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8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87화
187화
카시안 공작의 죽음 앞에 그를 따르던 군대는 모두가 큰 충격을 받았다.
제국 최강의 기사로서 그가 쌓아온 명성이나 현재 제국에 끼치는 영향력 등.
빌헬름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로스니아 제국을 뒤흔들 정도로 거대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받게 될 충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안덴스 후작!”
카시안 공작 휘하의 영주들이 안덴스 후작에게 달려들려고 할 때 안덴스 후작은 그들을 모두 무시했다.
대신 어느 한쪽을 보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는데 그 기이한 행동에 영주들은 주춤거렸다.
“뭐지? 어디를 보고 저러는 거야?”
“저, 저쪽을 보게!”
저 멀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거대한 군세.
그 선두에서 펄럭이고 있는 황실의 문장 앞에 영주들은 카시안 공작의 죽음에 대한 분노조차 잊고 말았다.
“황실의 문장을 단 군대라고? 저게 어떻게 여기에 있을 수 있지?”
빌헬름의 사후로 더는 황실의 문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기에 영주들은 큰 혼란을 느꼈다.
그리고 그 혼란은 가장 앞에서 군대를 이끌고 온 아드리안 황태자의 모습에 정점을 맞이했다.
“황태자 전하!”
“이게 무슨? 황태자 전하께서는 분명 돌아가셨다고 하지 않았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영주들의 동요는 즉시 휘하 부대로 퍼져 나갔다.
피의 연회에서 죽은 줄로만 알고 있던 아드리안 황태자의 귀환.
감히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아드리안 황태자는 자신을 향하는 그 시선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섰다.
“카시안 공작은 반역자다.”
그는 가장 먼저 카시안 공작을 따르던 이들에게 카시안 공작을 반역자로 선언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황태자의 말이었기에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었다.
“그는 자격도 없는 빌헬름을 황제로 옹립하여 황실을 능멸하였고, 그 빌헬름을 죽음으로 내몰아 황제의 권력을 자신이 갈취했다.”
덤덤한 이야기 속에 담긴 황태자의 싸늘한 눈빛에 카시안 공작가의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안덴스 후작이 카시안 공작을 죽인 게 황태자의 지시라는 건 눈치만 있으면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카시안 공작을 따른 그들 역시 같은 죄로 처벌받게 될 것이다.
“그대들은 어떠한가?”
아드리안 황태자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날아오자 기사들은 몸을 움츠렸다.
“법률을 따르자면 예외 없이 반역의 죄를 물어 가족들까지 남김없이 극형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극형이란 말에 모두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두려워하는 대신에 전의를 불태웠다.
어차피 반역죄로 처참하게 죽어야 할 운명이라면 적어도 발버둥이라도 치는 쪽이 낫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게다가 카시안 공작이 허무하게 죽었다고 하지만 그를 따르는 군대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머릿수로는 황태자가 이끌고 온 군대와 비교해 전혀 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 결과가 어떨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제국은 너무 많은 피를 흘렸다.”
그때 아드리안 황태자가 생각지도 못한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최후의 전투를 각오하고 있던 카시안 공작의 기사들은 그 말에 눈을 번쩍 떴다.
“과거의 찬란하고 아름다웠던 제국의 모습을 그대들도 알 것이다. 그러나 내전으로 지금의 제국은 어떻게 변했는가?”
아드리안 황태자의 말에는 모두가 공감했다.
선대 황제가 이끌어가던 평화로웠던 제국은 마족과의 전쟁을 시작으로 조금씩 국력이 쇠해갔다.
그나마 그 전쟁은 인류를 대표하는 국가로서 마족과 싸웠다는 그럴듯한 의미라도 있었으나 이후의 내전은 달랐다.
제국 내에서 제국민들을 희생하며 치러진 처절한 싸움이었다.
