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84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84화
184화
* * *
“정보는 이 정도면 다 얻은 거 같습니다.”
한나절이 더 지났을 무렵, 로바크는 더는 정보를 말하지 못했다.
위니스에 대해서는 처음에 말한 것 이상으로 알지 못했고 가이스트에 대한 내용도 베이브만 알고 있었다.
혹시 아스카에 대한 통제 수단 같은 걸 알고 있는가 했으나 그 문제 역시 베이브의 소관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졌다.
‘아스카와 마족들 사이에 균열이 있다.’
아스카에 대한 로바크의 시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마족들의 복수를 대신해 줄 구세주와 같은 존재를 보는 시선이 아니다.
마족들에게 있어 아스카는 그저 수단이었다.
‘아스카도 그렇겠지.’
자신을 부활시켜 줬다고 하지만 아스카가 마족들을 굳이 챙겨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특히 위니스나 가이스트 같은 외부 세력의 존재 때문에 더욱 그럴 것이다.
다른 마족들이야 힘으로 눌러서 복종시키더라도 외부 세력은 아스카가 어쩌지 못할 영역이었으니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위니스의 말을 믿고 군주가 되어야 했다.
‘진정한 불사도 가능하다고 했지.’
아스카가 진정한 불사에 상당히 목을 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부활하기 전이라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인츠발트 시대의 아스카는 늙은 마족이었으니까.
그러나 현재 부활한 아스카는 전성기였던 때의 힘과 젊음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불사에 집착하는 건 여전히 불사가 완전하지 못하다는 의미였다.
‘분명 여전히 치명적인 문제가 있는 거야.’
여기까지만 알게 된 것만으로도 아주 큰 수확이었다.
그러나 아직 부족했다.
결국은 베이브라는 마족을 붙잡아서 정보를 더 얻어야만 아스카를 물리칠 방법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놈은 어찌할까요?”
아인츠발트의 물음에 난 미련 없이 신호를 보냈다.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다.
이용 가치가 완전히 없어진 적을 굳이 살려둘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로바크는 우리와 접촉하면서 반대로 우리에 대한 정보도 얻었으니까.
“자, 잠깐만!”
선고를 내리는 내 모습에 로바크는 기겁하며 소리쳤으나 아인츠발트의 검은 이미 휘둘러졌다.
* * *
사교도로 돌아온 다니엘의 행색은 엉망이었다.
로바크를 버려두고 온 상황에 대해서 사제장이 납득할 수 있도록 위장을 한 것이다.
“사제장님!”
“아니, 그게 무슨 꼴인가?”
이를 목격한 사제장은 당연히 아연실색했다.
영지를 습격하는 일은 분명 위험 부담이 있었지만 그건 이후 영주의 추적을 우려한 것이지 절대 그 일 자체가 실패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돌아온 신도들의 숫자는 일부에 불과했으며 로바크는 보이지도 않았다.
“설마 실패한 건가? 신의 사자께서는?”
“그 신의 사자 때문에 실패한 겁니다!”
다니엘은 억울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게 무슨?”
“후우, 차근차근 설명드리겠습니다.”
다니엘은 영지를 앞두고 로바크와 신도들이 충돌했던 일을 각색해서 사제장에게 설명했다.
아인이나 네패스 왕국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었기에 그들끼리 싸움이 난 것으로 말을 맞춘 것이다.
“그딴 일이 벌어지다니.”
자신의 신도들과 로바크가 서로 싸웠다는 이야기에 사제장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아군끼리 싸웠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오히려 의심을 지웠다.
실제로 로바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기도 했으니까.
‘그 빌어먹을 마족 놈이 기어이 사고를 쳤구나!’
하다못해 어디 한적한 곳에서 싸운 것도 아니고 영지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마법까지 사용했다고 하니 분명 영지에 이 사실이 알려졌을 것이다.
“그럼 돌아오지 못한 신도들은?”
“송구합니다.”
다니엘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냥 싸운 걸 넘어 로바크에게 신도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사제장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치달았다.
다니엘을 비롯해서 이번에 보낸 신도들은 그저 평신도가 아니었다.
그를 도와서 다른 신도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이들로, 훗날에는 구울로 만들어서 이용할 귀중한 자원이었다.
“신의 사자께서는 어디로 가셨나?”
“성질을 내시면서 사라지셨습니다.”
“허어.”
사제장은 이마를 짚고 비틀거렸다.
‘왜 하필이면 그딴 마족을 보내서!’
머리가 복잡했다.
아스카교에서 내려오는 주술은 마족들에게 전수받은 것이었다.
그가 사제장으로서 권리를 누릴 수 있는 것도 마족들의 협조가 있는 덕분이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로바크의 행동은 확실하게 선을 넘었다.
