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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224화 (224/250)

VVIP 영주님의 품격 224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24화

224화

* * *

퀴로스는 뛰어난 암살자였다.

프레시아 공작은 혹시나 하는 의심을 떨치기 위해서 퀴로스를 시험해 봤는데 휘하 기사들이 그에게 꼼짝도 하지 못했다.

‘만만찮은 실력이군.’

아인츠발트 같은 괴물과 비교하기에는 많이 부족했으나 그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대신 퀴로스는 프레시아 공작 휘하의 다른 기사들을 압도할 실력이 있었다.

‘이런 자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을 수가 있나?’

아무리 그 실력을 낮게 보아도 충분히 명성을 떨쳤을 실력자였다.

그러나 퀴로스는 자신의 출신이나 정체에 대해서는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고 수상하다고 내칠 수도 없었던 게 프레시아 공작은 지금이 아니면 다른 기회가 없으리란 사실을 잘 알았다.

아무리 그라도 아인에게 의심을 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기회는 제국 선포 때가 처음이자 유일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외부인을 동행시켜야 하는 문제라면 더욱 그랬다.

‘그날은 대규모로 축제가 열릴 테니까. 동행 하나쯤 늘어난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겠지.’

프레시아 공작은 즉각 퀴로스가 사용할 가짜 신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단지 계획이 실패하거나 퀴로스가 사로잡혔을 때 자신이나 딸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는 게 문제였을 뿐.

‘신경 써야 할 게 많다.’

우선은 변장이었다.

귀족이라면 모를까 그 동행의 신분까지 철저히 확인하지는 않으니 인상이 달라질 정도로 변장을 하면 잡히고 나서도 쉽게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부족한 머릿수는 도중에 사람이 합류하도록 약간만 손을 보면 될 일이고.

프레시아 공작은 자신 있었다.

이런 일은 이미 피의 연회 때 해봤기 때문이다.

“대단하시군요.”

일이 착착 진행되자 퀴로스도 감탄했다.

누구나 치밀하고 꼼꼼한 계획을 만들기를 원하지만 실제로 그런 계획을 짜는 건 어려웠다.

아인이 행사의 진행에 대해 세세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도 아니고 이런 걸 알아보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꼬리를 밟히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레시아 공작은 거침이 없었다.

“과연 피의 연회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근거 없는 비방은 아닌 모양입니다?”

퀴로스의 비아냥에 프레시아 공작은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반제국 동맹은 모두 무너지고 이제 당시 사건과 관련해 유일하게 남은 인물은 프레시아 공작 자신뿐이었다.

하지만 프레시아 공작은 아직까지도 그리고 죽고 나서도 피의 연회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았다.

귀족 사회에서 명예는 중요한 문제인 데다 이데아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이쿠, 실례했습니다.”

프레시아 공작의 살벌한 눈길에 퀴로스는 식은땀을 흘리며 물러났다.

아무래도 피의 연회에 대한 이야기는 프레시아 공작에겐 역린처럼 보였다.

“예행연습을 해보도록 하지.”

“물론입니다.”

퀴로스는 프레시아 공작의 적극적인 협력을 받아 아인을 암살하기 위한 준비를 거듭해 나갔다.

그렇게 몇 주가 흘러 기다리던 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을 때 프레시아 공작은 네패스 왕국의 수도를 방문했다.

“프레시아 공작 전하의 마차다! 속히 길을 열어라!”

수도에는 이미 각지에서 몰려온 귀족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수도를 드나드는 귀족들의 명단을 확인하던 이들은 프레시아 공작의 이름을 외치는 말을 듣자 부리나케 뛰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속히 모시겠습니다.”

귀족들조차 서로 밀려서 쉽게 통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프레시아 공작이 탄 마차는 아무런 검사조차 없이 바로 수도로 들어설 수 있었다.

물론 왕궁에 가면 다시 한번 검사를 받게 되겠지만 나름대로 프레시아 공작의 위세를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쉬울 수도 있겠군요.”

이에 퀴로스는 암살이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네패스 왕궁의 경비 상태를 보고는 쏙 사라졌다.

아무리 프레시아 공작이라 할지라도 예외는 없다는 듯 왕궁을 지키는 이들은 그의 마차와 동행인들의 신분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나마 앞선 대기자들을 놓고 최우선적으로 확인해 주는 게 그들이 베푼 배려의 전부였다.

“그럼 여기서 헤어지겠습니다.”

그렇게 왕궁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뒤 퀴로스는 은밀하게 자취를 감추었다.

거사를 진행하기에 앞서 왕궁 내 기사들의 배치 상태나 행사가 있을 장소를 둘러본다는 명목이었다.

