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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230화 (230/250)

VVIP 영주님의 품격 230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30화

230화

* * *

키스타 자작의 능력은 출중했다.

그가 알려주는 길을 통해서 우리는 매우 빠른 속도로 수도를 향해 진격할 수 있었다.

어쩌면 국경에 있는 병력이 제대로 합류하기도 전에 우리가 먼저 수도에 도착할지도 몰랐다.

“다음에 도착하는 마을에서 식수를 보충하시면 될 겁니다.”

“훌륭하군.”

키스타 자작은 단순히 최단 루트만 안내한 게 아니었다.

중간중간에 휴식을 취하거나, 습격을 받을 위험이 있거나, 우리가 식수와 식량을 보충할 만한 지점들을 빠짐없이 짚어주었다.

덕분에 처음에는 우려를 표하던 이들도 이제는 그를 어느 정도 신뢰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급속 행군을 이어가던 중이었다.

“그런데 황제 폐하.”

“뭐지?”

“어째서 이번 선봉에 그랜트를 포함시키셨습니까?”

돌연 키스타 자작이 선봉 부대의 인선에 대한 의문을 표했다.

“본인이 강하게 원하지 않았나?”

제국 출신이기에 유쾌하지는 않겠지만 그랜트는 이제 자신이 네패스 제국의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겠다며 직접 선봉을 자처했다.

이전부터 공을 세울 기회가 생기면 적극적으로 나서왔었고.

“지금까지는 그래도 상관없었지요. 하지만 이곳은 로스니아 제국의 영토 내부 아닙니까?”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곧 눈치챌 수 있었다.

키스타는 어떻게 제국 출신인 자신과 그랜트를 믿고 같이 선봉에 세웠냐고 묻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들이 비록 망명했다고 하지만 제국민으로서의 자부심은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군주라면 이런 위험한 작전을 이 둘이 주도하게 해선 안 되었다.

실제로 이에 대해서 탈론이 우려를 표시한 적도 있었고.

‘키스타의 정보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움직이는 군대에 제국 출신인 그랜트까지. 만일 둘이 다른 마음을 품는다면 확실히 위험하겠지.’

하지만 그건 그럴 가능성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영웅 정보에서 표시된 두 사람의 소속은 배신의 가능성을 거의 없애주었다.

그리고 단지 영웅 정보만 믿고 이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적은 더 가까이에 두라고 했던가?’

이 둘이 혹은 둘 중 하나라도 배신할 계획이 있다면 그걸 예방하거나 대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내가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었다.

마법을 통해서 연락한다고 해도 마법사인 내가 알아차릴 수 있고, 물리적인 접선을 하려고 한다면 다니엘이 알게 될 것이다.

이 둘은 모르겠지만 현재 선봉에는 다니엘을 비롯한 암살자 출신 기사들이 모습을 위장한 채 숨어 있었으니.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한다는 것이고 실제로는 그리 의심하지도 않지만.’

진짜 의심했으면 아예 이렇게 써먹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다니엘을 불러들인 건 네르바의 생사를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였으니.

이들에 대한 감시는 도중에 놀게 둘 수 없어서 시키는 부수적인 것에 불과했다.

“의심스럽지 않냐고 묻는 것이로군.”

“저희가 망명한 이유는 제국이 싫어져서가 아니라 살길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얼마든지 변심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지요.”

키스타 자작은 절대 쉽게 꺼낼 수 없을 부분을 대놓고 말했다.

확실히 그와 그랜트가 망명한 까닭은 로스니아 제국이 싫어서가 아니다.

카시안 공작을 따랐다가 네르바에게 토벌당할 처지가 되어 마지못해 달아난 것일 뿐.

그러니 네르바가 마족에게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지금, 다시 제국으로 마음이 기울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걸 제 입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키스타 자작도 어지간히 범상치 않은 이였다.

“나를 시험해 보고 싶은 건가?”

이에 대해 내가 짐짓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자 키스타 자작은 능청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폐하께서 저희를 믿어주신 것은 감복할 따름입니다. 단지 의심이 완전히 걷힐 순 없을 텐데 어찌하여 이리 용단을 내리시게 된 건지가 궁금했을 뿐입니다.”

“내가 굳이 대답해 줘야 하나?”

“그럴 리가요.”

대답을 필요하냐는 물음에 키스타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결국 내가 입을 열게 될 것이라는 걸.

그가 나를 시험해 보려고 하는 이상 나는 군주로서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내야 했다.

그를 위협하든 납득시키든.

군주로서의 권위란 그런 것이었다.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대답했다.

딱히 상관없었다고.

“상관없었다?”

“아무리 일국의 황제라고 해도 사람의 마음까지 어찌할 수는 없지.”

