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29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29화
229화
【 암수 】
“경들에게 미안한 일을 했군.”
피레타 공작의 죽음 이후 네르바가 정신을 추스른 건 하루가 지난 뒤였다.
자신이 이끌던 제국군은 갑자기 나타난 마족에게 몰살당하고, 그런 위기 상황에 몸소 나섰던 피레타 공작마저 목숨을 잃은 상황.
그런데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은 로스니아 제국을 이끌어 가는 인물다운 침착함을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
네르바는 이에 극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더욱 창피한 건 이런 자신의 무능함으로 인해 피레타 공작의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주군을 버린 채 자신을 데리고 달아나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어떻게 갚아야 할지도 모를 크나큰 빚을 진 셈이었다.
“아닙니다. 분명 공작 전하께서 곁에 계셨다면 저희와 같은 행동을 하셨을 겁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제국을 수호하는 피레타 공작가의 역할이니까요.”
피레타 공작가의 기사들은 주인을 잃어버리게 된 자신들의 처지를 최대한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제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서 황태자의 생존은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자신들의 주군인 피레타 공작보다도.
이는 매우 특이한 일이었다.
다른 가문의 기사라면 마땅히 공작의 안위를 우선했을 테니.
하지만 피레타 공작가의 기사들은 가문보다 황실을 우선시하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이 그들이 피레타 공작가에서 배워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기사들은 네패스 제국에 대한 증오를 곱씹으며 네르바의 명령을 기다렸다.
죽어간 동료들과 주군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침략자들로부터 로스니아 제국을 지켜내야 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현재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네르바였다.
“우선은 각 국경의 병력이 합류하기를 기다리는 게 최선이다.”
네르바는 침착하게 전황을 분석했다.
남부 국경마저 뚫린 이상 네패스 제국군과 정면으로 대적하면 승산이 없었다.
반대로 국경의 병력이 합류한다고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이 합류한다고 해봐야 숫자는 적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게 현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합류하지 않으면 싸울 여력 자체가 생기지 않았다.
“국경이 비어도 괜찮겠습니까?”
국경을 비운다는 네르바의 말에 피레타 공작가의 기사들은 곧장 우려를 표했다.
“괜찮지는 않겠지.”
네르바는 그런 우려에 대해 진솔하게 대답했다.
국경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가 빠져나간다면 침략자들이 들어올 위험이 있었다.
그렇기에 본래라면 절대 국경에 주둔 중인 군대만큼은 빼선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 네르바에게는 그들이 반드시 필요했다.
“희생자들이 나올 것이다. 전부 무능한 나의 잘못이지.”
특히 신경 쓰이는 건 북부 국경이었다.
그곳에는 레이칸 왕국과 비슷한 야만족들의 땅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그리 큰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국경이 열린다면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그렇다고 야만족의 침략을 우려해 어중간한 수만 빼는 것도 불가능했다.
모든 병력이 합류해도 절대적인 열세를 감당해야 하는데 그마저 규모를 줄인다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니.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서라도 병력을 하나라도 더 모아야 한다. 북부의 백성들에게는 피난을 지시하는 게 최선이겠지.”
네르바는 자신의 말이 현실성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피난을 명령하는 건 어렵지 않으나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껏 살아온 터전을 하루아침에 버리라는 건 절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는 국경의 군대에게도 부담되는 일이었다.
북부에는 당연히 그들의 가족들도 함께 살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갑자기 지켜야 할 가족들을 버리고 수도로 오라고 하는 것이니 반응이 어떻겠는가?
절대 사기가 높을 수는 없을 것이다.
‘부담이 매우 큰 선택이다.’
필연적으로 많은 희생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선택이었다.
네르바는 자신의 선택으로 일어날 희생을 생각해 보고는 잠시 이 명령을 철회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어쩌면 아예 저항을 포기해 버리는 쪽이 차라리 피해가 적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금세 사라졌다.
자신은 빌헬름처럼 타국을 침략하려는 야욕 때문에 이러는 것도 아니었고, 이미 제국을 위해서 흘러내린 피가 너무나도 많았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이 제국의 이름이 사라지는 일만큼은 막아야 했다.
“그럼 국경의 병력이 모일 때까지는 손 놓고 바라보는 수밖에 없습니까?”
“천만에.”
한 기사의 물음에 네르바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직접적인 전투는 불가능하지만 로스니아 제국군을 괴롭힐 방법은 얼마든지 남아 있었다.
