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74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74화
174화
* * *
‘생각보다 잘 버티는군.’
사트리안 왕국을 공격하고 있던 카시안 공작은 프레시아 공작의 분전에 조금 놀랐다.
제국의 이름난 이들이 열심히 준비해 온 전략이었다.
사전에 이를 예상할 수 없던 프레시아 공작으로서는 허를 찔린 것과 마찬가지인 셈.
그런데 프레시아 공작은 몇 개의 내벽을 통해서 제법 잘 막아내고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예상보다 그렇다는 것일 뿐, 양측의 전력 차이는 절망적이었다.
“오늘 안으로 함락시키는 건 무리겠습니다.”
안덴스 후작은 본인이 말하고도 표정이 처참했다.
하루쯤이면 사트리안 왕국 같은 약소국의 요새 정도는 무너트릴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비록 병력은 부족해도 프레시아 공작의 능력은 확실했다.
부족한 전력을 요새라는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여 어떻게든 시간을 끌고 있었다.
“이제 두 개의 벽만 넘으면 되는데.”
카시안 공작은 제국의 역사적인 행보를 기록하게 될 전투를 이렇게 지체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
첫 상대 정도는 단숨에 무너트리고 함락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어찌 방법이 없겠나?”
“내벽까지는 공성 병기를 들일 수 없으니까요.”
안덴스 후작은 외벽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카시안 공작을 주축으로 제국 최고의 기사들이 외벽의 문을 열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 공성 병기를 활용할 수는 없었다.
프레시아 공작이 언제고 외벽이 함락될 것을 고려해 아예 입구를 좁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내벽을 공격하는 것과 별개로 외벽을 무너트리고 진입하려 했으나 생각보다 외벽은 견고했다.
게다가 간신히 한쪽을 뚫어놓으니 높이만큼 잔해가 잔뜩 쌓여서 이를 치우는 것도 문제였다.
“참 잘 만든 요새입니다.”
그렇게 외벽을 정리한다고 끝도 아니다.
무너트리고 잔해를 치워야 할 내벽들도 많아서 공성 병기들은 시간을 계속 지체하고 있었다.
벽을 무너트리는 건 마법사들로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마나라는 한정된 자원을 쓰는 터라 금세 한계에 도달했다.
“쯧.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카시안 공작은 아쉬운 마음을 다독였다.
그래도 승리라는 결과는 명확했다.
이 전투도 그렇고 반제국 동맹과의 전쟁도 그럴 것이다.
“공작 전하!”
그때 통신을 담당하는 마법사가 하얀 게 질린 얼굴로 카시안 공작을 찾았다.
“무슨 일이냐?”
“무,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말에 카시안 공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떤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절대 나와서는 안 될 보고였다.
“문제라니? 대체 무슨 문제란 말이냐?”
“크라이더 왕국을 침공한 군대가 크라이더 국왕의 반격에 패퇴하였다고 합니다!”
카시안 공작을 비롯해 현장에 있던 이들 모두가 경악했다.
사트리안 왕국을 제외한 국가들에는 정확히 10만의 군대가 투입되었다.
이름 있는 기사나 마법사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제국의 군대라는 사실은 변함없었다.
그런데 패퇴라니?
“무슨 소리냐? 애초에 다른 군대는 적당히 공격하는 시늉만 하면서 버티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카시안 공작은 혹시나 크라이더 왕국을 공격한 지휘관이 전공에 눈이 멀어 멋대로 무리한 공격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그것 이외에는 벌써 패배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10만이라는 군대는 절대 한두 번의 전투로 무너질 수 없었으니.
“크라이더 왕국을 담당한 이가 누구였지?”
그랜트 백작의 물음에 하이록 백작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로던 백작이다. 그는 절대 어리석은 이가 아니야.”
로스니아 제국은 절대 인선을 허투루 하지 않았다.
정예가 모두 사트리안 왕국에 몰리는 만큼 다른 왕국을 침공한 병력들은 정예 없이 전쟁을 해야 하는 처지였다.
당연히 신중한 지휘관을 선별했고, 로던 백작은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귀족이었다.
“크라이더 왕국에서 회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회전?”
이어지는 보고 역시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병력에서 열세인 상대가 먼저 밖으로 나와서 전면전을 했다는 소리였으니까.
이는 로스니아 제국으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회전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설마 정예가 빠져 있다는 걸 눈치채고 벌인 일인가?”
귀족들은 동요하며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게 아니고서야 제정신이 박혔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런가.”
카시안 공작은 흥분했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회전이라니, 확실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정도라면 다행히 문제될 건 없을 듯했다.
제국 군사들의 희생은 아프지만 상대 역시 만만찮은 전력을 상실했을 테니까.
“그럼 양쪽은 공멸했겠군.”
“확실히. 회전을 벌였다면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터. 우리에게 나쁜 소식은 아닙니다.”
안덴스 후작도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쳤다.
