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13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13화
213화
【 후유증 】
빅터는 다른 기사들과 함께 아스카를 압박하고 있었다.
왕국 최고 실력자들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기에 빅터는 2열에서 그들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은 상태였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려왔을 때 빅터는 대열을 이탈해 앞으로 몸을 날렸다.
콰콰콰쾅!
고통은 한순간이었다.
반사적으로 방패를 앞으로 내밀고 버티고 서기 무섭게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충격이 빅터를 휩쓸었다.
가장 먼저 충격을 받은 건 빅터의 장비들이었다.
방패가 반토막 나며 떨어져 나가고 뒤이어 갑옷이 우그러지며 몸을 짓눌렀다.
차라리 튕겨 나가는 쪽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러나 빅터는 어떻게든 힘을 주며 버티고 섰다.
여기서 자신이 무너지면 이 충격이 누구를 향할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릴리아나는 빅터 자신보다도 실력 있는 기사였지만 그녀의 강함은 육체 능력에 있지 않았다.
릴리아나의 강함은 압도적인 재능과 기교에 의한 것.
그저 육체의 튼튼함을 보자면 빅터는 절대 릴리아나의 아래가 아니었다.
게다가 릴리아나는 검술에 집중하는 전투 방식 때문에 방패를 따로 쓰지도 않았고 장비도 활동성에 집중된 형태였다.
지금 자신이 이 꼴이라면 릴리아나는 즉사할 확률이 높았다.
“쿨럭!”
그렇기에 빅터는 마지막까지 버티고 섰다.
실핏줄이 터지고 부러진 뼈가 내장을 파고들었지만 어떻게든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그 노력은 성과를 거두었다.
빅터의 보호를 받은 릴리아나는 별다른 충격 없이 아스카의 자폭을 버텨내는 데 성공했다.
“빅터 경?”
하지만 빅터는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충격을 전혀 흘려내지 못하고 정면으로 뒤집어쓴 빅터는 그대로 쓰러졌다.
말 한마디 남길 정신조차 남지 않은 냉혹한 현실이었다.
* * *
아스카의 자폭이 끝난 뒤 고통스러운 신음이 전장을 채웠다.
후방에 있던 마법사들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미미한 편이었다.
하지만 선두에서 아스카와 붙어 있던 기사들은 거의 궤멸에 가까웠다.
아스카의 마나 때문이 아니라 정말 사람의 몸에서 나온 피가 주변을 뒤덮고 있었다.
‘누군가는 죽었겠군.’
그 처참한 광경을 보는 순간 난 내 측근 중 누군가는 반드시 죽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지금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는 기사들만 해도 3티어 이상의 실력자들이다.
산전수전 다 겪어봤던 역전의 용사들.
한 지역에서 알아줄 정도로 뛰어난 이들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처참한 현장에서 내 측근이라고 해서 무사할 수는 없다.
“아인츠발트!”
하지만 난 부하들의 안위를 살피지 않았다.
자폭했다고 하지만 아스카는 죽지 않는다.
죽을 수 있는 몸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아스카의 불사를 깰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다행히 아인츠발트는 아스카의 자폭 속에서 비교적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 갑옷을 내준 보람이 느껴졌다.
“아스카를 맡아라!”
아인츠발트의 말에 의하면 부활할 때의 아스카는 의식이 온전치 못한 상태였다.
그건 의식장에서 마족들이 부활할 때도 마찬가지였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잠에서 깨어나는 것도 아니고 죽음에서 부활하는 과정에서 상태가 멀쩡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하겠지.
그러니 아인츠발트가 아스카를 맡는다면 부활하기 전에 다시 죽이는 것을 얼마든지 반복할 수 있었다.
“염려 마십시오.”
아인츠발트도 내가 원하는 바를 이해하고 곧장 아스카의 시신을 찾아냈다.
이미 경험자니까 우리 중 누구에게 맡겨도 아인츠발트만큼 안심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아스카의 뒤처리를 맡긴 뒤에야 나는 피해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사단을 수습해라!”
남은 건 후방에 있는 마법사들.
그리고 애초에 전방에 설 필요가 없던 탈론뿐이었다.
모두가 정신없이 앞으로 뛰어나가 기사들의 상태를 살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왕국 최고의 기사들.
이들이 죽으면 왕국의 기사 전력은 절반 아래로 뚝 떨어진다고 말할 수 있었다.
머릿수에서는 결코 많은 숫자가 아니지만 선봉에 서서 싸울 실력 있는 기사가 남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뒤쪽으로 데리고 가!”
“어서 서둘러라!”
팔 하나, 다리 하나를 잃은 기사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저런 부상이라면 목숨은 건졌더라도 더는 기사로서 살아갈 수 없었다.
내가 플레턴에게서 배운 치유 마법도 저렇게 뜯겨 나간 신체를 되돌릴 수준은 못 되었고.
