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92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92화
192화
【 움직이는 자들 】
그랜트 백작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쓸어내리며 자신의 기형검을 매만졌다.
카시안 공작의 죽음 이후로 그를 따랐던 세력들은 모두 반역자가 되었다.
딱히 틀린 사실도 아니기에 억울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드리안 황태자의 생환이나 카시안 공작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적에 죽었다던 황태자가 갑자기 돌아와서 카시안 공작 전하를 죽였다니. 뭐 이런 경우가 다 있지?’
재수가 없어도 정말 더럽게 없는 상황이었다.
아드리안 황태자가 살아 있으리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당시 피의 연회에서 제국은 아드리안 황태자의 시신을 수습하지는 못했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았다.
다른 국가들보다 로스니아 제국에 마족들의 습격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현장에 있던 이름 있는 기사들은 선대 황제와 황태자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호위 병력이 그렇게 다 죽었으니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생존을 점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현장을 조사해 본 결과 황태자의 찢어진 의복이나 살점과 핏물 등이 발견되기도 했고.
만약 기적적으로 살았다면 금방 돌아왔을 테지만 그러지도 않았기에 제국에서는 선대 황제와 함께 황태자의 장례식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 뒤로 수년.
이미 아드리안 황태자는 기억 저편으로 잊힌 존재나 다름없었다.
“후우. 아직 살아 있냐?”
그때 그랜트 백작의 곁으로 하이록 백작이 다가왔다.
“당연하지.”
반가운 목소리에 웃으며 돌아보던 그랜트 백작은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너 몸이…….”
하이록 백작의 온몸에 피에 물든 붕대가 매어져 있었다.
그중에는 자칫 잘못하면 치료조차 못 할 위험한 급소도 있었다.
“용케 살았지?”
하이록 백작은 그랜트 백작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런 상태로는 다음 전투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망명하는 게 어때?”
그랜트 백작은 조심스럽게 망명을 권했다.
아드리안 황태자가 이끄는 군세는 위협적이지만 그들은 아직 카시안 공작의 잔당을 완전히 포위한 게 아니었다.
여차하면 제국의 기반을 모두 버리고 달아나 목숨을 건질 수는 있었다.
“난 제국의 귀족이다. 그런 내가 제국을 버리고 어디로 간다는 거냐?”
하이록 백작이라고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할 바에야 달아나는 쪽이 낫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도망친다고 해봐야 평생을 제국에 쫓기는 몸이 될 뿐이었다.
제국민으로서 제국을 떠난다는 것도, 귀족으로서 가진 모든 걸 버리는 것도 하이록 백작으로서는 못 할 짓이었다.
차라리 당당하게 싸우다 죽는 쪽이 나았다.
“미련하기는.”
“그러는 넌? 너도 이제 한계 같은데.”
하이록 백작은 그랜트 백작의 몸을 슥 훑었다.
치명적인 부상은 없지만 자잘한 상처들이 전투 때마다 늘어나고 있었다.
“나도 제국 귀족 아니냐?”
그랜트 백작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혼자 살려고 하면 못 할 건 아니지만 그래 봐야 남는 게 없었다.
“젠장! 마지막까지 네놈이 곁에 있다니.”
하이록 백작은 농담조로 과장되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평생 그랜트 백작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며 살아왔는데 죽을 때도 그랜트 백작의 곁을 벗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조였다.
그에 그랜트 백작은 피식 웃었다.
“그래도 친구 놈이 있으니까 좋네. 가는 길이 외롭지는 않겠어.”
그랜트 백작은 기형검을 고쳐 잡았다.
아드리안 황태자를 따르고 있는 귀족들의 군대가 다시금 진격해 오고 있었다.
“난 징글징글하다.”
하이록 백작은 안간힘을 쓰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육체가 일어서는 걸 거부하고 있었다.
“젠장! 이제는 일어서는 것조차 힘드냐.”
“부축해 줄까?”
“꺼져.”
그랜트 백작이 다가오자 하이록 백작은 손사래를 치며 떨어졌다.
“사내놈에게 안기는 취미 없다.”
“하하하. 뭐, 나도 기왕이면 여자가 좋지. 왜, 네패스 왕국의 여기사 있잖아?”
“아, 릴리아나였던가?”
“그래. 살면서 그렇게 강렬한 인상을 주던 여성은 없었어. 다시 겨뤄보면 좋겠는데.”
그랜트 백작은 릴리아나와 대련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당시에는 패배의 충격이 꽤 컸지만 최후가 다가온 현재는 꽤 괜찮은 추억이 되어 있었다.
“그런 일은 없겠지.”
적들의 창칼이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랜트 백작은 기형검을 크게 휘둘렀다.
선두에서 덤비던 상대 기사가 균형을 잃고 나자빠졌으며 뒤이은 다른 기사의 공격은 아슬아슬하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한계에 몰린 하이록 백작은 달랐다.
간신히 첫수를 받아내는가 싶었으나 힘에서 밀리며 균형을 잃었고 이어진 공격에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촤악!
