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69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69화
169화
【 제국의 칼날 】
아인과의 만남과 거래 이후 로스니아 제국은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반제국 동맹이 제국의 내전에 관여한 증거를 찾아내는 한편, 피의 연회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확실한 물증들이 모이자 카시안 공작은 제국의 기둥이 되는 귀족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카시안 공작은 내심으로 제국의 행보를 이미 결정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빌헬름 같은 황제가 아니라 일개 공작에 불과했다.
다른 제국 귀족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않고서는 얼마든지 뒷말이 나올 수 있었다.
“어찌 고민하겠습니까?”
하이록 백작은 모든 증거들을 확인한 뒤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명확한 증거들까지 얻었고 제국은 이미 전쟁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내부적인 혼란으로 인해서 지체하고 있기는 했으나 이번 일은 그 혼란으로 인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움직여야만 했다.
“황제 폐하의 유지를, 제국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 마땅히 싸워야 합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하이록 백작에 이어서 그랜트 백작이 찬성하고 나섰다.
그는 복잡한 정치 문제를 고려하지는 않으나 제국의 영토에서 황제가 죽은 치욕을 되갚기 위해서라도 이 싸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생각지도 못한 명분이 굴러들어 온 상황.
반제국 동맹은 인류의 해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남부의 대영주들이 뜻을 하나로 모으자 카시안 공작의 시선은 다른 지역의 대영주들로 향했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그의 시선이 꽂힌 곳에는 제국 서부의 대영주들이 있었다.
제국에서 손꼽는 마법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안덴스 후작.
그는 잠시 고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숙원이나 황제 폐하의 복수라는 명분이 아니더라도 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차라리 전쟁을 선택하는 게 낫습니다.”
지금 제국은 곪아가고 있었다.
빌헬름이 죽어버리면서 비어버린 황제의 자리.
그를 대신할 만한 제국의 핏줄이라고는 빌헬름에게 도망쳐서 망명했던 이들이 전부였다.
게다가 그마저 대부분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채 능력 없이 욕심만 많은 머저리만 남았다.
다른 국가라면 허수아비 황제를 앉히고 귀족들의 세상이 열릴지도 모르나 안덴스 후작은 그를 반길 수 없었다.
제국이 대륙을 통일하는 야망을 품은 건 마냥 기사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으니까.
제국의 귀족이라는 자부심이 있는 자들은 당장의 이득을 포기하더라도 원대한 야망을 꿈꾸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진정한 제국민이었으니까.
“저도 안덴스 후작 각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필요한 전쟁입니다.”
안덴스 후작에 이어서 또 다른 서부의 대영주인 키스타 백작이 의견을 내었다.
그는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 중 한 사람으로 제국 최대 규모의 상회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런 인물이 계산기를 두드려보아도 이 전쟁은 하는 게 더 이득이었다.
어차피 이미 전쟁에 필요한 준비는 다 갖춰져 있었으니까.
오히려 지금 전쟁을 취소해 버리면 막대한 손실이 일어날 판이었다.
“하지만 황제가 없는 상황에서 전쟁이 가능하겠습니까?”
그때 처음으로 부정적인 의견이 나왔다.
제국 북부의 대영주이자 카시안 공작과 지금은 죽은 필립 후작과 더불어 최강의 기사로 꼽히는 아트라시아 후작이었다.
그는 뛰어난 기사임에도 무력보다는 정치적인 부분을 자주 신경 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황제도 없는 상황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건 정신 나간 발상에 가까웠다.
“그 문제는 걱정하지 말게. 어느 정도 해결책을 마련해 뒀으니.”
카시안 공작은 그런 아트라시아 후작의 성향을 알고 있었기에 이미 그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 둔 상태였다.
“해결책이라니, 섭정이라도 세우시려는 겁니까?”
