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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208화 (208/250)

VVIP 영주님의 품격 208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08화

208화

【 마족 아스카 】

로스니아 제국과 네패스 왕국 사이에는 망령의 협곡이라고 불리는 험지가 있었다.

이름부터 불길한 이 협곡은 사람을 날릴 정도로 거센 돌풍이 불어 지나던 이들을 낭떠러지로 추락시키기로 유명했다.

네패스 왕국의 기사 폴은 그런 협곡에서 이틀째 몸을 숨긴 채 매복 중이었다.

그는 자신이 굳이 이 험지에서 대기해야 하는 이유를 떠올렸다.

로스니아 제국에 나타난 마족 아스카.

녀석은 단신으로 제국군 40만을 학살하는 터무니없는 무력으로 인류 역사상 최악의 마족이 되고 말았다.

이후 녀석이 어디로 향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로스니아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네패스 왕국으로서는 놈을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폴을 비롯해 정찰에 능한 이들은 제국에서 오는 길목에 흩어져 아스카를 감시하는 중이었다.

‘부디 내 쪽으로는 지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자신의 담당 구역이 망령의 협곡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 폴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이 망령의 협곡은 로스니아 제국과 통하는 가장 빠른 길이었기 때문이다.

어설픈 자들이라면 절대 통과하지 않을 험지였으나 마족의 실력을 생각한다면 굳이 협곡을 피해 갈 이유는 없었다.

‘내일 새벽까지만 마주치지 않으면 될 거 같은데.’

폴은 아스카가 확인된 장소로부터 협곡 사이의 거리를 헤아렸다.

그가 계산해 봤을 때 내일 새벽까지만 마족이 이 길로 지나지 않으면, 마족이 이 협곡을 가로지를 가능성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크고 강하다고 알려진 마족이 보통 사람보다도 느린 속도로 움직일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아예 올 생각이 없는 거라면 모를까 만약 아스카가 네패스 왕국을 목표로 한다면 반드시 내일 새벽 전까지는 이 협곡을 지나야만 했다.

콰아아아!

그때 거센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런 조짐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친 돌풍이었다.

폴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젠장.”

이곳이 망령의 협곡이라 이름 붙여진 이유는 그저 바람이 강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바람이 불 때 들리는 소리가 마치 유령이 부르는 것 같다 해서 망령의 협곡이었다.

실제로 여기에서 부는 바람은 다른 장소에서 느끼던 것과 달리 거칠고 불길했다.

‘차라리 진흙탕이나 벌레가 가득한 숲속이 나을 지경이야.’

폴도 처음에는 그저 바람 소리가 특이하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망령의 협곡이라는 이름 때문인지 불길한 소문 때문인지, 소리에 익숙해질수록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협곡에서 사고를 당한 자들이 자신을 길동무로 삼기 위해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정신 차리자. 내일 새벽까지만 버티면 돼. 나도 인생 좀 펴야지?’

폴은 한때 몬스터 사냥꾼 일을 하던 평민 출신의 기사였다.

물론 네패스 왕국은 철저하게 실력 위주로 인재를 평가하는 아인 덕분에 출신으로 인한 차별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그러나 따로 차별을 받지 않더라도 사냥꾼 출신 기사가 공을 세워 승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사로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검술이나 예절, 기마술 등이 여타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크게 뒤처지기 때문이다.

이런 분야는 절대 단시일에 숙달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온 이들에게 진급 기회가 밀려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폴은 거기에 대해 억울하단 말도 할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 같은 녀석이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엄청난 기회였으니까.

그리고 그가 봐도 기사로서의 능력이 남들보다 부족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임무는 폴에게 매우 중요했다.

많은 이들이 접근조차 꺼리는 망령의 협곡에서 매복하는 이 임무는 실적으로서 무척이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폴이 망령의 협곡에 배치된 이유는 사냥꾼 출신이란 점을 상부에서 높이 평가한 덕분이었다.

‘힘든 임무지만 성공하면 평가가 좋아지겠지. 진급에도 도움이 될 거야.’

아무리 기본이 부족하더라도 공을 세운 이를 홀대할 수는 없다.

폴은 그 하나만을 굳게 믿으며 불길한 망령의 속삭임 따위에 넘어가지 않도록 마음을 잡았다.

타각!

그런데 그때 길바닥을 구르는 돌멩이 소리가 들려왔다.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은 채 몸을 숨기고 있던 폴은 그 소음에 흠칫 놀랐다.

‘뭔가가 있어?’

