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2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26화
226화
【 제국 VS 제국 】
아스카의 제국 침공 이후 로스니아 제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지도층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 일말의 예외 없이 모조리 쓸려 나갔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시신조차 제대로 건지지 못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귀족이라고는 운 좋게 현장에 없었거나 어느 세력에도 속하지 못한 어중이떠중이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제국의 혼란을 수습해야만 했다.
남은 귀족들은 급하게 임시 회의를 열고 로스니아 제국을 이끌어 나갈 수 있을 만한 상대를 물색했다.
그리고 그때 거론된 이름이 바로 피레타 공작가였다.
“피레타 공작 전하를 뵙습니다.”
귀족들은 상석에 착석한 이를 향해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인사를 받은 피레타 공작은 그 작위에 맞지 않게 소박한 차림새를 한 젊은 남성이었다.
“그래. 하지만 반갑지는 않군. 이런 이유로 우리 가문이 다시 불려 나올 줄은 몰랐는데.”
피레타 공작가는 로스니아 황실에 누구보다 충성하는 이들이었으나 정치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 때문에 세력 또한 공작가인데도 변변치 않아 대부분의 귀족들에게 무시당했다.
내세울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공작이라는 작위와 명예뿐.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피레타 공작가와 비견할 만한 귀족 가문은 모조리 풍비박산이 나고 이제 남은 제국의 귀족들은 내세울 명성도 없는 반푼이었다.
“그대들도 나와 같은 심정이겠지.”
귀족들도 피레타 공작의 말에 수긍했다.
빌헬름 황제나 카시안 공작을 따랐던 파벌도 그렇고 변방에서 잠자코 있다가 아드리안 황태자를 따랐던 파벌도 그렇고.
그들은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과는 다르게 나름대로 힘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에게는 그런 힘이 없었다.
이번 기회에 한번 높은 자리를 노려보려는 야망을 가진 자가 없는 건 아니었으나 대부분은 그럴 주제가 못 되었다.
“남겨진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한 귀족이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피레타 공작가의 위세가 아무리 낮다고 해도 명색이 공작가.
그는 일평생 공작과 같은 높은 사람과는 얼굴을 마주해 본 경험조차 없었다.
“어떤 것들이지?”
“우선 황궁이 비었습니다. 아드리안 황태자 전하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이상 최악의 경우를 가정해야 할 듯합니다.”
귀족의 말에 피레타 공작은 시작부터 골치 아프다는 느낌을 받았다.
로스니아 황실의 혈통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었다.
빌헬름을 피했다가 다시 돌아온 황족들이 몇 있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 카시안 공작이 그들을 선택하지 않았던 것과 같은 이유로 피레타 공작 역시 그들을 선택하는 게 껄끄러웠다.
‘네르바 형님.’
피레타 공작은 아드리안 황태자 행세를 했을 네르바를 떠올렸다.
그는 선대 공작이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네르바와 형제처럼 자라났다.
카시안 공작의 만행을 참지 못한 네르바가 그를 처단하겠다고 떨치고 일어났을 때도 남몰래 세력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행동은 네르바의 목숨을 빼앗고 말았다.
설마 카시안 공작이나 그 세력이 아니라 뜬금없이 튀어나온 마족에게 당할 줄은 몰랐지만.
“그 문제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불경한 짓은 저지르지 말도록.”
피레타 공작의 말에 귀족은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그래도 옥좌를 계속 비워둘 수는 없으나 카시안 공작의 사례를 생각하면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
“송구합니다. 그럼 다음으로 제국의 군대 문제입니다.”
제국군이 마족에게 패배하고 몰살당한 이후로 로스니아 제국은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그나마 아직까지 타국의 침공은 없었으나 치안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그럴 만도 했다.
거듭되는 내전과 전쟁으로 이미 예전에 비하여 많이 쇠퇴해 버린 제국이었으니.
그런 와중에 군대마저 전멸했으니 치안이 멀쩡할 리 없었다.
평소에는 찾아보기도 어렵던 도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심지어 변방이 아니면 찾아보기도 힘들던 몬스터까지 나타났다.
“병력을 모으는 것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 훈련시킬 수 있는 자가 아예 없습니다.”
처참한 현실에 피레타 공작은 한숨이 나오려는 걸 가까스로 참아야 했다.
“군사훈련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을 가진 자가 아예 없는 건가?”
“이미 수십 년 전에 배워서 긴가민가해하는 노병이 있습니다만…….”
“후우.”
참았던 한숨이 기어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피레타 공작이 한숨을 내쉬자 귀족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공작의 한숨이었다.
