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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222화 (222/250)

VVIP 영주님의 품격 222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22화

222화

전투에서의 압도적인 승리 이후 내 군대의 진격을 가로막을 수 있는 상대는 아무도 없었다.

크라이더 왕국의 영주들은 모두 백기를 올렸고 덕분에 파죽지세로 수도까지 진군할 수 있었다.

“순조롭군요.”

아인츠발트는 이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침략자의 입장은 달갑지 않으나 한 번의 전투 이후 작은 저항조차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반제국 동맹이 피의 연회와 내전을 일으킨 세력으로서 명예를 잃었던 영향이 컸다.

외세의 침략이라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기에는 명분이 너무 확실한 것이다.

거기다 약탈하지 않음으로써 나는 그 명분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계속 이렇지는 않겠지만.”

“그거야 그렇겠죠.”

눈앞에 수도의 장벽이 펼쳐지자 아인츠발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방의 영주들이야 중앙군이 패배한 마당에 저항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그러나 수도는 달랐다.

왕국의 상징으로서 어떤 왕국을 점령하든 수도에서만큼은 심심찮게 저항이 일어나고는 했다.

아인츠발트 역시 약소국들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수도에서 벌어지는 저항을 목격한 적 있었고.

“하지만 준비했으니 괜찮습니다.”

아인츠발트는 이미 이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장벽 위에 모습을 드러낸 소수의 병력을 향해 아인츠발트는 위풍당당하게 말을 몰았다.

“이미 너희의 군대는 패주했다. 순순히 길을 열고 항복하면 무의미한 피를 흘리진 않을 것이다.”

아인츠발트는 딱히 소리를 높이지 않았으나 마치 귀에 대고 말하듯 또렷하게 들렸다.

어떻게 저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슬쩍 물어본 일이 있는데 자신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기술이라는 해괴한 설명만 돌아왔다.

그래도 벽을 넘은 나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는 말에 몇 번 연습해 봤으나 성과는 미미했다.

‘꼭 배우고 싶은데.’

작고 사소해 보이는 기술이지만 군주로서 위엄을 세우기에는 목소리만큼 좋은 것도 없다.

아무래도 아인의 육체가 젊다 보니까 연륜이 있는 외모를 갖추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 어울리지도 않고.

물론 지금까지 이룬 업적이나 명성만으로도 누군가에게 무시당할 위치는 아니지만, 사소하게나마 신경 쓰이기는 했다.

“그렇다 한들 우리가 항복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때 장벽 위에서 무장한 귀족 하나가 목청껏 소리쳤다.

딱히 소리를 치지 않고도 귀에 때려 박히듯 들린 아인츠발트의 목소리와 달리 악에 받친 외침이었다.

“그대는 누구지?”

“내 이름은 앨런 체이스다! 크라이더 왕국의 귀족이자 체이스 가문의 가주로서 이 자리에서 네놈들을 막겠다!”

스스로를 앨런이라고 밝힌 귀족의 호기 넘치는 외침과 함께 작은 함성이 들려왔다.

정말 작은 함성이었다.

장벽 위에 서있는 이들의 숫자를 대충 헤아렸을 때 아마 그 숫자는 간신히 일천을 넘는 정도일 것이다.

‘또 명예 팔이로군.’

점령지의 수도에서는 으레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충성심이나 명예를 증명하고 싶어서 이기지 못할 싸움인 것을 알아도 목숨을 버리려는 자들.

아마 그들은 자신의 죽음으로 의기를 보이고 나아가 왕국민들이 우리에게 저항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저들이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테니까.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그러니 묻지. 네놈에게 백성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권리가 있나?”

“나는 왕국의 귀족이다! 명예를 아는 자로서 어찌 외세에 맞서지 않겠느냐?”

“말귀를 못 알아듣는군.”

아인츠발트는 고의적으로 상대를 비하하고 무시하는 어투를 취했다.

