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23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23화
223화
【 선포 】
크라이더 왕국의 몰락 이후에는 다른 반제국 동맹의 국가들을 향해 사정없이 들이쳤다.
굳이 지체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력의 손실은 거의 없고 준비해 둔 군량은 여전히 넉넉하다.
장거리 행군으로 인한 피로도는 걱정이지만 그 정도는 휴식으로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렇게 다른 반제국 동맹의 국가들마저 무너트리는 데 걸린 시간이 약 3개월.
대부분은 이동하고 항복 서약 받느라 고생한 시간이었다.
‘이번에는 좀 많이 서두르기는 했지만.’
한 번에 세 개나 되는 국가를 집어삼키는 건 매우 성장한 네패스 왕국의 힘으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렇게 서두른 이유가 있었다.
반제국 동맹을 잡아먹은 것을 끝으로 한동안 체제 정비에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왕국을 넘어 제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준비였다.
“사트리안 왕국 귀족들을 흡수해서 다행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일할 사람이 부족했을 겁니다.”
네일이 제국 선포를 위한 준비 과정을 보고해 주었다.
왕국과 제국은 많은 것이 다르다.
그냥 내가 나서서 이제부터 제국이라고 말한다고 끝나는 게 아닌 것이다.
제국다운 무언가를 보여줘야 확실하게 제국이라 인식될 수 있었다.
반제국 동맹을 서둘러서 무너트린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이제는 영토에서 로스니아 제국에 밀리지 않으니까.’
왕국에서 발행한 지도가 각 마을에 풀렸다.
거기에는 로스니아 제국을 제외한 대륙 서부의 모든 국가가 네패스 왕국의 이름으로 통일된 모습이 나와있었다.
고작 지도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 싶겠지만 왕국과 제국의 차이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부분은 영토였다.
그저 크기만으로도 우리가 얼마나 큰 덩치를 가졌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었으니까.
‘물론 이게 다는 아니지만.’
제국 선포를 위해서 각지의 귀족들에게 소집령을 내렸다.
아무리 영토 대비 적은 수의 귀족들을 유지해 왔다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개념일 뿐.
그 많은 귀족들이 한자리에 집결한다면 숫자는 엄청날 것이다.
이 귀족들의 대규모 이동이 내 권위를 증명하는 방법 중 하나였다.
거기에 제국 선포 이후에는 귀족들의 대규모 충성 서약이나 레일리를 황후로, 이데아를 황비로 올리는 추대식도 있을 예정이고.
누군가는 이를 허례허식으로 볼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네패스 왕국이 제국이 되었다는 걸 선보이기에는 이보다 확실한 게 없었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국가들이 굳이 이런 귀찮고 돈 많이 먹는 일을 해왔던 것이다.
“반응은 어떻지?”
“예상하시는 대로입니다. 프레시아 공작가를 지지했던 이들은 마지못해 받아들인다는 반응이고 나머지는 꽤 적극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그럴 테지.”
반제국 동맹과의 전쟁은 레일리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기존 귀족들과 사트리안 왕국에서 흡수된 귀족들의 지원이 컸다.
난 그 지원에 걸맞은 보상을 내리겠다고 전쟁 이전부터 언질을 준 상태였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충성심을 증명하려 하거나 전쟁을 통한 이득을 원하는 귀족들이라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게 당연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다 잘될 텐데. 하지만 역시 그건 힘들겠지?”
서류 더미를 내버려 두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내 앞에는 다니엘이 서있었다.
* * *
프레시아 공작은 이데아를 혼인시킨 뒤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물려받아야 했을 아이였다.
그런데 누려야 할 것들을 누리지 못한 채 모든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만으로도 환장할 노릇인데 심지어 이 모든 일의 원흉에게 팔려가듯 첩이 되었다.
“빌어먹을! 원통해서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구나!”
프레시아 공작은 들끓는 마음을 도무지 감출 수 없었다.
당장 왕궁으로 달려가서 딸아이를 데려오지 않는 것만이 그가 발휘할 수 있는 인내심의 최대치였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그때 갑자기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프레시아 공작은 당황하며 몸을 틀었다.
아무리 더는 군주가 아니게 된 몸이라지만 그의 권위는 여전했다.
감히 그의 방에 낯선 이가 들어오는 일은 있어선 안 되었다.
“네놈은 누구냐!”
프레시아 공작은 곧장 벽에 걸려있는 검을 빼 들고 상대를 노려봤다.
“제가 누구로 보이십니까?”
상대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대신에 도리어 물음을 던졌다.
