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6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67화
167화
다행히 우려하던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안심해. 네 아내는 이미 잠들었고, 마법으로 노크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을 테니까.”
가슴이 철렁했다.
위니스가 마음을 먹는다면 그저 문을 두드리는 걸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레일리로부터 오해를 살 만한 언행으로 나를 곤경에 처하게 할 테고, 난 그런 위니스를 제지할 능력이 없었다.
“내가 혼인한 거에 대해서는 뭐라고 하지 않는 건가?”
“응? 내가 왜? 설마 나를 상대로 이상한 망상이라도 한 건 아니겠지?”
내 물음에 위니스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한 연기였다.
내가 무엇을 우려했는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런 거 말고. 이 몸은 원래 내 몸이 아닌 데다가 내가 한눈을 팔 수도 있잖아?”
아인 네패스라는 이름에 익숙해진 지 오래지만 이건 내 본래 몸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군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레일리의 남편으로서의 역할에도 가능하면 충실하려고 노력 중이다.
이런 행동은 자칫 위니스가 바라는 목표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여겨질 수도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안심해. 네가 가정을 꾸리든 미녀들을 모아서 주지육림을 차리든, 일만 똑바로 한다면 그딴 건 조금도 관심 없어.”
다행히 위니스는 레일리를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내가 절대군주를 목표로 한다는 야망만 유지하고 있다면 다른 일에는 간섭하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긴, 그게 지금껏 봐온 위니스다웠다.
“더 물어볼 건?”
“빅터 경을 살려준 게 너인가?”
“네 기사라면 내가 살려준 게 맞아.”
“왜지?”
위니스가 처음 나타난 건 가이스트라는 외부 세력의 개입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 위니스는 내 앞에 무언가를 설명해 주거나 모습을 보인 일이 없었다.
그런데 빅터 때만 달랐다.
물론 말릭이라는 마족의 힘이 가이스트의 개입으로 얻어진 것이라고는 말했지만, 그런 이유라면 이미 타르타로스가 대대적으로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위니스는 나를 내세우기만 할 뿐 본인이 정면에 선 적은 없었다.
“충신으로서의 동병상련이라고 할까. 나름대로 포상하는 의미로 개인적인 선물을 준 거지.”
동병상련이라니.
위니스가 절대군주의 광신도라는 건 알았지만 빅터가 내 광신도는 아니었다.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만약 빅터가 위니스처럼 정신 나간 충성을 보인다면 그건 기뻐할 게 아니라 걱정해야 할 문제였으니까.
“어디까지나 저번이 예외적인 경우니까 두 번 다시 그런 행운을 주지는 않을 거지만.”
“그건 알고 있어.”
이 자리에 서기까지 이미 수십 번이나 되는 전투를 치렀다.
이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위니스가 개입한 건 빅터의 경우, 한 번이 전부.
예외 중의 예외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는 내 용건을 말하지.”
질문은 여기까지라는 듯, 위니스는 발언권을 가져갔다.
“상황이 변했어.”
“무슨 말이야?”
“가이스트 녀석들이 마족을 이용해서 꽤 큰 사건을 터트려줬거든.”
순간 미간이 찌푸려졌다.
마족들의 움직임에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다른 인물도 아니고 위니스가 큰 사건이라고 말할 정도라니?
내 처지에 맞춘 설명이라고 해도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이쪽도 사상자가 나왔고.”
“사상자라고?”
“그래. 유혈 사태까지 간 거지.”
타르타로스와 가이스트의 유혈 사태.
순간 우주 전쟁 같은 거대한 싸움이 일어나는 건 아닐까 싶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범차원 세력들의 싸움.
그 여파는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뭐, 네가 그 문제를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네가 알아야 될 건 이거야. 마족들이 가이스트의 사주를 받고 아스카를 부활시켰다는 것.”
“역시 그런가.”
다행히 위니스는 범차원 세력들의 싸움과 나를 분리시켜서 말했다.
이는 내가 가이스트를 신경 쓸 필요까지는 없다는 의미였다.
애초에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세력도 아니겠지만.
“알고 있었어?”
“나름대로 마족에 대한 정보는 모았으니까.”
사트리안 왕국에서의 일도 그렇지만 레이칸 왕국을 방문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그것과 관련해서도 궁금한 게 있는데.”
그러다 레이칸 왕국에서 환영처럼 과거의 기억을 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심지어 후손이라는 레이칸 왕국의 전사들조차 모르던 걸 나 혼자 봤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위니스라면 뭔가 알고 있는 게 있을 거 같았다.
“나중에 생각나면. 어쨌든 핵심은 이거야. 넌 아스카를 못 이긴다는 것.”
위니스의 말에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버렸다.
가이스트가 처음 개입했다는 걸 알려줬을 때와는 명백하게 달랐다.
그때 위니스는 보주를 나눠 주면서 최소한의 승산 정도는 있다는 듯이 말했으니까.
그러나 그때보다 성장한 내 세력을 두고 패배를 기정사실화했다.
이는 그만큼 아스카란 마족이 지니고 있는 힘이 막강하다는 소리였다.
“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 정도라면 타르타로스 내에서도 나름대로 쓸모 있는 수준이지. 네가 죽었다 깨어나도 이길 가능성은 없어.”
“그래서?”
듣기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난 이미 위니스에게 타르타로스를 다스리고 있는 절대군주를 목표로 한다고 다짐했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리 강하다지만 이 세계에 속하는 녀석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듣기에 유쾌할 수는 없었다.