만약 피레타 공작이 아닌 카시안 공작이었다면 절대 곱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은퇴했거나 부상으로 전장에 없던 이들도 있을 것이다. 공식으로 포고문을 내걸고 그런 이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라.”
“알겠습니다. 대우는 어떻게 할까요?”
“이쪽이 아쉬운 상황이다. 아끼지 말도록.”
피레타 공작은 어떻게든 로스니아 제국군부터 재건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군대가 없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스카에게 피해를 입은 동부를 제외하면 국경을 지키는 병력들이 있기는 했으나 그들만으로는 할 수 있는 일에 한계가 명확했다.
‘여차하면 국경의 병력 일부를 빼내서 교관으로 써먹어야겠지.’
국경의 방비를 책임지는 귀족들의 입장에선 달가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만큼 사정이 급했다.
하지만 막상 그런 생각이 들자 의구심도 들었다.
과연 국경의 귀족들이 엉뚱한 마음을 품지 않고 충성을 유지할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지금까지는 빌헬름이든 카시안 공작이든 네르바든 상관없이, 국경의 귀족들은 주어진 역할에만 충실했다.
그러나 그때는 중앙의 제국군이 건재했다.
지금처럼 제국의 안위를 지켜낼 수 없는 상황에서는 괜한 마음을 품는 자가 나올 수도 있었다.
‘큰일이로군.’
게다가 신경 쓰이는 문제는 더 있었다.
네패스 왕국의 제국 선포.
반제국 동맹이 공격받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피레타 공작은 그들에게 합류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것을 주장하는 건 불가능했다.
당장 로스니아 제국을 이끌어 나갈 귀족들이 남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이 모인 것도 지극히 최근의 일에 불과했다.
“장례식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건…….”
장례식 이야기에는 피레타 공작도 말문이 막혔다.
네르바에 대한 것 때문이 아니라 황실의 장례 절차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알고 있는 사람이 없나?”
“저희 같은 이들이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귀족이라고 하나 자신의 영지조차 변변치 않은 이들이었다.
제국의 수도에서 열리는 장례식에 대한 정보가 있을 리 만무했다.
“궁에서 일하는 자들은?”
“접촉을 해보았으나 대부분 달아나고 없었습니다.”
카시안이 황제의 자리에 야욕을 보일 때부터 궁에서 일하는 이들 상당수가 일을 그만두었다.
아드리안 황태자로 위장한 네르바가 등장했을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달리 내전에 휘말리기라도 한 건지 궁에서 일하던 이들 대부분을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이들은 떠나고 싶어도 떠나지 못하는 부류가 대다수였고.
“머리가 아프군. 그런데 황태자 전하의 시신은 발견한 건가?”
“그건 아닙니다.”
“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거지?”
피레타 공작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아스카가 끔찍한 참상을 저질렀다고 해도, 사건이 벌어진 게 언제인데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건 의아했다.
네르바가 혼자 죽은 게 아니라면 주변에는 귀족들도 가득했을 테니.
“어쩌면 이미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만…….”
귀족은 뒷말을 흐렸다.
강한 마법의 흔적들로 인해서 온전한 육신을 찾는 건 어려웠고 그나마도 일부는 부패가 진행되는 상태였다.
그런 곳에서 특정한 사람의 시신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이 제국의 하나뿐인 황태자 전하시다. 시신을 묻어드리는 일조차 못 한다는 건가?”
피레타 공작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공작 전하!”
그때 마법사 한 명이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왔다.
귀족들은 중요한 회의를 방해한 마법사의 등장에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자네, 이 자리가 어디인 줄 알고 그렇게 불쑥 들어오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너무 급한 일이라서.”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이 끝난 다음에 보고하게.”
귀족들이 마법사를 돌려보내려고 하자 피레타 공작은 당황했다.
마법사도 바보가 아니라면 이렇게 불쑥 들어올 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를 들어보지도 않고 내보내려고만 하다니?
그러다 정작 중요한 소식을 놓치면 큰 낭패를 볼지도 몰랐다.
“됐다. 무슨 이야기인지 말해보게.”
“아, 예. 네패스 제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남부 국경에서 연락이 왔는데 네패스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타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더구나 네패스 제국이라면 이미 왕국 시절에 쌓아놓은 전적이 워낙 화려했고.
“정복 전쟁인가.”
피레타 공작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로스니아 제국의 군대는 국경을 지키고 있는 이들까지 몽땅 끌어들여 봐야 불과 10만을 조금 넘는 정도다.
이 정도만 해도 웬만한 왕국의 군세를 막아설 능력은 되지만 네패스 제국은 수백 년 만에 새롭게 나타난 제국이었다.
그들의 전력이 고작 그 정도도 되지 않을 리 없었다.