“이 땅은 우리의 땅이다. 적들을 괴롭힐 방법이라면 얼마든지 있지.”
네르바는 네패스 제국에서, 정확히는 아인이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를 추측했다.
국경의 군대가 수도로 모이게 될 거라는 사실은 네패스 제국도 충분히 알고 있을 터.
느긋하게 주변을 장악하고 보급로를 탄탄하게 해서 진격하거나 아니면 신속하게 수도로 이동해 제대로 된 방비를 하기 전에 결판을 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전자를 선택할 확률은 높지 않았다.
이곳은 다른 국가도 아닌 로스니아 제국이었으니까.
침략자에게 제대로 협조해 주지도 않을 것이고 개인적으로 저항하는 이들도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게다가 영토마저 드넓으니 하나씩 점령하려고 하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시간을 끌게 될 확률이 높았다.
아인이 그런 선택을 할 리 없었다.
‘놈은 단 한 번도 전쟁을 길게 끌어본 일이 없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전이든 전쟁이든 국력을 깎아먹는 일을 굳이 오래 이어나갈 필요는 없을 테니.
게다가 그런 지지부진한 행보는 아인이 쌓아 올린 명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번에도 아인은 속전속결로 결판을 보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수도로 오려고 할 테지. 우리는 거기에 맞춰서 대비하면 된다.’
네르바는 아인이 지금껏 보여준 업적을 통해 그의 선택을 예측했다.
“놈들은 서둘러서 수도로 이동하려고 할 테니 우리는 그 틈을 노린다.”
그리고 이런 예측은 굉장히 정확했다.
실제로 아인은 네르바의 예상대로 수도로 진격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 * *
피레타 공작을 죽이고 남부 국경을 뚫은 뒤 나는 지휘관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현재 로스니아 제국에 남아 있는 병력은 셋 중 하나였다.
서부 국경이나 북부 국경을 담당하고 있던 주둔군.
혹은 남아 있는 제국의 귀족들이 어떻게든 끌어모은 중앙군.
그러나 어느 쪽이라도 우리에게 위협이 될 만한 규모는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은 각개격파 당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를 막는 대신 제국의 수도로 집결할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수도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방비가 사라졌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우리는 바로 수도로 직행할 것이다.”
난 그 이점을 포기했다.
이곳이 타국이었다면 느긋하게 주변 영지들부터 접수하면서 차근차근 점령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로스니아 제국은 넓어도 너무 넓었고 일일이 점령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게다가 제국민 특유의 자존심을 생각한다면 의용병 등이 일어나 발목이 잡힐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에 구심점이 될 만한 세력을 박멸하기 위해서라도 빠르게 수도를 함락해야 한다.
“로스니아 제국의 영토를 생각하면 부담이 많이 갈 겁니다.”
탈론은 이런 내 명령에 우려를 표했다.
다른 국가보다 월등히 넓은 영토를 가진 로스니아 제국에서 수도까지 행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무리 많은 병력을 상실했다고 해도 가는 길목에서 저항해 올 이들은 남아 있었고.
전투를 반복하면서 수도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준비된 적에게 역습을 당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당연히 그냥 진격하지는 않지.”
나는 병력을 셋으로 나눌 것을 계획했다.
하나는 국경을 지키고 보급로를 마련할 후방의 병력.
다른 둘은 선봉에서 길을 뚫을 병력과 전투 없이 체력을 온존하여 수도에서 일전을 펼칠 병력이다.
여기서 선봉의 역할은 지금까지처럼 그저 선두에서 싸우는 게 아니라 전멸하는 한이 있더라도 길을 여는 것이었다.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아무리 아인츠발트 공작의 실력이 있다고 해도 부담이 클 겁니다.”
탈론뿐 아니라 루시우스 역시 내가 너무 서두른다고 여기는지 불안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진짜 불안해해야 할 일은 이제부터였다.
“아니, 아인츠발트는 선봉에 참가하지 않는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누구나 아인츠발트가 선봉에 설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무력을 가진 이가 앞장서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선봉을 맡기도 했으니 갑자기 아인츠발트가 제외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아인츠발트 자신조차.
“선봉 부대를 희생시키겠다는 생각이군요.”
아인츠발트는 금세 내 생각을 파악했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겠다는 건 선봉 부대의 희생을 어느 정도 감수하겠다는 소리.
