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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195화 (195/250)

VVIP 영주님의 품격 19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95화

195화

* * *

“아무리 먹어도 적응이 안 될 만큼 더럽게 쓴맛이군.”

혀가 마비되는 것 같은 쓴맛에 그랜트는 인상을 찡그렸다.

로스니아 제국의 국경을 넘은 뒤 키스타의 장담대로 추격대도 더는 그들을 쫓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그랜트는 키스타가 제공하는 약이라는 새로운 난관과 맞닥뜨렸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지.”

키스타는 자신을 노려보는 그랜트를 향해 조소를 보냈다.

제국에서 이름 높은 기사가 겨우 약이 쓰다고 앓는 소리를 하는 게 무척 우스웠다.

“됐으니까 꿀이나 달라고.”

이에 기분이 상한 그랜트가 미간을 찌푸리자 키스타는 놀리기를 멈췄다.

설마 이런 일로 감정의 골이 생길까 싶지만, 지금은 예민할 때이니 작은 충돌도 좋을 게 없었다.

꿀을 전달받은 그랜트는 달콤함으로 마비된 혀를 달랜 뒤 키스타에게 물었다.

“그런데 키스타 백작. 아니, 이제 백작은 아니지. 어쨌든 이렇게 맨몸으로 네패스 왕국으로 갈 건 아니겠지?”

로스니아 제국을 피해서 네패스 왕국으로 가겠다는 키스타의 생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의 말처럼 아인이 정말 더 큰 야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을 비싸게 사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불안한 점이 없는 건 아니다.

“빌헬름 폐하께서 각국의 군주들에게 선전 포고를 했고 우린 그분을 따랐던 수족이야. 게다가 그분의 죽음 이후로 각국의 군주들을 모두 죽이려고 했지. 감정이 좋지는 않을 텐데.”

아인이 별다른 피해 없이 무사히 제국을 빠져나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자신들에 대한 감정이 고울 리는 없었다.

아예 불구대천의 원수인 반제국 동맹이나 아드리안 황태자가 돌아온 제국보다는 낫지 않을까 짐작할 뿐.

그렇기에 그랜트는 어떻게든 네패스 왕국에 가도 괜찮다는 확신을 얻고 싶었다.

“그저 야망만으로 우리를 받아줄까? 단물만 빼먹고 버릴 수도 있잖아.”

네패스 왕국의 국왕과 제국의 반역자가 되어버린 자신들.

둘 중 어느 쪽이 우위에 있는지는 굳이 비교해 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아인이 마음먹기에 따라선 키스타로부터 제국의 기밀만 뽑아내고 그들을 처분할 수도 있었고.

“그러니 되도록 많은 것들을 준비했지.”

그랜트의 불안에 키스타는 주변을 가리키며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준비했는지 설명했다.

잘 훈련되고 전쟁 경험도 충분한 1만의 병력.

만약을 대비해 따로 모아둔 막대한 재물.

거기에 그 혼자만 알고 있는 제국의 약점.

단신으로 수백을 상대할 수 있는 제국의 이름 높은 기사 그랜트까지.

“나까지?”

키스타의 입에서 자신마저 언급되자 그랜트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러나 키스타는 태연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거기 가서도 기사로 살아야지. 아니면 다른 밥벌이를 알아볼 건가?”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그랜트를 구해 온 이유는 결국 그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랜트 역시 이를 거부할 수 없는 처지였고.

그가 돌보고 책임져야 할 이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으니까.

“끄응.”

할 말이 궁색해진 그랜트는 앓는 소리를 냈다.

자신의 목줄이 키스타에게 쥐여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확실한 건 아니잖아?”

키스타가 언급한 것들은 모두 망명 신청의 조건으로 괜찮기는 했다.

아인이 야망이 있다면 더욱 구미가 당길 테고.

그러나 거기에도 한계는 있었다.

“세상에 확실한 게 어디 있나?”

키스타라고 그랜트처럼 불안한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랜트와 달리 자신은 아인을 직접 본 적도 없는 처지니 더욱.

그저 행적과 소문만으로 어떤 인물일지 추측할 뿐이었다.

‘그래도 어지간하면 맞을 거다.’

키스타는 아인의 행적을 곱씹으며 자신의 제안이 받아들여지리라 여겼다.

그 모습에 막연해진 그랜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불안하면 빨리 낫기나 하게. 자네가 회복하지 못하면 그땐 쓸모없다고 생각해서 정말 죽일지도 모르니까.”

키스타에게 구출될 당시의 그랜트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겨우 며칠 치료한 정도로는 이전과 같은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계속 질색하는 쓴 약을 억지로 먹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낫는 게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랜트는 붕대로 감은 부분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을 느끼며 툴툴거렸다.

자다가 통증 때문에 깨어나는 일이 매일 세 번 이상은 반복되는 상황.

게다가 아무리 좋은 약을 먹더라도 이렇게 불편한 환경에서는 회복에 전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귀한 약재를 내주고 있지 않나? 그거 나중에 다 갚아야 하네.”

“뭣?”

