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93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93화
19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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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네패스 왕국의 수도에는 상당히 많은 외부인이 모여 있었다.
제국으로 떠나기 전 날치기로 진행한 검투 대회 때문이었다.
순위권에 들었던 수상자들에게는 더 큰 상금이 준비된 상위 대회의 출전 자격이 부여되었고 대회의 규모도 더욱 커졌다.
그리고 수도에는 그렇게 가려서 올라온 실력자들을 위한 최고 대회가 개최 중이었던 것이다.
‘이번은 상금보다는 부상 쪽이 핵심이지만.’
라이언도 그렇고 로크나 탈론 등 용병 출신에게 물어봤을 때 용병들이 가장 바라는 건 돈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나름대로 실력 있는 용병은 의외로 돈에 잘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탈론이 말하기에 큰 건수를 하나만 하면 되니까 굳이 자잘한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그래서 돈 말고 그들이 바라는 게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로스니아 제국이 일으킨 전쟁을 피해 도망친 입장이라는 것에서 단서를 얻었다.
지금 용병들에게 필요한 건 확실한 신분이었다.
자신들이 활동했던 국가에서는 명성이 곧 실력과 신분을 보증했겠지만, 네패스 왕국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는다.
타국의 용병에 대한 소문이나 명성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며 그걸 증명할 방법도 없으니까.
따라서 실력 있는 용병들은 확실한 신분이 필요했고 난 그것을 미끼로 내걸기로 했다.
“이런 게 부상으로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네일은 부상으로 수상자에게 발급하기로 한 왕국 내 통행 허가서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귀족들이야 상관없는 일이지만 평민은 왕국에서 이동하는 데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사전에 통행에 대한 허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건 용병이나 상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나마 이름 있는 상회에 소속된 상인이라면 상회 쪽에서 관련 절차를 처리해 주거나 일이 잘 안 풀려도 상회를 보증인으로 세울 수 있다.
하지만 용병은 그것조차 안 된다.
그들은 대부분 일확천금을 꿈꾸며 고향에서 뛰쳐나온 평민이나 농노인데 제대로 된 허가가 내려졌을 리 없으니까.
출입 금지 정도면 양호하고 경우에 따라선 범죄자가 되어 감옥에 보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국왕인 내가 직접 왕실의 인장을 찍은 허가서가 있다면 말이 다르다.
설령 한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라고 해도 왕실의 인장을 앞두고 통행을 금한다는 말은 쉽게 꺼내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이 통행 허가서의 무게는 컸다.
‘애초에 왕실 인장을 통행 허가서에 찍는 경우 자체가 드무니까.’
왕실 인장이 찍힌 통행 허가서를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왕가의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이나 외부에서 온 귀빈밖에 없다.
그만큼 귀한 물건인 것이다.
그런데 그 왕실 인장이 찍힌 허가서를 검투 대회의 부상으로 끼워 넣었다.
용병이 아니더라도 관심이 갈 것이다.
‘게다가 실력 검증도 덤으로 되고.’
분실이나 위조의 위험성 때문에 허가서를 많이 풀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괜히 곤혹스러워질 수 있으니.
그러나 실력에 자신 있는 용병이라면 노려볼 만한 숫자라는 생각에 10장을 준비했다.
즉 이 허가서를 얻으면 왕국에서 가장 뛰어난 용병 10명 안에 든다는 증명이 되는 것이다.
“캬! 저도 그런 거 하나 주시면 안 됩니까?”
네일이 들고 있던 허가서를 본 라이언이 나에게 눈을 반짝였다.
“원하면 내려가서 참가하게. 특별히 참가하게 해주지.”
내 제안에 라이언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위 대회라면 모를까 여기는 저도 좀. 지거나 고전하기만 해도 개망신 아닙니까?”
2티어 영웅인 라이언은 용병으로선 거의 정점이라고 할 만하다.
크레시안 왕국이었던 시절에는 동부에서 알아주던 용병이었고.
하지만 지금 이 대회 참가자들과 비교하자면 조금 손색이 있었다.
