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8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85화
185화
【 반역자 】
로스니아 제국으로 복귀한 카시안 공작은 바로 보급부대를 습격한 적들의 정체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 이미 안덴스 후작이 짐작하던 것처럼 그 범인이 지방 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케프리 남작이 주축이 된 파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눈이 뒤집힌 카시안 공작은 대대적인 토벌을 명령했다.
“감히 제국의 귀족이라는 자가 제국의 대업을 방해하다니!”
카시안 공작의 분노는 매서웠다.
출정했다가 퇴각했던 군대는 그대로 제국을 뒤집으며 인근 지역을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무수한 희생자를 만들었다.
반역을 저지른 이들과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곳은 모조리 불태웠기 때문이다.
“허…….”
그렇게 벌어진 참상을 앞두고 안덴스 후작은 할 말을 잃었다.
카시안 공작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물증도 없이 심증만으로 불태운 마을이 벌써 열 곳을 넘었다.
그 끔찍함에 명령을 수행했던 기사와 병사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한두 곳이라면 본보기로 이해할 수 있다. 케프리 남작을 잡는 게 급하니까.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해.’
잿더미가 되어버린 마을과 그곳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죽어버린 이들.
안덴스 후작은 지금이라도 카시안 공작을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소용없겠지.’
이미 카시안 공작의 과격한 행동에 대해서 우려를 표한 귀족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시안 공작은 자신을 말리려는 귀족들에게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분노가 전혀 식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냥 말해 봐야 듣지 않을 거다. 무언가 성과를 내서 가져가야 해.’
카시안 공작을 막기 위해서는 역시 반역의 주동자였던 케프리 남작을 잡는 게 최선이었다.
케프리 남작만 처치하면 카시안 공작의 실책을 모두 그에게 뒤집어씌울 수 있으니까.
그렇다고 로스니아 제국의 패배가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마음을 추스를 수는 있었다.
‘문제는 그 성과다. 케프리 남작, 잘 알려지지 않은 기사인데 실력이 만만치 않아.’
카시안 공작이 정말 완전히 미쳐서 마을들을 모두 불사른 건 아니었다.
카시안 공작에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다.
이미 케프리 남작은 카시안 공작이 퇴각해 올 것을 예상하고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자취를 감춘 상태.
아직 이 지역을 벗어나지 못한 건 분명하지만 솔직히 어디를 뒤져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카시안 공작은 케프리 남작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모두 없애기로 한 것이다.
‘분명 미친 짓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성과는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문제는 이런 짓을 하고도 성과가 없다는 것.
지금껏 불 지른 마을 어디에도 케프리 남작이나 그를 따르는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답답하군.”
안덴스 후작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다음 마을로 이동했다.
이번에 도착한 마을은 변방에 있는 마을치고는 규모가 상당했다.
적어도 천 명 이상은 살아가는 곳이었기에 이를 목격한 병사들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후작 각하. 설마 이곳까지 불태우시려는 건…….”
안덴스 후작의 아래에서 오랜 세월 종군했던 노기사가 그를 말리려 했다.
“그건 저들에게 달렸지.”
안덴스 후작은 군대의 움직임을 목격하고 마을에서 나오는 이들을 살폈다.
촌장으로 추정되는 그럴듯하게 차려입은 중년 남성이 안덴스 후작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저희 마을을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저는 촌장인 에버트입니다.”
그런데 그 인사가 조금 인상적이었다.
평범한 촌장에게서는 볼 수 없는 절제된 동작에서 안덴스 후작은 그가 군에 몸담았던 사람임을 눈치챘다.
“기사인가?”
“지금은 은퇴하였지요.”
촌장인 에버트는 은퇴한 기사였다.
안덴스 후작은 그의 움직임에서 발목이 불편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 은퇴를 하게 된 이유도 발목의 부상 때문일 것이다.
“은퇴하기 전에는 누구를 따랐지?”
“제던 자작님의 아래에서 종군했습니다.”
“제던 자작이라…….”
안덴스 후작의 눈가가 휘어졌다.
제던 자작은 안덴스 후작도 이름을 알고 있을 정도로 실력 좋은 마법사였다.
‘이래저래 곤란하군.’
섣불리 이곳을 건드렸다가는 제던 자작과 원수가 될 것이다.
딱히 그가 두렵지는 않으나 껄끄러운 건 사실이었다.
제국의 마법사들은 황실에서 운영하는 교육 기관에서 동문수학하는 경우가 많은데, 제던 자작은 그곳에서 안덴스 후작이 잘 따랐던 선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사적인 감정 때문에 카시안 공작의 명령을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
안덴스 후작은 제발 뭐라도 정보가 나오기를 바라며 에버트에게 물었다.