당연히 크라이더 왕국 역시 만만찮은 피해를 입었을 터.
사트리안 왕국을 정리한 다음에 가서 그들을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이곳에 있는 병력도 그렇고 제국에는 50만의 군대가 남아있었으니까.
“그게….”
그러나 그런 제국 귀족들의 반응에 마법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크라이더 왕국의 병력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제국 귀족들도 쉽게 반응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멍한 얼굴로 보고를 올리는 마법사를 바라봤다.
“회전이 끝났는데 병력을 외부로 보내? 지원을 보낼 정도의 여력이 남았다고?”
하이록 백작은 경악했다.
이 말은 크라이더 왕국을 침공했던 군대가 대패했다는 소리였다.
“대체 로던 백작이 지휘를 어떻게 했기에 그딴 일이 벌어진다는 말이냐?”
생각지도 못하게 뒤통수를 위협받게 되었다.
그러나 카시안 공작은 침착하게 두 왕국 사이의 거리를 계산했다.
지금 지원군이 출발했다고 해도 프레시아 공작이 그때까지 버텨낼 가능성은 낮았다.
오히려 크라이더 왕국이 수비의 이점을 버린 셈이니 먼 길을 오느라 지친 그들을 단숨에 제압하면 그만이었다.
“로던 백작의 책임은 나중에 묻지. 우리가 사트리안 왕국을 빨리 정리하면 될 문제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전투 이후 쉬지도 못하고 지원이라니, 제대로 된 군대는 아니겠지요.”
“맞습니다. 오히려 앉은자리에서 두 왕국의 군대를 무너트리게 되었으니 귀찮은 일을 피하게 된 것이지요.”
귀족들은 카시안 공작의 의견에 수긍하며 어떻게든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마법사가 불길한 행동을 보였다.
“어? 어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허공에 귀를 기울이며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
마법사만이 아니었다.
안덴스 후작도 갑자기 얼굴이 굳어졌다.
카시안 공작은 그게 마법사만이 인지할 수 있는 특별한 연락 수단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무슨 일인가?”
“그, 그것이…….”
카시안 공작의 물음에도 안덴스 후작은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대신 그는 본래 이 역할을 수행해야 할 마법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에 마법사는 울상이 된 채로 입을 열었다.
“제국에서 온 소식입니다.”
“제국에서?”
“네. 1차 보급 부대가 알 수 없는 적들의 습격을 받아서 궤멸했다고 합니다.”
카시안 공작은 할 말을 잃었다.
병영의 분위기도 싸늘하게 식었다.
로던 백작의 패퇴 역시 만만찮은 사고였지만 이건 그를 능가했다.
이 자리에 있는 병력의 숫자는 자그마치 20만.
그를 먹이기 위해서 필요한 군량의 양도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사트리안 왕국을 점령하고 약탈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20만이라는 머릿수는 약탈로 어떻게 해결하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1차 보급 부대라면 아직 제국을 벗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결국 카시안 공작은 폭발했다.
이건 아무리 좋게 여기려고 해도 좋게 넘길 수 없는 문제였다.
“맞습니다. 제국 내에서 습격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게 말이나 되는가!”
1차 보급 부대의 규모는 절대 작지 않았다.
20만이 먹을 군량과 보급품을 챙기는 부대가 어찌 그 규모가 적겠는가?
그런데 그들이 당했다는 건 제국 내에서 엄청난 숫자의 적들이 나왔다는 소리였다.
적어도 별동대 따위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적의 정체를 파악도 못 했다고?”
그것만으로도 화병이 날 지경인데 심지어 적의 정체를 알지도 못한다.
이는 같은 일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당장 책임자를 호출하게!”
“부, 불가능합니다. 1차 보급 부대의 책임자였던 알데버 자작은 전사했다고 합니다.”
“허?”
심지어 임무를 담당했던 귀족이 죽었다는 말에 분위기는 더욱 차갑게 식었다.
당장 승리를 앞둔 상황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분위기가 병영을 뒤덮었다.
* * *
‘겨우 오늘은 넘겼는가?’
프레시아 공작은 초췌해진 얼굴로 로스니아 제국군을 응시했다.
불과 하루였지만 무척이나 힘든 시간이었다.
그와 그의 딸인 이데아가 열심히 지휘하고 격려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이곳까지 함락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조만간이다.’
그러나 겨우 버티기만 했을 뿐 이미 그의 군대는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전황을 바꿀 만한 계기가 없다면 패배는 예정된 상태였다.
“프레시아 공작 전하! 크라이더 왕국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크라이더 국왕이?”
그런데 마침 적절하게 순풍이 불어왔다.
“크라이더 왕국이 자국의 영토에 침공한 로스니아 제국군을 물리치고 지원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고 합니다!”
마법사의 보고에 프레시아 공작은 눈을 번쩍 떴다.
나쁜 소식만 가득하던 전쟁에 처음으로 들려오는 희소식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면 로스니아 제국으로서는 앞뒤로 적을 두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프레시아 공작의 미소는 얼마 가지 못했다.