힘으로 찍어 누를 수는 있다.

하지만 마음을 사는 일은 권력으로도 불가능하다.

당장 이데아와 내 관계가 그렇다.

권력과 무력에서 나는 이데아를 압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데아가 나에게 마음을 여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얼마든지 다른 생각을 품어도 된다.”

“그건 너무…….”

키스타 자작은 내 이야기에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건 일국의 군주로서는 일견 무책임하게 보일 테니까.

그러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하는 법.

내가 말하고자 하는 진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책임은 제대로 져야겠지.”

기회는 얼마든지 줄 수 있다.

이데아에게도 기회는 줬다.

난 그녀가 나에게 요구했던 것들을 거의 대부분 들어주기로 약속했고 실제로 그것들을 이행했다.

덕분에 이데아는 황비치고 꽤 운신의 폭이 자유로웠으며 나름대로 세력을 꾸릴 기반도 마련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데아가 이를 통해서 세력을 만든다면 그 행적 하나하나가 나에게, 그리고 레일리에게 알려지게 될 것이다.

프레시아 공작이라는 확실한 목줄까지 채워놓은 상태에서 이데아가 그 기회를 제대로 쓰는 건 절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군요. 탄복했습니다. 과연 제국을 일궈낸 지배자다운 배포이십니다.”

키스타 자작은 아부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어느 쪽이라도 딱히 주의 깊게 들을 필요는 없었기에 대충 흘려들을 때였다.

키스타 자작이 일전에 이야기했던 마을이 보였다.

“잠깐 쉬겠군.”

당연하지만 전투는 없었다.

선봉이라고 해도 수만의 군대 앞에서 고작 작은 마을 하나가 뭘 하겠는가?

어서 떠나기를 바라며 숨거나 멀리서 우리를 발견하고 달아나는 이들이 전부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식수를 확보하러 접근했던 이들이 마을 촌장으로 보이는 노인을 상대로 멱살을 잡는 게 보였다.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

“그런 듯하군요.”

보통이라면 아래에서 올라올 보고를 느긋하게 기다렸겠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에서 그런 절차를 기다릴 순 없었다.

게다가 신경 쓰이는 문제도 있었기에 직접 소란이 일어난 곳까지 움직였다.

“무슨 상황이지?”

내 행차에 마을 촌장은 물론 그를 상대로 멱살잡이를 하던 이들도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만세! 만세! 만세!”

황제가 되고 나서 불편해진 점이 있다면 나를 상대하는 이들이 예의를 과하게 차리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나는 아무런 쓸데없는 만세 삼창을 듣게 되었다.

“무슨 상황이냐고 물었다.”

“아, 예! 글쎄, 이 간악한 늙은이가 마을의 식수가 갑자기 말랐다고 거짓을 늘어놓는 게 아니겠습니까?”

노련해 보이는 병사가 촌장을 노려보며 답했다.

확실히 갑자기 식수가 말랐다고 하는 건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애초에 잘 막힐 것을 식수로 쓰지도 않을뿐더러, 시기도 너무 공교로웠으니.

“마침 우리 군대가 지나갈 때 식수가 말랐다?”

촌장은 한눈에 봐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소리쳤다.

“사, 사실이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으나 갑자기 물이 말라버렸습니다!”

“그것참 대단한 우연이군.”

누구도 믿지 않을 헛소리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촌장이 바보가 아니라면 의심을 받을 것도, 우리의 분노가 쏟아질 것도 모르지는 않았을 터.

일부러 작정하고 식수를 막아버린 것이라면 분명 마을 주민들은 대피시켰어야 한다.

그러나 연기가 올라가는 것도 그렇고 마을은 우리가 나타나기 전까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 증거로 창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민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어른들이야 죽음을 각오했을지 몰라도 아이까지 죽이게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신경 쓰이는 건 또 있었다.

‘우리가 오늘 여기를 지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지?’

키스타 자작의 도움 덕분에 선봉은 아직 별다른 저항 없이 빠른 속도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개 촌로가 우리 군대의 움직임을 알고 물길을 막아버릴 수 있을까?

단언컨대 불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누군가가 직접 말을 해줘야 했고 그 누군가는 우리 군대의 움직임을 꿰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보통 군대가 이동하는 길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선봉은 키스타 자작 덕분에 일반적으로 쓰이지 않는 길을 통해 이동하고 있다.

상대가 키스타 자작의 존재를 아는 게 아니라면 절대 우리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디 믿어주십시오! 이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옵니다!”

촌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자신들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애걸복걸했다.

“어떻게 생각하나?”

난 슬쩍 고개를 돌려 키스타 자작에게 물었다.