여기서 상대를 우대해 주면 오히려 기세가 살아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 차례도 약탈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항한 이들이 없었기 때문이지.”

“그게 어쨌단 말이냐? 그딴 겁쟁이들과 나를 비교하지 마라! 나는 명예로운…….”

“그러나 그대들이 저항하겠다면 이 수도에 있는 인간은 단 한 명도 살려두지 않을 거다.”

당당하게 소리치던 상대의 말문이 그대로 막혀버렸다.

내전에서도 써먹었던 적 있는 방법이지만 목숨 걸고 저항하겠다는 녀석의 뜻대로 굳이 어울려 줄 필요가 없다.

이겨봐야 본전이거나 오히려 화근을 남겨두는 셈이 되니까.

이럴 때는 상대가 먼저 포기하도록 압박하는 게 최선이었다.

아인츠발트 역시 굳이 피를 보고 싶어 하지는 않기에 이런 내 의견을 긍정해 주었고.

“남에게 칼을 겨눈다면 너희 또한 죽을 각오가 되어있다는 의미일 터. 그 좋아하는 명예를 위해 기꺼이 죽여주겠다. 그편이 역사에도 이름을 남길 테니 좋지 않나?”

아인츠발트의 협박에 장벽 위에 싸늘한 침묵이 찾아왔다.

아인츠발트의 목소리는 비단 장벽 위에만 향하는 게 아니었다.

그 너머에 있을 크라이더 왕국 수도의 백성들에게도 향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 발이라도 화살이 쏘아지거나 창칼을 휘두르면 무자비한 학살이 자행될 것이라고.

이는 저항을 소리치던 이들이 지키고자 했던 명예가 단번에 박살 나는 일이었다.

“저, 저게 무슨 미친 소리야?”

“우리까지 다 죽인다고?”

협박의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마치 구경이라도 하듯이 저항하려는 귀족들을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난 것이다.

“감히 저항한 놈들과 그걸 막지 않고 방관한 놈들. 다 같은 처벌이 내려지는 게 옳지 않은가?”

아인츠발트는 그들에게 들으라는 듯 쐐기를 박아버리고 몸을 돌렸다.

뿌우우우!

난 그런 아인츠발트의 말에 호응해 주듯 신호를 보내 나팔을 불게 만들었다.

딱히 공성전에 있어서는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위압감 하나는 끝내주는 기사들이 대형을 만들며 돌격 태세를 갖추었다.

그렇다고 기사단이 아예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장벽이야 마법으로 부숴버리면 그만이고 일단 틈이 생기면 기사단의 독무대였으니까.

다만 장벽을 마법으로 부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었다.

마법사 협회의 원로라도 단독으로 시도하기는 어렵고 여러 원로가 나서거나 로스니아 제국의 이름 높은 마법사들이나 가능했으니.

하지만 나는 옛날부터 써먹던 전략이다.

공성 무기를 일일이 제작해서 쓰려면 전문적인 기술자나 좋은 나무가 있어야 하는데 양쪽 다 상시 구비하기도 어렵고 시간도 많이 지체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이쪽의 압도적인 전력을 믿고 벽을 마법으로 부수는 쪽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물론 화력을 벽에 쏟는 만큼 전투에 지원하기는 어려워지지만, 그 정도 리스크는 누를 만큼 이쪽의 전력이 월등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고.

“들어라! 우리는 오늘 이 땅에 단 하나의 생명도 남겨놓지 않을 것이다!”

아인츠발트는 기사단의 앞으로 가서 공격 전 사기를 높이기 위한 연설을 시작했다.

절차상 저 다음에 공세가 시작된다는 건 굳이 군에 종사하는 이가 아니라도 알 수밖에 없었다.

“적들을 명예롭게 보내주어라! 약탈도 허용한다. 네패스 왕국에 맞선 자들의 말로가 어떠한 것인지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다!”

“와아아아!”