핏물이 튀어 오르며 하이록 백작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나 하이록 백작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비명을 지르면 그랜트 백작은 반드시 자신을 도우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랜트 백작도 빈틈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넌 1초라도 더 살아라. 바로 옆에 붙어서 저승길 가는 건 싫으니까.’
하이록 백작은 실없는 생각과 함께 쓴웃음을 지었다.
예리한 칼날이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 * *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던 그랜트 백작은 어느 순간 표정이 굳어졌다.
전장의 상황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의 난전이었지만 하이록 백작의 마지막 상태로 봤을 때 지금까지 버틸 수 없다는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오랜 친우였던 만큼 그 실력 역시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지금쯤이면…….’
그랜트 백작은 하이록 백작의 죽음을 예상했으나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어차피 자신 역시 그렇게 될 미래가 예정되어 있었으니까.
‘적어도 하나라도 더 베는 수밖에!’
그 대신 그랜트 백작은 복수를 위해서 맹렬하게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고 또 휘두르다 어느 순간 충격을 견디지 못한 기형검이 부서졌다.
콰악!
그랜트 백작은 이를 예상한 것처럼 재빨리 다른 무기를 쥐어서 전투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전황은 점차 악화되었다.
주변에선 어느새 아군의 모습이 사라졌고, 그랜트 백작 혼자서만 적진에 둘러싸인 형세가 되었다.
“헉헉!”
쉬지 않고 이어진 전투에 육체 역시 영향을 받았다.
격렬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다량의 출혈로 인해 몸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머리도 어지러워지고 눈의 초점도 조금씩 일그러지며 최악의 상태로 치달았다.
‘이제 끝이구나.’
그랜트 백작은 움직임을 멈췄다.
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생각과 달리 적들의 창칼은 그랜트 백작을 향하지 않았다.
콰콰쾅!
잠깐의 번쩍임과 울려 퍼지는 굉음.
지축을 뒤흔드는 강대한 충격에 그랜트 백작은 균형을 잃고 나뒹굴었다.
‘대체 뭐지?’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적들도 같은 꼴이 되어 뒹구는 상황.
그랜트 백작은 당황하며 주변을 살피다 그 원인을 발견했다.
“키스타 백작?”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 중 한 사람인 키스타 백작이 한 무리의 군대와 함께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많은 마법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대규모로 화력을 투사해 일대를 쓸어버린 것이다.
“아니, 그랜트 백작! 아직 살아 있었군! 정말 다행이야.”
“방금 그쪽 때문에 죽을 뻔했다!”
마법사들은 그랜트 백작이 있는지도 모르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을 가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랜트 백작이 살아남은 건 순전히 운이었다.
“미안하네. 적들이 잘 모여 있으니까 바로 쏴버린 건데.”
“왜 모였는지는 생각 안 하냐!”
“내가 전쟁에는 익숙지 않아서.”
키스타 백작은 상인이었다.
소규모 전투라면 모를까 대군이 맞부딪치는 전장을 지휘해 본 경험은 전무했다.
적들이 모여 있으면 마법으로 쓸어버리기 좋으니 잘된 것이지 그 이유까지는 고민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랜트 백작이 목숨을 건진 건 그런 키스타 백작 덕분이었다.
아군이 있는 걸 알았고 그게 그랜트 백작이란 걸 확인했다면 무차별적인 폭격은 결코 불가능했을 테니.
“그런데 그대가 왜 여기에?”
그랜트 백작은 키스타 백작의 등장이 당황스러웠다.
자신과 하이록 백작은 남부의 대영주지만 키스타 백작은 안덴스 후작과 같은 서부의 대영주였다.
“난 귀족이지만 상인이네. 수지 타산이 안 맞는 일은 하지 않아.”
“그게 무슨 말이지?”
“내 땅을 버리고 제국을 등지는 것도 충분히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일세.”
키스타 백작은 아드리안 황태자를 상대로 승산이 없다는 걸 알자마자 바로 도주를 결심했다.
문제는 그를 받아줄 만한 국가가 얼마나 되느냐는 것.
로스니아 제국과 척을 질 것을 각오하고 키스타 백작의 망명을 받아줄 국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
“반제국 동맹이나 가능하겠지. 그런데 그쪽은 이미 원수졌지 않나?”
로스니아 제국과 사이가 제일 나쁜 건 반제국 동맹이었지만 키스타 백작은 카시안 공작을 지원했던 몸이었다.
반제국 동맹이 그를 곱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고민해 봤는데 네패스 왕국이 그나마 가능성 있을 거 같더라고.”
“네패스 왕국?”
네패스 왕국이란 말에 그랜트 백작은 의문을 표시했다.
“어째서 네패스 왕국이지? 카시안 공작 전하와 거래한 것 때문에?”
“그거 말고.”
키스타 백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야망이 있는 군주란 말이지.”
키스타 백작은 비록 망명하는 처지지만 자신이 비싸게 팔리기를 원했다.
그런 관점에서 로스니아 제국을 상대로 언젠가 발톱을 드러낼 인물이야말로 가장 좋은 상대였다.
“야망?”
“젊고 능력 있지. 거기에 정복 전쟁도 꾸준히 하고.”