바람에 돌멩이가 날아왔을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폴은 그게 흔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매복하고 있는 곳은 협곡의 지형상 바람이 영향을 거의 주지 못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돌멩이 소리가 묻히지 않고 들린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어지간히 근접하지 않고서야 먼 곳에서 나는 소리는 모두 바람에 묻혀버리는 게 망령의 협곡이었으니까.

‘젠장! 설마 마족은 아니겠지?’

폴은 설마 자신이 그렇게 운이 없을까 걱정하며 매복해 둔 공간의 틈으로 밖을 살폈다.

폴이 숨어 있는 장소는 지형이 안쪽으로 들어가 바람이 침범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여기에는 바위와 바위 사이의 작은 틈이 있었는데 주변의 경치를 한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위치가 좋았다.

‘뭐야?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그 틈 사이로 밖을 살핀 폴은 당황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상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틈 너머로 보여야 할 주변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새까만 어둠만이 자리해 있었다.

‘대체 뭐지? 뭔가 이물질이라도 끼었나?’

폴이 틈 사이에 이물질이 끼었나 의심할 때 갑자기 어둠이 움직였다.

콰작!

폴을 가리고 있던 바위가 산산조각이 나며 마족의 팔이 튀어나왔다.

“커억!”

폴은 그 팔에 목을 붙잡힌 채 버둥거렸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제대로 반응할 틈조차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폴은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치며 자신의 불운을 저주했다.

마족이었다.

아마 아스카일 거라고 추정되는 마족이 그를 움켜쥐었다.

“철저하군.”

아스카는 폴의 갑옷 한쪽에 새겨진 문장을 확인했다.

네패스 왕국의 문장.

로스니아 제국을 무너트린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중간 지점에 기사를 배치해 두었다.

그 철두철미함에 아스카는 혀를 내둘렀다.

‘이미 나를 상대할 준비도 갖추었겠지.’

이렇게 중간 지점에 눈을 심어둘 정도라면 당연히 습격에 대한 대비 역시 되어 있을 것이다.

‘하긴 먼저 로스니아 제국을 습격하도록 유도하고 그 틈을 노려서 마족들을 소탕해 버릴 정도로 치밀한 상대니까. 이 정도는 기본이겠지.’

아스카는 아인이 어떤 유형의 인간인지 이제야 감이 잡힐 거 같았다.

처음에는 베이브에게 들었던 뛰어난 마법사라는 정보에 주목했지만 아인의 진면목은 마법사로서의 능력이 아니었다.

승리를 앞두고 기고만장해졌을 타이밍에도 잃지 않는 철두철미함.

무력보다 지력을 주로 쓰는 유형이었다.

“끄아아!”

아스카가 아인에 대해 추측할 때, 손에 붙들린 폴이 괴성과 함께 몸을 움직였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아스카를 노렸다.

우드득!

그러나 아스카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아스카는 그대로 힘을 주어 폴의 목을 비틀어 버렸다.

풀썩!

절명한 폴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스카는 그런 폴의 시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원통한 죽음에서 깨어나라.”

핏빛의 마나가 일렁이며 폴의 몸으로 흘러 들어갔다.

꿈틀!

마나를 주입받은 폴의 몸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고통으로 일그러졌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지고 생기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대가로 폴의 몸은 죽음에서 깨어나 움직일 수 있었다.

“자, 너도 함께 가자.”

아스카의 말에 구울로 되살아난 폴이 눈을 빛냈다.

그런 폴의 뒤로 수백의 구울이 뒤를 따르고 있었다.

* * *

나와 영웅들은 왕궁을 비움과 함께 국경까지 이동한 채 아스카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스카가 로스니아 제국에서 바로 이곳으로 오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러나 구태여 돌아갈 이유도 없었기에 주변에 사람을 풀어 움직임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중이었다.

“국왕 전하.”

각 지역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확인하던 협회의 원로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직감적으로 아스카가 나타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위치는?”

“망령의 협곡입니다.”

마법사는 귀중한 인력이고 마법을 사용하면 예민한 아스카에게 바로 발견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번 매복에는 철저하게 실력 있는 기사들만을 선별했다.

물론 기사들만 배치하면 연락을 주고받기가 어려워지지만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이 이번에 새로 개발되었다.

대상의 신체 일부를 보주에 각인해서 살아 있으면 빛이 나고 죽으면 빛이 꺼지는 방식이었다.

베이브를 비롯한 마족들도 이 마법을 사용하는지 마족들의 아지트에서 불이 꺼진 보주가 다수 발견되기도 했었다.

‘기사는 죽었나 보군.’

하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이 마법의 효과로 보주의 빛이 꺼졌다면 기사가 죽었다는 소리니까.

실제로 죽을 걸 알고서 보낸 거라지만 절대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베이브의 입을 여는 건 아직인가?”

