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71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71화
171화
대륙은 다시 전란에 휩싸였다.
로스니아 제국과 반제국 동맹.
네패스 왕국과 약소국들.
대륙의 절반에 해당하는 국가들은 내전 이후로 다시 한 번 피를 흘려야만 했다.
“흠.”
아스카는 이러한 대륙의 상황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과거 자신을 추종했던 일부 인간들이 남겨둔 사교도는 나름대로 요긴하게 쓰일 수 있었다.
그들이 가진 마법의 수준이야 과거 자신이 남긴 것이니 볼 게 없었으나, 마족들이 인류에게 패한 현재로서는 이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으니.
문제는 생각보다 인류의 성세가 상당하다는 부분이었다.
로스니아 제국의 100만 대군에 대해 들었을 때는 아스카조차 놀랄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인간 국가들이 다 모인 것도 아니고 한 개의 국가에 그만한 전력이 있다니.
대륙에 있는 모든 인류가 힘을 합친다면 기껏해야 자신과 남은 마족들만으로는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그 여자, 이것까지 예상했던 건가?’
위니스가 말한 신이 되는 조건은 단순히 대륙을 피로 물들이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지성체들의 인정이 필요했다.
인류를 모조리 죽인다면 남은 마족들과 사교도만으로 충분하겠지만, 아스카가 생각해 봤을 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숫자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넓은 대륙에 퍼져 있는 그들을 뿌리 뽑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으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인데, 이 역시 아스카가 마족이란 점이 문제였다.
‘내가 전면에 나서면 인류가 뭉치게 될 거란 말이지.’
대륙의 패권을 차지한 인류와 싸워야 하기에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사교도를 이용한다고 해도 이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사교도의 숫자가 많아봐야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그 대부분은 싸움이라고는 모르는 농민들이다.
주술을 통해서 힘을 부여해 준다고 한들, 그들이 숙련된 기사처럼 훌륭한 전투 병기가 될 수는 없었다.
‘죄다 구울로 만들어버릴 수도 없고.’
마족의 세력이 너무 쇠퇴한 게 문제였다.
그나마 남아 있는 마족들의 수준이 뛰어나기는 하지만 단독으로 행동하면 토벌당한다는 건 이미 아인에 의해서 증명된 상황이었다.
‘그 녀석이 타르타로스가 선택한 인간이라면 납득하지 못할 건 아니지만,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없지.’
아인 네패스.
베이브는 아스카가 말한 조건과 일치하는 인간으로 그를 지목했다.
실제로 아스카가 봐도 아인의 행보는 놀라웠다.
고작해야 20여 년밖에 살지 못한 젊은 인간이 변방의 한미한 가문에서 지금의 왕국을 이루었다는 것.
거기에 믿기지 않는 마법 실력을 갖췄다는 것.
가이스트로부터 힘을 받은 마족인 말릭이 토벌되었다는 것까지 아인을 의심할 근거는 충분했다.
그러나 의심은 의심일 뿐이다.
아인이 타르타로스에서 선택한 대리인이 분명하다면 당장 마족들을 이끌고 가서 죽이면 되겠으나 만약 아니라면?
아인이 유독 눈에 띄기는 하지만 대륙에 이름 있는 마법사는 아인이 다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마족들이 아인을 죽이게 된다면 인류는 이 돌발 사태를 경계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타르타로스의 대리인도 자신이 암살당하는 상황을 두려워해서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려 할 것이고.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일국의 군주다.’
절대 쉽게 죽여버릴 만한 위치가 아니었다.
게다가 인류와 마족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 계기도 이와 비슷했다.
자칫 전란으로 제 세력을 깎아먹고 있는 인류에게 다시 단합의 여지를 내주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들 아스카는 인류를 무너트릴 자신이 있었지만 타르타로스의 대리인의 존재는 그런 아스카마저 망설이게 만들고 있었다.
‘녀석을 죽이려면 반드시 확신부터 얻어야 한다.’
아인이 타르타로스의 대리인인지 확인할 만한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위니스가 데리고 갔던 아인츠발트의 존재.
균형을 맞춘다는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아인츠발트를 써먹겠다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상대의 곁에는 아인츠발트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아인츠발트가 모습을 드러낸다면 어떤 식으로든 그 무용에 대한 소문이 돌 것이다.’
아스카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어차피 사교도를 모으기 위해서는 그에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아스카가 찾아가서 내가 너희들이 떠받드는 신이라고 말한들, 그들이 이를 덥석 믿지는 않을 테니까.
게다가 인류는 마족과의 전쟁을 넘은 상태.
양 종족의 적대감은 아무리 사교도라도 어쩔 수 없었다.
실제로 사교도임에도 불구하고, 아스카가 마족이라는 이유로 능력을 보였음에도 신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이 시대에서 마족이란 그런 위치인 것이다.
아스카는 도대체 어쩌다가 마족이 인류에게 밀려서 이따위 처지가 되었는지 갑갑함을 느꼈다.
“하지만 감내할 것이다.”
