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10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10화
210화
* * *
‘아인츠발트를 빼냈나?’
아스카는 안개 너머를 노려보며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불러낸 안개였으나 아스카 또한 안개 내부의 상황을 정확히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조종하고 있는 구울들이 엄청난 속도로 줄어든다는 건 확인이 가능했다.
이 짙은 안개 속에서 그런 일이 가능한 존재는 아인츠발트뿐이었고.
‘아인츠발트의 실력이라면 잠깐 사이에 구울들을 다 처치할 수는 있겠지.’
절대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아인츠발트가 아닌 다른 기사들이 나선다면 안개 속에서 습격하는 구울에게 피해를 볼 가능성이 크니까.
최소한의 손실로 최대의 성과를 거두려면 분명 이 상황에서는 아인츠발트를 움직이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했다.
바로 아인츠발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수장인 아인이 제 몸을 지킬 능력이 있어야 된다는 것.
아스카로서는 아인츠발트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저 아인츠발트의 능력에 기댄 거라면 잘못된 선택이다.’
아스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분명 아인츠발트의 무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아스카 역시 아무 생각도 없이 구울들을 모은 게 아니었다.
저 구울들은 모두 아인츠발트를 상대하기 위해서 준비한 거였으니까.
“실수를 저질렀군.”
아스카는 안개 안으로 발을 디뎠다.
마나 실드는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안개 속에서는 자신을 찾아서 화살을 날리지 못할 것이니까.
괜히 자신의 위치를 노출할 필요는 없었다.
‘마법을 안 쓰고 숨어 있을 생각인가?’
아인을 비롯해 마법사들 모두가 마법을 쓰지 않은 채 마나를 숨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아스카는 직접 안개 속을 헤집고 다녔고 곧 기사 한 명과 마주쳤다.
“마, 마족이다!”
기사는 당황하며 검을 뽑았다.
이 자리에 모인 기사치고는 어딘가 어설퍼 보이는 자세를 취하는 상대였다.
아스카는 그런 기사를 향해 대수롭지 않게 손을 뻗었다.
굳이 마법을 쓰지 않더라도 어지간한 기사 정도는 맨손으로 죽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 순간 기사는 언제 어설픈 모습을 보였냐는 듯 한순간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콰아앙!
재빨리 마나 실드를 펼친 아스카는 기사를 향해서 눈을 흘겼다.
벽을 넘은 상대는 쉽게 알아보지만, 이 기사는 아직 벽을 넘은 정도가 아니었다.
그래서 잠깐 착각했으나 이 기사는 상당한 실력자였다.
그것도 일부러 어설픈 모습을 보였다가 상대를 단숨에 찌를 정도로 싸움에 능숙했다.
“칫!”
아인에게 제대로 접근하기 전부터 위치가 발각된 아스카는 인상을 찡그렸다.
크게 소리치는 것과 마나의 흐름으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화르르륵!
역시나 곳곳에서 아스카를 노리고 마법이 날아들었다.
위치를 숨기는 데 실패한 아스카는 마나 실드를 두르고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최대한 조용히 접근해서 아인의 위치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들킨 이상 그럴 여유는 없었다.
“이쪽이다! 여기에 마족이 있다!”
“전하께 향한다! 어서 막아!”
아스카의 움직임을 확인한 기사들이 사방에서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스카가 신경 쓴 건 안개에서 튀어나오는 날붙이 따위가 아니었다.
아무리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공격이 날아와도 자신의 마나 실드를 부수지 못한다면 위협이 될 수 없었으니.
대신 아스카는 어느 기사가 소리친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실수인가? 아니면 기만책인가?’
의도였는지 아닌지 기사는 아스카가 움직이는 방향이 아인이 있는 방향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인 특유의 마나 흐름을 포착하지 못한 이상 확신할 수는 없었다.
지금껏 아스카가 파악한 아인은 상대를 속이는 것에 능했으니까.
휘하의 기사라고 해서 그러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일단 가보는 수밖에.’
아스카는 이 방향이 맞으면 분명 아인의 곁을 지키는 실력자들이 나오리라고 예측했다.
콰아앙!
그때 묵직한 충격이 마나 실드를 뒤흔들었다.
근위 기사단장인 로크였다.
안개를 펼치기 전 아인의 곁에 바짝 붙어있던 로크의 모습을 떠올린 아스카는 눈을 빛냈다.
바로 곁에 있던 기사가 이 자리에 있으니 아인 역시 근처에 있을 게 분명했다.
“여기구나!”
콰아앙!
그 순간 아스카는 사방을 향해 돌풍을 내뿜었다.
짙은 안개가 순식간에 흩어지며 주변의 풍경을 드러냈다.
