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1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15화
215화
네패스 왕국 기사들과 협회 마법사들은 아스카와의 전투가 끝나고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전장의 정리는 끝났지만 죽어도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아스카의 육신을 아직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조치가 취해질 때까진 계속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임시로 차려진 주둔지에서 두 명의 기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릴리아나였다.
“오늘도 같은 상태이신가?”
“후우. 말도 마라.”
릴리아나는 빅터의 죽음 이후로 막사에 틀어박혀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전혀 나올 기미도 안 보이신다.”
“이거 기사단의 사기가 말도 아니군.”
루시우스나 로크는 부상을 당해 상태를 지켜봐야 할 처지였다.
단장급 기사가 둘이나 빠지게 된 상황이고 다니엘은 이곳에 없으니 남는 건 릴리아나와 탈론뿐.
그러나 탈론은 모르타르의 죽음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릴리아나가 나서지 않는다면 기사단에 대한 통제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게 그분뿐인데 이대로 계속 막사에 틀어박혀 계시면…….”
기사가 거듭 우려를 표할 때였다.
불쑥 튀어나온 거센 손길이 그를 밀어냈다.
“자자, 상황이 나쁜 걸 알고 있으면 뭐라도 해야지?”
손의 주인은 라이언이었다.
“무슨 짓이야?”
“기사단 상황이 안 좋은 걸 알면 어떻게든 문제가 안 생기게 수습을 해야지 여기서 한탄이나 하고 있으면 되겠어?”
라이언은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훑었다.
두 기사의 대화를 훔쳐 듣고 있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이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번에 무찌른 마족은 로스니아 제국까지 뭉개버린 놈이야. 그런 놈을 처치해 줬는데 감사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부담을 주려고 해서 되겠어?”
“그건…….”
“아니면 혹시 다른 생각이 있는 건가?”
라이언의 은근한 시선에 기사들은 당황하며 되물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이 있다는 거지?”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겁먹나? 꼭 반역이라도 준비하다가 걸린 사람처럼.”
“뭐, 뭐 이 새끼야!”
“지금 뭐라고 했어!”
반역이라는 말에 두 기사의 눈이 뒤집어졌다.
어느 국가이든 반역이라는 말은 함부로 꺼내서는 안 될 이야기였다.
하극상 중에서도 최악의 하극상으로 본인뿐 아니라 그 식솔들까지 모조리 극형에 처해지는 대역죄였으니.
절대 농담으로라도 꺼낼 이야기가 아니기에 기사들의 격렬한 반응은 당연했다.
그러나 라이언은 뻔뻔하게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면 이 상황은 뭐냐? 지금 분위기를 이 꼴로 만들고 기사단을 위한 일이라거나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말할 셈은 아니지?”
순간 기사들은 말문이 막혔다.
사실 그들이 굳이 지금 상황을 상기시키며 떠들어 댄 건 나름대로 기사단을 흔들려는 생각에서였기 때문이다.
두 기사 모두 다른 귀족 휘하에서 차출된 이들이기에 이번 기회에 아인에 대한 기사단의 충성을 자신들의 영주에게로 끌어올 심산이었다.
그러나 이는 아인의 영향력을 줄이려는 정도의 계산이었지 절대 반역까지 염두에 두고 있지는 않았다.
어쨌든 아인은 마족을 무찌르는 데 성공했고 그 마족은 앞서 로스니아 제국을 꺾었기에 아인의 명성을 흔들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가벼운 흠만 내는 정도일 뿐.
“하찮은 용병 출신 주제에! 아무 말이나 내뱉으면 되는 줄 아느냐!”
“용병 출신이란 말은 오랜만에 듣네. 그리고 아무 말이나 내뱉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겠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반역을 준비하는 낌새를 보이는데…….”
라이언은 살기를 내뿜으며 두 사람을 노려봤다.
“다른 영주들이 사고 치기 전에 본보기로 삼아줄까?”
“자꾸 누구더러 반역이라는 거냐! 오히려 왕국의 충신인 우리를 모함하는 네 녀석이야말로 반역자가 아니냐!”
여기서 밀리면 좋지 않은 소문이 붙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두 기사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설마 용병 출신 기사의 말 몇 마디에 반역자가 되지는 않겠지만 이번 전투로 아인의 심기가 불편해져 있을 건 분명했다.
이런 와중에 반역이라는 단어라도 흘러 들어가면 자칫 큰 사건이 터질 수도 있었다.
“무슨 소란이지?”
그때 지금껏 막사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던 릴리아나가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며칠 사이 수척해진 얼굴은 릴리아나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보여줬다.
하지만 아무리 빅터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릴리아나라도 반역이라는 단어에는 모습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방금 반역이라는 말을 들은 거 같은데?”
릴리아나의 손은 어느새 검 손잡이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기사들은 당황하며 다급히 입을 열었다.
“오해십니다! 이자가 멋대로 저희를 모함한 겁니다!”
기사들은 손을 들어 라이언을 가리켰다.
