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14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14화
2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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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의 정리는 금방 끝났다.
전투에 직접 참여한 건 소수의 실력자뿐이지만 근처에는 따로 대기시켜 둔 병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겼을 때는 전장의 정리를, 패배했을 때는 아군의 후퇴를 위한 시간을 버는 게 목적이었다.
이 한 번의 싸움에서 내가 패할 경우도 계산해야 했으니까.
‘결과적으로 승리는 했지만.’
100여 명의 병력 중에서 기사의 비율은 8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스카의 자폭에 죽거나 재기 불능이 된 이들의 숫자가 절반을 훌쩍 넘었다.
상태를 지켜봐야 하는 부상자는 거의 전부였고.
‘완전히 멀쩡한 건 탈론과 릴리아나 그리고 아인츠발트뿐이군.’
5티어 영웅은 그랜트 하나만 잃은 셈이고 그마저 경과가 좋다면 회복은 가능하다.
그렇지만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한 번에 이만한 실력자들이 죽은 일은 지금껏 없었으니까.
저티어 영웅도 아니기에 승급권으로 채우는 일도 불가능하다.
고티어 영웅의 승급권을 살 만한 보주는 나에게도, 마법사 협회에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정복 전쟁은커녕 당분간은 왕국을 안정화하는 것도 힘들겠지.’
아스카를 물리쳤으니까 로스니아 제국을 짓밟은 마족을 토벌한 공적을 자랑할 수는 있다.
외국에서 나를 영웅이라고 인정해 주는 건 마족을 토벌한 공이 크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런 형식적인 행동은 이제 나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
로스니아 제국의 40만 대군도 어쩌지 못했던 마족을 내가 토벌했다.
반제국 동맹이나 로스니아 제국의 남은 이들이 나를 얼마나 두려워할까?
기가 막히는 이야기지만 어쩌면 반제국 동맹과 로스니아 제국이 힘을 합쳐서 나에게 맞설지도 몰랐다.
실제로 지금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를 막을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런 와중에 왕국의 실력 있는 기사들이 다수 사망한 이번 일은 내 발목을 두고두고 붙잡게 될 것이다.
빌헬름이 정복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친동생인 아르센이 일으킨 반란으로 발목이 잡힌 것처럼.
‘왕국 내부도 잘 살펴야 하고.’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각 지역의 영주들이었다.
이번에 동원한 기사 중에는 내 휘하의 기사뿐만 아니라 다른 영주를 따르는 기사도 상당수 있었으니까.
마족들을 상대한다는 명목으로 각 영주들에게서 이름 있는 기사들을 차출해 온 것인데 그들 대다수가 죽었으니 영주들의 반감이 작지 않을 것이다.
대의명분이야 대의명분이고 감정은 별개의 문제니까.
보상만 요구해도 제대로 챙겨주기 힘들 텐데 이번 일로 대놓고 나를 거역하며 반항하는 영주가 나올 경우도 배제할 수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본보기를 보여야겠지.’
그런 세력이 나왔을 때 가만히 내버려 두면 문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될 것이다.
아인츠발트를 쓰든 탈론을 보내든 고티어 영웅을 동원해서 압도적인 힘으로 짓밟아야 다른 영주들이 동조하지 못하겠지.
하지만 영주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내가 이 상황에서 본보기를 보일 거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다른 방법을 고를 확률이 높다.
가장 나쁜 상황은 높은 보상을 요구하면서 정치적으로 나를 압박하는 것이다.
왕국 내에서 내 지지도는 나쁘지 않지만 이번에는 명분이 영주들에게 있었다.
게다가 약소국을 흡수하면서 그쪽 귀족들을 받아들였을 때 겉으로는 고개를 숙여도 나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은 이들이 제법 있을 것이고.
“시발.”
순간 욕설이 튀어나왔다.
모르타르가 죽고 빅터도 죽었다.
마벨을 비롯해 재기 불능이 된 이들도 있고 다른 영웅들의 회복 또한 불투명하다.
그런데 난 이 상황에서 정치적인 문제를 붙잡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자체가 너무 짜증 나고 불쾌했다.
내가 선택한 길이고 절대 후회하지는 않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전하.”
탈론이 나를 불렀다.
근위 기사단장으로서 내 곁에 붙어있던 로크는 심각한 부상으로 이송된 상태였다.
그 때문에 내 곁을 지키는 역할을 임시로 탈론이 대신하고 있었다.
“자크론 후작이 알현을 청했습니다.”
“들여보내.”
허락이 떨어지자 자크론이 안으로 들어왔다.
자크론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혀를 찼다.