그나마 깔끔하게 베였다면 혹시나 하는 기대라도 품어보겠지만 충격에 뜯긴 몸의 상태가 온전할 리 없었다.
‘설마 전멸인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즉사한 이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에는 똑바로 보는 게 힘들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진 이들도 있었다.
아스카와 근접해 있던 이들이었다.
“모르타르!”
앞쪽을 살피던 탈론이 모르타르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서둘러 뛰쳐나간 탈론은 모르타르의 호흡과 맥박을 살피고는 표정을 굳혔다.
‘대단한 전사지만 모르타르는 갑옷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
모르타르는 장비보다 자신의 몸을 믿는 타입이었다.
그리고 그래도 될 만큼 뛰어난 육체를 가지고 있었고.
하지만 격투를 중점으로 하는 전투 방식 탓에 갑옷은 철저하게 활동성에 중점을 두고 제작되었고 그 영향으로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태로 선두에서 아스카의 움직임을 압박하고 있었으니 즉사는 당연한 결과였다.
탈론은 착잡한 얼굴로 모르타르를 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측근들은 대체로 사이가 원만했지만 탈론과 모르타르는 동향이었기에 더욱 친근한 면이 있었다.
모르타르가 과거 탈론이 용병으로 활동했을 때 함께했던 학살자로 불리던 용병의 형이기도 했고.
거기에 내가 북부를 탈론에게 내주면서 모르타르는 탈론의 사람이 되었다.
절대 그 충격이 작지 않을 것인데 탈론은 감정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누군가의 죽음에 슬퍼하기에는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살릴 수 있는 사람을 하나라도 더 찾는 게 중요했다.
“편히 쉬어라.”
탈론은 모르타르를 내버려 두고 좀 더 앞으로 나아갔다.
나 역시 탈론의 뒤를 따라 아스카의 앞까지 이동했다.
마벨은 팔 하나를 잃었다.
다른 자잘한 부상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 눈에 들어오는 건 그 정도였다.
로크는 의식이 없었으나 숨은 붙어 있었다.
팔이 부러진 것이나 근처에 망가져 있던 대검으로 봐서 폭발의 순간 대검을 방패 대신 써먹었던 모양이다.
아이투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대검에는 아무런 장비 정보가 떠오르지 않았다.
장비로 취급받지 못할 정도의 고물이 되었단 소리였다.
그러나 제 주인을 지켰으니 그 가치는 충분히 다한 셈이다.
루시우스도 팔이 부러지기는 했으나 살아 있었다.
‘제일 걱정되는 건 릴리아나 경인데.’
몸을 지켜내는 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릴리아나였다.
장비도 활동성에 초점을 맞춰서 그렇게 단단한 편도 아니고 방패나 방패 대용으로 쓸 만한 장비도 없다.
그러나 기우였다.
릴리아나는 아인츠발트와 더불어 가장 멀쩡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건 절대 행운 따위가 아니었다.
“빅터.”
릴리아나가 빅터를 끌어안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신체가 뜯긴 것도 아닌데 빅터는 피투성이였다.
전신의 피부가 뜯기고 혈관이 터져서 피범벅이 되어있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빅터는 죽었다.
하다못해 충격을 흘려내기라도 했어야지.
미련하게 제자리에서 그 충격을 모두 받아냈던 모양이다.
그걸 끝내 성공해 냈다는 점에서 과연 빅터다웠지만.
‘로크나 루시우스는 경과를 봐야 할 테고 마벨은 팔을 잃었다. 그리고 모르타르와 빅터는 사망.’
릴리아나라도 무사해서 다행이라고, 그렇게 생각해야 할까?
“전하, 그랜트 경을 확인했습니다.”
가만히 빅터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탈론이 다가왔다.
아, 그랜트도 있었지.
비록 로스니아 제국 출신이라고 하지만 무려 5티어나 되는 영웅인데 한순간 잊고 말았다.
나답지 않은 실수였다.
이 상황이 나에게도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랜트 경의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제대로 회복할 수 있을지는……. 전하?”
보고를 올리던 탈론이 당황하며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그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내 얼굴이 어떤 상태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탈론은 차라리 나보다 나은 사람이었다.
모르타르의 죽음에도 꾹 참고 감정을 억누르는 데 성공했으니까.
“못 본 척 하겠습니다.”
탈론은 아무 말 없이 내 옆자리를 지켰다.
우리의 승전이었다.
* * *
쿠웅!
철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베이브는 흐릿한 의식 속에서 성큼성큼 다가오는 다니엘의 발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마 지금쯤이라면 아스카가 이 네패스 왕국에 도착했을 터.
어떤 식으로든지 결판이 난 게 분명했다.
‘어떻게 된 거지?’
