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8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86화
186화
황실 문장의 등장에 케프리 남작도, 안덴스 후작도 입을 열지 못했다.
물론 로스니아 제국의 황실은 완전히 망한 게 아니었다.
빌헬름의 숙청을 피해 타국으로 망명한 이들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빌헬름의 죽음 이후 다시 제국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 황족이나 황실의 문장을 걸 수 있는 건 아니다.
오직 황제와 그 직계만이 황실의 문장을 사용할 수 있었다.
‘대체 누구지?’
안덴스 후작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빌헬름의 숙청을 피해서 달아났던 여러 황족들.
그러나 그중에서 다시 제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쭉정이뿐이었다.
그들이 숙청을 피할 수 있던 것도 빌헬름이 처치해야 할 우선순위에서 벗어난 덕분이었으니.
그렇기에 현재 남은 황족 중에서 황실의 문장을 걸 수 있을 만한 인물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뭣들 하는가? 황실의 문장 앞에서도 뻣뻣하게 허리를 세우다니?”
제던 자작은 충격에 빠진 케프리 남작과 안덴스 후작을 향해 한마디를 하고 말에서 내려 납작 엎드렸다.
제아무리 작위를 가진 귀족이라고 한들, 황실의 문장 앞에서는 최대한의 존중을 보여야 했다.
“모두 엎드려라!”
케프리 남작도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바닥에 엎드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나 안덴스 후작은 엎드리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 제국에는 황실의 문장을 걸 수 있는 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누가 감히 황실의 문장을 사용한다는 말이냐? 황제 폐하와 그 식솔 중 직계는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안덴스 후작은 오히려 호통을 쳤다.
감히 황실의 문장을 멋대로 사용한다고.
“이런, 안덴스 후배님. 머리에 문제가 있는 모양이군. 어찌 직계가 없다고 말하는 거지? 아직 남은 분이 계시는데.”
제던 자작의 말에 안덴스 후작은 혹시 자신의 기억이 잘못된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만큼 제던 자작의 행동이 당당했으니.
그리고 상식적으로 황실의 문장을 사칭하는 간 큰 범죄는 누구도 저지를 수 없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그 핏줄 모두가 죽음을 면할 수 없으니.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문장을 걸 만한 이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누구란 말이냐?”
“누구긴. 아드리안 황태자님이지.”
“누구?”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거론되자 안덴스 후작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드리안 황태자.
황태자라는 직책에서 알 수 있듯이, 로스니아 제국 선대 황제가 직접 정했던 후계자였다.
그는 황자 중에서 가장 뛰어났고, 제국의 귀족들도 그가 다음 대의 황제가 되는 걸 당연시했었다.
그러나 그건 모두 옛날이야기였다.
“제던 자작, 혹시 미쳤나?”
아드리안 황태자는 이미 예전에 죽었다.
피의 연회에서 선대 황제와 함께 마족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빌헬름이 다른 형제들을 밀어내고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신 게 언젠데 그딴 망발을 내뱉는…….”
“누가 죽었단 말이지?”
안덴스 후작이 제던 자작에게 소리칠 때였다.
위압적인 목소리가 안덴스 후작의 말을 끊어내며 주변을 잠식했다.
어디선가 들어봤던 그 익숙한 목소리에 안덴스 후작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화, 황태자 전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린 안덴스 후작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이미 예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아드리안 황태자가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 황태자 전하께서는 분명…….”
“그래, 죽을 뻔했었지.”
아드리안 황태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안덴스 후작은 그가 자신이 기억하던 모습과 상당히 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미남으로 이름 높았던 아드리안 황태자의 얼굴에는 흉터가 길게 남아 있었고 귀도 한쪽이 뭉개져 있었다.
거기에 움직이는 걸음걸이 역시 어색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이렇듯 살아 있다.”
그러나 모습이 엉망이 되었음에도 안덴스 후작은 아드리안 황태자를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주변을 짓누르는 위압적인 분위기는 과거와 마찬가지였으니까.
“무릎 꿇어라, 안덴스 후작.”
아드리안 황태자의 말에 안덴스 후작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지만 놀랍게도 아드리안 황태자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안덴스 후작은 곧장 무릎을 꿇고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안덴스 후작의 외침에 휘하의 군대도 서둘러 복창했다.
아드리안 황태자는 주변을 슥 훑었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어디에도 그와 눈을 맞추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두가 바닥에 엎드렸으니.
“그대들 모두 많이 혼란스러울 것이다.”
아드리안 황태자는 그제야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귀신이 아니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
안덴스 후작은 그 말에 몸을 떨었다.
아드리안 황태자의 상태로 봤을 때, 아무래도 피의 연회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듯했다.
그러나 이는 절대 기쁜 일이 아니었다.
그 뒤로 제국은 황제의 자리를 둘러싼 내전을 치렀고 이 과정에서 빌헬름을 황제로 옹립하였다.
