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20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20화
220화
【 압도 】
전쟁을 앞두고 나와 이데아의 혼인이 먼저 진행되었다.
동시에 본래라면 이데아가 가져야 했을 사트리안 왕국에 대한 권리 상당 부분이 나에게로 넘어왔다.
이 부분에 대한 반발은 크지 않았다.
이미 프레시아 공작가에 대한 기대를 버린 이들로서는 차라리 네패스 왕국에 흡수되는 쪽이 나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프레시아 공작가에 대한 충성이 남아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언행이 이데아에게 화가 될까 몸을 사렸다.
그렇게 별다른 어려움 없이 혼인 동맹을 성공적으로 체결한 다음 나는 곧장 전쟁을 준비했다.
그사이 부상으로 몸을 가누지 못했던 기사들도 모두 복귀할 수 있었다.
“상태는 어떤가?”
“국왕 전하의 은혜 덕분에 괜찮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분위기가 밝은 건 그랜트였다.
아스카 토벌에 대한 공을 높이 사서 단숨에 백작의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순수하게 실력만 보고 내려준 작위는 아니었다.
‘로크는 끝났다.’
내 마법으로도 어쩔 수 없는 영구적인 신체의 손상이 남은 로크였다.
따라서 로크를 대체할 인물이 필요한데 유력한 후보가 루시우스였다.
그런데 루시우스를 근위기사단장으로 뽑으면 이번에는 루시우스의 자리가 빌 수밖에 없었다.
그를 대신할 사람으로 선택한 게 그랜트였다.
‘실력은 충분하니까.’
로스니아 제국의 5티어 기사.
오히려 순수한 실력만 놓고 본다면 루시우스보다 그랜트가 위였다.
“의욕이 넘쳐서 다행이군.”
“선봉을 맡겨주시면 반드시 승리를 가져오겠습니다!”
그러나 그랜트의 의욕은 너무 과했다.
이미 선봉을 맡기로 한 기사가 있는데 이렇게 욕심을 내다니.
“아인츠발트 공작보다 더 잘할 자신 있나?”
게다가 그 상대는 다름 아닌 아인츠발트였다.
아군의 희생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최강의 전력인 아인츠발트를 선봉에 세우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한쪽에서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인츠발트와 눈이 마주친 그랜트는 당황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크크크큭!”
그런 그랜트의 반응을 지켜보며 웃는 이가 있었으니 키스타였다.
다시 백작이 된 그랜트와 달리 키스타는 현재 자작으로 작위가 내려간 상태였다.
그러나 키스타 자작은 이를 그리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적당히 해야 할 거 아니야?”
“어딜 자작 따위가!”
“흐음. 아직 내가 쓴 치료약 비용을 못 받았는데. 한 번 방문하면 되겠나?”
“아니, 갚는다니까? 조금만 더 시간을…….”
채권자인 키스타 자작 앞에 채무자인 그랜트 백작은 순식간에 순한 양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빚진 건 갚는 게 당연한 일이기에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건 왕국의 법에서도 명시하고 있는 당연한 권리였으니까.
“뭔가 익숙한데 낯설군요.”
루시우스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익숙한데 낯설다고?”
“로크 백작과 라이언 경의 모습이랑 비슷하지 않습니까?”
루시우스의 말에 근처에 있던 측근들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 같기도 하군.”
“사이가 좋은 모양이야.”
측근들의 평가에 그랜트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하긴 로크와 라이언은 선후배 관계였지 채권자와 채무자의 사이는 아니었으니까.
절대 같을 수는 없었다.
“농담은 그쯤 하고 이제 출정하지.”
전쟁을 앞두고 긴장을 풀기 위한 대화는 여기까지였다.
나는 출정을 명령했고 아인츠발트를 선봉으로 한 군대가 가도를 따라 행군을 시작했다.
* * *
크라이더 국왕은 네패스 왕국의 출정 소식을 듣기 무섭게 모든 병력을 소집했다.
이미 선전포고를 받은 상황이었기에 그 대응은 신속하기 이를 데 없었다.
“우선은 미리 준비한 작전대로 움직이지.”
크라이더 국왕의 말에 영주들은 불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사전에 작전을 준비하기는 했으나 그 작전에는 중요한 요소가 배제되어 있었다.
바로 상대의 정확한 전력을 알지 못한다는 것.
전쟁에서 상대의 모든 정보를 파악할 수는 없으나 이번 전쟁에서는 그런 부분이 특히 두드러졌다.
‘선봉을 맡았다는 아인츠발트 공작.’
