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1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17화
217화
* * *
모든 준비가 끝난 뒤 아스카를 죽이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우선 아스카의 보주를 통해서 마나 파장을 분석하고 대륙 각지에서 발동하는 부활 마법을 차단했다.
화르르륵!
그다음은 화형이었다.
자크론을 중심으로 마법사 협회에서 막대한 화력을 퍼부어 아스카의 육신을 티끌 하나 남지 않도록 불태웠다.
본래라면 아무리 태워도 바로바로 재생해서 부활했겠지만, 지금의 아스카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그러니 부활의 중심이 될 육신을 없애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진정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걸로 된 건가?”
“그런 거 같습니다.”
특별한 유언을 남기는 것도,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을 뿐.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아직 대륙 각지에 숨겨져 있는 보주들이 있지만 아스카가 사라진 이상 그것들은 그냥 매우 희귀하고 마나가 많은 보주일 뿐이었다.
그래도 기분이 찝찝하니 가능하면 회수해서 없애거나 써버리는 쪽이 낫겠지만.
그 문제는 마법사 협회에 맡기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고생 많았다. 결국 마족들을 모두 처치했구나.”
자크론이 나를 칭찬했다.
“저보다는 협회나 기사들의 노고가 컸지요.”
그에 난 모든 공을 협회와 기사들에게로 돌렸다.
립 서비스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난 마법사이기에 전방에 나서지 않았고, 국왕이기에 협회처럼 직접 조사를 하지도 않았다.
큰 그림을 짜는 것만이 내가 담당한 일이고 세부적인 부분은 모두 아랫사람들이 감당했다.
그러니 고생으로 따지자면 나보다는 다른 이들이 더할 것이다.
“이제 승전 소식을 전할 수 있겠군요.”
왕궁에서 대피했던 레일리도 다시 불러오고 피해도 수습해야 한다.
기사단에서 희생이 나온 만큼 재편도 해야 될 테니 할 일은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나중의 일이다.
일단은 이겼으니 지금은 승리를 즐기는 게 먼저였다.
* * *
왕궁으로 돌아온 뒤 이틀 동안 두 가지 행사가 진행되었다.
첫날은 장례식이었다.
이번에 희생된 기사들의 숫자가 많지는 않지만 대부분 출중한 실력만큼 지위가 높은 기사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내가 이끌던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직접 장례를 치러줘야 했다.
“그대들은 누구보다 용맹하게 이 땅을 지켜냈다. 해서 군주인 나 아인 네패스는 그대들에게 영웅의 칭호를 내리며…….”
장례식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전사자들에게 영웅이라는 칭호를 내려주고 그중 기사 작위만 가진 이들은 준남작으로 추대했다.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라기보다는 그들의 가족들에게 보내는 작은 위로였다.
왕국의 법에 따르면 국왕의 친정에서 전사한 이들에게는 이런저런 혜택이 있는데 그것도 작위에 따라 차등을 두기 때문이다.
빠져나가는 예산을 계산해 본 네일의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이 정도는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난 다음 둘째 날에는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렸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국왕이 주최하는 연회인지라 나름대로 구색은 갖춰졌다.
이 때문에 네일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끄응.”
“인상 좀 펴게.”
난 연회장에서 홀로 죽상을 하고 있는 네일을 다독이며 시간을 보냈다.
연회라고 해도 전날 장례식도 있었기에 분위기는 그리 활기차지 않았다.
그냥 살아남은 사람들끼리 가볍게 회포를 풀며 죽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정도였다.
“아인츠발트 경에게 공작 작위를 내리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계속 앓는 소리를 내던 네일이 돌연 아인츠발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무래도 인상을 찌푸렸던 게 단순히 장례식이나 연회의 예산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랬지.”
“어디 영토를 내주실 겁니까?”
“왜 영토를 걱정하지? 땅이 부족하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공작이라는 작위가 높다고 해도 네패스 왕국의 영토는 충분히 방대했다.
왕국의 귀족들 숫자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땅이 문제가 아니라 관리가 문제입니다.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아인츠발트에게도 최고의 대우를 약속했는데 이래서야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해결할 방법은 충분히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 해결할 방법은 이미 마련해 뒀으니까.”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네일은 의구심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하긴 사람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다면 진작 해결했겠지.
콘라드 후작을 닦달하고 굴려봐도 인재가 무한정 뽑혀 나오는 건 아니었다.
기존에 콘라드 후작이 데리고 있던 이들도 밑에서 한참을 공부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왕국 내부에 사람이 없으면 외부에서 영입하면 될 일이었다.
“자체적으로 귀족을 만들 수 없다면 다른 왕국에서 수입해 와야지.”
“네?”
내 대답에 네일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쟁으로 정복하면 얻는 귀족의 수보다 영토의 규모가 더 크지 않습니까?”