아트라시아 후작은 그런 카시안 공작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어쨌든 능력은 부족해도 황실의 핏줄을 이은 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억지로 섭정을 내세울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 탐욕스러운 이들에게 섭정이라도 자리를 내주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전쟁과 별개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제국 내부에서 얼마든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내가 선택한 수단은 이거네.”
카시안 공작이 신호를 보내자 그의 측근이 대영주들에게 문서 하나씩을 건넸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살펴본 아트라시아 후작은 눈을 부릅떴다.
카시안 공작이 내민 건 황제의 권한 일부를 대영주들이 나눠서 운영하기 위한 계획서였다.
“이게 무슨!”
황제가 없으니 대영주들이 그 권한을 나눈다.
언뜻 당연한 듯이 들릴지 모르나 그들이 침해하는 게 황제의 권한이라는 게 문제였다.
하다못해 정당한 황실의 핏줄을 잇는 이에게 그를 맡기는 것도 아니고, 귀족들이 그것을 차지하는 건 결국 군주의 자리에 야심을 보이는 것과 다름없었다.
세상에 자신의 손에 들어온 권력을 놓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카시안 공작 전하, 이건…….”
그 의미를 깨달은 귀족들도 당황했다.
그러나 카시안 공작은 이런 반응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섭정을 세우는 방법은 이미 고려해 봤네. 그런데 대체 누구를 그 자리에 앉힐 생각인가? 능력이 있는 분은 이미 남아 있지 않은데.”
황제의 자리는 무지렁이를 앉혀서 될 게 아니다.
레이칸 국왕은 빌헬름을 향해서 무능하다고 욕을 했지만, 빌헬름은 사람을 다루는 재주 하나만큼은 훌륭했다.
적어도 그는 아래 기사들의 야망에 불을 지폈으니까.
그러나 다른 이들은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능력이 없고 국정을 제대로 돌볼 능력도 없다.
유능한 황족은 빌헬름에게 있어 가장 우선적인 숙청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예외가 있다면 빌헬름의 친동생이었던 아르센뿐인데, 여기에 자리한 귀족들은 그 아르센의 반란을 평정한 공신들이었다.
“게다가 그대들도 말했듯이 이 전쟁은 제국을 위해서도, 인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네. 지체해서도 안 될 일이고.”
로스니아 제국은 모든 분야에서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는 역량을 지녔지만, 그렇다고 계속 황제의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었다.
게다가 기껏 전쟁을 대비해서 준비해 둔 물자 역시 시간이 지나면 품질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비축해 둔 군량은 썩어버리게 될 것이고 무기들은 녹슬어 버려진다.
아무리 제국이 부유하다고 하지만 대륙 정복을 위한 전쟁 준비를 여러 번 하는 건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아인과의 거래로 생각지도 못했던 큰 지출까지 감수한 마당이었고.
“제국을 위해서라면 결단을 내려야 하지 않겠나?”
카시안 공작의 말에 대영주들은 반박하지 못했다.
이미 제국을 위해서 필요한 전쟁이라는 것에 동의했는데, 이제 와서 그걸 반대할 수는 없었다.
제국을 위한다는 명분보다 더 중요한 건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황제의 권한을 넘보는 일이다. 괜찮을까?’
‘아니, 하지만 어차피 우리를 처벌할 수 있는 황족은 없어.’
귀족들은 반역에 대한 거부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동시에 그들을 벌할 수 있는 위협적인 황족이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더구나 제국을 위한다는 명분과 실제로는 그들의 권한이 강해지는 실리까지.
노련한 카시안 공작의 설계는 알고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카시안 공작이 황제의 자리에 대한 탐욕을 드러내는 것인가?’
아트라시아 후작은 카시안 공작의 얼굴을 살폈다.
제국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등에 지고 누구보다 기사다운 명예로운 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도 결국에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기사의 명예에 집착하는 것 역시 나름대로의 욕망이 발현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지만 이건 나쁜 일은 아니다. 이득이 되면 되었지.’
