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90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90화
190화
제국 황태자의 이름은 분명 아드리안이었다.
게임에서 등장하지 않은 인물이 갑자기 나타났기에 가짜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확률은 매우 낮았다.
아드리안 황태자는 그리 먼 과거의 인물이 아니며 아직 제국에는 그를 잘 알고 있는 귀족들이 널려 있었으니까.
상식적으로 그들 모두를 속이는 건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영웅은 처음 보는데.’
전투형 영웅에게도 세세한 분류가 있듯이 다른 유형의 영웅에도 몇 가지 분류가 있었다.
외교형 영웅에는 넓은 시야로 대세를 읽는 것과 거래에 능한 경우, 상대를 속이는 것에 능한 경우가 있었다.
그런데 영웅 정보를 통해 드러난 이 네르바라는 녀석은 외교형 영웅의 다양한 분야를 모두 아우르고 있었다.
‘협잡에도 능하고 대국을 읽는 능력도 좋고 거래도 잘한다라.’
사기라고 봐도 좋을 정도의 영웅.
심지어 등급이 낮은 것도 아니고 4티어 영웅이었다.
‘대체 정체가 뭐지?’
아드리안 황태자를 사칭했고, 남들이 그것에 꼼짝없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훌륭한 연기를 가졌다.
대놓고 연기 스킬이 최고 수준의 숙련도를 가진 것만 봐도 알 만하지만.
‘게임에서 나온 인물이 아니다. 왜 게임에서는 안 나왔을까?’
가장 유력한 추측은 게임에서는 빌헬름이 살아 있었기에 나올 수 없었다는 것이다.
빌헬름을 직접 죽인 건 반제국 동맹이지만 그 죽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나였으니까.
내가 관여하지 않은 게임에선 빌헬름이 죽을 상황이 마땅히 없었고, 그렇기에 가짜도 나타나지 못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성이 로스니아. 즉 로스니아 황실의 인물은 맞단 소리겠지.’
하지만 지금껏 알아본 정보에 의하면 로스니아 제국의 황족 중에 네르바라는 이름을 가진 자는 없었다.
“이곳은 네패스 왕국이 아니다. 언행을 주의하는 게 좋지 않겠나?”
네르바의 정체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이 녀석은 나를 향해 불쾌감을 드러냈다.
로스니아 제국의 황태자로서 내 행동을 지적한 것이다.
“황태자라고 하지만 아직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도 못한 이에게 군주인 내가 숙일 필요는 없지.”
정론에는 정론으로.
황태자의 신분이란 게 타국의 왕세자보다는 대단하겠지만 그래 봐야 후계자일 뿐이다.
일국의 군주인 내가 겨우 황태자에게 밀리는 모양새를 보일 순 없었다.
설령 이곳이 로스니아 제국의 아가리 속이라고 해도.
‘어차피 아인츠발트도 있고.’
일이 아무리 꼬이더라도 내 한 몸 정도는 빠져나갈 자신이 있었다.
“후우. 그래, 네패스 국왕. 기왕 수행원 역할을 할 거라면 그대로 있는 게 낫지 않았나? 왜 구태여 정체를 밝힌 것이지?”
이대로 기 싸움을 이어나가는 게 영양가가 없다고 여겼는지 네르바는 내 속내를 파내는 쪽으로 대화의 주제를 옮겼다.
“조공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뭐?”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쓰던 네르바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하! 내 요구가 과했나? 볼모를 바치라는 것도 아니고 공녀를 바치라는 것도 아닌, 그저 재물을 좀 내놓으라고 했을 뿐인데?”
“내가 왜 재물을 주어야 하지? 아쉬운 건 우리가 아니라 제국일 텐데.”
장담하는데 아드리안 황태자를 연기하고 있는 네르바는 절대 전쟁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싸움을 피하고자 하는 상대에게 우리가 조공을 할 이유 역시 없다.
아쉬울 게 없으니까.
“네패스 왕국이 세력을 급격히 키웠다고 해도 이 제국의 상대가 될 거 같은가?”