‘들키지는 않겠지.’

프레시아 공작은 퀴로스가 떠나기 전에 스스로의 외모를 바꾸는 걸 보았다.

정확히는 변장을 푸는 행동이었다.

들어올 때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들어왔으니 만에 하나 퀴로스가 발견된다고 해도 자신이 의심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퀴로스가 위장했던 모습을 따라 할 대역까지 사전에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운명이 걸린 주사위가 던져졌다.

* * *

제국 선포가 이틀 앞으로 다가왔을 때 나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왕궁을 찾아온 귀족 중 일부는 직접 만나봐야 했고 행사가 잘 준비되는지도 수시로 체크해야 했으며 그런 와중에 레일리와 이데아까지 찾아가야 했다.

“고생이 많네요.”

레일리는 이렇게 고생하는 내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하는 중이었다.

딱히 그녀는 한가하고 나만 바빠서 그런 건 아니다.

오히려 전체적인 업무의 양을 보자면 왕궁 내부를 관리해야 하는 레일리가 더 바빴다.

그런데도 이렇게 여유를 보일 수 있는 건 레일리는 이미 예전부터 준비를 하나씩 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하루아침에 제국 선포를 하겠다고 한 건 아니지만 출정하고 있는 동안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이 많았다.

“그래도 얼추 끝났으니까 내일 하루는 쉴 수 있겠지.”

쉰다고 해도 그냥 쉬는 건 아니고 굳이 한 번 더 점검하고 귀족들과 만나고 그래야 했지만.

그래도 행사 자체의 준비는 완전히 끝난 시점이었다.

“후후후. 쓸데없이 첩만 들이지 않았으면 더 편했을 텐데요.”

레일리는 괴로워하는 나를 보다가 가차 없이 아픈 부분을 찔렀다.

물론 이는 엄밀히 따지면 틀린 이야기였다.

반제국 동맹과의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그들에게 지원받았고, 제국의 기틀을 다지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으니까.

그러나 그것 때문에 일이 많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다거나 하는 건?”

“아니요. 뭐, 나쁘지는 않았어요.”

레일리는 의외로 쿨하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게 겉으로만 보여주는 모습이라는 걸 난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좌우에 있는 시녀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가 묘하게 불경하다는 느낌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뭐라고 하고 싶지만 레일리의 푸념을 들어주는 게 그녀들의 역할이었으니 아마 나에 대한 인식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제가 추천해 드린 사람은 어때요?”

그때 레일리가 대화의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직 평가하기에는 이른 거 같은데?”

그에 난 대답을 보류했다.

아마 그에 대한 평가는 이틀 뒤에 이뤄질 테니까.

“그런데 그런 사람을 어떻게 준비한 거지?”

내 물음에 레일리는 대답 대신 미소만 지었다.

그게 자세하게 캐묻지 말라는 의미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는 애써 괜찮은 척 받아들여야만 했다.

레일리는 내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었다.

“다 방법이 있는 게 아니겠어요?”

“왕비로서 파벌 싸움은 하지 않는다고 했던 거 같은데.”

솔직히 짐작되는 부분은 있었다.

왕궁에만 있던 레일리가 무슨 수로 사람을 준비할 수 있었을까?

전부 다 아랫사람들이 레일리를 대신해서 구르며 얻은 성과였다.

어떻게 보면 공적을 가로채는 행위라서 이런 부분은 좋지 않다고 예전에도 이야기했고 레일리도 그에 동의했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예외였다.

나에게도, 레일리에게도, 레일리를 도와준 이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었으니.

“이건 파벌 싸움이 아니에요.”

내 지적에 레일리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반박하지 못했다.

분명 특정 세력의 도움을 받는 거기는 했으나 레일리 나름대로 항변할 말이 있는 건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그녀의 목적과 나의 목적은 일치하고 있었다.

아무리 원칙이 중요하다고 해도 때로는 그걸 접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궁의 법도와 기강을 잡는 일이죠.”

* * *

레일리와의 만남이 끝나고, 다음으로는 이데아를 찾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물론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봐야 내가 이데아에게 눈길을 줄 일은 없겠지만.

“오셨습니까?”

이데아는 몹시 공손하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나를 대했다.

이제는 많이 익숙하고 편해진 레일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어차피 서로 진심이 될 수는 없는 사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었기에 이데아를 대하는 순간은 상당히 불편했다.

그런데도 굳이 이데아를 찾아온 건 따로 전달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었다.

“예정대로 이틀 뒤 그대는 황비가 되겠지.”

“다 전하, 아니 황제 폐하의 은혜입니다.”

마음에도 없을 소리를 내뱉는 이데아였다.