약탈이 허용된다는 말에 어마어마한 함성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이게 마음에도 없는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말로는 허락해 준다고 하지만 여기까지 하면 상대가 알아서 항복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우리는 아쉬워하면서 항복을 받아들이고 약탈은 포기한다.

이미 수차례나 반복된 상황이기에 내 군대에서 이것이 연기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굳이 찾자면 선임들이 후임을 골려주기 위해 일부러 속이는 경우.

즉, 최근에 배치된 소수의 신병들만 정말 약탈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미친! 빨리 어떻게든 해보시오!”

“나, 나보고 어쩌라고?”

“다 같이 죽을 참이오?”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다급해지더니 그중 몇 명이 앨런이라는 귀족에게 달려갔다.

이후 자세히 들리지는 않으나 다투는 게 분명한 고성이 오갔다.

“야 이 미친놈들아! 죽으려면 혼자 죽지 대체 몇 명이나 죽이려고 그래?”

“이제 와서 항복할 수는 없소!”

“네놈 미친 짓에 왜 우리를 끌어들여? 이 수도의 인구가 몇인데!”

분위기는 금세 험악하게 변했다.

앨런은 명예를 위해서 죽겠다는 생각일 것이다.

정확히는 이제 와서 자신이 내뱉은 말을 취소하고 싶지는 않겠지.

자존심이 상할 테니까.

게다가 어차피 자신은 이미 죽기를 각오했으니 달라질 것도 없고.

그러나 목숨을 걸 생각이 없던 이들은 웬 미친놈들 때문에 자신들까지 다 죽게 생겼으니 고운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결국, 충돌이 일어났다.

“항복! 항복이다! 백기를 걸어라!”

“그만두지 못해? 어찌 침략자들에게 항복할 수 있단 말이냐!”

“그럼 수도의 사람들을 싹 다 죽일 거냐? 이 미친놈들이!”

고성은 곧 주먹질로 바뀌었다.

죽음을 각오한 자들과 죽을 생각이 없는 자들 중 급한 쪽이 어디일지는 뻔했다.

백기를 걸고 당장 문을 열려고 하는 이들과 최소한의 저항할 여지조차 없애버리는 행동을 막으려는 이들.

유혈 사태까지 이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우리는 아래에서 그 광경을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이 버러지 같은 귀족 놈들이!”

저 싸움의 승자는 누구일까?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그건 목숨을 버린 귀족도, 항복하려는 귀족도 아니었다.

애꿎은 상황에 휘말려 피를 보게 생긴 절대다수의 평민들이 승리를 쟁취했다.

그들은 자신들 목이 떨어지게 생기자 상대가 귀족이라는 것도 잊은 채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아무리 귀족이 무서워도 장벽 너머에 있는 침략자들만큼 무섭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숨을 버린 귀족들과 달리 그들은 지켜야 할 것이 있는 자들이었다.

비록 무장 상태는 빈약하나 눈이 뒤집어진 평민들이 장벽 위로 올라와 명예 팔이를 하던 귀족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귀족들의 칼날에 목숨을 잃는 이들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행동이 민중의 분노를 더 자극했다.

“슬슬 들어가지.”

분위기가 더 격해지면 큰 희생이 나올 수도 있었기에 나는 적당할 타이밍에 진입을 명령했다.

물론 길을 뚫는 건 내 역할이었다.

콰콰쾅!

삼중 마법으로 깔끔하게 한쪽을 무너트리자 기사단이 지체하지 않고 바로 돌격했다.

자신들끼리 뒤엉켜 싸우던 이들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어디를 갈 수 있겠냐마는.

“으아악! 제발 살려주시오!”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소!”

바닥에 엎드리고 애원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기사단의 칼날은 저항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베어 넘겼다.

그렇게 기사단이 장벽을 돌파하고 불과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수도는 함락되었다.

