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2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25화
225화
“이데아 프레시아.”
정확한 상황을 이야기한 건 아니지만 이데아는 내가 프레시아 공작에게 무슨 수작을 부렸다는 걸 깨달은 눈치였다.
그렇기에 경고를 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상황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대의 처지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본래라면 누려야 했을 모든 것들을 잃었다.
사트리안 왕국도, 프레시아 공작가도 이제는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텐데 헛된 희망을 심어줘서 그마저 못 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필요한 일이었어.”
그러나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사트리안 왕국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 있는 명분이 있고 힘이 있는데 참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손에 넣은 사트리안 왕국으로 반제국 동맹과의 전쟁을 이끌고 제국 선포까지 앞당겼다.
같은 상황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주어지더라도 내 선택은 한결같을 것이다.
“아버지를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프레시아 공작의 행동은 명백한 반역죄였다.
필요하다면 프레시아 공작의 목을 베고 그 가문의 모든 걸 내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때 이데아는 감히 목소리를 내지 못할 것이다.
제 목숨도 같이 걱정해야 할 처지일 테니.
“한 번쯤은 눈감아 줄 수도 있다.”
아직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애초에 일어날 수도 없다.
퀴로스라는 녀석은 왕궁에 들어오는 것으로 제 역할을 끝냈기 때문에 이제는 프레시아 공작 앞에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프레시아 공작을 압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연히 퀴로스도 나름대로 증거는 수집해 둔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그것들은 레일리의 손에 넘어갔고.
“대가는요?”
“피의 연회.”
“그게 왜요?”
“좀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해서. 관련된 모든 기록을 받았으면 하는데.”
“저보고 죽으라는 소리인가요?”
이데아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그런 것이 나에게로 넘어온다면 그때는 이데아의 목에 올가미를 거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 올가미였다.
계속해서 아니라고 부정해 왔던 이데아가 더는 부정하지 못할 완벽한 물증.
“딱히 공개할 생각은 아니야.”
“그런데 왜 그게 필요한데요?”
“만약을 대비하는 거지.”
이데아에게 올가미를 씌우려는 건 나를 위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이데아를 다루는 것 자체는 지금의 나로도 충분하니까.
그런데도 이런 걸 요구하는 건 내가 아닌 레일리를 위해서였다.
행여나 내가 잘못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이 나라가 둘로 쪼개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이데아에 대한 확실한 견제 카드가 필요했다.
이번에 퀴로스가 확보한 증거들은 그가 레일리의 사람이기에 진위 여부를 의심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피의 연회는 아니다.
이미 로스니아 제국에서 먼저 터트린 일이고 반쯤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내가 그 죄를 묻지 않겠다고는 말했지만 그렇다고 낙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니 레일리라도 그것만 손에 넣으면 이데아를 꼼짝도 못 하게 할 수 있었다.
“거부할 건가?”
“선택의 여지가 있는 건가요?”
“프레시아 공작가가 사라져도 그대는 지켜준다고 약속하지. 어쨌든 이제는 내 부인이니까.”
프레시아 공작을 반역죄로 처벌해도 이데아는 살려주겠다는 말.
물론 듣는 입장에서는 기가 막힐 것이다.
그러나 이데아는 거기에 담긴 속뜻을 이해하고 있었다.
“나를 동정하는군요.”
“동정만 해주는 거지.”
그녀가 가진 모든 걸 빼앗았으니 적어도 황비의 자리와 목숨만큼은 남겨주겠다.
대충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결국 그게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나도, 이데아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미인계에 홀릴 사람이라면 벌써 첩들로 왕궁을 가득 채웠을 테니까.”
이데아는 생각보다 침착하게 상황을 받아들였다.
내 후계를 낳는다거나 레일리를 밀어내려는 생각을 안 한 건 아니겠지만 그게 가능성이 없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단서는 충분히 있었다.
레일리도 딱히 빠지는 외모는 아닌데 내가 레일리랑 붙어있던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
내가 이성에게 그리 관심이 없다는 증거였다.
“나에게 바라는 게 뭐예요? 인형처럼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죽는 거?”
“이왕이면 레일리 말 잘 듣고 황비로서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군.”
내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이데아가 감정을 드러냈다.
“당신은 양심도 없어요? 모든 걸 다 빼앗아 놓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격렬하게 흔들리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가?
