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20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205화
205화
【 제국과 마족 】
원로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자크론이 협회에 복귀하는 일은 없었다.
나도 농담 삼아서 꺼낸 말이었고 자크론도 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복귀해 봐야 원로들이랑 드잡이질밖에 더 하겠냐며 내 제안을 거부했다.
“그렇기야 하죠.”
나 역시 자크론의 말에 수긍했다.
어차피 아쉬울 것도 없고.
협회 역사에 내 스승으로 기록되지는 못해도 왕국 역사나 귀족 명부에는 자크론의 이름이 계속 남아 있을 테니까.
“뭐, 듣기에 나쁘지는 않구나.”
자크론은 원로들이 내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지 기대된다며 좋아했다.
이렇게 스승님 챙겨주는 제자가 어디 있을까?
“음. 그러고 보니 넌 후계자 소식 없냐?”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나 했는데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이 질문에는 자크론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측근들 모두가 크게 반응했다.
다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지만 은근히 신경이 나에게 집중되었다는 게 느껴졌다.
“아이가 들어설 때가 지난 것 같은데. 혹시 부부 사이에 문제라도?”
“그런 거 없습니다.”
첩 이야기를 잘못 꺼냈다가 혼난 적은 있지만, 레일리와의 관계는 여전히 잘 유지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아이 소식이 없는 건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나라 저 나라를 돌아다니며 왕궁에 붙어 있는 일이 드물고 기껏 돌아와도 처리해야 할 업무가 한가득인데.
아무리 6티어 마법사라도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내 일 처리 능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지만 어렸을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내정형 영웅들과 글을 읽고 쓰는 게 전부인 내 업무능력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네일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는 있지만 내정형 영웅으로서 나는 1티어조차 장담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왕국의 일을 아랫사람에게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게 부족한 부분이 보인다면 어떻게든 이용해 먹을 생각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몇 차례 있기도 했다.
마법사로서나 지휘관으로서는 나름대로 능력을 보여왔지만 내정은 그것과 다른 일이니까.
서류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내 눈을 가리거나 엉뚱하게 돈을 빼다가 제 잇속을 챙기려는 시도는 지겨울 정도로 있었다.
대부분은 네일의 선에서 정리가 되었지만 여기에도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네일을 속일 수 없다면 그를 회유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와 관련해 네일과 접촉하려 한 귀족들이 제법 있었다.
네일은 꽤 충성스럽게 그런 귀족들에 대한 정보를 알려줬지만 이마저 결국에는 그의 권력을 강화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콘라드 후작으로부터 인재들을 지원받았을 때 무척이나 기뻤다.
네일의 권력을 분산시켜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일은 이런 내 생각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일이 줄어든다며 오히려 기쁘게 받아들였다.
만약 당시 네일이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면 실제로 그는 짙은 의혹을 받았을 것이다.
‘알고도 그랬든, 모르고 그랬든 적어도 네일이 나를 신경 쓴다는 건 확인했지.’
네일의 선택은 옳았다.
덕분에 나에게서 더 큰 신뢰를 얻어 갔고 왕국의 기밀에 가장 접근해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행동해 준다면 사실 푼돈 얼마 정도는 눈감아주지 못할 것도 없고.
네일이 실제로 그런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쯧쯧쯧. 아직 새파랗게 젊은 놈이. 게다가 신혼이라면 막 그런 거 있지 않느냐?”
“결혼도 못 하셨던 분께서.”
자크론이 혀를 차며 나를 찌르자 나도 그대로 받아쳐 주었다.
스승이라고 봐주는 건 없다.
* * *
로스니아 제국은 비상사태였다.
동부 국경에 나타난 마족들의 침공은 끝내 국경을 무너트리고 많은 사상자를 만들었다.
다행히 마족들이 더 이상 공격을 이어나가지 않고 사라졌기에 민간인의 희생은 없었으나 희생된 장병의 숫자는 족히 수만에 달했다.
게다가 제국의 이름 있는 기사나 마법사들이 무더기로 죽음을 당했다.
특히 마법사의 피해가 컸다.
국경의 책임자였던 프로반 백작과 반역을 저지르고 작위를 뺏겼다지만 실력은 여전했던 안덴스가 사망했다.
그러나 이 충격은 슬픔보다는 분노를 일으켰다.
어차피 과거 전쟁에서 패배한 마족에 대한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방비가 잘되어 있던 동부의 국경을 무너트렸다고 해도 이런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제국군의 상당수는 반역자들의 토벌 문제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기 때문이다.