황태자가 살아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황제를 세운 건 죽어도 할 말이 없는 대죄였다.
황태자가 죽은 줄 알았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황제의 권위는 절대적.
인간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사연이 있더라도 그게 황제의 권위를 흔들 수는 없다.
빌헬름을 옹립했던 이들에게 무자비한 피바람이 몰아칠 것은 자명했다.
게다가 카시안 공작을 따라서 황제의 권력 일부를 양도받아 전쟁을 일으킨 건 그런 변명조차도 불가능한 죄였다.
‘끝났다.’
안덴스 후작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될 자신의 미래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가 카시안 공작을 따른 것은 카시안 공작을 황제로 옹립하고 대신 자신이 제국의 2인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황태자가 돌아온 현재, 그는 그저 반역자에 불과했다.
‘모든 게 끝났어.’
감히 저항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드리안 황태자의 뒤에 도열해 있는 군세에는 이번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대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곧 그들이 세력적으로 카시안 공작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카시안 공작이 아무리 대단한 기사라고 해도 제국민들이 황태자와 카시안 공작 중 누구를 따를지는 뻔한 일이었다.
로스니아 제국에서 황제의 권위는 절대적이니까.
“고개를 들어라, 안덴스 후작.”
아드리안 황태자의 말에 안덴스 후작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자비를 구하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런 게 통할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안덴스 후작 스스로가 잘 알았다.
“카시안 공작이 근처에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주변 마을들을 불태웠다는 것도.”
안덴스 후작은 더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지른 죄가 너무 컸다.
“그대에게 기회를 주마. 식솔들만은 살릴 수 있는 기회를.”
하지만 이어지는 아드리안 황태자의 말에 안덴스 후작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죽음은 이미 확정적이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가족만이라도 살려야 했다.
“무엇을 하면 됩니까?”
“반역자 카시안 공작의 목을 가져와라.”
* * *
‘소식이 늦군.’
카시안 공작은 안덴스 후작으로부터 통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역자인 케프리 남작의 위치를 파악했고, 거의 몰아넣었다고 하니 아마 전투 때문에 늦어지는 듯했다.
‘그래도 금방 승전보가 전해지겠지.’
케프리 남작이 보급 부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던 건 행운이 따라줬기 때문이었다.
1차 보급 부대는 제국 내에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2차 보급 부대는 그 적이 설마 또 자신들을 노릴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멍청한 일이기는 했으나, 결국 이 같은 이점이 있었기에 승리했을 뿐이고 그 과정에서 케프리 남작의 군세는 상당히 소모된 상태였다.
안덴스 후작이 몇 배는 되는 대군을 이끌고 간 이상 케프리 남작의 죽음은 정해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카시안 공작 전하.”
그때 마침 곁에 있던 마법사가 카시안 공작을 돌아봤다.
“무슨 일이냐?”
“케프리 남작을 생포했다고 합니다!”
기다리고 있던 승전보였다.
카시안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역시 안덴스 후작이라면 해낼 줄 알았지.”
제국에서 알아주는 마법사다운 솜씨였다.
카시안 공작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반역자 놈은 어디에 있지?”
“지금 이곳으로 잡아 오고 있다고 합니다.”
“감히 제국의 숙원을 방해한 놈이다. 절대 곱게 죽일 수는 없지.”
전투 도중에 죽을 줄 알았는데 생포했다는 것에는 카시안 공작도 놀란 상태였다.
하지만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카시안 공작은 케프리 남작의 방해로 인해서 황제가 되고자 하는 자신의 목표가 멀어진 것에 분노하고 있었으니.
“고문을 준비해라. 입에서 제발 죽여달라는 소리가 나올 때까지 고통을 맛보게 해줄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올 무렵 안덴스 후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덴스 후작, 참으로 고생이 많았네.”
카시안 공작은 안덴스 후작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케프리 남작의 정체를 알아내고 직접 추격하여 생포하기까지.
안덴스 후작이 세운 공은 결코 작지 않았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카시안 공작의 공치사에 안덴스 후작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무언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지만 카시안 공작은 안덴스 후작이 피곤해서 그렇다고 여겼다.
실제로 안색이 좋지 않고 몰골도 영 엉망이었다.
‘의외로 고전했나 보군.’
케프리 남작이라는 녀석이 생각보다 대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카시안 공작은 곧 죽을 녀석의 실력 따위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반역도들의 수괴는 어디에 있나?”
“안쪽입니다. 따라오시지요.”
안덴스 후작이 뒤를 가리키며 안내하겠다는 뜻을 보였다.
하지만 카시안 공작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저쪽으로 끌고 오게.”
이에 카시안 공작은 미리 준비된 고문장을 가리켰다.
그에 안덴스 후작의 표정이 살며시 일그러졌다.