정보를 최대한 모아본 결과 사트리안 왕국에서 보인 무력시위 말고도 로스니아 제국에서 잠깐 활동한 전적이 있었다.
그 결과 놀랍게도 아인츠발트의 정체는 아트라시아 후작을 죽인 기사였다.
그러나 이 사실은 상대가 몹시 강하다는 것만 알려줄 뿐 구체적으로 얼마나 강한지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었다.
‘어쩌면 카시안 공작 이상일지도 모른다.’
제국 최강의 기사로 이름 높았던 카시안 공작의 명성은 그의 죽음 이후로도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그를 뛰어넘을 만한 실력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인츠발트는 카시안 공작을 능가할 가능성이 높은 유력한 실력자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사트리안 왕국에서는 무력시위를 했지만 크라이더 왕국에서는 가벼운 신경전만 하고 물러난 상대였다.
그 탓에 작전을 수립할 때 상대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한 명의 무력을 신경 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기는 하지만…….’
영주들은 인상을 쓰며 전술지도에 표시된 네패스 왕국의 군대를 노려봤다.
‘단신으로 일국에서 무력시위를 하고 전쟁의 선봉을 맡았다. 거기에 아트라시아 후작을 죽인 전적까지 있으니.’
아인츠발트의 무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기에 단 한 명을 상대로 머리를 싸매야 하는 이 비정상적인 광경도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크라이더 국왕 전하. 혹시나 이자의 무력으로 작전이 망가질 가능성은 없습니까?”
한 영주가 조심스럽게 불안점을 짚었다.
크라이더 왕국이 준비한 전략은 매복이었다.
선봉 부대와 후방에서 따라올 본대를 나누고 우선은 선봉부터 무찌른다는 계획.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게 아인츠발트의 무력이었다.
만약 본대와 선봉을 제대로 나누지 못하거나 선봉에게 도리어 패퇴한다면 그때는 돌이킬 수 없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크라이더 국왕은 영주에게 핀잔을 주었다.
그럴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거나 아인츠발트를 우습게 봤기 때문이 아니었다.
절망적일 정도의 전력 차이를 극복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요소까지 고려하면 작전을 수립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카시안 공작 이상이라면 대응할 방법 자체가 전무했으니.
‘매복으로 본대와 분리한 다음 포위해서 죽인다. 이것 이상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가 매복을 예측해서 실패한다면 모를까, 매복을 힘으로 뚫어버릴 능력이 있다면 어떤 전략을 쓰더라도 승산은 없었다.
그렇기에 크라이더 국왕은 여기에 모든 걸 걸어야만 했다.
‘왕국 내 기사들과 마법사를 모두 동원하는 작전이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돼.’
크라이더 국왕은 혹시나 해서 작전을 몇 차례나 꼼꼼하게 점검했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두 왕국의 국경을 넘어 네패스 왕국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네패스의 군대는 다른 곳에서도 움직이고 있겠지.’
로스니아 제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인 역시 군대를 나눴다.
그러나 로스니아 제국처럼 당당하게 여러 전선을 형성한 건 아니었다.
나눠진 병력들은 다른 반제국 동맹의 지원군이 올 길목을 틀어막는 게 전부였다.
‘그렇다면 이쪽으로 오는 병력은 많아도 10만은 못 된다.’
선봉과 본대를 모두 합칠 때의 경우였다.
사전에 파악한 정보에 따르면 출정할 당시 선봉의 병력은 1만 안팎이었다.
“작전대로 움직여라. 놈들에게 우리 왕국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거다!”
곧 양측 군대의 교전이 시작되었다.
크라이더 국왕은 4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네패스 왕국군과 맞섰다.
그러나 병력의 숫자 이상으로 서로의 전력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촤악!
선두에 선 아인츠발트는 가벼운 칼질로 자신에게 달려드는 이들을 해치웠다.
나름대로 그를 경계하고 있던 기사들은 마치 허수아비를 상대하는 것 같은 경쾌한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이 정도로 차이가 난단 말인가?’
아무리 봐도 상대는 전력을 다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필요한 만큼 적당한 힘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을 뿐.
그런데 이름 있는 기사들이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참살당하고 있었다.
“당황하지 마라! 아무리 강해도 놈도 사람이다. 카시안 공작도 죽었는데 놈이라고 죽지 않을 리 없다.”
크라이더 왕국군은 작전대로 거짓 후퇴를 시작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딱히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양측의 전력이나 사기의 차이가 명확했기에 반은 거짓이지만 반은 진짜로 후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크라이더 국왕 역시 어설픈 속임수는 통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알기에 다소의 희생을 감수하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일단 선봉부터 끌어들인다.’