“뽑지도 않을 칼을 무서워할 이유는 없지.”
“어떻게 자신하지? 아까 내가 말한…….”
“피레타 공작가.”
네르바의 소속을 이야기하자 그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국의 다른 귀족들은 이를 알아듣지 못한 모양새였지만 네르바의 반응만으로 충분했다.
‘어째서 소속이 피레타 공작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 소속이라면 전쟁을 반길 리가 없다.’
피레타 공작가는 로스니아 제국의 오래된 명문가로 개국공신의 가문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역사와 별개로 공작가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위세를 갖고 있었다.
이유는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피레타 공작가의 가주들이 별다른 욕심 없이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추구했기 때문에 정치 싸움에서 밀려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전에서도 뒷전이 되었지.’
어차피 끌어들여 봤자 도움도 안 되니까 빌헬름이나 아르센 등 제국의 황자들은 피레타 공작가에 관심을 주지 않았다.
피레타 공작가도 내전에 참가할 생각은 없었을 것이고.
“그걸로 대답은 충분하겠지.”
“이야기가 길어지겠군.”
피레타 공작가란 말을 들은 네르바는 불편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휘하의 귀족들이 걸리적거린 것이다.
“일국의 군주를 대하는 순간이다. 비록 연락도 없이 찾아왔다고 해도 대우를 해주는 게 맞겠지. 방을 준비해라.”
네르바의 지시에 제국의 귀족들은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그 명령에 따랐다.
“호위 한 명 정도는 괜찮겠지?”
상대의 속내를 파헤치는 건 좋지만 마법사인 내가 단독으로 상대의 영역에 들어가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니었다.
“입이 무거운 자인가?”
“입은 그렇지.”
입만 그렇다는 말은 검은 무겁지 않다는 의미였다.
그 말에 담긴 허튼수작을 부리면 싸우겠다는 의미를 알아들었는지 네르바는 인상을 구겼다.
* * *
자리를 옮긴 뒤 나와 네르바는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마주하고 섰다.
아인츠발트와 네르바의 호위는 다소 거리가 있는 장소에서 서로를 경계한 채 대기 중이었다.
‘4티어 영웅이군.’
네르바가 고른 호위는 4티어의 전투형 영웅이었다.
하긴 아무리 아드리안 황태자를 사칭하고 있는 상황이라도 5티어 영웅을 호위로 쓰기는 곤란할 것이다.
‘죽거나 적이 된 이들이 많으니까.’
필립 후작과 카시안 공작은 사망.
그랜트 백작과 아트라시아 후작은 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게 현재 네르바의 상황이었다.
“피레타 공작가에 대해서 말한 이유가 뭐지?”
“질문을 해야 할 건 이쪽이라고 생각하는데.”
네르바가 목소리를 낮춘 채 물었고 나 역시 그에 맞춰서 대답했다.
“설마 아드리안 황태자를 사칭하다니, 어이가 없군.”
내 이야기에 네르바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피레타 공작가의 이야기까지 했으니 자신이 가짜라는 걸 이미 확신하고 있다고 믿는 눈치였다.
“대체 어떻게 알았지?”
“대답해 줄 이유는 없을 텐데.”
“저 호위가 제국의 기사들을 상대할 수 있을 거 같은가? 당장 근처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만 100명이 넘는다.”
아인츠발트면 100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기사만 그렇다는 거지 주변에 주둔하고 있는 군대까지 포함하면 아인츠발트도 쉽지는 않겠지만.
“내가 마법사란 건 모르나? 이 거리면 호위보다 내가 더 빨라.”
하지만 그런 협박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상황이 급해서 깜빡했는지 네르바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으니까.
대기 중인 아인츠발트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네르바를 죽이는 것에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내가 직접 처치하면 그만이니까.
크고 복잡한 마법도 필요 없다.
가장 빠르게 쓸 수 있는 마법 한 번이면 전투력 없는 상대는 얼마든지 죽일 자신이 있었다.
‘설령 마법을 안 써도 마찬가지지.’