“송구합니다.”

최강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인츠발트는 이곳에 있지만, 다니엘은 베이브에 대한 고문을 계속 이어가고 있었다.

아스카의 불사를 깰 방법을 알고 있을 존재는 베이브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이브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다른 마족들이 고문을 제대로 견디지 못했던 것과는 상반된 상황.

녀석은 우리가 아스카에게 무너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악착같이 버티고 있었다.

‘당장 방법을 모르더라도 대처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최악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고대에 그랬던 것처럼 아인츠발트와 함께 다시 봉인하는 방법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인츠발트를 잃어야 하지만 아스카라는 최악의 난적을 상대로는 충분히 감수할 만한 행동이었다.

훗날 군주가 되었을 때 아스카를 죽일 방법을 알게 될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래서야 깔끔한 결판은 무리겠어.’

이대로는 이기더라도 지저분한 결말이 나온다.

다른 국가와의 전쟁에서 아인츠발트를 쓰지도 못할 테고.

“알았다. 모두 준비하도록.”

내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기사단이 몸을 움직였다.

마족들의 아지트를 공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예를 추리고 추린 인원 100명.

기사들도 왕국 내 최고 실력자였고 마법사들 역시 협회의 원로들이나 지부장을 포함한 최정예였다.

뭐, 여기까지는 로스니아 제국도 어느 정도 근접하게 준비했겠지만 그들과 우리 왕국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바로 정면에서 아스카를 맞상대할 아인츠발트의 존재.

일대일로는 승산이 없지만 지원을 등에 업는다면 절대 쉽게 당하지 않으리란 걸 로스니아 제국에서의 싸움으로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국왕 전하.”

생각을 거듭하는데 로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마족 녀석이 국왕 전하를 최우선으로 노릴 수 있음을 명심해 주십시오.”

근위 기사단장으로서 내 안위를 신경 쓰는 건 당연하지만 이번에는 특히 긴장한 모습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로스니아 제국을 초토화시켰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상황이니까.

단신으로 수천을 상대하는 건 5티어 전투형 영웅에게도 불가능한 영역의 일.

그런데 아스카는 이번에 무려 40만을 학살했다.

민간인을 그렇게 죽여도 충격적일 텐데 제국군을 휩쓸었으니 솔직히 나도 무서웠다.

그런데도 아스카와의 싸움을 피하려고 하지 않는 건 애초에 이 싸움을 피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목적도 녀석의 목적도 군주가 되는 것이니까.

사이좋게 손잡고 함께 군주가 된다는 결말이 가능한 게 아닌 이상 둘 중 하나는 사라져야 했다.

“근위 기사단장을 믿지.”

긴장을 풀라는 의미로 로크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동을 재촉했다.

망령의 협곡에서 빠져나올 아스카와 길이 엇갈리기라도 하면 낭패기 때문이다.

최정예를 이쪽으로 빼냈기에 현재 네패스 왕국에는 아스카를 상대로 시간 벌이가 가능한 수준의 실력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측근을 빼고는 애초에 그런 실력자도 없지만.

‘건곤일척이다.’

뒤를 생각할 여유는 없다.

로스니아 제국도 그렇게 당했는데 아무리 우리에게 아인츠발트가 있다지만 승리를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

어쩌면 내가 패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벌어져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지.”

망령의 협곡이 보일 정도로 가까이 접근했을 때 나는 서둘러 정지를 명령했다.

아직 아스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존재는 분명하게 느껴졌다.

‘딱히 숨길 생각도 없다는 건가?’

협곡 너머에서 울렁거리는 핏빛의 마나.

무슨 마법을 쓰고 있는지 아스카의 존재가 선명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하! 뭐 저딴…….”

자신의 위치를 일부러 드러내고 있는 행동을 알아차린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자크론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 아스카란 마족은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구나.”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요.”

자크론의 말대로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타르타로스의 계약자인 내 존재를 두려워하던 녀석이 갑자기 방심할 리가 없으니.

이건 방심이 아니라 도발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아스카를 상대해 온 방법이 직접 나타나지 않은 상태로 마족들만 처리하는 쪽이었으니까.

이번에는 숨지 말고 나오라는 의미로 일부러 자신의 마나를 드러내는 게 분명했다.

‘오히려 방심하지 않고 제대로 싸우겠다는 거겠지.’

로스니아 제국에 내가 없다는 걸 알았다면 도중에 전투를 멈추고 나오는 것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스카는 굳이 로스니아 제국의 군대를 모두 쓰러트렸다.

자신에게 저항할 여지를 남겨둘 생각은 없다는 의미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만큼 녀석도 진심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눈앞에 수백의 구울들과 함께 아스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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