“찾았다!”
아인은 당황한 얼굴을 한 채 불과 수십 미터 뒤에 서 있었다.
“크윽!”
아인의 위치가 발각되자 로크는 다급하게 대검을 휘둘렀다.
마나 실드에 막혀 닿지 않던 공격은 아인의 위치가 발견되자마자 상황이 변했다.
순식간에 아스카의 마나 실드를 잘라내며 위협적인 일격을 가했다.
아인이 사용한 마나 웨폰의 영향이었다.
아스카는 하는 수 없이 로크의 공격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타악!
아스카가 뒷걸음질하기 무섭게 로크는 힘껏 발을 디뎌 앞으로 내달렸다.
아스카에게 거리를 주면 아인을 노리고 공격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몰아붙이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멍청하기는!’
아스카는 그런 로크의 행동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분명 아인을 바로 공격하기는 어려웠으나 이렇게 무리한 공격은 로크 자신의 빈틈을 드러내는 일이기도 했다.
자신이 그저 마법에만 능통한 마족이라면 모를까 육체 능력 역시 어지간한 마족과는 비교할 수 없음을 고려하면 이는 자살행위였다.
쐐액!
아스카는 로크의 빈틈을 노리고 손을 뻗었다.
갑옷이든 투구든 상관없이 그대로 로크를 짓이겨 버릴 심산이었다.
콰아앙!
그러나 아스카의 공격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아슬아슬한 타이밍에 날아든 탈론의 화살이 아스카를 방해했다.
무시하고 공격했다가는 그대로 팔이 뜯겨 나갈 상황이라 아스카는 마지못해 팔을 빼내고 한 걸음 더 물러났다.
‘저 활잡이가 문제로군.’
아스카는 힐끔 탈론을 보았다.
아까 프로반 백작의 구울을 저격할 때도 느꼈지만 화살에 담긴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말이 화살이지 거의 공성추가 날아드는 것 같은 위력이었다.
‘단순히 힘이 센 게 아니다. 저 힘을 그대로 담아서 쏘아내는 활의 장력, 거기에 마치 미래라도 보는 것처럼 정확한 타이밍에 원하는 지점으로 활을 날리는 기량.’
아스카는 탈론의 활 솜씨에 감탄했다.
근력이나 정확성도 대단하지만, 특히 놀라운 건 허를 찌르는 타이밍이었다.
경지에 이른 실력자들의 싸움은 찰나에 결판이 나는 경우가 많아서 활로 타이밍을 맞추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신체 능력을 떠나서 고도로 예민한 직감과 싸움의 흐름을 읽는 눈이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벽을 앞두고 있구나.”
생명체로선 거의 한계에 도달한 강함이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이런 실력자가 탈론만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이었다.
로크와 탈론이 시간을 번 사이에 여러 기사가 달려들어 아스카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아스카는 그중에서 두 명의 기사를 살폈다.
그랜트와 릴리아나였다.
‘한쪽은 그나마 아직 좀 부족해 보이는데…….’
아스카는 그랜트를 보았다.
인간으로서는 과거 영웅들과 비견할 만큼 훌륭한 솜씨지만 아직은 벽에 도달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저 시간의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재능이 부족해 끝내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릴리아나는 달랐다.
‘이건 넘은 건지 못 넘은 건지 헷갈리는데?’
휘리릭!
릴리아나의 검이 화려하게 움직였다.
분명히 왼쪽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는데 릴리아나의 검은 어느새 오른쪽을 공격하고 있었다.
어차피 마나 실드는 모든 방면을 보호해 주기에 어디를 공격해도 차이는 없으나 바로 눈앞에서 이런 상황이 펼쳐지는 건 아스카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독특한 검술이군. 아인츠발트조차 이런 검술을 쓰는 걸 본 적은 없는데.’
아인츠발트는 뛰어난 검사이며 기교 역시 비할 상대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인츠발트가 기술을 중시하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었다.
아인츠발트에겐 검술을 겨룰 만한 상대를 만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력을 다해서 싸울 만한 유일한 상대는 아스카였고 그마저 마법이 주력이었다.
그렇기에 아인츠발트의 검술은 자신보다 약한 적들을 압도할 수 있도록 힘과 속도로 찍어 누르는 성향이 강했다.
‘본래라면 그저 눈속임일 뿐인데…….’
기술이 통용되는 건 어디까지나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싸울 때의 일.
근접전에서도 뚫리지 않는 마나 실드를 펼칠 수 있는 아스카를 상대로 기교를 중점으로 한 릴리아나의 검술은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단독으로 싸울 때 그렇다는 것이지 이렇게 일 대 다수의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우웅!