타국의 귀족을 모두 받아들일 게 아니라면 전쟁을 반복하는 건 이 문제의 해결책이 되어줄 수 없다.
이런 뜻이 담긴 네일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네일의 말은 수입이 아니라 약탈의 예시였다.
“전쟁이면 그렇겠지. 하지만 통째로 흡수하면 상관없지 않나?”
“통째로 흡수한다니요?”
네일에게 내 계획을 설명해 주자 네일은 그제야 납득한 표정이었다.
“언제부터 계획하고 계셨습니까?”
“꽤 됐지. 마족 놈들 아니면 진작 했을 일이니까.”
“그렇군요. 그런데 레일리 왕비마마께서는 동의하신 일입니까?”
“힘들었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피곤하다.
그래도 그때의 고생이 이제는 보답을 받게 될 테니 다행이었다.
* * *
“흐음.”
사트리안 왕국의 군주인 프레시아 공작은 네패스 왕국의 소식을 접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로스니아 제국에서 일어난 반란은 반제국 동맹에게는 호재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아드리안 황태자의 생환은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고.
정복 전쟁을 이끌던 카시안 공작은 반역자가 되어 사라졌으니 어쩌면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렇게 되는 듯했다.
아드리안 황태자가 네패스 왕국과 협정을 체결하며 평화적인 노선을 보였기에.
프레시아 공작은 이 분위기를 이용해 로스니아 제국에 화해를 청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과연 아드리안 황태자가 이를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었으나 적어도 시도해 볼 가치는 있을 테니까.
그러나 갑자기 나타난 마족 하나가 모든 계획을 망쳐버렸다.
그 무시무시했던 로스니아 제국의 군대를 혼자서 학살해 버린 마족.
프레시아 공작은 그 마족이 사트리안 왕국으로 오지 않기만을 간절하게 빌었다.
다행히도 마족의 행선지는 네패스 왕국이었다.
하지만 이후 들려온 네패스 왕국의 승전 소식은 프레시아 공작에게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져도 곤란하지만 이겨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많은 마족들을 처치해 온 네패스 왕국이지만 로스니아 제국조차 감당하지 못한 마족을 이길 줄은 몰랐다.
그것도 고작 수십의 희생으로 40만의 제국군을 학살했던 마족을 물리치다니?
처음에는 잘못된 정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재차 확인한 결과 이 정보는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
프레시아 공작의 물음에 이데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답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네패스 왕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힘을 합쳐야 합니다.”
네패스 왕국의 기사 수십이 죽은 것.
작은 피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그들 모두가 각자 한 부대를 이끌 만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그만큼의 지휘관이 죽었으니 분명 질적인 하락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자리는 채워지기 마련이었다.
“사실상 네패스 왕국은 제2의 로스니아 제국과 마찬가지니까요.”
그렇다면 그 뒤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아인은 이미 약소국들을 침공하면서 자신의 야망을 드러낸 상태였다.
사실상 전쟁을 피할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다.”
모을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모아서 맞서는 것.
지금으로선 그것만이 네패스 왕국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로스니아 제국도 감당하지 못했는데 그보다 강한 마족을 이긴 네패스 왕국이었으니까.
그 힘의 정체도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려웠다.
“프레시아 공작 전하, 네패스 왕국에서 사절단이 왔습니다. 현재 왕궁 바깥에 있습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전달되었다.
크라이더 국왕이나 다른 반제국 동맹의 국가들이라면 모를까 네패스 왕국에서 사절단이라니?
“대체 무슨? 아무 소식도 없이 사절단이라고? 국경에서는 연락이 없었느냐?”
“예.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보고를 올리는 자도 당황한 눈치였다.
사절단이라고 하면 보통 출발하기 전에 마법사를 통해 연락부터 전해오는 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경에서부터 사절단이 어느 경로로 오고 있는지 꾸준히 보고가 올라와야 하는데 지금까지 아무런 보고도 없었다.
“혹시 항복을 권하려는 게 아닐까요?”
그때 이데아가 조심스럽게 사절단이 온 이유를 추측했다.
로스니아 제국이 마족에게 큰 피해를 입은 뒤로 각국의 균형은 완전히 무너진 상태였다.
전쟁으로 덩치를 키운 네패스 왕국으로서는 이미 승리를 자신하고 있을 터.
그렇다면 전쟁에 앞서 선전포고를 하거나 항복을 권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흠.”
프레시아 공작도 자신의 딸이 하는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네패스 왕국이 보내올 서신이라고는 그런 내용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락 없이 몰래 온 것도 그런 의심에 심증을 더해주었다.
자신들의 국경을 아무렇지 않게 숨어들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의도라면 연락 없이 나타난 것도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우리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로스니아 제국의 침공도 막아낸 우리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운다면 네패스 왕국이라도 절대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아.”
하지만 이러한 행동에 프레시아 공작은 오히려 전의를 불태웠다.