제국에서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은 프로반 백작의 원수를 갚겠다며 네르바의 호출에 응해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 숫자가 자그마치 40만이었다.
카시안 공작이 반제국 동맹을 공격할 때와 비슷한 규모의 병력이 모이자 사기 역시 크게 고양되었다.
그때는 반제국 동맹의 4개국을 나눠서 침공했기에 병력이 나뉘었지만, 이번 병력은 마족을 상대한다는 하나의 목적만 갖고 있었다.
마족이 받게 될 압박이 클 건 당연했다.
그러나 네르바는 이런 상황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던 자작.”
네르바의 부름에 제던 자작은 몸을 바싹 낮추었다.
네르바는 제던 자작을 믿고 지원군을 보냈으나 결국 지원군은 마족들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그런 주제에 뻔뻔하게 살아서 돌아왔으니 제던 자작은 죄인과 다름없는 처지였다.
“황태자 전하! 명령을 이행하지 못한 저를 벌하여 주시옵소서!”
“그딴 말이나 듣자고 자작을 이리로 불러온 줄 아는가?”
네르바의 살벌한 목소리에 제던 자작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황태자가 이렇게 감정의 동요를 보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인츠발트에 대해서는 확인했나?”
“그는 전투 도중에 갑자기 사라졌다고 합니다.”
“사라져? 도망쳤다는 건가?”
“그렇긴 하지만 조금 다릅니다. 믿기지 않으나 순간 이동 마법진을 타는 걸 목격한 이들이 있습니다.”
제던 자작은 아인츠발트가 전투 당시에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아스카와 싸우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전선에서 다른 마족들과 싸우느라 그쪽을 주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음 보고를 올릴 때 아인츠발트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네르바가 아인츠발트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를 요구하였기에 살아남은 이들 중 아인츠발트를 목격한 자가 있는지 찾아 헤맸다.
그리고 그 노력은 성공하여 한 기사로부터 아인츠발트가 아스카와 대치하던 도중 아스카를 따돌리고 순간 이동 마법진을 통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순간 이동 마법진이라고?”
네르바는 제던 자작의 보고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순간 이동 마법진은 아무나 준비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나름대로 경지를 개척한 마법사는 되어야 쓸 수 있었고 마법사 협회를 기준으로 지부장급이 거기에 해당했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원로보다는 낮아도 마법사로서는 이미 완성된 상태라고 봐야 했다.
‘조력해 주는 마법사가 있었다? 그것도 전장에서 순간 이동 마법진을 준비하는 게 가능한 마법사가?’
그러나 그런 마법사가 있다고 제자리에서 뚝딱 순간 이동 마법진을 만들 수는 없었다.
필요한 재료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인츠발트는 마족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지원군에 편성되어 떠난 상태였다.
그런데 전장에 아인츠발트를 기다리고 있던 아군이 있었다는 건 말이 안 되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군.’
네르바는 이 정보들을 통해서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었다.
네패스 왕국에서는 마족들이 로스니아 제국을 공격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던 게 분명했다.
그것도 언제 어디를 공격할지 제법 자세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현장에 미리 마법사를 보내고 순간 이동 마법진까지 준비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고서도 우리 제국에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았다.’
협정이 완벽하게 무시당한 순간이었다.
네르바는 마음 같아선 네패스 왕국과 당장이라도 일전을 치르고 싶었다.
그러나 제국의 고통을 없애기 위해 아드리안 황태자의 흉내를 내고 있는 자신이 감정에 치우쳐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게다가 네패스 왕국의 꿍꿍이가 무엇이든 마족들이 나타난 건 사실이었다.
프로반 백작이나 안덴스마저 죽을 정도로 강력한 마족을 눈앞에 두고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뻔히 알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군.’
하다못해 협정에 근거해 네패스 왕국의 군대를 불러들이는 일마저 실패였다.
제국 귀족들은 40만이나 모여버린 제국군을 보며 승리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제국 특유의 자부심이 겹쳐져 타국 군대의 출입을 반기지 않았다.
네르바는 어떻게든 귀족들을 설득해 보려 애를 썼으나 역부족이었다.
적어도 당장 이 자리에 모인 40만의 군대가 싹 사라져버리지 않는 이상은 귀족들의 뜻도 꺾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진짜 황태자였다면 달랐을까?’
네르바는 진짜 아드리안 황태자였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 고민했다.
그러나 아무리 겉모습과 성격을 흉내 내도 그 생각마저 파악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황태자 전하!”
시름이 깊어질 때 한 귀족이 네르바를 찾아왔다.
“찾았습니다!”
“찾다니? 무엇을 말이냐?”