그에 릴리아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말이 짧군. 라이언 경은 평기사가 아니라 준남작 작위를 가진 몸이다.”
릴리아나의 지적에 기사들은 눈을 부릅떴다.
잊고 있었지만, 라이언은 귀족 작위를 갖고 있었다.
그것도 영주가 아니라 국왕인 아인이 직접 내려준 작위였다.
비록 준남작에 불과할지라도 보통의 기사들이 가볍게 말을 놓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아, 아니 그게…….”
“반역을 생각하는 놈들이 하극상 따위가 대수겠어?”
라이언은 당황하는 기사들의 뒤에서 빈정거렸다.
반역 역시 넓게 보자면 하극상의 한 종류라는 걸 이용한 빈정거림이었다.
그 뜻을 파악한 기사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이러다가는 진짜 반역자로 몰릴 수 있었다.
“아닙니다! 전부 오해입니다!”
“정말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결국, 두 기사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가며 억울함을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반역과 엮인 사안을 가볍게 처리할 수는 없었기에 릴리아나는 일단 두 기사를 감금한 뒤 심문을 통해 상황을 파악했다.
“쓸데없이 입을 놀렸군.”
얼마 지나지 않아 릴리아나는 어째서 라이언이 반역이라는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있었다.
모든 건 아인에 대한 충성을 흔들려는 영주 휘하 기사들의 얄팍한 수작이었다.
반역으로 묶기에는 어려웠으나 부대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행동을 했고 하극상까지 일으켰으니 나름대로 처벌은 가능했다.
“그래도 반역으로 볼 정도는 아닌 거 같은데 너무 과하지 않았나?”
릴리아나의 물음에 라이언은 어깨를 으쓱였다.
“막사 밖에서 반역이라고 소리 좀 쳐줘야 나올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습니다.”
“나를 불러낸 거군.”
라이언의 대답에서 릴리아나는 그가 자신을 불러내려고 일부러 반역이란 말을 썼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지간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기사라도 못 할 일이지만 확실히 라이언이라면 이런 짓도 그리 놀랍진 않았다.
지금까지 릴리아나가 곁에서 지켜본 라이언은 정말 파격적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으니까.
다른 기사라면 진작 목이 잘려 나갔을 테지만 라이언은 아인이 특별히 봐주는 상대였기에 지금껏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볍게 넘어갈 일은 아니다. 국왕 전하께 보고할 테니 그렇게 알도록.”
“아무렴요. 사안이 사안이니 직접 가셔야겠지요.”
이어지는 라이언의 말에 릴리아나는 눈을 흘겼다.
막사에서 강제로 끌어내지고 아인에게 보고까지 해야 하게 생겼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릴리아나는 라이언이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신경 쓰나 의문이 들었다.
라이언과 빅터가 상당한 친분이 있다는 건 릴리아나도 알고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자신과 라이언 사이에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
“그놈이 지금 그 얼굴 보려고 죽은 건 아닐 테니까 말입니다.”
라이언이 말한 그놈이 빅터를 의미한다는 걸 알아차린 릴리아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울컥 치미는 감정을 조절하기 어려웠다.
“빅터 경과 나는 그냥 전우였을 뿐이다.”
“제가 언제 아니라고 했습니까?”
라이언은 릴리아나의 감정을 매섭게 파헤쳤다.
본인들만 서로 부정했을 뿐 주변에서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 입, 조심하는 게 좋아.”
릴리아나의 은은한 경고에 라이언은 섬뜩함을 느꼈다.
단장급 기사들의 실력은 지금의 라이언으로서는 전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릴리아나는 그중에서도 단연 최강이라고 평가받는 실력자.
아인츠발트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에는 다른 단장들조차 적수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
“저도 쓸데없이 입 놀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해야지요.”
하지만 라이언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여기서 물러나면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게 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인가?”
“그놈 목숨값이라고 생각하시지요.”
퍼억!
이어지는 말이 끝나자마자 라이언은 눈앞이 핑 도는 걸 느꼈다.
바짝 긴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릴리아나의 주먹에는 제대로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단 일격에 라이언은 바닥에 쓰러져 구역질을 내뱉어야 했다.
“끄윽!”
여성의 몸이라고 해서 주먹이 조금은 가볍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완전한 착각이었다.
릴리아나는 깔끔하게 급소를 후려쳐 힘의 차이를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다시 입을 놀리면 그땐 이 정도로 끝내지 않겠다.”
릴리아나가 쓰러진 라이언을 뒤로한 채 몸을 돌릴 때였다.
라이언은 더는 덤비지 말라는 본능을 거스른 채 얄미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직 힘은 정정하시군요. 이제 표정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다.”
그 목소리에 자리를 떠나려던 릴리아나가 몸을 돌렸다.
“진짜 죽고 싶나?”
라이언은 순간 얌전히 입 닥치라는 본능의 경고를 느꼈다.
설마 정말로 죽이지는 않겠지만 자칫 큰 부상을 당할 수도 있었다.