아인이 마법을 부여하자 릴리아나의 검에서 옅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순간 아스카의 마나 실드가 쩍 갈라지며 빈틈을 드러냈다.
콰아아앙!
탈론의 화살은 그런 빈틈을 놓치는 법이 없었다.
다른 기사들이 아스카가 움직일 경로를 몸으로 틀어막고 있었기에 아스카는 물러나지 못한 채 날아오는 화살을 받아내야 했다.
“마족을 상대하는 것에 익숙해 보이는군.”
아스카는 솔직하게 감탄했다.
아인과 부하들의 연계는 매우 훌륭했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이 조합을 상대로는 순식간에 송장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야.”
아스카는 아인과 다른 이들이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상대하는지 알고 있었다.
언뜻 몰아붙이는 듯하지만 사실은 아스카가 여유롭게 상대해 주고 있을 뿐이다.
저들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테니 아인츠발트가 최대한 빠르게 구울을 처치하고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불가능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는 건 아스카 쪽이었으니까.
물론 아스카의 기다림은 아인츠발트를 향한 게 아니었다.
‘아인츠발트는 강하다.’
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절대적인 믿음이 도리어 아인츠발트를 위험에 빠트릴 순간.
아스카는 바로 그때를 기다렸다.
* * *
콰콰콰쾅!
진심으로 싸우는 아인츠발트의 검격은 재해나 다름없었다.
안개에 숨어 있는 구울을 굳이 하나하나 찾아낼 필요 없이 아인츠발트는 일대를 통째로 뒤집어 버리고 있었다.
그 과정에 휘말린 수십 마리의 구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절단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시간이 없다.’
그러나 아인츠발트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했다.
지금 그는 시간에 쫓기고 있으니까.
아인이나 다른 이들만으로 아스카를 상대하는 건 결코 불가능했기에 자신이 최대한 빠르게 구울을 정리하고 합류해야만 했다.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구울은 공포를 잘 모르기에 아인츠발트의 압도적인 무력에도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놈들은 겁 없이 안개를 뚫고 흉흉한 안광을 번쩍이며 아인츠발트를 향해 달려들었다.
촤악!
물론 어떤 구울도 아인츠발트에게 상처를 입히는 건 불가능했다.
대부분의 구울이 제대로 접근하기도 전에 안개 너머에서 날아드는 칼날 아래에 무너졌다.
그렇게 구울의 정리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음?”
아인츠발트는 구울의 역한 냄새 너머에 섞여 있는 묘한 냄새를 뒤늦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게 무슨 냄새지?’
낯선 냄새에 의문을 표하기도 잠시.
갑자기 주변이 시뻘건 불길에 사로잡혔다.
아인츠발트는 검을 휘둘러 주변의 안개를 걷어냈다.
안개 너머에 숨어 있던 구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덴스…….”
상대는 아인츠발트가 아는 얼굴이었다.
로스니아 제국에서 잠깐 머물던 동안 얼굴을 익힐 기회가 있었던 마법사 안덴스.
그가 구울이 된 채 마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애초에 로스니아 제국에 갔던 일 자체가 마족들을 유인해 내기 위한 것이었기에 아인츠발트는 그들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물며 이렇게 구울로 변한 모습을 직접 마주하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미안합니다.”
그러나 아인츠발트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 일을 받아들인 건 전적으로 자신이었으니까.
이 세계의 인간들이 아무리 번영했어도 부활한 아스카의 능력은 과거보다도 월등했다.
아무리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운다고 한들 인류의 패배는 정해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유일하게 변수를 생각해 볼 수 있다면 타르타로스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세력과 계약한 존재인 아인뿐.
그렇기에 아인츠발트는 기꺼이 아인의 명령에 따라 로스니아 제국을 미끼로 삼았다.
“이만 편히 쉬십시오.”
아인츠발트가 안덴스를 향해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였다.
안덴스가 먼저 준비된 불길을 쏘아냈다.
아인츠발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신의 검술이라면 날아드는 불길을 통째로 갈라버리는 게 얼마든지 가능했기 때문이다.
번쩍!
그러나 그런 아인츠발트의 생각은 이내 바뀌고 말았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안덴스가 쏜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 비밀은 로스니아 제국이 아스카를 상대할 때 사용한 신형 화약이었다.
아스카가 그러했듯 아인츠발트 역시 화약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런 게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으나 화약을 직접 육안으로 확인하거나 냄새를 맡아본 일은 없었다.
‘이런…….’
순식간에 자신을 덮치는 거대한 불길에 아인츠발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콰콰콰쾅!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굉음과 함께 일대가 활활 타오르는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