그러나 아스카는 이 괴로움을 참아냈다.
진정한 불사의 육체를 거느리고 영원토록 군림하게 될 미래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의 괴로움은 별거 아니었으니까.
기나긴 세월 봉인에서 고통받아 온 아스카에게 인내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 * *
카시안 공작은 종자가 갈아온 자신의 검을 살폈다.
종자라고 해도 제국 최강의 기사인 그의 종자가 절대 평범할 리 없었다.
정식으로 서임을 받고도 남을 실력 있는 견습 기사가 개인적으로 카시안 공작의 명성을 흠모하여 몇 년이나 남아 있는 상황.
그렇기에 보통의 종자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노련한 솜씨가 엿보였다.
“좋구나.”
카시안 공작의 칭찬에 종자의 표정이 환해졌다.
평상시에도 열심히 카시안 공작을 무구들을 손질해 왔지만 이렇게 칭찬을 받는 일은 잘 없었다.
카시안 공작이 칭찬에 인색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늘 반복되어 온 일 하나하나에 감사를 느끼는 인물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카시안 공작은 종자가 갈아 온 검을 써야만 했기에 오늘따라 훌륭하게 손질된 상태가 무척 기껍게 여겨졌다.
“그럼 움직이도록 하자.”
카시안 공작의 시선이 정면을 향했다.
로스니아 제국은 반제국 동맹에 속하는 4개 국가를 상대로 출정했다.
한 번에 4개의 전선이 생기는 셈이었지만 로스니아 제국은 이를 거리끼지 않았다.
승리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하필이면!”
로스니아 제국의 맞은편에 자리한 건 사트리안 왕국의 군주인 프레시아 공작이었다.
그는 로스니아 제국의 군대에 있는 지휘관의 깃발을 확인하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하필 제국에서도 최강이라고 불리는 기사인 카시안 공작이 사트리안 왕국을 침공하는 군대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시안 공작은 개인의 무력도 대단했지만 군략에 있어서도 뛰어났다.
“쉽지 않은 싸움이 되겠군.”
언젠가 있을 제국의 야망을 저지하기 위하여 방어 태세는 진즉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양측의 전력 차이는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프레시아 공작이 이끄는 군대의 숫자는 7만.
반면 사트리안 왕국을 침공한 로스니아 제국은 20만이 넘는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무리 수비하는 입장이라도 이렇게나 격차가 난다면 승산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이 전쟁은 우리만의 전쟁이 아니니까.”
이데아는 그런 프레시아 공작을 격려했다.
그녀가 봤을 때 당장의 전력 차이는 분명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사트리안 왕국은 약소국들의 합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패스 왕국의 침공으로 인해서 많은 약소국들이 혼란에 빠졌지만 사트리안 왕국과 네패스 왕국은 거리가 멀었다.
당연히 네패스 왕국이 침공할 국가들과도 거리가 있었기에 나름대로 지원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미 지원군이 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고.
그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텨내기만 한다면 사트리안 왕국도 나름대로 승산을 점칠 수 있었다.
‘문제는 로스니아 제국의 군대가 저게 전부는 아니란 거지만.’
로스니아 제국은 4개국을 침공했지만 이에 전 병력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카시안 공작이 직접 나섰기에 20만이 넘는 군세가 움직였지, 다른 왕국을 침공하는 병력은 10만 정도였다.
이를 다 합치면 50만의 병력.
어떤 국가도 넘보지 못할 엄청난 전력은 맞으나 100만 대군을 가진 로스니아 제국으로서는 절반의 병력만 동원한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나머지 병력은 쉽게 움직이지 못할 거야.’
아무리 전쟁이라고 해도 자국의 군대를 모두 보내는 경우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치안도 무너지고 국경의 방비도 허술하게 되니까.
로스니아 제국은 드넓은 영토를 가졌기에 지켜야 할 땅도 컸다.
‘그러니 분명 이것 이상은 로스니아 제국이라도 무리겠지.’
그러나 이데아의 생각과 달리 로스니아 제국은 아직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전력을 아끼고 있는 건 그들을 투입하지 않고서도 승리할 자신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 카시안이 어째서 제국 최강이라 불리는지 보여주어야겠군.”
프레시아 공작의 군대는 요새에 틀어박힌 상태였다.
확실히 요새는 잘 만들어져 있었다.
아무리 제국의 군대가 강인해도 사람인 이상 공성전을 치르려면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수준에 이른 이들의 이야기.
카시안 공작과 같은 초인은 때때로 상식에서 벗어난 전략을 준비할 수 있었다.
“마법사들의 준비는?”
“모두 완료되었습니다.”
카시안 공작의 명성에 가려서 사람들은 그의 곁에 있는 뛰어난 기사들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카시안 공작은 기사만큼이나 마법사의 중요성을 잘 알았다.
그래서 비록 그 자신은 기사일지언정 그의 수하 중에는 뛰어난 마법사들이 많았다.
“시작하라.”