프레시아 공작은 그 뻔뻔한 모습에 인상을 썼으나 덕분에 냉정을 조금은 되찾을 수 있었다.
‘암살자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군.’
만약 암살자라면 한가롭게 이야기나 할 이유가 없었다.
바로 자신의 급소에 무기를 찌르고 달아났겠지.
“감히 나의 방에 멋대로 들어온 걸로 봐서 죽고 싶어 환장한 놈인 모양이군.”
프레시아 공작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한편으로는 의문을 느꼈다.
자신을 지키는 기사들이 결코 적지 않은데 어떻게 아무런 소란도 없이 상대가 침입할 수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레시아 공작 전하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아, 이제는 대공 전하라고 불러드려야 하나?”
대공이라는 말에 프레시아 공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첩이라고 부르지만, 명목상 이데아는 황비가 될 몸이었고 따라서 그 역시 대공으로 지위가 올라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프레시아 공작에게 이는 조금도 기쁘지 않은 일이었다.
오히려 모욕이었지.
“용무를 말해라.”
“별건 아닙니다. 그냥 작은 도움을 받고 싶을 뿐.”
“작은 도움?”
“명목상이나마 대공이 되실 분이시니 네패스 국왕의 제국 선포 때 그 옆에 계실 분 아닙니까?”
프레시아 공작은 잠시 상대의 말을 해석하느라 머리를 굴려야 했다.
제국의 선포 때 곁에 있는 사람.
틀린 말은 아니나 그 말에 담긴 뜻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이 수상쩍은 상대가 이야기하는 작은 도움이 그와 관련 있다면 절대 호의적인 이유는 아닐 테니까.
“네 녀석이 말하는 도움이라는 게 설마 네패스 국왕에게 접근하게 해달라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상대가 의도를 숨길 생각도 없이 바로 긍정하자 프레시아 공작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설마 국왕과 인연을 쌓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의미는 아닐 테니 이는 아인을 죽이겠다는 소리였다.
“미친놈! 내가 대공이 될 사람이라고 알고 있으면서 그딴 소리를 지껄이느냐?”
“그 자리를 원치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프레시아 공작의 노성에 상대는 침착하게 반응했다.
“그렇기에 손을 잡을 가치가 있죠. 대단한 일을 해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네놈은 대체 어디서 온 놈이냐?”
프레시아 공작은 상대의 정체를 추측하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다.
아인을 죽이고 싶어 할 상대라면 분명 무수하게 많았다.
그러나 생각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직접 실행하려고 할 세력은 의외로 없었다.
복수라는 것도 어느 정도 급이 맞을 때나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가는 괜한 벌집을 들쑤시듯 이쪽이 당할지도 모른다.
‘네패스 국왕의 곁에는 실력자가 한둘이 아니다. 특히 아인츠발트 공작이라는 놈은 괴물이야!’
직접 무력시위를 경험해 본 당사자로서 프레시아 공작은 아인츠발트의 무위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일국의 군주를 단신으로 겁박하는데도 어찌할 수 없는 무력함.
그것이 사트리안 왕국의 군주였던 프레시아 공작과 이데아의 입지를 단숨에 앗아 갔다.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그런 괴물과 싸울 수는 없다.’
프레시아 공작의 아래에도 이름 있는 기사 정도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인츠발트에게 모두 제압당하고 말았다.
따로 싸운 것도 아니고 여럿이 협공으로 달려들었음에도 고작 한 명에게 제압당한 굴욕.
그마저 상대는 손속에 사정을 두어 피를 흘리는 일은 피해주었다.
만약 아인츠발트가 봐주지 않았더라면 당시 왕궁에는 피바람이 불었을 것이다.
“그걸 묻는 걸 보면 제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 다행입니다. 단칼에 거절하면 어쩌나 했는데.”
“헛소리 말고 제대로 대답해라.”
프레시아 공작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기분이 불편했다.
자신의 딸 이데아를 위하여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으나 역으로 피해가 갈까 봐 전전긍긍하던 처지였다.
그런 와중에 척 보기에도 수상한 놈이 아인에게 접근한다고 하니 내심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죄송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뭣이?”
그러나 이어지는 상대의 말에 프레시아 공작은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상대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놈이!”
“진정하시지요. 저라고 거사를 함께할 분을 속이고 싶겠습니까? 하지만 이 일은 절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자칫 잘못해서 실패라도 한다면…….”
하지만 상대에게도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었다.
아인을 죽이겠다는 계획은 곧 반역.