“나는 이 이상으로 제국의 피를 보고 싶지 않다. 그렇기에 특별히 지금 이 자리에서 항복하는 이들에게는 반역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른 죄도 아니고 반역을 눈감아 주겠다는 아드리안 황태자의 선언.
그 말에 최후를 각오하고 있던 기사들의 눈빛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대로 싸우면 이기든 지든 그들에게 남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패배한다면 반역자로서 지워질 것이고, 승리한다고 한들 황태자를 공격한 반역자로 남을 뿐이기에.
그러나 지금 아드리안 황태자의 약속이 실현된다면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선택은 그대들의 몫이다.”
아드리안 황태자는 선택권을 각자에게 넘긴 뒤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물러났다.
카시안 공작의 군대는 그런 아드리안 황태자의 뒷모습을 보다가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반역자로서 끝나느냐, 아니면 죄를 용서받고 황태자를 따르느냐.
영주들 역시 고민에 잠겼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때 한 기사가 검을 뽑으며 소리쳤다.
“현혹되지 마라! 고금을 통틀어서 반역이 용서받았던 전례는 없다. 우리가 무장을 해제하고 투항한다면 그때 황태자는 우리를 무참히 살해할 것이다!”
그 외침에 항복으로 마음이 기울던 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눈앞에서 자신들을 용서해 주겠다는 황태자의 제안은 무척이나 달콤했다.
마지막까지 싸우겠다는 마음이 모두 사라질 정도로.
그러나 잘 생각해 보니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어떤 국가의 역사를 뒤져봐도 반역이라는 중죄가 용서받은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 전하신데 설마 빈말을 하시겠어?”
그러나 황태자가 그들에게 푼 독은 너무나도 달콤했다.
어차피 싸워서 이겨봐야 진짜 반역자가 되는 게 전부인 상황.
게다가 황태자의 신분으로 자신들에게 거짓말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곳에 듣고 있는 귀만 해도 수만에 이르니까.
만약 황태자가 자신의 말을 어긴다면 이는 황실의 명예에 먹칠하는 거였다.
“우리가 뭐가 아쉬워서 항복해야 한다는 말이냐? 충분히 이길 수 있는데!”
“이겨봐야 우리에게 뭐가 남는다고!”
황태자의 말에 따라서 항복해야 한다는 의견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의견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아드리안 황태자는 그런 모습을 보며 남몰래 미소를 흘렸다.
어차피 아무리 잘 설득해 봐야 피를 흘리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는 일.
단지 상대에게 망설임을 주는 것만으로도 그가 직접 나서서 흔든 것은 의미가 있었다.
“준비하게.”
“명령을 받듭니다.”
제던 자작은 깊이 허리를 숙인 뒤 휘하 병력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황태자를 따라온 귀족들도 제던 자작과 함께 돌격을 준비했다.
전투가 임박하자 카시안 공작 군대의 소란은 더욱 커졌다.
지금이라도 항복하거나 달아나야 한다는 쪽과 맞서 싸우려는 쪽이 서로 목청을 높였고, 그 때문에 대열은 위태롭게 요동쳤다.
“카시안 공작이 죽고 안덴스 후작이 배신하니 오합지졸로 변했군.”
돌격을 앞둔 상황에서 제던 자작은 이미 전투의 승패가 어떻게 될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는 힐끔 아드리안 황태자를 돌아봤다.
가벼운 말 몇 마디로 반역자들의 군대를 뒤흔들어서 손쉽게 승리를 가져오는 뛰어난 지략.
처음에는 그도 아드리안 황태자의 생환에 대해 반신반의했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건 진짜 아드리안 황태자가 맞다는 사실을.
‘황태자 전하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짓이 가능할까?’
그 명성 높던 선대 황제가 예전부터 일찌감치 점찍어 뒀던 총명한 후계자.
그때의 능력이 여전한 모습에 제던 자작은 일말의 의심조차 떨쳐내고 돌격을 명했다.