이데아와 혼인을 하자마자 반제국 동맹과 전쟁을 일으킨 나였으니까.

그들이 한때는 사트리안 왕국과 동맹국이었음에도 나는 가차 없이 그들을 짓밟았고 굳이 자비를 베풀지도 않았다.

아마 이데아와 친분이 있던 이들도 그 전쟁에서 많이 죽어 나갔을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줄 알았는데 나에게 쓴소리 한 번 하지 않는군.”

진심을 철저하게 감춘 채 연기하는 이데아의 모습에 혀가 내둘러졌다.

“그건 폐하께서도 마찬가지시니까요.”

“무슨 의미지?”

“저희는 부정하고 있지만, 폐하께서는 피의 연회의 배후에 제 아버지가 연관되어 있을 거라 여기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약조해 주신 것처럼 저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으시니까요.”

네가 봐주고 있으니 나도 봐주겠다.

기브 앤 테이크가 확실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게 단지 듣기 좋게 하는 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데아가 나에게 바라는 건 자신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이나 피의 연회를 함구해 주는 게 아니니까.

그녀는 끊임없이 나의 관심을 갈구하고 인정받아야 할 위치에 있었다.

레일리는 황후가 될 것이고 자연스럽게 제국의 권력은 그녀를 중심으로 꾸려질 테니까.

의외로 나는 권력의 중심에서 거리가 있었다.

다른 이유는 아니고 전쟁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경우가 많아서였다.

아마 이런 행보는 이후로도 크게 변하지 않을 테니 권력의 중심이 레일리에게로 흐르는 건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가장 피해를 보는 게 이데아였고.

레일리는 이데아를 적극적으로 견제하고 있었으니까.

그게 노골적이거나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 이데아도 분명 느끼고 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레일리 입장에서 이데아는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으니까.

그래서 이번에 사람을 하나 준비해서 나에게 보낸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은데 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내 말에서 묘한 느낌을 받았는지 이데아가 의아해하는 시선을 보냈다.

“그대가 바라는 일은 없을 거라는 소리야.”

그에 난 대놓고 이데아의 야망을 들어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잔혹한 말이지만 그나마 혼인 당일에 이런 소리를 하지 않은 게 내 유일한 배려였다.

“제가 무엇을 바라는지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대와 독대하는 일이 거의 없을 거란 말이지.”

독대에는 잠자리도 포함된다는 걸 이데아라면 바로 알아들을 것이다.

“원래 그런 건 황후의 허락을 받는 게 제국의 법도라고 하던데.”

명분도 있었다.

우리가 모방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제국인 로스니아 제국은 황후가 첩들의 합방 날을 정해주도록 법도가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황제가 그걸 무시할 수는 있겠지만 황후와 대놓고 척을 질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역대 황제들도 대부분은 그 법도를 충실히 따랐고.

황후와 사이가 틀어지면 제아무리 황제라도 피곤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닌 말로 황후가 황제의 침실을 괴상한 취향으로 꾸며놓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사람이 치사해지려고 마음먹으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는 법이다.

딱히 법도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니까 황제가 항변한다고 해도 제대로 통할지도 미지수고.

물론 레일리는 홀몸으로서 마땅한 외척이 없지만 그녀를 지지하고 추종하는 귀족들의 세력은 아직도 충분히 남아있었다.

딱히 레일리가 실책을 저지른 일도 없고 아랫사람들을 잘 챙겨주는 건 나나 그녀나 다를 게 없었으니까.

“우리 왕국도 그래야 하지 않겠나?”

내 이야기에 이데아의 표정이 처음으로 동요를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이데아는 빠르게 표정을 감추고 돌연 나에게 몸을 바짝 들이밀었다.

“저에게 계속 가혹하게 대하실 건가요? 그건 약속과 다르잖아요.”

“약속은 어기지 않아.”

내 말에 이데아가 한순간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약속을 어기지 않는 상태로는 내 말이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다.

“프레시아 공작이 실수하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이데아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그제야 내가 말한 약속은 어기지 않는다는 말의 전제 조건을 깨달은 것이다.

프레시아 공작이 먼저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아버지께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딱히.”

솔직히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굳이 말하자면 레일리가 소개해 준 사람과 다니엘의 업무를 살짝 바꿔줬을 뿐이다.

프레시아 공작을 감시하고 있던 다니엘은 그 때문에 하던 일이 사라지자 나를 다시 찾아왔고, 나는 다른 업무를 지시했다.

단지 그뿐이다.

“행동은 내가 하는 게 아니야. 프레시아 공작이 하는 거지.”

레일리가 보낸 그 녀석의 이름이 바로 퀴로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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