지금의 릴리아나에게 얼마만큼의 이성이 남았는지는 알 수 없으니까.
그러나 라이언은 다시 입을 열었다.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설마요. 그 머저리 놈 아니면 누가 남을 위해 제 목숨을 던지겠습니까?”
라이언의 입에서 빅터가 거론되는 순간 릴리아나의 입술에서 피가 살짝 흘러내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라이언의 안면을 향해 릴리아나의 신발이 날아들었다.
* * *
“너, 몰골이 왜 그러냐?”
로크는 문안을 왔다는 라이언의 상태를 보고 황당해하며 물었다.
간신히 의식을 회복한 뒤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심란해하던 때였다.
반가운 얼굴이 찾아왔다고 해서 맞아주었더니 그곳에는 자신보다 급하게 치료를 받아야 할 거 같은 환자가 있었다.
“제 목숨 안 아낀 놈 때문에 그렇습니다.”
라이언은 엉망으로 얻어터진 몸으로 다리까지 절며 안으로 들어왔다.
로크는 진지하게 자신이 쓰고 있는 병상을 양보해야 하나 고민했다.
“뭔지는 몰라도 너도 네 목숨 안 아끼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에이, 몇 시간 동안 기절하기는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자리 비켜줄까?”
“일어날 수는 있고요?”
“다리는 그럭저럭 멀쩡하다. 팔이 부러지기는 했지만.”
로크는 아스카가 자폭하던 순간 대검을 방패처럼 사용하여 충격을 받아냈다.
그러나 모든 충격을 흡수하는 건 아무리 네임드 장비라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대검은 도중에 부서지고 말았다.
남은 충격은 온전히 두 팔이 감당해야 했기에 끝내 부러지고 만 것이다.
“팔이 부러져? 그러면 근위기사단장 노릇도 끝난 거 아닙니까?”
라이언의 물음에 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지나면 부러진 뼈는 회복되겠지만 한번 부러진 뼈는 두 번, 세 번도 부러질 수 있었다.
평생 남겨질 후유증이기에 기사로서 제 몫을 하는 데 지장이 될 것이다.
“그러게나 말이다. 내 꿈이 여기서 끝나네.”
“뭐, 용병이 일국의 근위기사단장까지 했으면 할 만큼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기는 하지.”
로크는 지금껏 아인의 밑에서 이뤄온 것들을 떠올렸다.
기껏해야 작은 귀족 가문의 기사단에서 부단장이나 하던 자신이었다.
그마저 온갖 차별을 견뎌가며 얻은 자리였고.
그런데 지금 자신은 무려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일국의 국왕을 지키는 근위기사단장이었다.
“하지만 아쉽단 말이지.”
자신의 주제에 벅찬 자리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자신보다 재능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 또한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인은 지금까지 로크에게 먼저 그만두라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기사단장 자리는 하나뿐이라는 로크의 상식을 비웃듯이 아인은 국왕이 되어 여러 기사단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재능 있는 이들의 자리를 빼앗지 않고도 계속 기사단장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로크는 미련이 생겼다.
“왕국의 근위기사단장보다는 제국의 근위기사단장이 더 낫지 않냐?”
“하기야.”
로크의 말에 라이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인의 야망이야 측근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보여준 성과를 생각하면 절대 오래 걸릴 일도 아니고.
이번 위기만 잘 넘겼으면 로크도 지금보다 높은 자리도 넘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쉬울 수밖에.
“그래도 날 완전히 버리지는 않겠지?”
“팔이 붙기만 하면 일단 칼질은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뼈가 부러지는 일은 흔한 부상이었다.
물론 후유증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적당히 써먹겠죠. 아니면 은퇴시켜 주거나.”
“내가 은퇴할 생각이 없어서 그래.”
“욕심이 과한 거 아닙니까?”
“너라면 그만둘 수 있겠냐?”
로크가 되묻자 라이언은 말문이 막혔다.
아인은 측근들에게 아주 관대한 편이었고 대접 역시 최상으로 해주고 있었다.
당장 수년 전만 해도 라이언은 자신이 일국의 군주에게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다.
물론 아인의 야망이 위험하다는 건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먼저 그만둘 거 같지는 않았다.
“목숨이 귀하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야. 죽더라도 따라가고 싶으니까. 그래서 그래.”
“어휴.”
로크의 말에 라이언은 한숨을 내쉬었다.
빅터는 원래부터 기사니까 그러려니 했지만 같은 용병 출신인 로크까지 이럴 줄은 라이언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왜 이렇게 다들 목숨을 안 아끼는지.”
“받은 게 있어서 그런 거지 뭐. 용병이란 게 그런 거 아니냐?”
라이언은 반박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세상의 어떤 용병도 자신의 목숨으로 보답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로크는 자신의 행동을 용병이기 때문이라며 정당화하고 있었다.
이미 마음까지 완전히 넘어갔단 소리였다.
“쯧쯧.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