스스로 죽음을 각오했다고 말하던 이들도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 앞에서는 생각이 변했는지 항복하기 바빴다.

그래도 저항하는 이들이 아예 없지는 않으나 어차피 그들은 제일 먼저 죽기 때문에 본보기로 딱 좋을 뿐이다.

* * *

수도가 넘어오기 무섭게 우리는 왕궁으로 내달렸다.

약탈은 당연히 금지됐다.

상대가 맞서지 않고 항복했으니 굳이 약탈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였다.

방금의 상황을 항복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나뉠 수 있겠으나 국왕인 내가 그렇다는데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도인가.”

왕궁의 정문으로 함께 움직인 아인츠발트가 그 앞을 가로막고 서있는 기사 몇 명을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나도 그런 아인츠발트의 심정에 동의했다.

명예 팔이를 하고 싶으면 앨런인지 뭔지랑 같이 싸울 것이지.

왜 번거롭게 따로 나눠서 길을 막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크라이더 왕국의 근위기사단이다! 이 앞을 지나가려거든 우리를 모두 죽여야…….”

퍼버벅!

아인츠발트는 귀찮아하는 얼굴로 주먹을 내질러 앞을 가로막는 이들을 모두 정리했다.

그래도 숫자가 적어서 다행이었다.

괜히 저항이 거세면 이쪽도 분위기가 험악해지니까.

만약 아군에서 사상자가 발생한다면 나도 마냥 호의를 베풀 수만은 없었다.

점령지의 민심을 얻는 것만큼이나 내 사람들을 잘 대해주는 것 역시 중요하니까.

명분에 눈이 멀어서 아랫사람들을 홀대했다가는 오히려 손해가 커질 수도 있었다.

“이쪽입니다.”

잠시 왕궁을 살피던 아인츠발트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나를 한쪽으로 안내했다.

그곳에는 아마 크라이더 국왕의 식솔로 보이는 이들이 모여있었다.

‘영웅 정보가 없는 게 아쉽군.’

한 명이라도 정보를 보면 확실할 텐데 그 누구에게서도 영웅 정보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사전에 파악해 둔 정보가 있기는 했다.

항복을 요청한 영주들에게서 입수한 초상화 같은 것들이 특히 효과적이었다.

“우리는 왕족입니다. 포로가 되어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약속해 주십시오.”

눈을 치켜뜬 채 나에게 대우를 요구하는 녀석이 크라이더 국왕의 장남이었다.

“걸맞은 대우라.”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면 네패스 국왕 전하의 명예 역시 드높아질 겁니다!”

그나마 차남은 좀 더 낮은 자세로 말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우습기 그지없었다.

자비를 베풀면 내 명예가 드높아질 것이다?

물론 보통이라면 그렇다.

점령국의 왕족은 대우해 주는 게 예의지.

그러나 거기에도 예외 사항은 있다.

그들이 딱히 점령국의 왕족으로서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거나 명예를 잃은 상대일 경우.

혹은 이쪽에서 도저히 살려주기 힘든 경우.

안타깝게도 크라이더 국왕의 식솔들은 두 경우 모두 해당했다.

“기가 막히는군. 이 전쟁의 명분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내 질문에 크라이더 국왕의 식솔들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당황했다.

내가 내건 전쟁의 명분은 피의 연회를 일으켰던 이들에 대한 응징이었다.

이들이 당사자가 아니라고 한들 이 세계에서 연좌제는 여전히 유효했다.

“적어도 크라이더 국왕 본인이었으면 이런 멍청한 소리는 안 했을 텐데.”

빌헬름도 그렇고 부모가 잘났다고 자식까지 잘난 경우는 의외로 잘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제,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국왕 전하! 전하!”

일단 당장 죽이지는 않는다.

겁을 줘서 은닉해 둔 재산도 찾아야 하고 혹시나 회유해야 할 귀족이 있다면 인질로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으니까.

그때까지는 목숨을 붙여둘 것이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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