황태자를 따라나선 군대는 거센 파도가 되어 반역자들을 휘몰아쳤다.
사기가 꺾이고 대열이 무너진 군대는 아무리 강병이라고 해도 힘을 쓸 수 없었다.
살기 위해서 도망치는 이들과 어떻게든 맞서려는 이들이 서로 뒤엉키고 아군의 도주와 전방 대열의 패퇴로 공포는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전쟁이라고 하기도 뭐한 일방적인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모두 쓸어버려라!”
“반역자들을 남기지 마라!”
승기가 넘어오자 황태자를 따르는 이들은 더욱 용맹하게 적들을 몰아쳤다.
불과 반나절 만에 수천의 목숨이 고혼이 되어 바닥에 흩뿌려졌고 카시안 공작의 군대는 처참한 흔적만 남긴 채 무너졌다.
“압도적인 성과입니다.”
사실 죽은 이들의 숫자는 군대의 규모에 비해서는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공포의 전염은 매우 빨라서 죽은 이보다 달아난 이들이 훨씬 많았으니.
그러나 그렇게 달아난 이들이 다시 하나로 뭉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수장인 카시안 공작이 이미 죽었고 그를 따르는 군대가 대패했다는 게 알려지면 겁이 나서라도 합류하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드리안 황태자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새 황태자의 시선은 안덴스 후작을 향하고 있었다.
“그대의 죄를 아는가?”
아드리안 황태자는 검을 굳게 움켜쥔 채 무릎을 꿇은 안덴스 후작의 앞으로 걸어갔다.
“물론입니다.”
“그 죄를 인정하는가?”
“그렇습니다.”
아드리안 황태자는 검을 높이 들었다가 힘차게 내리쳤다.
콱!
그러나 그 검은 안덴스 후작의 목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때렸다.
“안덴스 후작.”
“예, 황태자 전하.”
“그대의 후작 작위와 봉토, 재산을 전부 몰수하겠다. 또한 그대에게 평생토록 종군하여 노역할 것을 명한다. 이의가 있는가?”
“황태자 전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말에 안덴스 후작은 만세를 외치며 절을 올렸다.
이후 아드리안 황태자의 생환 소식이 제국을 넘어 대륙에 퍼지기 시작했다.
* * *
로바크를 처치하고 왕궁으로 돌아왔을 때 네일이 불안하게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다.
“오셨습니까?”
“안 좋은 소식이 있는 모양이군.”
마족 하나를 별다른 피해도 없이 제거해서 좋아졌던 기분이 단번에 추락했다.
아직 무슨 소식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네일이 괜히 이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닐 테니까.
“좋은지 안 좋은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애매하기 짝이 없었다.
큰일이 일어난 건 분명한데 그것이 우리에게 이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 판단이 안 서는 모양이었다.
“무슨 소식이기에?”
“그게 솔직히 정보가 잘못된 건 아닌지 혼란스럽습니다.”
네일은 말을 하려다 말고 주저했다.
좋은 소식인지 나쁜 소식인지도 모르는데 그 진위조차 불확실하다니?
이쯤 되면 나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다.
“일단 말해라.”
서둘러 재촉하자 네일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로스니아 제국의 카시안 공작이 죽었습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다.
5티어 전투형 영웅이며 그중에서도 정점에 있는 게 카시안 공작이다.
설령 같은 5티어 전투형 영웅인 탈론이라고 해도 정면에서는 상대가 되지 못할 텐데 그 카시안 공작이 죽었다니?
케프리 남작의 재능이 카시안 공작에 밀리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케프리 남작은 외팔이었고 카시안 공작에게는 제국의 유능한 영웅들과 압도적인 병력이 있었으니까.
“누가 카시안 공작을 죽였지? 케프리 남작인가?”
“진짜 문제는 그겁니다. 피의 연회에서 죽은 줄 알았던 아드리안 황태자가 돌아와 카시안 공작을 반역자로 규정하고 처단했답니다.”