“쯧쯧쯧! 지금껏 잘도 뻔뻔하게 굴었던 놈이 낯빛이 그게 뭐냐?”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크론의 말을 받아줄 정도의 여유도 없었다.
“시답잖은 소리를 하러 오신 거라면 오늘은 물러가시지요. 제가 아직 스승 대접 해줄 정신은 남아 있으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지금 나를 건드리지 마라.
그 뜻을 담아서 경고를 보내자 자크론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헹! 그래서 왕국의 귀족을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죽이기라도 할 셈이냐?”
자크론에게 작위를 준 사람이 다름 아닌 나였다.
그것도 단순한 귀족이 아니라 대영주였고.
그만한 작위를 준 이유는 어차피 자크론의 작위를 물려받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다시 회수가 가능하니까 뿌려도 아무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젊은 마법사들을 끌어들이기에도 좋고.
“후우. 이러지 마십시오.”
“뭘 이러지 마? 내가 너 놀리려고 온 줄 아냐?”
“그럼 무슨 이유로 오셨습니까?”
“그딴 표정 짓지 말라고 말하려고 왔다.”
자크론은 갑자기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네가 이겼다.”
국왕에게 대놓고 삿대질을 하는 상황.
하지만 나도 탈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과정이 깔끔하지는 않지. 피해도 제법 크고. 거기에 아끼던 이들도 몇 명 죽었다.”
자크론은 담담하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거기에 연연해서 뭐가 달라지느냐? 이미 결과는 나왔는데.”
“말은 쉽지요.”
“맞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태도는 부적절합니다. 사람이라면…….”
내 말을 탈론도 이어받았다.
그러나 자크론은 오히려 성을 냈다.
“이놈이 어디 인정이니 뭐니 신경 쓰던 놈이었냐? 내가 옆에서 지금껏 봤던 악행만 말해도 하룻밤은 족히 보내고 남는다.”
자크론의 외침에는 할 말이 없었다.
진실을 모르는 이들은 나를 영웅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이미지가 만들어져 있으니까.
그렇지만 내 속내를 알고 내 야망을 아는 이들은 절대로 나를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수단과 방법을 전혀 가리지 않는 악랄한 놈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놈이 이겨놓고 왜 그런 표정을 짓느냐? 나쁜 놈일 거라면 끝까지 굳건하게 나쁜 놈을 해라! 어설프게 동정하거나 흔들리지 말란 말이다!”
“하지만 그건…….”
“하지만이고 뭐고. 처음부터 각오했던 일 아니냐?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스카 녀석은 아직 죽지도 않았고, 네가 정복해야 할 국가는 한참 남았다.”
그 말대로였다.
이 싸움은 끝이 아니었다.
아직 난 내 목표의 절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
애초에 마족은 플레턴에게서 듣기 전에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놈들.
내 대륙 정복에 있어서 마족은 중간에 끼어든 훼방꾼일 뿐이다.
“다른 놈이라면 질질 짜도 된다. 얼마든지 괴로워해도 되고 심지어 그만둬도 상관없다. 하지만 넌 그러면 안 돼.”
자크론이 나를 향해 말했다.
절대 잊지 말라고 새겨들으라고.
“너만은 그래선 안 된다. 그 이유도 네가 제일 잘 알 거고.”
빅터는 선량한 사람이었다.
내가 알기로 가장 선량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빅터가 해왔던 행동까지 선량하지는 않다.
빅터는 내 야망을 위해서 그 손에 피를 묻혀왔으니까.
“최악의 위로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걸 위로로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다.
그야말로 어설프고 엉망진창인 위로.
아니, 오히려 이건 압박이었다.
가뜩이나 힘들고 괴로워 죽겠는데 자크론은 오히려 나를 압박하고 있었다.
“네가 제대로 된 위로를 받을 자격은 있는 놈이냐?”
그러나 차마 부정할 도리가 없었다.
“스승님을 모시도록.”
그래서 난 축객령을 내렸다.
이대로 자크론에게 잔소리인지 위로인지 모를 말을 계속 듣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이런 말까지 들어놓고 계속 죽을상 하고 있기도 그렇고.
차라리 눈을 감고 외면하고 싶었다.
다행히 지금 당장은 그럴 시간이 충분했다.
이미 해가 떨어진 밤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안 자고 딴짓하면 다시 오겠다.”
자크론은 으름장을 내놓은 뒤에야 탈론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램프의 불빛이 꺼지고 어둠이 찾아왔다.
난 울지 않았다.
* * *
“하…….”