크라이더 왕국군이 후퇴하려고 하자 네패스 왕국군은 그 뒤를 맹렬하게 추격했다.
굳이 달아나는 적을 순순히 보내줄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나고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좀 더. 조금만 더 끌어들이면 된다!’
그렇게 얼마간 일방적인 피해를 당했을까?
마침내 네패스 왕국군의 선봉은 과할 정도로 깊숙하게 크라이더 왕국군을 뒤쫓았다.
“지금이다! 어서 신호를 보내라!”
크라이더 국왕의 지휘 아래에 나팔 소리가 전장을 뒤덮었다.
그에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던 기병 부대가 나타나 본대와 선봉의 허리를 습격했다.
네패스 왕국에서도 즉시 기사단을 내보내며 대응에 나섰지만, 선봉이 너무 깊이 들어가며 거리가 생겨 제때 도착할 수 없었다.
“성공이다! 모든 전력을 쏟아부어라!”
그렇게 선봉을 본대로부터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크라이더 국왕은 모든 전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남아 있는 모든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네패스 왕국의 선봉을 소탕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촤아악!
그러나 전력을 다하기 시작한 건 크라이더 왕국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인츠발트는 매섭게 검을 휘두르며 크라이더 왕국군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앞을 가로막고 어떻게든 발을 붙들려고 했던 기사들은 검 한 번 제대로 맞대지 못한 채 형편없이 쓸려 나갔다.
기껏 마법사들의 폭격이 이어졌지만 성과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저게 대체?”
게다가 아인츠발트 말고도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는 기사는 더 있었다.
“하압!”
그랜트는 아인츠발트의 뒤를 따르며 선봉을 포위한 크라이더 왕국군을 무너트렸다.
비록 아인츠발트가 차지한 선봉의 자리를 노릴 수는 없었지만, 그 옆에서 공을 세우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선봉 부대에는 마법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자크론은 한숨을 푹 내쉬며 몰려오는 크라이더 왕국군의 한쪽을 휩쓸었다.
아인이 바보도 아니고 고작 이 정도 노림수를 알아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러나 아인은 선봉이 깊숙하게 추격하는 것에 대해서 별다른 제지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선봉 부대를 미끼로 써먹다니.”
크라이더 왕국군이 선봉을 궤멸시키기 위해서 포위망을 형성한 것을 역으로 이용해 본대는 크라이더 왕국군을 이중으로 포위하고 있었다.
이는 본래라면 선봉 부대에서 막대한 희생이 나올 걸 감수해야 가능한 전략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네패스 왕국은 선봉만으로 크라이더 왕국군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미끼가 된 건가요?”
미끼라는 이야기에 티아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에 자크론은 핀잔을 주었다.
“뭐 이런 걸로 놀라고 그러냐? 이쪽에서 깨고 나가면 된다.”
반제국 동맹의 지원군을 막기 위해서 탈론과 루시우스가 빠졌지만 대신 본대의 실력자들 대부분이 선봉에 모여 있었다.
자신들을 포위한 크라이더 왕국군을 역으로 잡아먹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자신 없는 거냐?”
사방으로 화염을 퍼트리며 전장을 휩쓰는 자크론의 모습에 티아라는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에는 미끼가 되었다는 말에 철렁했지만 그런 것치고 포위를 당한 선봉의 사기는 전혀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포위망을 뚫거나 이중 포위로 본대가 크라이더 왕국군을 궤멸시킬 때까지 버틸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아니지만 혹시나 해서.”
“이런 사소한 일로 겁먹지 마라. 애초에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자크론은 그렇게 말하며 힐끔 본대가 있는 방향을 돌아봤다.
만약 상대가 선봉을 노리지 않고 본대에 있는 아인을 노렸더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인츠발트를 제외하면 최고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릴리아나가 본대에 있고 아인 스스로도 범접할 상대가 없는 인류 최강의 마법사였다.
이제 지금의 아인을 무섭게 할 수 있는 건 상대의 전력보다는 군량과 군자금일 터.
그러나 이번 전쟁은 레일리를 지지하는 남부 연합의 귀족과 이데아를 지지하는 사트리안 왕국 귀족 사이에서 경쟁적으로 지원이 이뤄졌으니 아인으로서는 딱히 손해 볼 게 없었다.
‘전쟁까지 남의 돈으로 하다니. 하여튼 난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