몇 차례에 걸쳐서 선별된 용병 중에는 이미 라이언과 비등한 실력자가 제법 있었고, 타국에서 넘어온 용병 중에는 그를 능가하는 경우마저 있었으니.
물론 흔한 일은 아니다.
보통 그 정도 실력의 용병이면 어느 귀족에게 찾아가 기사 작위를 받을 정도가 되니까.
이때까지 용병으로 남는 이들은 기사가 되기를 포기했거나 아예 기사는 체질에 맞지 않아서 용병을 선택한 쪽이었다.
“체면을 생각하면 근위기사 단장님을 쓰시죠.”
“미쳤냐? 검투 대회에 근위기사 단장이 나가게?”
라이언의 은근한 말에 로크가 눈을 부라렸다.
현재 나를 따라온 기사들의 분위기는 굉장히 자유로웠다.
평소의 엄격한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대회는 기사들의 대회가 아니다 보니 귀족들은 아예 이번 대회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기껏 찾아온 이들도 심심했거나 국왕인 내 얼굴을 보러 온 쪽이었고.
그래서 나도 어느 정도 그런 분위기에 맞춰서 호위를 많이 대동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로크가 따로 신경 썼는지 근위기사단보다는 다른 기사단에서 차출된 병력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출신이 낮았기에 근위기사단과 같은 엄정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었다.
‘참관에 나선 고위 귀족은 셋뿐이군.’
근위기사 단장 로크.
북부의 대영주 탈론.
답답해서 마실 나왔다는 자크론.
“하암. 이거 계속 볼 필요 있느냐?”
자크론은 아예 하품까지 하는 모습을 보였다.
“실력자들을 뽑기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알지. 근데 너는 대충 봐도 짐작할 수 있으니까 시간 낭비란 거다.”
자크론의 말에 순간 흠칫했다.
시스템에 대해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에게 무언가 있다고 눈치챈 이들도 그게 뭔지에 대해서는 감을 잡지 못했고.
그나마 아인츠발트만이 타르타로스와 같은 배후 세력에 대해 알았지만 그도 시스템의 존재는 모르고 있었다.
“저라고 보자마자 다 아는 건 아닙니다.”
“어느 정도는 알지 않느냐? 지금까지 곁에서 봐온 게 있는데.”
다행히 자크론은 시스템을 아는 게 아니었다.
내가 어디선가 자꾸 고티어 영웅들을 영입해서 활용하는 모습을 보고 지레짐작한 것뿐이었다.
“그래도 승패는 겨뤄봐야 알지 않습니까?”
티어가 다르다면 판별이 쉽지만 동 티어에서는 정확한 격차를 알 수 없다.
그럴 때는 보통 스킬의 종류와 숙련도를 보고는 하지만 그게 절대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2티어에 불과했던 빅터가 6티어에 해당하던 말릭을 한 번 죽인 전적도 있고.
객관적인 전력과 실제 승패가 꼭 일치하지는 않기에 가능하면 지켜보는 쪽이 나았다.
“게다가 전투 도중에 실력이 향상되는 경우도 있고.”
“뭐, 그건 그렇지.”
자크론의 시선이 어딘가로 휙 돌아갔다.
어디를 보는가 했더니 티아라가 와 있었다.
“켈렌의 제자 녀석도 그래. 처음에도 나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그럴듯한 마법사가 되었어.”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 협회 최고의 재능으로 인정받던 티아라였다.
종군했던 기간 동안 자크론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나에게도 이것저것 배웠다가 얼마 전에 4티어에 도달했다.
협회 역사를 찾아봐도 저 나이에 티아라 수준의 마법사는 거의 없었다.
작고하신 스승 플레턴보다도 월등한 재능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니.
‘저게 진짜 5티어 마법사의 재능이겠지.’
특전으로 5티어부터 시작한 나와는 다르다.
아랫단계부터 밟아서 가파른 상승세를 그리는 게 티아라였다.
이제 막 턱걸이로 4티어에 오른 거라서 아직 원로들보다는 조금 아래지만, 지부장들을 넘어선 실력은 협회에서도 제법 말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왜 나온 거지?”