반역에 실패한 자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아무런 신뢰 관계도 없는 프레시아 공작이 그대로 밀고라도 한다면 아예 시도조차 못 하고 모든 게 무너질 수도 있었으니.
‘조심스러운 태도가 이상한 건 아니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충분히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레시아 공작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나도 네놈과 나눌 대화는 없다.”
자신을 밝히지도 않는 상대와 손을 잡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었다.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해도 프레시아 공작은 절대 수상한 이와 손을 잡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의 딸이 말이 황비지 실질적으로 볼모나 마찬가지인 지금으로서는 더욱.
“역시 쉽게 믿지는 않으시는군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제가 농담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란 것을 증명해 보이지요.”
프레시아 공작이 대화를 거부하려고 하자 상대는 먼저 한발 물러났다.
그의 계획에는 프레시아 공작의 도움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네패스 왕국의 약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약점?”
“네. 물론 프레시아 공작 전하 정도 되시는 분이라면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확인차 여쭤보는 겁니다.”
뜬금없는 상대의 물음에 프레시아 공작은 고민에 잠겼다.
그러나 그 답은 금세 나왔다.
무력시위를 당한 뒤로 네패스 왕국을 무너트리기 위해 예전부터 알아보고 있던 덕분이었다.
“국왕과 왕비 모두 홀몸이라는 것이지.”
국왕인 아인도, 왕비인 레일리도 가족은 고사하고 친척조차 없는 홀몸이었다.
이는 곧 어떤 상황에서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세력은 없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지지 기반만의 문제가 아니라 후계 구도에 있어서도 큰 불안거리였다.
“바로 그렇습니다. 세세하게 따지고 보면 여러 약점이 있겠지만 제일 큰 약점은 후계가 없다는 것이죠.”
상대는 이런 프레시아 공작의 말에 긍정해 주었다.
그가 생각한 약점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즉, 어떤 방식으로든 네패스 국왕을 죽이기만 한다면 이 왕국은 극심한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네패스 왕국의 파벌은 꽤 다양하게 나눠져 있었다.
아인을 따르고 전쟁에도 꾸준히 참가하는 측근들과 레일리 왕녀를 지지하는 과거 세력.
그리고 점령된 국가에서 넘어온 귀족들.
그들도 출신이 어디였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파벌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했다.
아인이 갑자기 죽거나 쓰러진다면 왕비인 레일리 혼자서는 이를 수습하지 못할 것이다.
후계자가 없다면 더욱.
“그리고 저는 제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 목적을 달성할 의지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프레시아 공작은 상대의 말에 납득하고 말았다.
자신의 방에 침입한 시점부터 목숨을 내놓은 거나 다름없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도 죽음을 각오한 게 아니고서야 꺼내지 못할 말이었다.
“국왕의 곁에는 실력자들이 널려있다. 게다가 본인 역시 뛰어난 마법사지. 잠깐의 시간만 있더라도 마나 실드로 자신의 몸을 보호할 것이다.”
“그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지금도 이렇게 공작 전하의 앞에 와있지 않습니까?”
그다지 마음에 드는 예시는 아니었으나 프레시아 공작은 진지하게 상대의 제안을 고민해 봤다.
자신이 어떻게든 눈앞의 상대를 숨겨서 왕궁까지 데리고 가기만 한다면 암살도 가능하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후의 상황은 프레시아 공작에게 유리했다.
아무런 방비도 하지 못하고 있을 다른 이들과 달리 사전에 정보를 안다면 이후 상황을 주도할 수 있으니까.
더구나 사트리안 왕국의 귀족들은 통째로 흡수되면서 전력을 온존했기에 더욱 그랬다.
‘내 딸도 엄연히 왕의 아내다. 후계자가 없는 상황이라면 레일리 왕비를 밀어내고 국정에 관여할 명분은 충분해.’
반대 세력도 만만치 않겠지만 프레시아 공작은 충분히 자신 있었다.
네패스 왕국이 왕국에 그치지 않고 조만간 제국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방대한 영토가 주인 없이 방치되어 있는데 탐욕스러운 이들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어떻게든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어쩌면 기존 사트리안 왕국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토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때 레일리 왕비와 다른 파벌들을 밀어내면 그만이었다.
또다시 가혹한 내전의 시기가 오겠지만 그 정도는 이데아를 위해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군.”
프레시아 공작이 긍정적인 뜻을 밝히자 상대는 방긋 웃었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그런데 자네 대체 이름이 뭔가? 가명이라도 부를 이름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프레시아 공작의 물음에 상대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퀴로스라고 부르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