순간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케프리 남작이나 휘하 귀족의 배신 정도를 예상했는데 느닷없이 황태자라니?
“내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게임에서 로스니아 제국을 거의 멸망까지 몰아봤지만, 아드리안 황태자의 귀환 같은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애초에 설정상 피의 연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없으니까.
레일리라는 전례가 있으니까 아예 불가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분명 예상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혼란스러운데.’
혹시 이것도 가이스트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해 봤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가이스트는 이미 마족들을 밀어주고 있었고 그중에서도 아스카라고 하는 확실한 패를 뽑았으니까.
아직 대면해 본 적은 없으나 녀석의 위험성은 아인츠발트가 말해주는 정보나 위니스의 행동을 통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니 여기서 갑자기 마족도 아닌 인간을 살린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레일리처럼 운 좋게 살아남은 경우인가?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늦게 나온 거 같은데.’
같은 사례인 레일리의 경우 내전이 시작될 때쯤에 이미 암약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마이어드 후작이라는 든든한 배경의 도움이 컸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레일리는 내전에 개입했을 것이다.
어떻게든 내전에서 힘을 키워야만 대영주들을 상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둘의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로스니아 제국은 왕실이 모두 멸족되어 버린 타국과 달리 비교적 건재한 황실을 보유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빌헬름은 같은 피를 이은 형제들을 죽이는 대숙청을 감행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 이상했다.
만약 그 시기에 제국의 황태자가 돌아왔다면 빌헬름은 절대 황제의 자리에 앉지 못했을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만일 빌헬름에 맞설 자신이 없어 모습을 숨겼다면, 반제국 동맹의 손에 빌헬름이 죽었을 때라도 나왔어야 했다.
당시 제국은 카시안 공작이 간신히 분열을 수습하고 억지로 통제하고 있었으니까.
황태자가 돌아오기 가장 좋은 시기가 바로 그때였다.
“상대가 황태자가 분명한가?”
“설마 다른 곳도 아닌 로스니아 제국에서 황태자를 사칭하겠습니까?”
네일의 반문에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로스니아 제국에서 다른 인물도 아니고 황태자를 사칭한다는 것.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었다.
만약 가짜라는 게 들통난다면 그 후폭풍은 누구도 감당하지 못할 테고.
“게다가 카시안 공작을 죽인 것만큼 확실한 증거도 없지요.”
이어지는 이야기에도 설득력이 있었다.
카시안 공작이 비록 반제국 동맹에게 패배하며 조금 주춤하고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누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다른 귀족은 누가 나서더라도 카시안 공작과 같은 영향력을 보일 수 없다.
그런 일이 가능한 건 진짜 황태자뿐이다.
‘곤란해졌는데.’
아드리안 황태자는 게임에 등장조차 하지 않았던 인물.
그렇기에 그의 성격이 어떤지는 조금의 단서도 없었다.
앞으로의 행보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일단 정석적으로 생각하면 카시안 공작의 세력을 찢어놓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려고는 하겠지만, 문제는 이후였다.
카시안 공작처럼 반제국 동맹에 대하여 전쟁을 지속하며 대륙 정복의 야망을 보일 것인가?
아니면 반역자가 일으킨 전쟁을 멈추고 자신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데 집중할 것인가?
로스니아 제국의 행보는 다른 국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파급력을 지녔기에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아스카에 집중하기에도 바쁜 상황인데.’
베이브라는 마족을 붙잡아 아스카의 불사를 깰 방법을 찾는 것.
그 하나에만 집중해도 어려운 상황인데 이런 변수는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그래도 일단 당장 움직이지는 못하겠지.’
카시안 공작의 세력을 꺾을 동안 로스니아 제국은 사실상 내전 상태가 된다.
그사이 어떻게든 대응책을 찾고 가능하면 아드리안 황태자에 대한 정보를 모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