수도에서의 일전을 위해 거기까지 길을 뚫을 부대를 완벽히 버리려고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습니다. 정예가 아니라면 수도까지 단시일에 길을 뚫을 수는 없을 텐데 괜히 희생만 내고 시간도 지체될 겁니다.”
“그렇겠지.”
아인츠발트의 말을 담담히 긍정하자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짙은 의문이 서렸다.
“그런 위험성을 아시고도 굳이 그걸 감수하려는 겁니까?”
“우리에게 대항하려는 귀족이 과연 피레타 공작뿐일까?”
이해되지 않는다는 그들의 반응에 나는 오히려 되물었다.
특히 내 시선은 로스니아 제국 출신인 그랜트를 향해 있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랜트는 그런 내 시선에 단언했다.
로스니아 제국의 귀족들이 절대 순순히 항복해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항복을 선택하는 일이 흔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곳은 로스니아 제국이니까요.”
기나긴 세월을 최강국으로 군림했던 자부심.
이제 와선 현실 파악을 못 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무형의 가치는 사람을 충동질하기에 좋다.
각 나라의 수도에서 있었던 저항이 로스니아 제국에서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귀족과 평민을 나눠서 그들에게 내분을 일으키는 방법도 통하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이러니까 더욱 속전속결을 고집할 수밖에.
“그렇다고 해도 선봉의 위험성이 너무 큽니다. 대체 누가 그런 부담을 감수하고 선봉을 이끌 수 있겠습니까?”
측근들 모두가 난색을 표했다.
아인츠발트조차 쉽지 않다고 평가될 만한 일을 해낼 수 있는 영웅은 이 자리에 없었다.
애초에 아인츠발트가 어렵다면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란 의미였고.
하지만 이는 아인츠발트가 아무리 강해도 검사라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내가 할 것이다.”
나는 마법사다.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 전투형 영웅보다 우월한 마법형 영웅.
비록 아인츠발트의 티어에는 미치지 못하나 이 세계를 기준으로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영역에 있는 6티어였다.
“폐하께서 직접 하시겠다고요? 하지만 그 말씀은…….”
내가 직접 선봉을 이끌 거라는 이야기에 당황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선봉의 역할은 수도까지 길을 여는 것.
위험성도 높지만, 설령 임무를 제대로 달성했다고 해도 이후 수도의 전투에서는 활약하기 어려워진다.
우리 입장에선 총사령관인 내가 가장 중요한 전투에서 배제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너무 걱정하지는 말도록.”
이런 의문과 우려에 대해 나는 키스타 자작에게 시선을 보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로스니아 제국에 대한 정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인물.
드디어 그를 받아들여 준 값을 할 때가 되었다.
“최선의 경로로 안내하겠습니다.”
카시안 공작의 휘하에서 원정군의 보급을 담당했던 그는 누구보다 제국의 육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길이나 실제 지도와는 다른 길도 있었고.
이 같은 곳을 이용한다면 심지어 제국민들조차 모르는 허를 찌를 수 있을 것이다.
키스타 자작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한때나마 백작이었던 몸으로 지금의 작위가 만족스럽지는 않을 테니까.
확실한 기회가 온 이상 그가 우릴 배신할 가능성은 낮았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고.’
단지 키스타 자작을 이용한다는 계획만으로 내가 선봉에 서려는 건 아니었다.
로스니아 제국에 들어온 뒤부터 지금까지 줄곧 신경 쓰이는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아드리안 황태자 행세를 하고 있는 네르바의 생사를 여전히 확인할 수 없다는 것.
네르바는 위험 요소였다.
비록 제대로 된 기록조차 남지 않은 몸이라고 한들 황실의 혈통을 잇는다는 사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게다가 녀석은 제국민의 존경을 받고 있는 황태자를 사칭하는 중이었고.
아드리안 황태자는 다른 황실의 혈통들과 비교할 수 없는 상징성을 가지기에 네르바를 죽이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살려두는 건 더 위험했다.
아스카에게 죽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반드시 처치해야 한다.
‘그러려면 정보를 모아야 하는데.’
영웅 정보를 확인하려면 적과 마주칠 확률이 높은 선봉에 서는 쪽이 유리했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있지만 네르바의 존재는 그걸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신경 쓰이는 게 있으십니까?”
“그냥 기우면 좋겠는데 말이야.”
내가 과도한 걱정을 하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그래도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