그는 상당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마 촌장의 말은 사실일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제가 안내한 길이 아니라 보통 쓰이는 길을 이용했다면 이 마을을 지날 일은 없습니다. 만약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라면 우리의 움직임을 예측했다는 건데 한낱 필부가 할 만한 일이 아니지요.”

옳은 분석이었다.

만약 우리가 느긋하게 주변 지역을 점령하면서 나아갔다면?

식수를 말려버려 봤자 우리가 다시 파내어 버리면 그만이다.

다소 귀찮은 일이 되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임시방편에 불과한 일.

우리의 진격을 지연시키겠다는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서야 쓸데없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지연시키려는 건 국경의 병력이 올 시간을 끌기 위해서일 테고.’

그렇다면 상대는 국경의 병력이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며, 동시에 우리가 속전속결로 수도로 진격한다는 것도 안다는 뜻이다.

게다가 정상적인 경로가 아니라 키스타 자작을 통해 바꾼 경로를 이용했다는 것도 안다.

우리의 사정을 훤히 꿰고 있다는 소리다.

‘그저 키스타 자작이 전향했다는 걸 아는 것만이 아니야. 어떤 경로를 선택할지 짐작했다는 건 키스타 자작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의미지.’

내 행동을 분석했고 키스타 자작이 내놓을 답까지 예측했다.

로스니아 제국의 귀족 대부분이 죽어버린 현재 그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적어도 내가 기억하고 있는 영웅 중에 그럴 능력을 갖춘 건 하나뿐이었다.

“네르바.”

스스로 내린 결론에 이토록 강한 확신이 든 경험은 몇 번 없다.

물론 혹시나 하고는 있었다.

피레타 공작이 결사 항전을 하는 대신에 괜한 계략을 쓴 게 찜찜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었다.

상황이 궁지에 몰렸기에 기존과 다른 행동을 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나 그 피레타 공작이 죽은 상황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더는 의심할 필요가 없다.

이런 짓을 할 만한 존재는 네르바뿐이었다.

“살아 있었군.”

“네르바? 그게 누구입니까?”

내 중얼거림을 옆에서 듣고 있던 키스타 자작이 의문을 표했다.

로스니아 제국의 귀족이며 카시안 공작 휘하로 잠깐이나마 그에 맞섰을 인물인 그조차 네르바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긴, 비단 네르바만의 일은 아니지만.

“우리를 골치 아프게 만들지도 모르는 상대지.”

네르바가 살아 있다면 대응도 달라져야 했다.

지금 네르바가 원하는 건 우리의 진격을 지연시키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국경에서 지원군이 올 시간을 벌고, 수도에서 방비를 갖춰 일전을 치르기 위해.

그럼 내 선택지는 세 가지 중 하나가 된다.

더 빠르게 이동하거나, 계획을 바꿔서 주변을 먼저 점령하거나.

그러나 어느 쪽이라도 나에게 웃어주는 선택은 아니었다.

지금보다 속도를 더 올리면 보급이나 휴식 여건이 불안해지는데 자칫 낭패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걸 고려하고 편성한 선봉 부대였지만 내 예상보다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 혹여 길을 뚫기 전에 패퇴한다면 그것은 뼈아픈 손해였다.

‘그러니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를 선택해야겠지.’

상대가 시간을 끌고 싶어 하는 이유를 부수는 것.

‘마법사 협회의 도움을 받아야겠군.’

국경에서 오고 있을 지원군을 먼저 요격할 때였다.

* * *

네르바는 서둘러 수도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생존을 밝히고 네패스 제국군과 맞서 싸울 이들을 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네패스 제국군의 진격을 막는 일은 피레타 공작가의 기사들에게 일임한 상태였다.

그런데 서둘러 수도로 향하는 네르바에게 남아서 공작을 펼치던 이들로부터 보고가 올라왔다.

네패스 제국군의 선봉이 움직임을 멈췄다는 내용이었다.

“작전이 성공한 건가?”

네르바는 이 보고를 통해서 자신의 작전이 성공적으로 먹혀들었다고 여겼다.

‘예상대로 키스타 자작을 이용해서 빠르게 진격했군.’

그저 시간을 끄는 정도의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 잠깐의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적어도 싸워보기도 전에 수도가 함락당하는 꼴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에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였다.

“황태자 전하.”

그런데 네르바와 동행하던 마법사가 심상치 않은 얼굴로 네르바를 불렀다.

“무슨 일이지?”

“서부 국경의 리처드 백작으로부터의 보고입니다. 네패스 제국군이 리처드 백작의 군대를 급습했다고 합니다!”

분명 똑똑히 들었음에도 네르바는 그 내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부에서 올라오고 있는 네패스 제국군이 느닷없이 서부의 지원군을 공격했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사의 말은 실수가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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