약값을 받겠다는 키스타의 말에 그랜트는 당황하며 그를 쏘아보았다.

처음 약을 줄 때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었다.

“설마 공짜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상인은 공짜를 좋아하지 않아.”

키스타는 당당했다.

그랜트를 살려놓기 위해서 쓴 약재 값만 해도 평민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수준이었다.

그랜트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기사였기에 내주었지 다른 기사였다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하! 이래서 장사꾼은 믿으면 안 되는데.”

“그 장사꾼 덕에 목숨 건져놓고.”

그랜트는 말문이 막혔다.

애초에 말싸움하는 건 그와 맞지 않았다.

그런 건 하이록의 몫이었으니까.

“그런데 검은 그걸로 되나? 원한다면 명검 한 자루를 내줄 수 있는데.”

키스타는 그랜트의 새 검을 보며 물었다.

기형검이 전투 도중에 망가지자 그랜트는 키스타를 따라오기 전에 하이록의 시신을 찾아 그가 쓰던 검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하이록의 가족들에게 유품으로 전해주려는 줄 알았으나 지켜본 결과 직접 쓰려는 게 분명했다.

“됐어. 이걸로 충분해.”

“그런가.”

키스타는 그랜트와 하이록의 관계를 새삼 떠올렸다.

어디까지나 같은 남부의 귀족으로서 전략적인 동맹을 맺은 것이라 여겼는데, 두 사람은 그 이상으로 서로를 존중했던 모양이다.

‘흔치 않은 일인데.’

대영주나 군주들에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존재가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주변 환경의 차이로 인해 격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등한 수준의 상대를 찾아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이해관계에 얽혀서 감정보다는 득실을 계산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저런 태도는 오히려 불안 요소지.’

그랜트가 스스로 말했듯이 네패스 왕국 역시 로스니아 제국에 대한 감정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나마 카시안 공작과 한 번 거래를 트기는 했고, 야망이 있는 아인이라면 감정보다는 이득을 우선시할 거라 짐작할 뿐.

‘아무래도 경고를 따로 해주는 게 좋겠어.’

키스타는 진중한 분위기를 잡았다.

“노파심에 말하는 거지만 네패스 왕국에서 심한 모욕을 받게 되더라도 참게. 그게 설령 하이록 백작에 대한 모욕이라도.”

그랜트는 키스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바로 이해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들고 가더라도 상대가 웃으며 자신들을 받아줄 가능성은 높지 않다.

모욕을 받는 건 거의 확정적일 터.

자고로 이 모욕이란 건 자신에 대한 것보다 주변에 대한 것일 때 더 불쾌한 법이었다.

“당연히 그 정도는 알고 있지.”

평상시의 그랜트라면 주변 사람들에 대한 모욕을 절대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앞뒤를 재가면서 행동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이들이 있었다.

아무리 심한 모욕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 * *

“누가 왔다고?”

용병들의 영입이 끝났을 무렵 뜻밖의 소식이 도착했다.

국경에 로스니아 제국의 반역자들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였다.

그 사실을 보고하는 네일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무래도 아드리안 황태자에 의해 패색이 짙어지자 제국을 버리고 망명하려는 모양입니다.”

“망명이라.”

아드리안 황태자와 맺은 협정이 있지만 부담될 일은 아니다.

그 협정은 어디까지나 적을 마족에 한정하니까.

망명을 받는 것 자체를 간섭받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껏 로스니아 제국과 좋아진 관계를 다시 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계산을 좀 해봐야겠는데?’

이건 아무래도 별도의 계산이 필요할 듯했다.

키스타 백작이라면 로스니아 제국에서도 알아주는 부를 가진 대영주.

게임에서도 엄청난 재산을 가졌다는 언급이 나오는 상대이기에 절대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뭘 가져왔지?”

“꽤 많습니다. 제국에서 부유함으로 손에 꼽힌다더니 그 말대로인 거 같습니다.”

네일은 국경에서 올라온 보고 내용을 줄줄이 나열했다.

1만이나 되는 무장한 군대.

엄청난 숫자의 마차와 짐수레들.

그리고 거기에 가득하게 실려 있는 재화.

게다가 그랜트라는 5티어 전투형 영웅까지.

망명에는 어울리지 않는 호화로운 구성이었다.

“정말 호화롭군. 썩어도 제국인가.”

“일단 얼굴이라도 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이미 네일은 눈이 뒤집혀 있었다.

검투 대회를 개최한다고 들어간 인력과 예산 때문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

이래서야 반역자의 망명이 아니라 귀빈의 방문에 가까웠다.

나는 즉각 국경에 그들을 수도로 올리라는 지시를 전달했다.

물론 1만을 통째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타국의 군대를 무장시킨 채로 1만이나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호위의 숫자를 크게 제한하고 그들은 국경에서 움직이지 못하도록 대기시켰다.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 나는 그 둘을 직접 마주할 수 있었다.

“낯익은 얼굴이군.”

우선 내 시선은 그랜트를 향했다.

제국에서 봤을 때와 비교하면 그리 좋은 몰골은 아니었다.