카시안 공작의 명령이 내려지자 마법사들이 대규모 마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 심상치 않은 모습에 프레시아 공작은 즉시 휘하의 마법사들을 불러모았다.
“제국에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 마법사들은 이에 대응하도록.”
프레시아 공작의 명령에 마법사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들이 보기에도 제국 마법사들의 준비가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요새를 공략할 수 있는 마법은 종류가 한정되어 있었다.
제국 나름의 비전 마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요새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강력한 위력의 공격 마법을 날릴 터.
그에 대한 마법사들의 대응은 정해진 수순과 같았다.
“마나 실드를 준비한다.”
프레시아 공작 휘하의 마법사들을 이끄는 귀족이 명령을 내렸다.
그에 따라 마법사들은 마나 실드를 겹겹이 펼칠 준비를 갖췄다.
과연 로스니아 제국답게 마법사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지만 이쪽도 쉽게 뚫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직후 벌어진 마법은 그런 이들의 자신감을 깨부쉈다.
“저게 뭐지?”
강력한 공격 마법이 날아들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제국의 마법사들이 사용한 마법은 안개를 생성해 내는 것이었다.
이에 프레시아 공작의 마법사들은 마나 실드를 펼치는 대신에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왜 안개를? 그런다고 공성에 도움이 될 거 같지는 않은데.”
평야에서 기습을 하려는 것이라면 모르겠으나, 요새라는 든든한 벽 너머에 숨어 있는 그들에게 안개는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속셈이지?”
프레시아 공작은 카시안 공작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으나 마법에 관해서 그가 알고 있는 지식은 그리 깊지 않았다.
그렇게 요새가 안개에 잠길 무렵이었다.
“콜록콜록!”
갑자기 기침 소리가 연달아서 들리기 시작했다.
안개를 들이마신 병사는 목이 타는 고통에 당황하며 우왕좌왕했다.
그제야 사람들은 로스니아 제국이 무슨 마법을 사용한 건지를 깨달았다.
“그냥 안개가 아니다! 이건 독이야!”
“안개를 들이마시면 안 된다!”
상황을 파악한 이들은 서둘러 대응에 나섰다.
그렇다고 한들 기사나 마법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숨을 참는 게 전부였다.
대처는 마법사들에게서 나왔다.
바람 마법을 사용해서 요새로 밀려드는 안개를 걷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그리 위협적인 독은 아니군.’
프레시아 공작의 마법사들은 고작 독 안개 따위를 전략이랍시고 가져온 로스니아 제국을 비웃었다.
굳건히 수성하고 있는 그들을 마법으로 중독시킨다는 발상은 나름대로 괜찮았지만 안개 따위는 바람 마법으로 얼마든지 무력화가 가능했다.
이를 흡입한 병사들이 조금 있기는 했으나 그 정도는 큰 피해라고 할 수 없었다.
타악!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짙은 안개 너머에서 갑자기 들려서는 안 될 발소리가 들렸다.
마법사들은 당황하며 정면을 살폈다.
“설마 우리가 준비한 게 독 안개 따위라 여기지는 않았겠지?”
놀랍게도 안개 너머에서 나타난 인물의 정체는 카시안 공작이었다.
그는 안개를 통해서 시야를 가린 틈을 타서 마법사들의 협력을 받아 정예 기사들과 함께 요새를 넘어버린 상태였다.
“카시안 공작!”
이를 본 프레시아 공작은 경악했다.
그러나 여전히 카시안 공작의 생각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해야 기사 몇 명이 넘어온다고 요새를 함락시키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카시안 공작이 스스로 적진 한복판에 목을 들이민 형국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때 카시안 공작과 기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요새의 정문을 향해서 달려들었다.
“문을 장악할 생각인가?”
공성 병기까지 준비해 놓고 설마 정예 기사들로 문을 장악하려고 하다니.
확실히 프레시아 공작이 예상하지 못한 발상이기는 했다.
바깥에 있는 많은 공성 병기들이 사실은 눈속임에 불과했단 이야기니까.
하지만 그 정도는 문제 될 게 없었다.
요새의 문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프레시아 공작이 특별히 선별한 정예였다.
충성심도 실력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제국 최강의 기사를 상대로 일대일로 이길 수준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시간은 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프레시아 공작의 착각에 불과했다.
촤아악!
피분수가 튀었다.
카시안 공작을 따라서 함께 요새로 넘어온 이들의 면면은 프레시아 공작의 예상을 능가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프레시아 공작이 자랑하는 기사들은 제국 기사들의 칼날 아래에 무참하게 쓰러졌다.
“내 깃발 하나에만 정신이 팔려서 내가 누구를 데려왔는지는 전혀 모르는군.”
카시안 공작과 함께 요새에 들어온 기사들은 절대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아트라시아 후작을 비롯해 제국에서 이름 높은 기사들과 그들이 선별한 정예 중의 정예.
하지만 침공한 군대에는 오직 카시안 공작의 깃발만이 걸려 있었다.
독안개와 공성병기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내걸었던 깃발마저 사실은 함정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