티아라가 검투 대회에 관심을 가질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별다른 일이 없을 때는 마법 수련을 하거나 쇼핑을 하는 게 티아라의 일과니까.
그런데 왜 굳이 이 자리에 나왔나 싶어 이상해서 바라보니, 티아라의 주위로 젊은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저거 저거. 아예 파벌 하나 만들 셈인가?”
여러 마법사들에게 둘러싸인 티아라의 모습에 자크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파벌이라.
협회를 나누는 큰 파벌은 협회장인 나와 원로들이다.
그 외의 파벌은 자잘한 수준이라서 무시해도 될 정도지만 지금 티아라 곁에 있는 마법사는 제법 숫자가 많았다.
게다가 모두가 젊었으니 한 세대에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볼 수 있었다.
“말려야 되겠군.”
“뭐, 파벌을 만드는 거야 본인의 자유가 아닙니까?”
애초에 티아라 정도의 마법사가 파벌이 없는 쪽이 더 이상하다.
나는 태생부터 귀족에 형식적으로나마 마법사 가문 출신이라는 차이점이 있지만, 티아라는 그렇지 않으니까.
오직 출중한 능력과 전쟁터에서 세운 공으로 젊은 나이에 성공한 마법사의 대표.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게 당연하다.
“협회에서도 파벌을 제재한 적은 드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원로들도 파벌 싸움을 실컷 하고 다녔는데 딱히 파벌에 대한 제재가 있을 리 없다.
그나마 역사적으로 보면 몇 차례 있기는 했지만 그건 굉장히 드문 케이스였고.
“실력을 키우는 거면 나도 뭐라고 안 한다. 애초에 협회에는 관심도 없고. 근데 쟤들은 그런 내가 봐도 영 아니야.”
“뭔가 아십니까?”
“네가 마법사들에게 꽤 많은 돈을 풀었었지.”
“그랬죠.”
젊은 마법사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였다.
성과도 괜찮았다.
엄한 채찍질에 당근을 끼워 넣은 셈이라 성취가 앞당겨졌다고 분석되었으니.
“근데 쟤네들은 원래부터 있는 집 자식들이야.”
그제야 자크론이 티아라의 파벌을 반대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평민이라고 다 가난하지는 않다.
돈 많은 상인의 자식일 수도 있고, 귀족의 밑에서 제법 요직에 앉아 있는 권력자인 경우도 드물게 있었다.
그런 집에서 마법사가 나오게 되면 당연히 가문에서 기대를 갖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기 마련.
원로나 지부장들도 체면이 있으니 후계자는 순수한 실력으로 정하지만, 그냥 제자 하나쯤은 있는 집 아이로 받아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만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제자가 여럿이면, 아무래도 재능도 있고 자신의 비전 마법도 이어받을 제자에게 관심을 두는 게 당연하니까.
“돈 없는 애들은 돈의 가치를 잘 알아. 가끔은 놀 때 쓰더라도 대부분은 자신에게 다시 투자하지. 그게 네가 돈을 푼 뒤에도 원로들이 반발하지 못한 이유였고.”
자크론의 분석은 정확했다.
가난한 젊은 마법사들은 돈이 생긴 뒤에도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부유했던 자라면?
내가 지원해 주는 돈은 푼돈 정도로 여기고 평소 태도나 성취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다.
“근데 쟤들은 돈이 당연해. 뭐, 그래도 귀족인 티아라보다야 별것 아니겠지만 곁에 두면 자칫 물드는 수가 있단 말이지.”
한 마디로 나쁜 아이들이랑 놀면 안 된다는 소리였다.
‘확실히 인맥으로서는 어떨지 몰라도 실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애들은 아니네.’
영웅 정보를 통해서 슥 훑으니까 1티어가 사방에 넘쳐났다.
2티어조차 없으니 티아라가 어울리기에는 확실히 수준이 떨어졌다.