머리가 좋은 이들은 이미 계산을 끝마친 뒤였다.
‘그럼 우려해야 할 건 혹시나 다른 국가들처럼 내전이 일어나는 건데.’
외부를 상대로 군사력을 투사하는 이상 내전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제국이라도 전쟁에서 피해 없이 승리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어쩌면 이 자리에 있는 몇몇 이들은 전쟁에서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게 될 것이고, 그러면 경쟁자는 자연스럽게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솔직히 내키지 않는다.’
동부의 대영주인 실마 백작은 카시안 공작의 제안이 달갑지 않았다.
그 속내가 뻔히 보였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자신들에게 이득이 될 것이기에 이미 다른 귀족들은 카시안 공작의 의견에 넘어간 것처럼 보였다.
그렇다면 자신 혼자서 반대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빌헬름이라는 욕망의 화신에 의해서 가려졌으나 이들 역시 승냥이와 같은 무리.
홀로 반대되는 의견을 내었다가는 가장 먼저 물어뜯기게 되는 게 순리였다.
그렇다면 그의 선택은 정해져 있었다.
“카시안 공작 전하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아르센은 올바른 능력과 성품을 가졌던 선대 황제를 보며, 그러한 존재만이 제국을 이끄는 군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그들은 옳은 아르센보다는 욕망에 충실한 빌헬름을 선택했다.
한 번 이루었던 그 선택이 다시 또 이루어지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저도 따르겠습니다.”
“동의합니다.”
그렇게 로스니아 제국의 귀족들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하나로 단합된 의사를 내보였다.
개전.
웅크리고 있던 제국이 마침내 발톱을 드러낸 것이다.
* * *
로스니아 제국은 전쟁을 개시함에 앞서서 먼저 소문을 퍼트렸다.
반제국 동맹의 존재와 그들이 내전에 개입한 정황.
그리고 황제인 빌헬름의 죽음과 그로 인해 벌어진 제국의 혼란.
결정적으로 전 인류를 하나로 묶을 피의 연회에 대한 진실까지.
그 소문은 로스니아 제국을 넘어 모든 국가들에 퍼져나갔다.
“모두 들어라!”
그리고 출정식이 거행되었다.
제국의 각지에서 집결한 수십만의 군세 앞에서 대영주들은 전쟁을 선언했다.
“우리는 인류의 적을 단죄하겠노라!”
빌헬름의 선전 포고는 모든 국가들을 향했으나 카시안 공작은 서두르지 않았다.
어차피 반제국 동맹만 무너트려도 다른 약소국들을 점령하는 건 시간문제였으니까.
그렇기에 카시안 공작은 확실한 대의명분을 가진 반제국 동맹을 먼저 공격하기로 했다.
이는 반제국 동맹이 약소국을 끌어들여 하나로 단합하는 걸 막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다.
눈 가리고 아웅이라는 건 약소국들도 바보가 아니라면 잘 알 테지만, 제국의 군사들에게 자신들이 정의의 편이라는 인식만 주어도 충분했다.
“가라! 제국의 용사들이여! 마족과 내통한 변절자들을 처치하고 인류의 원수를 갚아라!”
카시안 공작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수십 만에 달하는 군대가 내지르는 함정이 제국 전역을 울렸다.
이런 로스니아 제국의 움직임은 즉시 대륙을 긴장시켰다.
직접적인 목표가 된 반제국 동맹의 5개 국가.
그중에서 이미 목숨을 잃고 이주까지 시작된 레이칸 왕국을 제외한 4개 국가를 향해 엄청난 군세가 몰려들었다.
물론 반제국 동맹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대륙 정복의 야욕을 드러낸 로스니아 제국을 성토하고 동맹의 깃발 아래에 평화를 위한 연합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일은 생각보다 잘 되지 않았다.