“나는 이 근방에 숨어 있을 발칙한 반역자들을 쫓고 있다. 그대는 제국의 보급 부대를 습격했던 반역자들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있는가?”
“도움이 되지 못하여 송구합니다만, 저는 아는 게 없습니다. 혹시나 뭔가 의심스러운 사람을 보거나 정보를 얻는다면 즉시 신고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런가.”
다른 마을과 같은 대답이었다.
안덴스 후작의 얼굴에 어둠이 드리워졌다.
“후작 각하, 제발…….”
노기사는 안덴스 후작의 곁에 바싹 다가와 안덴스 후작이 마을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하도록 만류했다.
에버트는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뭐지?’
그저 정보를 모으러 인근 마을을 돌아다니고 있다 보기에는 병사들의 배치가 이상했다.
좌우로 넓게 쫙 퍼진 게 마치 마을을 포위하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꼭 마을을 공격하려는 거 같은데.’
누군가 마을에 반역자가 숨어 있다는 거짓 신고라도 한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에 에버트는 심각한 얼굴로 안덴스 후작의 반응을 살폈다.
마을의 규모가 근방에서는 제법 알아주지만 그래 봐야 그냥 제국 변방의 마을이었다.
낯선 외부인이 찾아왔더라면 촌장인 그에게 반드시 보고가 왔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을 지키는 자경단의 젊은이들이나 숙박 시설을 운영하는 이들 중 누구도 외부인이 왔단 말을 하지 않았다.
‘만약 정말 공격하려고 한다면…….’
이 마을은 제던 자작이 그에게 하사한 봉토이자 그의 전 재산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제국에서 알아주는 대영주라고 한들, 자신의 재산을 파괴하게 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마을을 공격하는 거라면 촌장인 자신을 살려줄 가능성도 낮다고 봐야 했다.
이에 에버트의 손이 은밀하게 허리춤으로 이동했다.
대귀족이 찾아왔는데 검을 들고 올 수는 없는 일.
그러나 평범한 장식처럼 보이는 옷 매듭 아래에는 작은 단검이 숨겨져 있었다.
‘제발 그냥 가라. 이 마을에 반역자 같은 건 없으니까.’
하지만 이런 대비와 별개로 에버트는 자신에게 승산 따위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을을 둘러싼 병사의 숫자가 마을 주민들의 숫자보다도 많은 대군이다.
순순히 죽을 수 없어서 발악을 하려는 것이지 죽음 자체를 피할 수는 없었다.
움찔!
그때 갑자기 안덴스 후작이 고개를 돌렸다.
몇몇 마법사들도 어디선가 온 마나 파장을 전달받고 표정이 밝아졌다.
다른 마을에서 반역자들의 흔적을 찾았다는 보고였다.
“마법사들의 통신이 온 모양이군요.”
마법사와 함께 활동한 경험도 풍부했던 에버트는 안덴스 후작의 반응에 안도했다.
그의 표정이 밝아진 것으로 봐서 내용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 그러니 이만 돌아가야겠군. 한시가 급하니.”
안덴스 후작은 서둘러 군사를 물렸다.
에버트는 안덴스 후작이 이끌고 온 군대의 뒷모습을 보며 그제야 표정을 드러냈다.
“자경단장.”
에버트는 곧장 곁에 멀뚱히 서 있던 자경단장을 불렀다.
그는 은퇴한 에버트가 소일거리 삼아서 가르치고 있는 제자로, 발목을 다친 에버트를 대신해 몸을 써야 하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네, 촌장님.”
“자경단을 풀어서 인근 마을들을 살펴라.”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에버트의 지시에 자경단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반역자들을 이미 찾은 듯했기 때문이다.
“주변 마을들의 상태를 확인해. 무언가 일이 터졌을 것이다.”
에버트는 인근의 지형을 떠올렸다.
안덴스 후작의 군대가 거쳐 왔을 만한 경로에는 몇 개의 마을이 있었다.
만약 그 마을들이 무사하다면 자신이 그저 착각한 것이겠지만, 혹시 문제가 생겼다면…….
‘설마 아니겠지.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거야.’
에버트는 머리를 털어냈다.
그럴 리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제국의 군대가 제국민을 상대로 창칼을 들이밀다니?
반역자를 찾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는 덮을 수 없는 정신 나간 행동이었다.
* * *
“드디어 찾았군!”
안덴스 후작은 마법사들의 통신을 받고 마침내 케프리 남작의 흔적을 쫓는 데 성공했다.
케프리 남작은 제국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추적에 나서면 마을 사람들이 고발할 것을 우려해 아예 인적이 없는 험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결국 마을들은 아무 죄도 없이 불태워진 것이지만 안덴스 후작은 그 일을 머리에서 떨쳐버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 케프리 남작만 잡는다면 그 일은 케프리 남작의 소행으로 덮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덴스 후작인가.”