“사절단을 안으로 들여라. 그리고 귀족들을 소집하도록.”
잠시 후 사절단이 왕궁으로 들어왔다.
프레시아 공작은 사트리안 왕국의 귀족들과 함께 사절단을 맞이했다.
그는 가장 먼저 사절단의 대표로 나선 귀족을 보았다.
검은 피부에 하얀 머리칼.
그리 큰 차이는 아니지만 분명 상대는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들의 국가뿐인 대륙 서부에서 인간이 아닌 이를 사절단의 대표로 보내는 건 매우 특이한 경우였기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프레시아 공작님을 뵙습니다.”
더구나 사절단치고 상대의 인사는 매우 단순했다.
일국의 군주를 대하는 태도로 보기에는 다소 무례한 것이다.
허리를 뻣뻣하게 세운 채 고개만 살짝 숙인 게 결정적이었다.
꿈틀!
이데아와 몇몇 귀족이 반발하려고 할 때였다.
“저는 아인츠발트 공작입니다.”
이어지는 상대의 자기소개가 그들의 반발을 억눌렀다.
놀랍게도 상대의 작위는 프레시아 공작과 같았다.
물론 타국의 작위가 사트리안 왕국에서 그대로 통하지는 않으나 네패스 왕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마냥 무시할 순 없었다.
‘하필 공작을 보내?’
프레시아 공작은 뭐라 지적하지 못한 채 이를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사트리안 왕국을 이끄는 군주였지만 아직 그의 가문은 왕가가 아니었다.
내전이 완전히 정리되기 전에 로스니아 제국이 선전포고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때 입은 피해를 수습하느라 프레시아 공작가는 아직도 왕가 선언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 연락도 없이 사절단을 보내다니, 네패스 국왕은 대체 무슨 생각인가?”
프레시아 공작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자 아인츠발트는 한숨이 나올 거 같았다.
아인이 갑자기 사절단 대표로 가라고 해서 당황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외교적인 문제를 처리해 줄 실무자들을 붙여주기는 했으나 검사에 불과한 자신이 대표를 맡은 것에 대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설명을 듣기는 했지만.’
그러나 납득할 수 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네패스 국왕 전하의 서신입니다.”
아인츠발트는 조심스럽게 아인이 보낸 서신을 꺼냈다.
“읽지 않겠다면?”
그때 프레시아 공작이 한껏 불쾌해하는 얼굴로 서신을 거부했다.
“감히 강제할 수는 없지요.”
아인츠발트는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자신이라도 이렇게 서신을 주면 자존심이 상해서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아인츠발트는 상대가 그러지 못하리란 걸 알았다.
“서신을 받지 않으시겠다면 저희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전혀 아쉬울 것이 없다는 아인츠발트의 태도에 프레시아 공작과 이데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는 명백하게 자신들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게 화가 난다고 무시하기에는 지금 네패스 왕국의 움직임이 가지는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허무맹랑한 소리가 적혀 있다면 그 목을 놓고 가야 할 것이다.”
프레시아 공작은 으름장을 놓은 뒤 마지못해 서신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레시아 공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인츠발트로서는 익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감히 내 딸을 넘봐!”
프레시아 공작은 손으로 옥좌를 내리쳤다.
그 외침을 들은 귀족들의 눈빛도 싸늘하게 식었다.
이데아는 그냥 귀족 영애가 아니라 프레시아 공작가를 이어받을 몸이었다.
사실상 군주와 다를 바 없는 신분인데 군주끼리 혼인을 하면 후계 문제가 복잡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가 되는 건 아인이 이미 정식으로 혼인한 몸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미 네패스 국왕에게는 부인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혼인 신청이 가당키나 한가? 게다가, 게다가…….”
프레시아 공작은 과도한 흥분으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혼인 신청.
그럴 수 있다.
부인이 이미 있다는 것.
거슬리지만 그것도 그럴 수 있다.
귀족의 혼인은 감정보다는 이권이 중요한 문제니까 여러 절차나 문제를 제쳐두고 얼마든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내용만큼은 어떻게 봐도 흘려 넘길 수 없었다.
“내 딸을 첩으로 달라고?”
자신을 첩으로 삼겠다는 이야기에 이데아는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트리안 왕국의 귀족들은 아인츠발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나 아인츠발트는 그들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이 사절단의 대표가 아인츠발트인 이유가 이 순간을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착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프레시아 공작님.”
아인츠발트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하지만 그 가벼운 행동이 가져오는 충격까지 가볍지는 않았다.
콰아앙!
아인츠발트가 디디고 있던 바닥을 시작으로 근처 기둥에까지 깊은 상흔이 새겨졌다.
단순히 발을 구르는 행동만으로 이루어진 파괴의 현장에 프레시아 공작은 말문이 막혔다.
“저희는 부탁이 아니라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아인츠발트가 사절단의 대표인 이유는 이 사절단의 목적이 무력시위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