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2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27화
227화
* * *
네르바의 생환 소식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것 자체가 네패스 제국의 경계심을 살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대신 피레타 공작은 거짓 항복을 준비했다.
‘어차피 정면으로는 승산이 없다.’
네패스 제국의 군사력은 강대했다.
과거 로스니아 제국의 전성기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적어도 지금의 로스니아 제국으로서는 맞설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렇기에 필요한 게 거짓 항복이었다.
딱히 이상할 것도 없는 게 황태자가 죽었다고 알려진 이상 로스니아 제국은 우두머리가 없는 상태였다.
물론 제국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한다는 의견을 내는 자들도 있었으나 그들도 피레타 공작의 설득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더 이상 무모하게 힘 싸움을 할 처지가 아니란 건 그들 자신이 더 잘 알았으니까.
“네패스 제국의 동향은 어떻지?”
“반제국 동맹을 공격했을 때보다 훨씬 많은 군세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적게 잡아도 20만은 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역시 방심해 주지 않는군.”
로스니아 제국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혹시 얕보지는 않을까 했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아인은 철저하게 준비를 갖춘 상태로 출정에 나선 상태였다.
“하지만 숫자가 중요한 건 아니야.”
피레타 공작은 마지막으로 작전을 점검했다.
국경에서 아인을 받아들이는 척하고 자신이 직접 그를 맞이하는 게 첫 번째였다.
그다음에는 점령군을 환대하며 연회를 열고 술을 먹일 계획이었다.
‘잘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항복한다고 하며 그들을 맞이한다면 분명 의심을 사게 될 테니 추가적인 계획도 필요했다.
이에 대해서는 네르바가 아이디어를 냈다.
“너무 순순히 항복하면 상대도 의심할 테니 공격할 이들을 따로 정하도록 하지.”
“그러면 희생이 나오게 될 겁니다.”
“하지만 전면으로 부딪치는 것보다는 낫지.”
항복할 생각이 없는 이들은 공격하는 것으로 하자는 계획.
사실상 병력을 나누겠다는 위험한 생각이었으나 적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네패스 제국의 전력을 어느 정도 체크해 볼 수도 있었기에 피레타 공작 역시 반대할 수만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제가 하는 쪽이 가장 자연스러울 텐데.”
로스니아 황실에 대한 충성을 자랑하는 피레타 공작가였다.
제국을 침범한 적들에 맞서 장렬하게 싸우는 역할로는 피레타 공작가만큼 적합한 곳이 없었다.
그러나 네르바는 그 의견을 기각했다.
분명 그게 가장 자연스러운 반응이기는 했으나 피레타 공작마저 죽으면 로스니아 제국의 재건을 맡을 이가 남지 않게 된다.
더구나 아인을 빼면 유일하게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피레타 공작이 죽는 건 네르바로선 절대 용납 못 할 일이었다.
“죽는 건 쉽지만 모욕을 참는 건 어려운 법이지. 그 역할을 자네가 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네르바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피레타 공작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그 무거운 짐을 떠안기로 했다.
실제로 자신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역할을 할까 싶기도 했고.
‘이곳에 있는 귀족들 대부분이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자들이니.’
무언가 믿고 일을 맡기기에는 불안한 부분이 적지 않았다.
그렇게 피레타 공작은 아인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 * *
대륙 통일의 기치를 걸고 나는 다시 한번 군사를 일으켰다.
반대의 목소리는 없었다.
제국 선포와 함께 내세운 목표에는 어떤 귀족도 반대 의견을 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연전연승하며 제국의 위치까지 올라왔는데 이제 와서 반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부분은 있지.’
지금까지 상대해 왔던 국가들과 로스니아 제국은 질적으로 달랐다.
비록 군대는 아스카에 의해 큰 피해를 보았으나 그 드넓은 영토는 기존의 군대로는 점령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각 귀족들의 사병들이 대규모로 동원되었다.
“어마어마한 군세입니다.”
탈론은 지금껏 이끌었던 숫자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아군 군대를 보며 감탄했다.
왕국이 아닌 제국으로서 움직이는 일이기에 모든 귀족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배분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떤 식으로 해도 불만은 나오지 않을 거다.”
탈론의 의문에 난 가볍게 대답했다.
다른 국가라면 모를까 로스니아 제국의 영토는 지금 네패스 제국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단순 계산으로만 따져도 영토가 두 배가 되는 셈.
어떤 식으로 나누든지 절대적인 기준에서는 불만을 가질 수 없었다.
상대적인 기준이야 어차피 공을 세운 순서대로 나눌 테니 문제가 없었고.
“로스니아 제국은 그 정도로 넓으니까.”
“그렇지요. 이 싸움이 끝나면 대륙의 절반을 손에 넣는 것이로군요.”
탈론의 눈가가 휘어졌다.
대륙의 절반.