“마족을 찾았습니다! 제던 자작이 이야기했던 마족 놈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귀족의 보고에 네르바와 제던 자작 모두 번개에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네르바는 지금 이 순간 마족이 다시 나타난 것이 좋은 징조가 아니란 걸 알았다.
국경에서와 달리 지금 제국군은 충분히 세력을 모은 상태였으니까.
비록 튼튼한 성벽이 없어도 이만한 규모라면 아무리 강한 마족이라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다시 마족이 나타난 건 이길 자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던 자작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다.
퇴각하기 전 아스카가 죽은 자들을 부리며 홀로 전장을 뒤집어버린 압도적인 위용은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았다.
‘그 위험한 마족이 기어이.’
프로반 백작과 안덴스를 죽인 것도 그 마족일 것이다.
현장을 확인한 건 아니나 다른 상대가 없었다.
그 둘을 죽일 정도의 마족은 흔치 않으니까.
‘그래. 차라리 잘되었다.’
제던 자작은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이제 제국은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게 된 처지였다.
40만이라면 제국에 남아 있는 병력 중 최소한의 인원을 빼고 모두 모인 것과 다름없는 상황.
충분히 일전을 노려볼 만했다.
“황태자 전하. 저에게 이번 싸움에 참가하는 걸 허락해 주십시오. 프로반 백작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제던 자작까지 적극적으로 전투를 주장하자 네르바는 마음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미 마족이 나타난 상태에서 이를 막을 만한 명분이 없었다.
지금 마족을 토벌하기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자신이 마족에게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귀족들이 나오게 될 테니까.
아직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런 평판은 큰 독이 될 수 있었다.
‘되든 안 되든, 지금은 그 마족을 처치해야만 한다.’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네르바는 이를 악물고 명령을 내렸다.
“전 지휘관을 모아라! 놈을 죽이고 프로반 백작의 원한을 갚겠다.”
네르바의 명령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40만 대군과 그들을 이끌 지휘관이 모여들었다.
제국군의 출정이었다.
* * *
“국경에서도 그랬지만 저런 꼴을 보니 인간들의 세력이 얼마나 강성해졌는지 잘 느껴지는군.”
아스카는 자신과 대치한 로스니아 제국의 군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자그마치 40만에 이르는 대군.
그 숫자가 워낙 많아서 끝이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스카는 전혀 겁먹지 않았다.
부활한 이후로 자신에게는 무한에 가까운 마나가 있었고 어차피 머릿수 따위는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말로 시대가 달라졌어.”
아스카는 혼자가 아니었다.
비록 살아 있는 존재는 그가 유일했지만 아스카의 곁에는 조종을 받고 있는 수많은 시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는 마족들의 시신도 있었다.
“저런 불경한 놈을 봤나! 죽은 이들의 시신을 저리 다루다니!”
아스카의 손짓에 따라 움직이는 망자의 군대를 확인한 제국군은 눈이 뒤집어졌다.
사교도나 마족도 드문드문 있었지만, 대부분의 병력은 국경에서 아스카와 마족들에게 맞섰던 제국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감히 제국군을 죽이고 그들을 부려서 다시 제국과 싸우려는 것이다.
화가 나지 않는 쪽이 이상했다.
“작전을 잊진 않았겠지?”
네르바는 불안한 얼굴로 귀족들에게 물었다.
아스카의 마법이 죽은 자들을 부리기에 단순히 머릿수로만 싸우면 안 된다는 건 이미 파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대군을 준비한 건 나름대로의 작전 때문이었다.
“물론입니다, 황태자 전하.”
“오늘 이 자리를 놈의 무덤으로 만들고 프로반 백작의 원한도 갚겠습니다!”
기사들은 사나운 기색을 드러내며 아스카를 노려보았다.
다른 마족들보다 훨씬 큰 덩치에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를 풍겼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기사들은 승리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좋아. 모두 돌격하라!”
네르바의 명령이 떨어지자 제국군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땅이 뒤흔들렸다.
아스카는 다가오는 제국군을 보며 눈을 빛냈다.
숫자도 숫자지만 선두에 세워둔 기사들은 그 실력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작정하고 준비한 게 분명했다.
“가볍게 해서는 안 되겠군.”
여타의 마족이라면 마나가 떨어지는 순간, 이 무시무시한 군대에 의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아스카는 얼마든지 이길 자신이 있었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군대를 부른 행동 자체에서 제국군의 약점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아인츠발트도, 계약자도 없다.’
제국군을 버리고 도망쳤을 때도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타르타로스의 계약자는 아드리안 황태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