라이언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싸움은 이전과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투에 나선 이들의 면면부터가 왕국 최정예였던 데다 심지어 상대는 로스니아 제국의 40만 대군을 학살했다는 마족이었다.
제정신이라면 맞서 싸우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멸해도 이상하지 않은 이 싸움을 겨우 절반 정도의 희생으로 승리했다면 이는 분명 기뻐할 일이다.
기뻐할 일인데…….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새삼스럽다거나 예상하지 못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라이언은 종종 빅터를 보면서 이 녀석은 전장에서 죽을 놈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보통은 싸움에 미친 놈들이 그런데 빅터는 달랐다.
녀석은 싸움이 아니라 다른 곳에 미쳐 있었다.
하지만 결국 미친놈이라는 건 변하지 않았고 빅터는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도망치는 법을 모르고, 피하는 법을 모르고, 숙이는 법을 모르는 바보 같은 놈에게는 당연한 결말이었다.
“기적이 두 번이나 일어나면 그게 기적이겠냐고?”
라이언은 빅터와 말릭과 싸웠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빅터는 자신을 내보내고 단신으로 남아서 말릭과 싸웠다.
그리고 이겼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기적과도 같은 승리였다.
하지만 그 승리가 사실 기적이라는 말로 통용될 것이 아니라는 걸 라이언은 이미 알고 있었다.
빅터는 스스로 죽었을 거라 말할 만큼 큰 부상을 입었고 자세히는 모르나 빅터의 생존에는 아인이 연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한 번이다.
그런 기적이 두 번이나 이루어질 수는 없다.
빅터 역시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나보다 강해지면 뭐 해? 결국엔 마지막까지 살아남지도 못할 거면서.”
라이언은 자신의 재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전장에서는 정말 괴물 같을 정도로 강한 자들이 나타날 때가 있으니까.
그들에 비하자면 자신은 둔재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런 괴물들조차 무참히 죽어갈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전장이었다.
아무리 강해지더라도 전장에서는 온갖 변수가 있었고 압도적인 강자도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죽을 수 있었다.
그런 곳을 벗어나지 않고 제 발로 드나드는데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그건 양심이 없는 것이었다.
“명예니 뭐니 하는 게 대체 무슨 소용이냐고, 이 새끼야.”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
가능하다면 거기서 성공해 돈을 잔뜩 버는 것.
여기에 만족하지 못한 놈치고 잘되는 놈을 라이언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여기 있었군, 라이언 경.”
그때 동료 기사가 라이언에게 다가왔다.
“뭐냐?”
라이언은 눈을 흘겼다.
동료 기사는 라이언과 눈을 마주치고는 당황했다.
라이언이 울고 있었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무언가 해야 할 말이 있었지만, 눈물을 매단 라이언의 모습을 보자 머릿속이 깔끔하게 지워져 버렸다.
그는 당황하며 돌아갔다.
라이언은 멀어져 가는 동료 기사의 뒤통수를 노려보다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
적극적으로 말리지도 않은 주제에 이렇게 청승맞은 모습을 보이는 게 뻔뻔하다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 또한 전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놈인 건 마찬가지였고.
아인에게는 장난으로 관둔다는 말을 몇 번 해봤지만 진심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게다가 이제는 더 벗어나지 못하게 되어버렸잖아.’
전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 빅터만이 아니었다.
빅터를 만나는 것보다 조금 더 빨리 라이언은 이미 그런 상대를 만난 상태였다.
‘네가 못했던 일, 내가 끝까지 해줘야지. 단장님도 그 꼴 났는데.’
아인 네패스.
빅터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상대.
라이언이 봤을 때 아인이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절대 능력이 뛰어나서만은 아니었다.
분명 그 능력은 대단했지만, 아인은 지금껏 봤던 누구보다 정신 나가 있었으니까.
그러므로 언젠가 아인 역시 죽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쉽게 말해 아인은 살아남은 게 아니라 덜 죽은 상태였다.
라이언은 빅터를 대신해서 자신이 조금이나마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죽으려면 여자에게 마음은 주지 말고 죽었어야지.”
라이언은 릴리아나의 얼굴을 떠올렸다.
하필 빅터가 죽은 이유 역시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방패를 들고 2열에 있던 빅터였으니까.
물러나면서 충격을 흘려냈다면 중상은 입었더라도 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던 놈이니까 절대 그럴 리는 없었겠지만.
“너 혼자 만족하고 죽으면 그뿐이냐? 남은 사람은 어쩌라고. 하여튼 잘생긴 것들은 꼭 얼굴값을 한다니까.”
라이언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본인은 만족했을지 모르겠지만 남은 사람이 겪어야 할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