케프리 남작은 자신을 추격해 온 상대를 확인하고 인상을 찡그렸다.
어차피 잡힐 거라면 카시안 공작과 다시 한번 겨뤄보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케프리 남작. 대체 왜 제국의 귀족이면서 제국을 공격한 건가?”
안덴스 후작은 공격을 개시하기 전 케프리 남작이 어째서 반역을 저질렀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그 말에 케프리 남작은 당치도 않다는 듯 소리쳤다.
“웃기는 소리! 나는 제국의 충신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말이다.”
“뭐?”
안덴스 후작은 케프리 남작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놈들은 나를 반역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내 반역을 결정 짓는 건 황실이다. 카시안 공작 따위가 아니라!”
케프리 남작의 말에 안덴스 후작을 따르던 이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들은 대놓고 케프리 남작을 반역자라 불렀으나 엄밀히 따지면 케프리 남작의 반역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그 판단을 내릴 권한이 자신들에게는 없었으니까.
반역은 오로지 황실에서 판단해야 했다.
“오히려 황제 폐하를 죽음으로 내몰고 그 권력을 찬탈한 네놈들이야말로 진정 반역자가 아닌가?”
케프리 남작의 말에 그를 따르던 이들이 동조하며 안덴스 후작을 비난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카시안 공작과 그를 옹립하려는 대귀족들이야말로 반역자였다.
“제국의 병사들을 죽여놓고 한다는 소리가 그딴 개소리인가?”
그러나 안덴스 후작은 밀리지 않았다.
케프리 남작에게도 문제가 될 부분은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자신들이 반역자인지 여부를 놓고 판단할 권리를 지닌 건 황실뿐이었고, 케프리 남작은 같은 제국의 군대를 살해하였다.
그렇게 서로에 대한 비난이 한바탕 이어진 뒤 양측의 군대는 전열을 갖추었다.
‘여기까지로군.’
케프리 남작은 안덴스 후작이 이끌고 온 군대를 보며 혀를 찼다.
대충 살펴도 적의 숫자는 아군보다 몇 배는 되었다.
더구나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 합류하며 숫자를 늘리고 있었다.
“멈춰라!”
그런데 두 군대가 서로를 향해 움직이기 직전, 날카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케프리 남작과 안덴스 후작은 뜻밖의 상황에 당황하며 고개를 돌렸다.
“제던 자작?”
끼어든 이는 근방의 영주인 제던 자작이었다.
그는 휘하의 병력들로 양측 군대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대가 왜?”
케프리 남작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제던 자작을 보았다.
양쪽을 가로막는 건 언뜻 중립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이는 양측의 전력이 비슷할 때의 이야기다.
케프리 남작의 세력이 월등히 약한 현재로서는 그를 도와주려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케프리 남작은 제던 자작이라는 인물과 별다른 친분이 없었다.
제던 자작은 중앙에서 큰 힘을 휘두르는 대귀족의 차남으로서 케프리 남작 파벌과 달리 권력에 매우 근접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제던 자작. 이게 무슨 짓인가?”
당황하기는 안덴스 후작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서 갑자기 제던 자작이 나타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였다.
제던 자작은 자신을 주시하는 양측의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넘기며 우선 안덴스 후작에게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안덴스 후배님.”
후배라는 표현에 안덴스 후작은 인상을 일그러트렸다.
둘이서만 있을 때 사적으로 그런 표현을 써주는 것 정도는 넘어갈 수 있지만 이 자리는 그런 사적인 자리가 아니었다.
제던 자작이 그걸 모를 위인도 아니었고.
“설마 그대도 반역을 저지른 건가?”
“하하. 어찌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하십니까? 후배님의 재치는 예나 지금이나 처참하군요.”
제던 자작은 안덴스 후작의 말을 끔찍한 농담이라 표현하며 뻔뻔하게 넘겨버렸다.
“지금 내가 농담이나 하려는 것으로 보이나?”
“일단 기다려보십시오. 저라고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니까.”
제던 자작은 양측 군대의 흉흉한 투기에 혀를 찼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일단 몸을 들이밀어서 시간을 벌고 있었지만,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군대를 앞뒤로 두는 건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지만 사실 속으로는 온갖 욕설을 다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제던 자작이 군대를 가로막은 게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고 하자 안덴스 후작은 의문을 표했다.
바로 그때였다.
쿵쿵!
육중한 발소리와 함께 지축이 울릴 정도의 많은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덴스 후작이 알기로 이 근방에서 저 정도 숫자의 군대를 이끌고 올 만한 인물은 카시안 공작뿐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가진 깃발은 카시안 공작의 것이 아니었다.
“저게 어떻게?”
안덴스 후작은 문장을 살피고는 경악했다.
의문의 군대가 내건 깃발에는 황실의 문장이 걸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