“이럴 수가. 정말 이 제국을 공격한단 말입니까?”
다른 곳도 아닌 자국이 공격당하게 생겼다는 이야기에 귀족들은 당황했다.
비록 그들이 힘을 가진 건 아니었으나 나라에 대한 신뢰만큼은 굳건했다.
게다가 기나긴 로스니아 제국의 역사에서 정치적인 문제라면 모를까 군사적 충돌을 경험한 사례는 흔치 않았다.
감히 로스니아 제국에 이를 드러내는 상대가 없었으니.
“세상에! 네패스 왕이 미친 모양이군.”
“왕이 아니라 황제요.”
“헛소리! 어딜 근본도 없는 변방 영주 가문 출신이 황제가 된단 말인가?”
아인에 대한 평가는 귀족들마다 다양했다.
그러나 피레타 공작은 그런 평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 상황이 적이 침공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지.’
한쪽은 제국을 선포하며 한창 상승세를 그리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에 로스니아 제국은 잃은 전력을 수습하는 것도 벅찬 상태.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도 지금보다 공격하기 좋은 타이밍은 없었다.
‘무언가 대비책이 필요하다.’
피레타 공작의 고민이 깊어지던 순간이었다.
“충!”
“어서 경례를 올려라!”
바깥에서 갑작스러운 소란이 일어났다.
피레타 공작과 귀족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이라고?’
섣불리 사용할 수 없는 경례에 피레타 공작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 순간 아까의 마법사처럼 누군가가 방 안으로 난입해 왔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귀족 중 어느 누구도 그 행동의 무례함을 지적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상석에 앉아있던 피레타 공작 역시 마찬가지였다.
“형… 아니, 황태자 전하!”
하마터면 형님이라고 부를 뻔했던 피레타 공작은 가까스로 호칭을 정정했다.
놀랍게도 갑작스러운 침입자의 정체는 그토록 생사를 알 수 없던 네르바였다.
“아드리안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귀족들은 허둥지둥 네르바를 향해 엎드렸다.
그중에는 황족을 대하는 예법을 잘 모르고 있다가 눈치를 살피며 따라 하는 이들도 있었다.
네르바는 그런 이들의 시선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들을 가로질러 피레타 공작의 앞에 섰다.
“피레타 공작.”
“네. 황태자 전하.”
피레타 공작은 네르바의 호명을 받아들이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자칫 잘못하면 반가운 마음에 실수를 저지를 것 같았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목숨은 건졌지.”
네르바는 아찔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아스카가 사용한 거대한 손을 불러내는 마법.
그 앞에 로스니아 제국이 자랑하는 강대한 군사력이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었다.
그런 혼란 속에서 네르바가 살아남은 건 순전히 운이었다.
아스카는 제국군을 힘으로 유린했으나 귀찮게 생사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아마 그만한 마족에게 네르바는 관심을 가질 존재조차 못 되었던 모양이다.
무척이나 원통한 일이었으나 네르바는 감정을 추스르고 대신 다른 문제에 대비하기로 했다.
“나를 도와주어야겠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네패스 제국 놈들과 싸워야 한다.”
전쟁을 주장하는 네르바의 발언에 피레타 공작은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아는 네르바는 절대 선공을 주장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어째서입니까? 네패스 제국은 강적입니다. 솔직히 지금 제국의 역량으로는 승산이 없습니다.”
제국의 귀족으로서 부끄러운 이야기였으나 네패스 제국을 상대할 방법은 전무했다.
양측의 전력 차이는 압도적이고 그런 주제에 로스니아 제국은 지켜야 할 영토도 많았다.
병력을 나누면 나누는 대로 뭉치면 뭉치는 대로 문제가 될 것이다.
“제국이 이 꼴이 된 게 바로 그놈 때문이다!”
네르바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아인이 맺은 협정과 지원군으로 왔던 아인츠발트.
그리고 이상하게 로스니아 제국을 침공했던 마족들.
이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놓고 깊이 고민한 끝에 네르바는 네패스 제국이 자신들을 미끼로 써먹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결정적인 건 네패스 제국이 아스카를 무찔렀다는 사실이다.
다수의 희생자가 나오기는 했으나 그 정도라면 네패스 왕국 혼자서도 처치하는 데 지장이 없었을 터.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아스카에게는 로스니아 제국을 침공할 이유가 없었다.
실제로 약간의 구울을 만든 걸 빼고는 군대를 무너트린 뒤 바로 떠나버렸고.
그래서 내려진 결론이 네패스 제국의 농간이라는 것이었다.
“놈들에게 제국의 피가 얼마나 값비싼지를 알려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