아스카가 이겼다면 아마 다니엘이 지금 들어오는 이유는 자신을 죽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스카가 졌다면?
‘그럴 리 없다.’
베이브는 자신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를 아인에게 패배하면서 느꼈다.
인간이란 존재는 끔찍할 정도로 욕망을 따르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 집착의 깊이는 고작 복수에 연연하는 자신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스카는 다르다.
범차원 세력인 가이스트가 직접 선택했을 정도로 아스카는 특별한 존재였다.
타르타로스의 계약자인 아인 네패스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무한한 마나를 갖고 불사까지 갖춘 아스카를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자신을 죽이지 않고 끈질기게 고문하는 이유도 아스카를 죽일 방법을 찾기 위해서였으니까.
‘아스카가 이겼을 거야.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고통에서 해방되겠군.’
베이브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다니엘을 보았다.
비록 자신의 손으로 복수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결과는 똑같았다.
아스카가 승리했다면 이후 인류의 미래는 안 봐도 뻔한 일.
아스카는 군주가 되기 위해서 전 대륙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다.
그리고 인류의 피 위에서 승리를 쟁취할 것이다.
비록 그 광경을 자신이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베이브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크큭. 아인 네패스는 어떻게 됐…….”
쩌억!
베이브가 다니엘을 비웃으려고 할 때였다.
다니엘은 냅다 주먹을 들어 베이브를 후려쳤다.
효과적인 고문 방법은 아니었다.
상대가 고통이나 공포에 무지하다면 그저 마구 때리는 것만으로도 살고 싶어서 어떤 말이든 내뱉겠지만 베이브는 그런 상대가 아니었다.
한참을 이어진 전문적인 고문을 견딘 놈이었다.
다니엘의 인생을 통틀어 이렇게까지 입을 열기 어려운 상대가 없었을 정도였다.
게다가 다니엘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암살자 출신 기사나 독특한 고문법을 가진 아인츠발트가 나섰고, 아인이 지속적으로 치료를 하면서 압박까지 줬다.
그러나 베이브는 무너지지 않았다.
녀석의 마음 한쪽에서는 아스카가 나서서 자신들을 쓰러트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니엘은 지금 그 확신을 무너트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서도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네놈 입을 열기 위해서 난 전장으로 나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기사들과 많은 합을 맞춰왔으나 다니엘은 기사로서는 부족했다.
기사들끼리의 연계에 암살자가 끼어봐야 괜히 빈틈을 내줄지도 모른다.
게다가 다니엘이 주력으로 쓰는 전투 방법 대부분이 마족을 상대로는 효과가 떨어졌다.
암살자는 인간을 죽이는 데 특화된 이들이지 마족과의 싸움에는 익숙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결국 네놈 입을 여는 건 실패했지.”
하지만 이런 냉정한 판단으로 내려진 결정이라 할지라도 다니엘은 지금 상황에 대해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
사망자가 나왔다.
물론 상대가 마족이고 그중에서도 아스카라는 특별한 개체라는 걸 고려하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사망자가 자신이 기사가 된 이후로 친분을 쌓아온 이들이라는 점에서 다니엘은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자신이 베이브의 입을 여는 데 성공했다면 조금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좀 더 쉽게 아스카를 무력화할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아인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지인들의 죽음은 다니엘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이 폭력은 그런 감정을 담은 분풀이였다.
“목숨이 위험한 전장에 동료들만 보내고 혼자 안전한 곳에 남은 거야.”
마음 같아서는 아예 이대로 때려죽이고 싶었다.
그러나 다니엘은 곧 손을 거둬야만 했다.
아직 베이브에게서 정보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크큭. 그래서?”
“아스카는 졌다.”
“뭐?”
“당연한 결과지.”
다니엘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어떤 싸움이든 패배할 수 있다.
아스카 같은 상식 외의 존재라면 오히려 패배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자신들에게는 아인츠발트라는 걸출한 검사가 있었고 최고의 장인이 만들어 준 품질 좋은 장비도 있었다.
거기에 결정적으로 아인이라는 영웅이 있었다.
그렇기에 다니엘은 승리 자체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죽지는 않았지.”
다니엘은 베이브를 향해 속삭였다.
“하지만 너도 죽지 못하는 꼴인 건 똑같다.”
이전까지 다니엘은 베이브가 입을 열면 편히 죽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아스카가 무력화된 이상 베이브의 가치는 오직 정보뿐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제 베이브가 입을 연다고 해서 편안한 죽음을 내려줄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네놈의 몸이 늙고 병들어 썩어 문드러질 테까지. 이곳에서 10년이고 100년이고 영원히 고통받게 될 거야.”
다니엘의 경고에 베이브는 눈을 부릅떴다.
아스카의 패배를 상정하지 못했기에 이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죽을 기회를 놓친 걸 평생 후회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