외교형 영웅이나 내정형 영웅은 등급이 높다고 해서 딱히 육체적인 능력이 좋아지지 않는다.
별다른 스킬이 보이는 것도 아니니 네르바의 전력은 1티어 전투형 영웅만도 못한 것이다.
“그런 짓을 하면 그대는 살아서 나가지 못할 거다.”
“빌헬름을 죽인 자들은 잘만 나가던데.”
제국의 치욕을 언급하자 네르바의 표정이 더 사나워졌다.
“쓸데없는 대화만 할 생각인가?”
“그럼 말해봐라. 왜, 그리고 어떻게 아드리안 황태자를 사칭할 수 있었지?”
이미 피의 연회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아드리안 황태자.
그의 장례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칭을 한 것을 보면 시신조차 제대로 건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를 사칭한 걸까?
“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로스니아 제국 황실의 혈통이다.”
네르바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영웅 정보에서 봤던 것처럼 그는 로스니아 황실의 핏줄이 맞았다.
하지만 수긍할 수 없었다.
도대체 뭣 때문에 황실에서 그의 존재를 감춰왔던 걸까?
“왜 알려지지 않았지?”
“내가 쌍둥이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쌍둥이라면 혹시?”
“그래. 난 아드리안 형님의 쌍둥이 동생이다.”
쌍둥이 동생.
그거라면 귀족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한 것도 수긍할 수 있었다.
쌍둥이라고 해서 모두 외모가 닮는 것은 아니나 가끔은 진짜 똑같이 생긴 이들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신뢰하기 힘들었다.
“아드리안 황태자는 황후의 소생이다. 쌍둥이라면 똑같은 황후 소생일 텐데 왜 존재가 지워진 거지?”
사생아 같은 혼외 자식이라면 모를까 황후에게서 본 아이를 무엇 때문에 지워야 할까?
“황실의 비사다. 거기까지는 몰랐나 보군.”
네르바는 로스니아 제국 황실에 대한 정보를 알려줬다.
몇 세대 전에 태어났던 어떤 쌍둥이 형제가 서로 권력 다툼을 하다 황실에 큰 해악을 끼쳤다고 한다.
그 때문에 황실은 쌍둥이를 불길하게 여겼고 이후 쌍둥이가 태어날 경우 한쪽을 숨겨서 키우게 된 것이다.
나로서는 그저 쌍둥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받게 된 상황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럼 네르바가 숨어서 살던 곳이 피레타 공작가였겠군.’
이유야 어쨌든 황후 소생이자 황태자의 쌍둥이다.
어지간히 믿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면 결코 쉽게 아이를 보낼 수 없을 터.
하지만 개국공신 가문인 피레타 공작가라면 황실에서도 충분히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피레타 공작가에서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숨어서 살아야만 했지. 하지만 형님께서 마족들에게 돌아가신 뒤로 상황이 변했다.”
“아드리안 황태자의 자리를 탐낸 건가?”
“헛소리!”
쌍둥이 형의 자리를 노렸냐는 내 질문에 네르바는 분노를 보였다.
“쌍둥이로 태어나 서로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되었지만, 딱히 형님을 미워한 적은 없다. 형님은 정말 훌륭한 분이셨으니까.”
“그럼 왜 아드리안 황태자를 사칭한 거지?”
“제국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다. 빌헬름이 즉위한 이후로 제국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았고, 이를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지.”
“그래서 아드리안 황태자를 흉내 냈다? 하지만 빌헬름은 이미 죽었는데 왜 이제 와서?”
“카시안 공작이 그 뒤를 이었지. 달라질 건 없었다. 탐욕으로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이라면 누가 황제가 되든 제국에 좋은 영향을 주지는 않을 테니까.”
맞는 말이었다.
그나마 빌헬름보다야 카시안 공작이 낫겠지만 그라고 문제가 없지는 않다.
양쪽 다 기사들을 주축으로 권력을 손에 쥐었던 만큼 제국의 권력이 기사들과 군에 몰리게 될 테니까.
‘군인이 정치해서 좋을 건 없지.’
역사가 증명한 사실이다.