죄 없는 신도들을 죽이는 녀석을 계속 따라서야 득 될 게 없었다.
‘신도들을 죽일 수 있다는 건 나 역시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거겠지.’
사제장은 언젠가 로바크의 잔혹한 손속이 자신에게도 들이닥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렇다고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고.’
아스카도 마족이었고 로바크도 마족이었다.
과거처럼 대륙의 패권을 쥔 종족도 아니고 죽을 대로 죽어 이제 몇이나 남았는지도 모르는 멸종을 앞둔 상황.
하지만 그렇기에 마족들 사이의 연결은 나름대로 끈끈할 것이라 추정되었다.
인간인 그가 아무리 로바크의 문제를 건의해 봐야 마족들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군.’
마족들이 아스카가 부활했다는 등 이야기를 하며 사교도들에게 세를 불리라고 했지만 사제장이 봤을 때 이는 허황된 이야기였다.
이미 대륙의 패권은 인간에게 넘어왔고 마족은 몰락해 버렸으니까.
사교도들을 모으고 구울을 동원한다고 한들 인류를 상대로 그리 승산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마족들을 믿을 수 없었다.
‘챙길 것만 챙기고 빠지는 게 낫겠어.’
사제장은 자신이 지금껏 축적한 재산을 떠올렸다.
2천 명의 신도들에게서 걷은 재물은 그 한 명이 홀로 살기에는 충분히 넉넉한 양이었다.
거기에 자신의 곁을 지켜줄 구울도 몇 마리 있었고.
‘마족 놈들의 복수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지.’
그렇게 사제장은 마족들을 배신하기로 결정했다.
“자네, 나 좀 도와주게.”
“무슨 일입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하지. 이대로라면 신의 사자 때문에 자네도 나도 다 죽을 걸세.”
다니엘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습니다.”
“이래서야 아스카의 뜻을 세상에 어찌 알리겠나? 그래서 말인데,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정착하는 게 어떤가?”
“좋은 생각이십니다.”
다니엘은 사제장의 말을 냉큼 받아들였다.
“그렇지? 하지만 세상을 빈손으로 살아갈 수는 없지 않나? 챙길 것도 많고.”
“물론이지요. 이봐들! 여기 모여봐.”
다니엘은 곧장 다른 신도들을 불러들였다.
모두 신도로 위장한 암살자들이었다.
“사제장님께서 거처를 옮기겠다고 하시니 모두 짐 싸는 걸 도와드리는 거야. 알아들었나?”
암살자들은 다니엘의 호출에 순순히 응했다.
사제장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다니엘이 그저 자신의 말을 잘 따른다고 생각했다.
“음음! 영주가 보낸 군대가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 서둘러주게.”
사제장은 신도들을 다독이며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다니엘은 그렇게 멀어져 가는 사제장의 뒷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사제장은 조심스럽게 벽면으로 다가갔다.
“이건 꼭 챙겨가야지.”
벽 아래를 두드리자 숨겨져 있던 비밀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아스카교의 사제장이 될 수 있던 주술을 비롯해 몇 가지 기밀문서가 있었다.
다니엘과 다른 신도들이 챙기는 것도 제법 값이 나가는 물건들이지만 이것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거기 숨겨져 있었군.”
그때 뒤에서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제장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분명히 문을 걸어 잠갔는데 어떻게 들어왔는지 다니엘이 빤히 금고를 살피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인가! 아니, 그보다 어떻게 들어왔나?”
사제장은 당황하며 다니엘을 다그쳤다.
여기에 있는 것들은 구울의 제조와 같은 핵심적인 기밀이기 때문에 아무리 신실한 신도라도 절대로 공개할 수 없었다.
“보자. 이게 주술인가?”
그러나 다니엘은 사제장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곁에서 지켜본 바에 의하면 사제장의 수준은 그저 조금 뛰어난 마법사에 불과했다.
암살자와 실내에서 일대일로 겨룰 때 그에게 승산은 전혀 없었다.
솔직히 암살자가 아니라 일반인이라도 기습이라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역시 내가 찾는 건 없군.”
다니엘은 금고 안에 들어 있는 기밀문서들을 살펴봤지만, 아스카의 불사에 관한 단서는 보이지 않았다.
교리 같은 건 이미 탈탈 털어봤기 때문에 더 볼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뿐이었다.
“영감.”
“뭐? 여, 영감이라고?”
“그래, 영감.”
다니엘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빼 들었다.
이제는 본업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물어볼 게 있으니까 힘 빼지 말고 대답해 주면 좋겠는데.”
“이 건방진 놈이!”
사제장은 다니엘을 향해 마법을 준비했다.
다니엘로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눈앞에서 뻔히 마법을 준비하는 걸 지켜봐 줄 리가 없으니까.