프레시아 공작이 위험에 빠졌다는 이야기를 해줄 때보다도 더 놀란 듯했다.
뭐, 나름 이해는 가지만.
가진 거 다 뺏어놓고 목숨만 붙여둔 채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잘 지내라니?
개새끼도 이런 개새끼가 없었다.
그런데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아예 깔끔하게 죽였다면 모를까 살려주기로 했으면 생기 있는 쪽이 나을 테니까.
“목숨은 살려주고 있잖아.”
“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그 생각은 동의해.”
나도 내 야망을 위해서 얼마든지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족속이었다.
이데아도 아마 이런 성향은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을 터.
그런 상황에서 내 요구는 다리 없이 뛰어보라는 소리와 같았다.
“하지만 각자의 입장 정도는 이해해야지.”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내가 억지를 쓴다는 건 나도 알았지만 이데아는 그걸 거부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거부한다면 죽어야 한다.
본인은 물론이고 프레시아 공작과 그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까지 남김없이.
그게 지금까지 내가 해온 방식이었고 이데아도 그걸 알고 있다.
“끔찍한 인간.”
“자업자득이지.”
피의 연회를 일으킨 게 반제국 동맹이니 지금의 나를 만든 것도 그들이라는 소리였다.
물론 진짜 아인 네패스가 아닌 나로서는 변명 같겠지만 잘 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피의 연회와 이후의 내전이 없었더라면 절대 여기까지는 못 왔을 테니까.
“자업자득이라.”
이데아는 내 표현을 곱씹더니 고개를 숙였다.
“알았어요. 아버지를 살려주세요.”
“내 말을 들어줄 건가?”
이데아로서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될 제안일 것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봐도 그렇다.
나라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지.
프레시아 공작이 이데아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원하신다면 그 이상도 얼마든지 괜찮아요.”
역시나 이데아는 이데아였다.
그녀는 오히려 이 상황을 빌미로 자신에게 손을 대라고 말하고 있었다.
절대적인 갑을 관계가 있으니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꼼짝도 못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여전히 자신의 미모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물론 그럴 만한 외모지만…….
“쓸데없는 소리를.”
레일리에게 죽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은근히 솔깃한 게 또 사실이라서 섬뜩함을 느꼈다.
이데아는 절대 긴장을 풀어선 안 될 상대였다.
* * *
마침내 제국을 선포하는 시간이 되었다.
왕궁 내부에는 귀족들이 빼곡하게 들어찼고, 눈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수도의 거리에도 사람들이 가득할 것이다.
“오늘 나는 중대한 발표를 할 계획이다.”
난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제국 선포를 마치 대단한 기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게를 잡았다.
지극히 형식적인 행동이었다.
아인츠발트에게 열심히 배운 목소리를 내봤는데 제대로 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귀족 중 선두에 서있는 아인츠발트의 표정이 나쁘지 않은 걸로 봐서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
일단은 그렇게 믿고 말을 이었다.
“더 이상 네패스 왕국은 없다. 현 시간부로 짐은 네패스 왕국이 제국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잠깐의 침묵.
그러나 놀라거나 당황한 사람은 없다.
이 침묵이 생긴 이유는 그저 서로의 눈치를 보며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네패스 제국 만세! 황제 폐하 만세!”
선두에 있던 측근들을 시작으로 귀족들의 만세 소리가 귀를 가득 채웠다.
듣고 있기 괴로울 정도의 소리였으나 누구도 인상을 찡그리지 않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인상을 쓰는 행동조차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표정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프레시아 공작.’
퀴로스에게 제대로 낚인 프레시아 공작은 전날 이데아에게 불려간 뒤 지금까지 안색이 창백했다.
그나마 이데아가 제대로 이야기를 전했는지 날뛰거나 발작하지는 않았으나 그뿐이었다.
살아있음에도 죽은 것과 다름없는 표정.
아마 프레시아 공작이 제자리를 지키는 일은 오래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육체는 어떨지 몰라도 정신적인 피해는 클 테니까.
“그리고 짐이 황제로 즉위함에 따라서 레일리 크레시안을 황후에, 이데아 프레시아를 황비에 책봉한다.”
이번에도 또 만세가 이어졌다.
이후 귀족들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렸다.
이 자리가 제국 선포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기존의 귀족들에게 나름대로 상을 주는 자리라는 걸 눈치껏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전쟁에 지원한 귀족들을 그 지원 내역에 따라서 적당히 포상해 주었다.