힘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쓰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고 한 번 손대기 시작하면 두 번, 세 번째는 당연하다는 듯 따라오니까.
“그렇군.”
이 대화로 네르바에 대해서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외교형 영웅으로서 가지고 있는 스킬들이 조금 흉흉하기는 하지만 피레타 공작가 소속답게 평화를 지향하는 인물이었다.
단지 그 과정에서 수단을 가리지 않는 타입일 뿐.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부분이 있군. 반제국 동맹에 대한 복수는 어쩔 거지?”
빌헬름처럼 모든 국가를 침략하겠다는 정신 나간 발상은 없다고 해도 반제국 동맹에 대한 침략 여부는 네르바 개인이 쉽게 정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피의 연회도 그렇고 빌헬름의 죽음도 그렇고 그들은 큰 죄를 저지른 입장이었다.
“그들을 모른 척 넘어갈 건가? 아드리안 황태자의 죽음 역시 그들 때문인데?”
내 물음에 네르바는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아드리안 황태자의 죽음은 그로서도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압박 정도는 하겠지. 하지만 전쟁까지 지속하고 싶지는 않다. 반제국 동맹을 무너트리게 되면 대륙 정복에 대한 야망을 제어할 수 없게 될 테니까.”
그러나 네르바는 반제국 동맹에 대한 분노를 접으려 하고 있었다.
반제국 동맹을 무너트리면 4개 국가의 영토가 로스니아 제국에 들어오게 된다.
그렇게 되면 대륙 정복이라는 제국의 숙원에 크게 다가가는 셈.
아무리 네르바가 황태자 역할을 잘 수행하고 설령 황제가 된다고 해도, 아래에서 전쟁을 원하는 목소리를 누르기 어려워질 것이다.
그러니 아예 반제국 동맹을 공격하지 않는 게 최선이라 여기는 듯했다.
역시 직접 이 자리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직접 아드리안 황태자를 보지 못해 그가 사실 네르바란 이름을 가진 가짜라는 걸 몰랐다면.
그리고 피레타 공작가란 이름을 단서로 그를 압박해 이렇게 둘만의 시간을 만들지 못했다면.
그렇다면 이렇게 진실을 알게 되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소득이 괜찮군.’
직접 봐야만 얻을 수 있는 귀한 정보였다.
앞으로의 내 행보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로스니아 제국에 정식으로 동맹을 요청하지.”
동맹이란 말에 네르바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동맹이라니?”
로스니아 제국에는 동맹이 필요 없었다.
선전 포고를 해버렸기에 동맹을 맺을 수 있는 상대도 없었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 국가들의 전쟁에 국한되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나는 네패스 왕국의 군주이기 전에 한 사람의 마법사로서 마족들을 쫓고 있다.”
나는 네르바에게 아스카의 정보를 풀었다.
아인츠발트에 대한 내용은 숨겼지만 그를 제외한 정보는 굳이 아낄 필요가 없었다.
그래야만 로스니아 제국도 진지하게 동맹에 대해서 고민하게 될 테니까.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기에 동맹이 필요 없다. 다른 국가들을 상대로는 그런 말이 통할지 모르겠지만 마족들은 다르지.”
녀석들의 인류에 대한 복수는 로스니아 제국이라고 해도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렇기에 충분히 손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마족은 어차피 인류에게 있어 공공의 적이니까.
“마족들을 토벌하는 것에 협력해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그대의 정체에 대해서는 영원히 함구하도록 하겠다.”
“솔직히 믿기지 않는군.”
네르바는 아스카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당연했다.
내가 이야기한 아스카의 무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까.
어쩌면 속으로는 내가 동맹을 이끌어내기 위해 아스카의 힘을 과장했으리라 여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족을 상대하는 것에 있어서는 인류가 힘을 합쳐야 하지. 게다가 마족들 역시 복수해야 할 대상은 맞고.”
네르바는 고심 끝에 내가 내민 제안을 받아들였다.
정체가 들통난 상황에서 이 정도는 얼마든지 용인할 수 있는 범위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 아래에 숨겨진 함정도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