그러나 로스니아 제국처럼 영향력만 미치는 수준이 아니라 실제로 그만한 규모의 영토를 손에 넣는 일이다.
단일 세력으로는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게 된다.
“잘들 논다.”
탈론과 한껏 분위기에 취해있는데 훼방꾼이 나타났다.
자크론이었다.
“황제 되니까 좋냐? 다들 전쟁하러 가는데 왜 이렇게 들떠있어?”
자크론의 지적은 나름대로 타당했다.
확실히 지금 군대의 사기는 지나칠 정도로 올라간 상태였고 지휘관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역시 분위기가 밝았다.
하지만 이건 내가 의도한 부분이었다.
네패스 제국으로서의 첫 출정.
황제의 행차에 무겁고 딱딱하기만 한 분위기는 오히려 어울리지 않는다.
자칫 기사나 병사들이 부담감을 느끼면 실수가 나올 확률이 높으니까.
그리고 나의 경우에는 분위기에는 어울려 줘도 방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처음 하는 전쟁도 아니고 이제는 익숙하니까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피해야 하는지는 훤히 꿰고 있으니.
“스승님께서도 좋지 않습니까? 황제한테 존대를 들을 기회가 흔하지는 않을 텐데.”
“황제도 황제 나름이지. 늙은이를 기어이 또 끌고 가는 고약한 황제는 내가 사양이다.”
언제는 늙은이 취급 하지 말라고 하더니.
뭐, 확실히 이번 원정은 제법 부담이 될 만한 일이기는 했다.
딱히 언급한 적은 없지만 아마 자크론이 전장에 함께 서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다.
‘그래도 걱정되기는 하네.’
플레턴은 마법사 협회의 원로였다.
굳이 내가 곁에 없어도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지켜야 할 자리가 있었다.
동시에 함께해 온 동료들도 있었고.
그러나 자크론은 다르다.
그나마 티아라와 관계가 좋은 편으로 보이지만 자크론이 빠지게 되면 티아라는 그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
놀리기에는 아까운 전력이니 어떻게 돌봐야 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폐하.”
그때 탈론이 조금 조심스러운 태도로 조그맣게 말을 걸었다.
“왜 그러지?”
“릴리아나 경은 요즘 어떻습니까?”
“어떻다라.”
릴리아나는 빅터의 죽음 이후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라이언의 눈물겨운 희생으로 어찌어찌 충격에서 빠져나오는 듯했지만.
애초에 죽음에 익숙한 기사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묘하게 찝찝한 느낌은 남아있었는데 그때 나선 게 아인츠발트였다.
‘그게 위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인츠발트는 동료의 죽음에는 익숙하다며 오히려 그럴수록 혹독하게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견을 꺼냈다.
그답지 않게 꽤 가혹한 선택을 한 것인데 릴리아나에게는 그게 나름대로 효과를 보였다.
단점이 있었다면 두 사람의 대련 같지 않은 대련에 연무장이 박살 났다는 것뿐이다.
그건 더 이상 인간 검사들의 대련이 아니었으니까.
‘6티어라.’
5티어와 6티어 사이에 존재한다는 벽.
릴리아나의 재능이라면 그 벽을 깨기 충분하지 않을까 추측은 했으나 그 성과를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이군.’
마족을 제외한다면 나 말고 다른 6티어는 처음이다.
승급권을 쓰지 않고 6티어가 된 것 또한 처음이고.
분야도 다르고 나는 승급권으로 성장한 몸이기에 지금껏 릴리아나의 재능을 질투한 적은 없었는데 이번에는 느낌이 달랐다.
‘꼭 쫓기는 것 같은 입장이야.’
마법사 협회에서 천재로 인정받는 티아라조차 간신히 4티어일 뿐이다.
그러나 릴리아나는 별로 나이 차이도 안 나는데 이미 6티어.
그야말로 비할 바 없는 재능이었다.
“언제나 기대했던 그대로 훌륭하지. 아닌가?”
“출정하기 전에 잠깐 겨뤄본 적 있는데 격이 다르더군요.”
탈론이 혀를 내둘렀다.
왜 갑자기 릴리아나에 대해서 묻는가 했더니 아무래도 6티어의 힘이 어떠한 것인지를 실감한 모양이었다.
“제가 화살을 쏘는 동작을 보더니 어디에 맞힐지를 미리 알고 피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만.
탈론의 설명에서 얼마나 놀랐을지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뭐, 제대로 보지도 않고 막아내는 아인츠발트 공작만큼은 아니지만…….”
아인츠발트는 명백한 크랙이었기에 비교 대상으로는 부적합했다.
게다가 그런 아인츠발트조차 겉모습이 젊어 보이는 것뿐이지 실제 나이는 적지 않다.
봉인지를 지키던 시기를 뺀다고 해도 아인츠발트는 사람보다 수명이 긴 요정족이라고 하니까.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나이가 많다.