반제국 동맹이라는 것 자체는 다른 국가들도 용인할 수 있었으나 마족과 내통하여 피의 연회를 일으킨 건 달랐다.
인류의 변절자와 대놓고 손을 잡으면 자신들의 체면에 흠이 생기는 걸 우려한 타국의 군주들은 선뜻 반제국 동맹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
아인처럼 대단한 명성은 아니더라도 일국의 군주가 된 이들은 자신들의 명성이나 평판에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하물며 내전을 통해서 이제 막 나라를 세운 입장에서 오물을 뒤집어쓰는 건 선뜻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리고 그 잠깐의 망설임은 반제국 동맹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대체 언제 결정을 내리는 건가?”
반제국 동맹의 일원인 사트리안 왕국의 군주 프레시아 공작은 답답하다는 듯 한탄했다.
몇 날 며칠의 지체.
거대한 전쟁에서 불과 며칠은 언뜻 아무 의미 없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로스니아 제국은 이미 모든 전쟁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
뒤늦게 전쟁을 대비해야 하는 다른 국가들로서는 그 며칠의 지체도 뼈아팠다.
“그런데 대체 로스니아 제국에서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걸까요?”
프레시아 공작의 딸인 이데아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로스니아 제국이 전쟁에 나서는 건 나름대로 대비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들이 들고나온 명분은 전혀 대책이 없었다.
기껏해야 빌헬름의 복수나 외칠 줄 알았는데 피의 연회가 일어난 배후가 반제국 동맹이라는 증거를 찾아내 가져올 줄이야.
다른 것들이야 제국 입장에서나 통용되는 억지일 뿐 타국에서는 동의할 수 없는 명분이었다.
빌헬름이 먼저 선전 포고를 해버렸으니까.
그러나 피의 연회는 달랐다.
전 인류에게 통용되는 확실한 명분으로서 반제국 동맹에게 위협이 되었다.
“글쎄다.”
프레시아 공작은 자신이 제국을 너무 얕본 건 아닐까 염려했다.
빌헬름을 죽일 때만 해도 제국의 혼란을 유도해서 자멸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실제로 한동안은 그렇게 흘러가는 듯했고.
그러나 마족과의 내통이 발각된 건 반제국 동맹의 숨통을 조르는 중대한 약점이었다.
물론 아래의 귀족이나 병사들에게는 조작된 가짜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각국의 군주들은?
그들은 바보 천치가 아니었고, 로스니아 제국이 그런 가짜 명분을 내세울 리 없다는 걸 알았다.
실제로 공개된 증거들을 검토해 보는 것도 어렵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결국에는 시간문제다. 결국 다른 국가들도 우리에게 동참할 수밖에 없을 거야.”
로스니아 제국은 거인이었다.
그들이 반제국 동맹을 무너트리면 남은 국가들의 운명도 정해진 수순이었다.
“다만 너무 늦지 앉게 결단을 내려야 할 텐데.”
약소국들의 망설임이 길어지는 건 로스니아 제국에게 좋은 일이었다.
모두가 힘을 합치더라도 로스니아 제국을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공작 전하!”
그때 마법사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서는 프레시아 공작을 찾아왔다.
그에 프레시아 공작은 의문을 가졌다.
아직 제국의 군세가 도착할 시간은 아니었으니까.
“무슨 일이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뭐?”
프레시아 공작은 괴상한 눈으로 마법사를 보았다.
로스니아 제국의 군대가 움직인 게 언제인데, 새삼스러운 소리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마법사가 그걸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마법사가 이야기하는 전쟁은 로스니아 제국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어디서 전쟁이 났다는 거야?”
“네패스 왕국이 약소국들을 침공했습니다!”
마법사의 보고에 프레시아 공작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네패스 왕국의 국력은 지금은 사라진 크레시안 왕국과 로베른 왕국을 합친 규모였다.
그 정도라면 약소국들로서는 지원군을 보내기 힘들 정도의 위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