“티아라에게 재능이 없다면 힘 좀 있는 집안 애들이랑 사귀는 게 나쁘지는 않겠지. 그런데 쟨 천재야. 어설픈 권력보다는 순수한 성취에 집중할 때라고.”
“누가 보면 티아라가 자크론 님 제자인 줄 알겠습니다.”
자크론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나도 티아라가 성취를 뒤로하고 한눈팔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래서 소속이 마법사 협회가 아니라 내 아래로 바뀌었을 때는 아주 기뻐했고.
하지만 결국 이 문제에 대해서 지적하고 훈육해야 할 사람은 나나 자크론이 아니라 켈렌 원로였다.
“켈렌 원로가 나서야 할 일 아닙니까?”
“협회에 처박힌 놈이 나서기는! 게다가 네가 시킨 일 때문에 원로들 다 바쁜 거 모르냐?”
아스카에 대한 조사는 아직도 밤낮없이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야심한 밤에 원로들의 곡소리가 협회에 울린다는 불길한 소문이 있을 정도였고.
‘협회장이자 국왕의 지시인데 아무리 원로라도 거부하지는 못하지. 게다가 마족까지 엮였으니.’
딱히 고생시키려고 한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정을 주셨나 봅니다?”
학살자로 악명을 떨치던 자크론이었다.
티아라의 친구 관계까지 신경 쓰는 건 그의 이미지에 맞지 않았다.
“그냥 재능이 아까워서 그렇지. 너도 재능 보고 따라온 거고. 플레턴도 그랬겠지만.”
“재능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 재능으로 국왕에 협회장까지 하는 놈이 재능이 중요하냐고 물어?”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는 자크론의 모습에 딱히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마법사로서의 재능이 어디까지나 위니스가 내준 특전에 불과하단 것이 신경 쓰였다.
아무리 크고 튼튼하게 지어봐야 결국에는 모래성이라는 느낌일까.
‘대륙 정복이라면 모를까, 군주인지 신인지 모를 건 원래 관심 없었는데.’
이런 기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위니스가 아스카에게 알려줬다고 말하는 군주의 자리.
대륙을 정복하고 지지나 인정을 받아서 완전히 다른 수준으로 벗어난다면 이런 느낌을 받을 필요는 없어질 것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걸 쌓아왔던 아스카조차 그렇게 탐낸다고 하니까.
‘타르타로스의 절대군주를 상대하려면 결국 그것도 필요하겠지.’
인간의 수명으로는 어쩌지 못할 영역에 있는 게 범차원 세력들이었다.
그들의 영역에 들어가려면 나 역시 인간을 넘어서야 한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힘을 얻는 차원을 말하는 게 아닐 것이다.
불사라고 했으니 육체뿐 아니라 어쩌면 정신적으로도 인간을 벗어나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래도 되는 걸까?’
인간으로 태어났으면서 인간을 벗어난다.
조금은 거북한 느낌도 있었다.
나라는 녀석의 정체성이 사라지는 기분이니까.
“무슨 고민 하냐?”
“별일 아닙니다. 그냥 지금과 다르게 변하면 그걸 자신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어서.”
“뭔 개소리야? 애초에 자기 자신이라는 건 헛소리다.”
“네?”
자크론이 뜬금없이 정체성을 부정해 버렸다.
“그런 건 없어. 네가 너라고 생각하는 모습은 뭐냐? 국왕? 협회장? 젊은 영웅? 천재 마법사? 어느 쪽이라도 남들이 붙여준 거지. 그건 네가 아니다.”
“제가 아니라고요?”
“세상에 변하지 않는 건 없다. 네가 무엇일지에 대한 네 생각도 계속 바뀌겠지. 많은 걸 겪게 될 테니까. 그러니 그런 쓸데없는 고민은 의미가 없는 거야.”
“그럼 전 뭡니까?”
“그건 네가 답을 내야지.”
어이없을 정도로 명쾌한 해답이었다.
뭐든지 상관없이 내가 내는 답이 옳다는 건가.
“그것참, 군주다운 대답이네요.”
하지만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건 그야말로 군주의 대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