사트리안 왕국을 침공한 제국의 병력에는 최고의 정예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리 크라이더 왕국의 지원이 온다고 해도 전력이 열세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과연 그것으로 충분할까?’
게다가 지원군이 제때 도착한다는 보장도 없었다.
지금 전선의 상황은 아주 아슬아슬했다.
로스니아 제국이 마법사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잠시 공세를 멈췄지만 이는 시간문제였다.
“방법은 하나뿐이에요.”
그때 이데아가 무장을 갖춘 채 다가왔다.
프레시아 공작은 자신의 딸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이데아?”
“우리 손으로 직접 공격에 나서야만 필요한 시간을 벌 수 있어요.”
차분하게 공격을 주장하는 이데아의 모습에서 프레시아 공작은 불길함을 느꼈다.
“설마 직접 나설 생각이냐?”
“압도적으로 많은 적들을 상대로 공격하는 일이에요. 부대의 사기를 위해서도 직접 나서야지요.”
“그런 일이라면 내가 하면 그만이다. 너는 물러나 있거라.”
프레시아 공작은 서둘러 이데아를 말렸다.
이 자리에 있는 로스니아 제국은 정예 중에서도 고르고 고른 이들.
설령 상대가 방심하고 있다 해서 쉽게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상대의 반격에 패퇴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전투에 절대 딸을 내보낼 순 없었다.
그러나 이런 프레시아 공작의 설득에도 이데아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녀는 이미 전투에서 아군의 사기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느끼고 있었다.
로스니아 제국의 정예를 상대로 지금까지 버텨낸 것만으로 군사들은 충분히 해야 할 몫을 해준 상태였다.
그들에게 위험한 작전을 맡기기 위해서는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울 지휘관이 필요했다.
“그럴 수는 없어요. 아시잖아요? 저에게 군주로서 필요한 모든 걸 가르치셨으니까.”
이데아의 거부에 프레시아 공작은 말문이 막혔다.
군주는 절대 뒤에서 지휘하며 보호만 받는 입장이 아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군주가 직접 전장에 서야 할 때도 있는 법.
이는 개인의 무력이 문제가 아니었다.
휘하 병력들에게 존경과 충성을 받기 위해서는 마땅히 감수해야 할 의무였다.
“그리고 이 요새에 대해서는 제가 더 잘 알아요.”
이어지는 이데아의 설득 역시 유효했다.
요새의 설계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은 이데아가 관여했다.
그녀는 요새의 각종 지형지물에 통달해 있었고, 이렇게 밀리는 상황에서 반격하기 위한 비밀 통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데아.”
“저를 믿어주세요. 반드시 승리할 테니까.”
프레시아 공작은 어느새 장성한 자신의 딸을 보며 목이 메었다.
* * *
반격이 시작된 건 조금은 이른 밤이었다.
야간이 되면 오히려 경계가 삼엄해질 것이라 여긴 이데아는 해가 서서히 저물 때쯤 행동을 개시했다.
약 1만의 군대가 요새에 숨겨져 있는 비밀 통로를 통해서 외벽으로 이동했다.
“으음?”
경계를 서고 있던 로스니아 제국의 병사는 어둠 속에서 들리는 소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소리가 난 거 같은데.”
병사는 창을 굳게 움켜쥔 채 어둠 속을 응시했다.
이곳은 전장이었고 적들은 바로 앞에 있었다.
숙련된 병사라면 절대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푹!
그러나 병사의 노력은 헛수고였다.
정면을 주시하는 사이 갑자기 그의 옆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병사는 꺽꺽거리는 소리만 내다가 쓰러졌다.
“경계가 만만치 않군요.”
로스니아 제국의 병사를 해치운 프레시아 공작가의 기사는 병사들의 상태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방심하는 기미 없이 예리하게 주변을 살피는 병사의 존재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이 정도는 예상한 바다. 문제 될 건 없어.”
그러나 그에게는 불행하게도 로스니아 제국의 경계 지점은 이데아의 예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요새의 구조상 경계병이 배치될 만한 장소는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로스니아 제국은 이 요새 안에 발을 들인 걸 후회하게 될 거야.”
이데아는 천천히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이에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프레시아 공작가의 기사들이 일제히 행동에 나섰다.
사방에서 프레시아 공작가의 기사들이 쏟아지며 로스니아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로스니아 제국은 당황했다.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에서 적들이 반격을 개시할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고려했다는 것뿐이지 정말 기습이 벌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크라이더 왕국의 지원군이 오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하는 상대가 먼저 공세를 취하다니?
“왕국의 적을 토벌하라! 로스니아 제국에게 본때를 보여주자!”
“이 나라가 누구의 땅인지 제국 놈들에게 똑똑히 알려주어라!”
하루 종일 로스니아 제국에 시달렸던 기사들은 그 복수를 하듯 제국군을 휩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