‘순순히 좀 따라오지.’
카시안 공작은 제국 최강이라는 명성을 가진 기사였다.
그런 이가 지금 자신을 따르는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황.
아무리 안덴스 후작이라 해도, 지금으로서는 카시안 공작을 죽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미리 함정을 파둔 안쪽으로 유인해서 다른 병력들과 떨어뜨리려 한 것이다.
그런데 카시안 공작은 그 잠깐 걷는 것도 귀찮았는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돌발 상황이었지만 안덴스 후작은 이를 내색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공작 전하. 송구하지만 제가 몸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안덴스 후작은 하는 수없이 다른 핑계를 댔다.
실제로 케프리 남작을 추격하면서 많은 고생을 했기 때문에 의심하기 힘든 변명이었다.
“아, 이런. 미안하네. 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군. 이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푹 쉬게.”
카시안 공작은 그제야 자신이 안덴스 후작을 신경 써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서둘러 안덴스 후작에게 쉬라고 말한 뒤 하는 수 없이 직접 안으로 움직였다.
다른 기사들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안덴스 후작에게 나름대로 성의를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안덴스 후작의 군대 사이로 들어가자 밧줄에 묶여 있는 남자가 보였다.
“저놈이 케프리 남작이군.”
카시안 공작은 성큼성큼 케프리 남작에게로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 다가가는 도중에 무언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뭐지?’
카시안 공작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분명 듣기로 케프리 남작은 팔 한쪽이 없는 외팔이 기사라고 하였다.
그런데 밧줄에 묶여 있는 이는 두 팔이 다 멀쩡히 붙어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저놈이 케프리 남작이 아닌가?”
카시안 공작이 그 사실을 지적할 때였다.
오싹한 느낌과 함께 카시안 공작의 본능이 미친 듯이 경종을 울려댔다.
“쳐라!”
사방을 둘러싸고 있던 안덴스 후작가의 기사들이 무기를 빼 들고 카시안 공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시안 공작은 당황하면서도 신속하게 자신의 검을 뽑아서 이에 대응했다.
촤아악!
카시안 공작의 일검에 달려들던 기사 두 명이 피를 흩뿌리며 나자빠졌다.
그러나 카시안 공작을 공격하는 안덴스 후작가의 기사들에게는 망설임이 없었다.
어차피 아무리 기습을 하더라도 희생 없이 제압할 상대가 아니란 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목숨을 초개처럼 던져가며 카시안 공작을 노렸다.
“크윽!”
팔다리가 잘려도 거리낌 없이 몸을 날리는 행동에 카시안 공작은 당황했다.
그저 단순한 배신이 아니었다.
상대는 반드시 자신을 죽일 각오로 목숨마저 내버린 채 덤비고 있었다.
콰앙!
게다가 그렇게 빈틈이 만들어지기 무섭게 강력한 마법이 날아들었다.
카시안 공작만이 아니라 그를 노리던 기사들까지 같이 휩쓸렸다.
“이런 미친!”
기사 하나를 붙잡아 방패로 사용한 카시안 공작은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절박하게 달려드는 이들.
심지어 아군의 공격에 오폭당하면서도 그들은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푸욱!
“큭!”
그 끊임없는 공격에 카시안 공작도 결국 상처를 입었다.
주변에 아군은 하나도 없고 적만이 가득한 상황이니 아무리 제국 최강의 기사라고 한들 한계가 있던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안덴스 후작가의 정예들이었다.
“그대로 붙잡아라!”
그때 돌아간 줄 알았던 안덴스 후작까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위력적인 마법으로 카시안 공작을 공격했다.
콰콰쾅!
카시안 공작의 곁에 있던 기사들도 그 공격에 함께 휩쓸렸다.
그러나 누구도 불만을 표하지 못했다.
가족이 반역으로 모두 죽어나가는 꼴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자신들이 죽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식으로라도 카시안 공작을 죽일 수 있다면 다행이었다.
“쿨럭!”
카시안 공작은 핏물을 울컥 토해냈다.
“안덴스 후작, 대체 어째서인가?”
죽음을 눈앞에 둔 카시안 공작은 안덴스 후작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자신처럼 황제의 자리를 노린다고 해도 이는 절대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카시안 공작은 그나마 제국 최강의 기사라는 명성과 공작이라는 작위가 있었다.
그러나 안덴스 후작은 명성도, 영향력도, 작위도 모두 부족했다.
그가 황제의 자리를 노리려고 해본들, 다른 대귀족들끼리 재차 내전이 일어날 뿐이었다.
“그냥 죽어주십시오. 원망은 저세상에서 받겠습니다.”
안덴스 후작은 별다른 설명 없이 한 번 더 마법을 날렸다.
무방비 상태가 된 카시안 공작은 그 마법에 허무하게 심장을 내주었다.
제국 최강으로 불리던 기사의 허망한 최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