과연 로스니아 제국과 충돌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럴 야망이 있다면 자신을 분명 받아들이리라.
키스타 백작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전쟁에는 재물이 필요한 법이지.”
키스타 백작은 손을 비비며 뒤를 돌아봤다.
그는 만약의 상황을 대비하는 것에 능한 상인이었다.
그래서 재산의 일부는 언제든 들고 달아날 수 있도록 해두었다.
어디까지나 대비만 했지 실제로 그게 도움이 될 상황이 올 줄은 몰랐지만.
“아니, 저만한 재물을 어떻게?”
그랜트 백작은 어이가 없었다.
아드리안 황태자가 돌아온 것이나 카시안 공작이 죽고 안덴스 후작이 배신한 것까지.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던 일이기에 재산을 정리한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키스타 백작은 짐수레에 가득할 정도의 재물을 싣고 있었다.
급하게 쑤셔 넣은 것도 아니고 차곡차곡 값비싼 물품이 정리된 게 시간을 두고 꼼꼼하게 준비했다는 티가 났다.
“상인이란 그런 법이야.”
“어이가 없군.”
그랜트 백작은 키스타 백작과 그리 친분이 없어서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키스타 백작은 자신의 행동이 상인으로서 당연한 자세라고 여겼지만.
“뭐. 따라오지 않겠다면 더는 설득하지 않겠네. 그런데 괜찮겠나?”
“목숨은 이미 버렸어.”
“그거 말고. 자네를 따르는 이들 말이야.”
키스타 백작의 말에 그랜트 백작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식솔들은 당연히 피신시켰겠지? 나도 소식 듣자마자 가족들은 전부 먼저 보냈거든. 하지만 돌봐야 할 가족이 있는 게 어찌 우리뿐이겠나?”
그랜트 백작은 조심스레 뒤를 돌아봤다.
키스타 백작이 등장하자 어디선가 용케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그의 병력이 다시 모이고 있었다.
하지만 상태가 멀쩡한 이는 없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살아남더라도 상처가 악화해서 죽거나 후유증이 남게 될 것이다.
그럼 그들의 남겨진 가족은 어떻게 될까?
이 제국에는 발도 붙이지 못할 이들인데.
“우리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이리 많은데 무책임하게 그냥 죽을 생각인가?”
“나는…….”
“그대가 지켜야 할 사람들 아닌가? 하이록 백작의 가족들은 또 어쩌려고?”
키스타 백작의 설득에 그랜트 백작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저 당당하게 죽으면 될 줄 알았다.
기사로서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냥 기사가 아니라 백작의 작위를 가진 귀족이었고 지켜야 할 이들이 있었다.
“어차피 한배를 탔던 몸. 같이 가지 않겠나? 자네라면 믿을 수 있고.”
키스타 백작은 그랜트 백작이 자신의 설득에 넘어오리라 확신했다.
그는 거래에 능한 상인이었고, 상인에게 중요한 건 상대를 면밀히 파악하는 능력이었다.
그랜트 백작은 매우 단순한 유형이었기에 그 파악이 어렵지도 않았다.
‘자네가 내 제안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지.’
구태여 위험을 무릅쓰고 전장에 나타난 것도 그랜트 백작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이록 백작까지 얻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덕분에 그랜트 백작은 설득하는 건 더 쉬웠다.
하이록 백작은 영민한 인물이라서 자신의 말에 쉽게 현혹되지 않을 테지만 그랜트 백작은 달랐으니까.
게다가 하이록 백작의 가족을 미끼로 쓸 수도 있었고.
“같이 갈 수 있겠나? 추적이 만만치 않을 텐데.”
“국경 밖까지 쫓아오지는 않을 거야.”
이 상황이 갑작스러웠던 건 그들만이 아니다.
아드리안 황태자를 따르는 귀족들도 황태자의 존재를 처음부터 알지는 않았을 터.
급하게 반역자들을 잡기 위해 전쟁에 나섰으나 준비할 수 있는 물자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애써도 제국군이 국경 너머까지 보급선을 댈 수 없다는 걸 키스타 백작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쪽이 소수 병력이라면 모를까 나름대로 1만은 된다. 어설픈 숫자의 추격대는 의미가 없어.’
키스타 백작의 설명에 그랜트 백작은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어떻게 도망치는 사이에 적의 추격이 가능할지를 검토했는지 믿기지 않았다.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아는 거지?”
“제국군에 군량을 대는 게 누구라고 생각하나? 보급 현황이야 훤히 꿰고 있지.”
그랜트 백작은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
보급 현황을 꿰고 있다는 말은 곧 제국의 약점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절대 제국 밖으로 보내서는 안 될 인물.
자신이 반역자가 아니었다면 무조건 목을 쳤을 것이다.
아니, 솔직히 반역자가 된 지금도 그랜트 백작은 키스타 백작을 죽여야 할지 망설임이 들었다.
하지만 끝내 그럴 수 없었다.
키스타 백작의 말처럼 식솔들을 먹여 살리려면 재물이 필요했고, 키스타 백작은 그것을 대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었으니.
‘제국에 위협이 되겠지만 내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랜트 백작은 키스타 백작의 일행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