드물지만 승작해 준 경우도 있었고 아니더라도 봉토를 내렸다. 그렇게 누구나 만족할 만한 시간이 이어졌다.
굳이 따지자면 이번에도 프레시아 공작만 표정이 달랐지만.
그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대공이 되었다.
“황제 폐하 만세!”
그리고 이어진 만세 삼창.
프레시아 공작으로서는 악몽 같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그렇게 프레시아 공작의 차례도 지나고, 다른 귀족들의 순서도 모두 끝났다.
예정에 따르면 이다음 행사는 흥겨운 연회뿐이다.
하지만 나는 예정에 없던 일을 하나 끼워 넣을 계획이었다.
“모두 제국의 귀족이 된 걸 축하하네. 마지막으로 황제로서 제국의 귀족들에게 한마디만 전하겠네.”
귀족들 대부분은 한마디만 전하겠다는 내 말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였다.
으레 있는 축사나 형식적인 이야기일 것이라 지레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내가 굳이 그런 귀찮은 짓을 재차 언급할 이유가 없었다.
“짐의 목적은 대륙 통일이다.”
겨우 한 문장을 말했을 뿐인데 흥겨웠던 분위기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위풍당당하게 선전포고를 날리던 빌헬름의 모습을 보던 당시 군주들의 심정이 지금 귀족들과 같지 않았을까?
“지금의 자리에 만족하거나 안주할 생각은 없다.”
지금까지는 명분의 싸움이었다.
여러 다양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싸움에서는 절대적으로 명분이 필요했다.
젊은 영웅이라 불리던 내 명성 역시 명분 없는 행동은 꺼려지게 만들었고.
하지만 과연 그 명분 싸움을 언제까지 해나갈 수 있을까?
로스니아 제국까지는 과거에 빌헬름이 해놓은 선전포고가 있으니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도 명분을 만드는 게 통할까?
어차피 귀족들도 나도 알고 있었다.
명분이란 게 사실상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그런데도 지금까지 명분에 집착한 건 어디까지나 다른 외부 세력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외부 세력을 걱정하거나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제국이란 건 그런 의미였다.
“대, 대륙 통일이라니?”
“그런 게 가능한가?”
이미 내 뜻을 짐작하고 있던 귀족들은 침착했으나 그렇지 못한 귀족들은 혼란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내가 대륙 통일을 목표로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자신들에게 어떤 피해가 생길지 염려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대들의 마음을 안다. 지금껏 역사에 없던 일이고 그 길에서 어떤 희생이 따를지 누구도 알지 못하니까.”
지금까지 잘해왔다고 해서 앞으로도 잘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어쩌면 생각지도 못한 복병을 만나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허무하게 거꾸러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스스로 멈추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어쩌면 지금껏 다른 군주들이 그러했듯 이뤄질 수 없는 꿈일지도 모르지.”
모두가 바짝 긴장한 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니 눈알 굴리는 소리가 들린다는 게 뭔지 알 거 같았다.
“하지만 그대들이 함께해 준다면 나는 그 꿈을, 영광을 그대들과 나눌 것이다.”
해석하자면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군비를 내주면 섭섭하지 않게 챙겨주겠다.
이런 의미에 그제야 귀족들의 표정이 풀어졌다.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리를 살폈을 때 다음 상대로 예상되는 국가는 로스니아 제국.
예전이라면 의구심을 갖고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스카 덕분에 손 안 대고 코를 풀게 생겼으니.
물론 제국의 저력이란 게 만만한 건 아니지만 지금이 로스니아 제국을 무너트리기에 가장 좋은 때라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이제는 체급도 같은 제국이다.
“묻겠다. 그대들은 나와 함께하겠는가?”
“이미 폐하를 위해 충성을 바치기로 맹세한 몸입니다! 망설일 이유가 없습니다.”
“예정되어 있는 영광을 걷어찰 바보는 없지요. 폐하의 꿈에 저 또한 함께하겠습니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대답해 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이 기폭제가 되어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대륙 통일을 입에 올린 나에게 찬성의 뜻을 표했다.
그래도 혹시나 반대가 나오지 않을까 예의 주시했지만 그런 목소리는 없었다.
그렇게 네패스 제국은 시작부터 대륙 통일을 기치로 내걸고 새로운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