부상이 심한 건지 희미하게 약 냄새도 풍기는 듯했고.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랜트는 나에게 영광이라고 말했다.

로스니아 제국에서 타국의 인물을 만나며 영광이라는 표현을 할 일은 없다.

제국민이 가진 오만함에 대영주라는 위치까지 합쳐진다면 더욱.

그러나 그랜트는 이런 표현까지 써가며 저자세로 나오고 있었다.

이는 그만큼 그들의 상황이 절박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영입할 수 있으면 괜찮기야 하지.’

무려 5티어 영웅.

용병들이 왕국에 몰려든 시기를 노려 돈과 부상을 내걸어서 검투 대회를 연 나조차 5티어 영웅은 찾아내지 못했다.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내 시선은 곧 그랜트가 아니라 옆에 있는 키스타를 향했다.

그랜트는 결국 일개 기사일 뿐.

그에게서 얻을 만한 것이 무엇일지는 뻔한 수준이었다.

반면에 제국에서도 부유한 걸로 이름 높은 키스타는 다르다.

그는 분명 괜찮은 조건을 들고 왔을 것이다.

“우선 이건 이 영광스러운 만남을 기념하여 바칠 선물이옵니다.”

키스타는 보석에 문외한인 내 눈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예쁜 장신구들을 꺼냈다.

당연히 내가 쓰라고 주는 건 아닐 것이다.

“왕비 마마께 잘 어울릴 겁니다.”

역시나.

당사자보다 그 주변을 먼저 공략하는,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잘 통하는 수법이었다.

이렇게 되면 레일리의 체면을 봐서라도 쉽게 내칠 수 없게 된다.

물론 내가 마음을 먹는다면 레일리도 반대하지 않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는 내가 절대적인 힘을 갖고 있으니까.

“굳이 이런 절차가 필요한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의도를 담아서 말하자 그랜트 쪽에서 긴장한 표정을 드러냈다.

반면 키스타는 태연하게 이를 받아들였다.

“하하. 저희가 그만 귀하신 분을 지루하게 만들었군요. 송구합니다.”

언뜻 비굴하게 들릴지도 모를 말.

하지만 말과 달리 키스타의 눈빛은 살아 있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협상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한껏 드러낸 것이다.

“일단 묻지. 나에게 뭘 줄 수 있지?”

“그건 전하께서 어디까지 원하시느냐에 달려 있지요.”

역시나 키스타는 무엇을 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오히려 자신감을 드러냈다.

내가 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맞춰줄 수 있다는 것처럼.

그러나 아무리 부유한 자라도 실제로 내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었다.

더구나 반역자의 신분으로 쫓기는 몸이라면 더더욱 선택의 폭이 좁을 터.

그런데도 이런 여유를 부릴 수 있는 건 그저 허세를 부리는 것이거나…….

‘아니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는 거겠지.’

잠깐 나와 키스타가 시선을 교환했다.

독심술을 배운 건 아니기에 보는 것만으로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통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저는 이전 전쟁에서 군대의 보급을 맡았습니다. 제 가문이 예전부터 해오던 일이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키스타는 내가 원하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스니아 제국에서 보급을 맡았다는 것.

언뜻 전선에 서지 않고 후방에만 머물렀다고 우습게 들릴 수도 있으나 사실 보급이야말로 전쟁에서의 핵심이었다.

군량은 물론이고 전쟁에서 쓰이는 화살이나 장비들을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장소로 꾸준히 대주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니까.

이를 위해서는 제국의 지형은 기본이고 기후와 부대 배치 등 많은 군사 정보를 숙달해야 했다.

다시 말해서 키스타는 자신이 누구보다 제국의 군사 정보를 잘 안다고 말한 것이다.

‘그 많은 재물이나 1만의 병력, 거기에 그랜트까지 내버려 두고…….’

난 그런 키스타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이놈은 진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값비싼 가치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그리고 내가 어디까지 바라고 있는지도.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할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걸 덥석 받아줄 수는 없다.

너무 속내가 드러나는 일이니까.

“아무래도 소식을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군. 로스니아 제국과는 협정을 맺었다는 걸.”

“물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협정은 어디까지나 마족에 맞서기 위함이 아닙니까?”

제국에서 달아나는 동안 잘도 정보를 모았다.

제국을 나오기 전에 알았을지도 모르지만, 황태자를 상대하는 일만으로도 바빴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협정까지 파악한 건 그가 상당히 꼼꼼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내가 굳이 로스니아 제국과 싸워야 할 이유가 있나?”

“미래를 알지 못한다면 누구나 적이 될 수 있는 법이지요.”

키스타는 이미 내가 로스니아 제국과 언젠가 싸우리라 확신하는 듯했지만 그걸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한 행동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자각하고 있다는 소리다.

하긴 영웅 정보만 봐도 납득할 수 있다.

키스타는 4티어 외교형 영웅이니까.

과연 로스니아 제국에는 인재가 넘쳐났다.

“네패스 왕국에 온 걸 환영하지.”

그렇기에 꼭 빼앗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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