“어쩌면 정말 따라잡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스스로 경지에 오른 아인츠발트와 적극적인 지도로 성장하는 릴리아나의 재능을 같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애초에 인간이 도달하지 못할 영역에 있는 상대를 따라잡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릴리아나 역시 괴물의 범주에 속했다.
“부럽나?”
“물론입니다. 특히 젊음은 이제 부러워해야 할 몸이니까요.”
탈론의 말에 내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드래고니안이기 때문인지 사실 탈론의 외모로는 나이를 구분하는 게 쉽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마냥 긍정해 주기 어려웠다.
“같이 은퇴하기에는 폐하께서 너무 젊으시니 세대교체가 되면 저만 밀려나겠군요.”
“그렇게 될 테지.”
자크론처럼 늙어서도 전장에 설 생각이 있는 게 아니라면 세대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당장 로크만 해도 무리시키지 못하고 있는 입장이고.
“뭐, 원한다면 스승님처럼 전장에 불러줄 수는 있지.”
“전 마법사가 아니라서 그건 무리입니다.”
탈론이 손사래를 쳤다.
자크론이 노익장을 보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육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마법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콰콰쾅!
그렇게 한가롭게 대화가 이어지던 도중이었다.
갑작스러운 폭음과 함께 대열의 선두에서 시커먼 연기가 솟아났다.
“적습이다!”
“로스니아 제국군이다!”
순순히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이제 막 국경에 발을 디딘 시점이었다.
기습을 받기에는 상당히 일렀다.
“일부러 작정하고 기다린 모양이군.”
이번에 이끌고 온 대규모 군대가 이동할 수 있는 길은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곳은 기습하기에 좋은 지형은 아니었는데 상대는 무리해서 공격을 가해 왔다.
어차피 이곳이 아니라면 아예 기습이 불가능할 테니 약간의 피해를 감수할 생각이거나.
‘아니면 피해를 주는 게 목적이 아닐지도 모르지.’
수상한 일이었다.
“적들 중 실력자를 붙잡아라. 확인할 것이 있다.”
판단이 내려지자 서둘러 명령을 내렸다.
상대가 그냥 이판사판으로 달려든 거라면 다행이지만 다른 노림수가 있다면 서둘러 파악해야 했다.
“즉시 전달하겠습니다.”
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탈론이 움직였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내 명령을 받아 적더니 그것을 화살에 매고 쏴버린 것이다.
아군 한복판에 화살을 쏘는 정신 나간 행동이었지만 나도, 탈론도 그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가장 선두에서 병력을 이끌고 있는 인물이 다른 누구도 아닌 아인츠발트였으니까.
텁!
아니나 다를까.
아인츠발트는 후방에서 날아온 탈론의 화살을 가볍게 받아냈다.
물론 공격을 위한 목적이 아니라 탈론이 힘을 빼고 쏜 덕도 있겠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인상적인 광경이었다.
“혹시나 해서 시켜본 건데 편리하군.”
“다른 사람이라면 못 써먹을 일이지만요.”
아군의 한복판에 정확하게 화살을 날려야 하는 탈론과 그 화살을 다치지 않고 잡아야만 하는 아인츠발트.
어느 쪽이라도 난이도가 미친 듯이 높은 묘기였다.
차라리 양측에 마법사를 배치하고 마나 파장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쪽이 훨씬 나을 정도로.
그러나 마나 파장은 상세한 내용을 전달하기에는 힘들기에 한번 재미 삼아서 이런 방법을 적용해 보았다.
“적이 많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로스니아 제국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전투는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끝을 맺었다.
본대는 나설 것도 없이 선봉에 있던 아인츠발트만으로 충분했다.
“크헉!”
아인츠발트는 내 지시대로 로스니아 제국의 실력자들을 몇 명 붙잡아 둔 상태였다.
전투형 영웅으로 최소한 2티어 이상이었다.
‘흐음?’
지금부터 느긋하게 심문을 해볼까 생각하는데 영웅 정보에 꽤 인상적인 정보가 눈에 들어왔다.
‘피레타 공작가라고?’
네르바 이후로 본 적 없었던 소속.
물론 이상하지는 않다.
워낙 로스니아 제국의 상황이 나쁘다 보니 피레타 공작이 움직였다는 정보는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막상 이곳에는 그가 없었고 습격자들의 소속도 제각각이었다.
‘아예 피레타 공작가가 없었다면 모를까.’
피레타 공작가 소속의 기사가 없었다면 제국 귀족들이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피레타 공작가의 기사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분명 무언가를 노리고 움직였을 것이다.
‘아스카도 로스니아 제국을 꽤 흥미로워했지.’
신형 화약을 가져다 쓰지를 않나 프로반 백작을 구울로 만들어서 데리고 다니지를 않나.
역시 제국이라는 이름답게 로스니아 제국은 쉽게 무너질 생각이 없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