콰득!
뼈가 뭉개지는 소리와 함께 사제장의 허벅지에 칼날이 틀어박혔다.
“아아아악!”
사제장은 비명과 함께 나자빠졌다.
다니엘이 금고를 살피는 동안 슬쩍 거리를 벌렸는데 그런 사실이 무색하게도 반응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터무니없는 속도였다.
“네놈은 누구냐! 대체 정체가 뭐냔 말이다!”
사제장은 그제야 다니엘이 자신 앞에서 보여준 실력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건 그쪽이 알 필요 없고.”
다니엘은 연이어 반대쪽 다리를 공격했다.
두 다리의 허벅지 근육을 완전히 끊어버렸으니 사제장으로서는 달아날 길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셈이었다.
“신도들에게는 잘도 주술을 걸면서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안 걸어놨군.”
다니엘은 사제장의 모순적인 행동을 비웃었다.
비단 눈앞의 사제장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구울이라는 기사급 전력이 있기 때문인지 여러 사교도의 사제장들은 자신에게는 별다른 주술을 걸지 않았다.
“대체, 대체 나에게 원하는 게 뭐냐?”
사제장이 뒤늦게 대화를 청했으나 다니엘은 냉막한 시선만 보냈다.
고문을 하기에 앞서 중요한 건 상대로부터 완벽한 우위를 점하는 것이다.
상대가 적당히 타협하려고 하는 건 마음에서 굴복하지 않았다는 의미.
제 입으로 뭐든지 말하겠다는 소리가 나오기 전까지는 절대 적당히 해서는 안 된다.
특히 눈앞의 노회한 너구리 같은 자들은 더욱.
“대화할 자세가 안 되어 있군.”
다니엘은 연이어 사제장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사제장은 끔찍한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빠져나가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구울들이나 다른 신도들이 온다면!’
그러나 다니엘은 그런 사제장의 생각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도.
다른 신도들이야 신도로 위장하고 있는 부하들이 못 들어오게 막기만 해도 그만이었다.
변명도 쉬웠다.
사제장님이 일이 있어서 출입을 금했다거나 폐쇄를 명령했다는 등 대충 내뱉으면 된다.
구울의 경우에는 더 쉬웠다.
이미 이 자리에 오기 전에 부하들에게 짐을 싸도록 하는 척하면서 구울들을 처리하라고 일러두었으니.
구울이 나름 기사급 전력이라고 해도 명령을 받기 전까지는 무력하다는 건 이미 파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이 사실을 사제장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믿고 있던 것들이 하나하나 무너질 때야말로 상대를 확실히 굴복시킬 수 있으니까.
다니엘이 방을 나온 건 그로부터 2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 * *
“로바크가 죽었다.”
베이브는 색이 사라져 버린 로바크의 보주를 꺼내며 말했다.
이를 보던 마족들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제 남겨진 그들의 숫자는 아홉뿐이었다.
“상대는 누구지?”
“위치를 보면 마땅히 짚이는 상대가 없군.”
베이브는 지도에서 로바크가 나가 있던 지점을 가리켰다.
지금까지 죽은 마족들은 소문을 통해서 누가 죽였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로바크는 딱히 위험한 임무를 하고 있던 게 아니었으며 주변에는 로바크를 죽일 만한 존재가 없었다.
“그럼 아인츠발트라는 요정족이겠지.”
이에 대해 마족들은 금세 범인을 추측했다.
타르타로스에서 온 상대가 데려간 요정족 검사 아인츠발트.
마족을 죽일 수 있는 실력자 중 소재가 불분명한 존재는 그가 유일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속단할 수 없다. 일단 조금이라도 단서를 모아보지. 로바크는 사교도들을 모으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베이브의 말에 마족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는 로바크의 죽음에 대해 조사할 마족을 정하기 위한 회의가 이어졌다.
“그런데 아스카는 어디 갔지?”
모든 이야기가 마무리된 후 한 마족이 아스카를 찾기 시작했다.
죽은 로바크를 제외한 마족들이 모두 모인 상황에서 유일하게 아스카의 모습만 보이지 않고 있었다.
“잠깐 바람 좀 쐬러 간다더군.”
“이런 상황에서?”
베이브의 대답에 마족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평상시라면 모를까, 동족이 또 하나 죽은 상황에서 바람을 쐬러 나간다니?
“우리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건가.”
“뭐,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베이브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자신들이 고개를 숙인다고 해서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건 아스카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장은 말을 들어주니 그걸로 충분해.”
베이브의 이야기에 마족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카가 자신들의 복수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란다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마족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정말 코앞이다.’
베이브는 다가오는 복수의 순간을 떠올리며 두 눈을 감았다.
인간들의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