저희는 모두 황태자 전하를 따라 이곳에 왔습니다!”
“그래, 그랬지.”
피레타 공작가의 기사들도 그랬다.
그들은 주군인 피레타 공작의 위기에도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무리한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다.
그저 얌전히 후퇴했을 뿐.
자신의 존재 때문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아스카라는 마족의 손에 죽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나를 따라왔어.”
아니, 그 이전에 아드리안 황태자를 연기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카시안 공작은 반역자였지만 그라면 아스카라는 마족에게 형편없이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당시의 제국에는 지금보다 더 강한 기사들과 더 많은 병력이 있었으니까.
어쩌면 아스카라는 마족도 감히 제국을 노리지 못했을 수도 있었고.
“이게 내 것이 아닌 자리를 넘본 대가인가.”
네르바는 입술을 짓씹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 무조건 승리를 거두어야 했다.
“퇴각하라! 황궁까지 물러난다!”
네르바의 명령에 귀족들은 안도하며 병력을 후퇴시켰다.
아인츠발트는 물러나는 로스니아 제국군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도심지 안까지 들어갈 생각인가?’
황궁의 위치는 수도의 한복판이었다.
그곳까지 물러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수도의 주민들까지 위협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아인이 약탈을 금지한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지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는 안 되지.’
군대도 아니고 일반인까지 전쟁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아인츠발트는 재빨리 퇴각하는 로스니아 제국 수뇌부의 앞을 틀어막았다.
“그대는!”
네르바는 아인츠발트의 얼굴을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황태자 전하. 여기까지 하시지요.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리실 생각입니까?”
“하! 이 제국에 재앙을 몰고 온 자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네르바의 지적에 아인츠발트는 말문이 막혔다.
아스카가 로스니아 제국을 공격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 자신이었으니 이를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수도 안으로 몸을 피하실 생각입니까? 뒤에 벌어질 일을 모르지는 않으실 텐데?”
네르바 역시 여기에 대해서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하다못해 군대의 희생은 전쟁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백성들의 희생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죽을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그렇다고 나를 믿고 따라주는 이들을 내버려 두고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다.”
네르바의 말과 함께 귀족과 기사들이 네르바의 앞을 가리고 섰다.
그들은 아인츠발트를 뚫기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비켜라.”
“그럴 순 없습니다. 저도 일단은 휘하 병력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라. 전쟁을 빨리 끝낼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요.”
아인츠발트는 네르바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것이 떠밀린 것이라고 할지라도 네르바에게는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책임은 자신에게도 존재했다.
아직 아인츠발트는 다른 단장급 실력자들과 달리 자신만의 기사단을 갖고 있지는 않았으나 임시로 한 기사단을 이끄는 몸이었다.
고작해야 불편한 감정으로 그들이 위험을 감수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럼 죽어라!”
네르바의 명령이 떨어지자 곁에 있던 기사들이 아인츠발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인츠발트는 그들을 바라보며 침울한 눈빛을 보냈다.
‘왜 하필 이런 시대였을까?’
분명 아스카를 물리치기에는 최고의 시대였다.
아인의 존재 덕분에 거기에 있어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끝없이 전쟁이 이어지는 후대의 모습은 아스카를 토벌하며 평화가 찾아오기를 바라던 과거 영웅들이 원하던 미래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 원인이 마족과의 전쟁 때문인지, 피의 연회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의 욕망 때문인지 아인츠발트는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지금 자신에게는 소속된 곳이 있고 그들을 지키려면 눈앞의 적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
전쟁이란 적과 아군을 나누는 것에서부터 시작이었다.
촤악!
아인츠발트는 자비를 보이지 않았다.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한 명이라도 아군을 살리기 위해서는 서둘러 승부를 봐야 했다.
“으아아!”
아군이 무참하게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로스니아 제국의 기사들은 초개처럼 몸을 던졌다.
네르바가 달아날 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수십 명의 기사들이 희생되는 동안 네르바 역시 이를 악문 채 황궁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네르바의 움직임은 금세 제지되었다.
아인츠발트는 네르바의 목덜미에 칼날을 겨눴다.
어느새 네르바를 지키던 이들은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