아직 한참 멀었다는 의미였으니까.
“설마 포기하라고?”
“그럴 리가. 단지 저번과 마찬가지로 균형을 좀 맞출 필요가 있다는 거지.”
위니스는 말과 함께 무언가를 슥 내밀었다.
[6티어 승급권]
무심코 그것을 살피다가 당황했다.
6티어 승급권.
상점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랜덤 박스를 돌려야만 나온다는 이유로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게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효율을 중요시하는 너한테 랜덤 박스는 고려할 여지조차 없었지. 그래서 제일 처음 특전으로 5티어에서 시작하고도 아직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거고.”
“그래서 이걸 그냥 준다고?”
“엄밀히 따지면 진작 줘야 하는 물건이었지만.”
“그건 또 무슨 말이야?”
6티어 승급권을 진작 줬어야 했다니?
“일일이 설명하려면 입 아프니까 그냥 받아.”
위니스는 귀찮다는 듯 6티어 승급권을 내던졌다.
그에 나는 깜짝 놀라 허둥거리며 6티어 승급권을 붙잡았다.
이게 어떤 물건인데 이렇게 막 던지는 건지.
물론 위니스에게는 별거 아닐 수 있겠지만 나한테는 천금과 같은 가치가 있었다.
“이걸로 승급해서 싸우라는 건가?”
“아니. 6티어 승급권 따위로는 여전히 승산이 없어.”
위니스는 돌연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나자 갑자기 허공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
그런데 그 외모가 낯이 익었다.
게임에서 보았고, 레이칸 왕국의 벽화에도 기록되어 있던 요정족 검사.
내가 세계 최강자라고 의심치 않던 영웅 아인츠발트였다.
“아인츠발트?”
“그래. 적어도 이 녀석 정도는 있어야 최소한 싸워볼 여지라도 있겠다 싶어서 공수해 왔지.”
위니스가 아인츠발트보다 강할 거라는 건 예상 범위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아인츠발트를 잡아 올 줄이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영웅 정보]
이름 : 아인츠발트
국적 : 아스트레아 왕국
소속 : 없음
유형 : 전투형
등급 : 8티어
칭호 : 검신
스킬 : 검술(8), 난전(8), 단검술(8), 지휘(6), 기마(6), 격투(6)
칭호는 검사 계열의 상위로 추정되는 검신.
딱히 앞에 붙어있는 수식어는 없었지만,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기량을 가졌음은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신이라는 칭호가 붙지는 않았을 테니까.
명성이나 살아온 세월에 비해 보유하고 있는 스킬의 가짓수는 적은 편이었지만, 이는 릴리아나를 봐도 납득할 수 있었다.
다방면으로 출중한 기사와 달리 검사 계열에 중요한 건 검술뿐이니까.
‘8티어라.’
하지만 난 아인츠발트의 등장에도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위니스가 어디서 아인츠발트를 데려오기는 했지만, 그를 설득해서 끌어들이는 건 순전히 내 몫이다.
게다가 위니스는 아인츠발트가 아스카라는 마족과 맞서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이는 8티어 영웅을 포함하고서도 우세한 건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럼 아스카는 9티어라도 되는 건가?’
티어 사이의 격차는 숫자가 높아질수록 커진다.
8티어인 아인츠발트로서도 승산을 높이 점치기 어려울 정도라면 상대인 아스카는 이를 상회한다고 봐야 했다.
최소한으로 봐야 9티어.
어쩌면 그마저 넘을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수준이었다.
“아인츠발트도 그렇고, 아스카라는 놈도 대체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지?”
6티어에서 7티어라면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라면 불세출조차 넘어서는 엄청난 천재라는 걸로 어떻게든 이해하거나 말릭처럼 가이스트의 영향을 받은 걸로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인츠발트도 그렇고 아스카도 그렇고, 이 두 존재는 분명 이 세계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까지 세계에 맞지 않는 강함을 지닐 수 있던 걸까?
“확률로 보자면 논할 가치도 없이 낮긴 하지. 하지만 가끔은 그런 존재가 태어나는 법이야.”
“아무리 그래도 한 시대에 둘이나 존재할 수 있는 건가?”
아스카와 아인츠발트가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났던 존재라면 납득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별격의 강자들은 완전히 같은 나이는 아닐지라도 결국 동일한 시대를 살았고, 또 싸웠다.
“그게 재미있는 점이지.”
위니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치 상대에게 적수를 내려주는 것처럼 똑같은 괴물이 나타나거든.”
“똑같은 괴물이라…….”
위니스는 이런 별격의 존재들이 동시대에 있는 게 그리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했다.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가 봐온 차원들에서는 이런 일이 흔하다는 의미인 것일까?
“그리고 알아야 할 정보가 하나 더.”
위니스는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우리 타르타로스와 가이스트의 개입은 여기까지야.”
“그건 무슨 말이지? 이미 사상자까지 냈다면서?”
무력 충돌까지 일으켜 사상자를 냈으면서. 여기까지라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 그 문제 때문에 한 번 시원하게 붙기로 했거든.”
“전면전이라는 소리야?”
“설마. 단지 이곳을 비롯해 타르타로스의 영향권 내부의 경계가 최고조로 올라갈 거야. 더는 가이스트로서도 끼어들지 못하게 되는 거지.”
이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족들에게 개입한 것에 이어서 이번에는 아스카의 부활까지.
위니스가 나름대로 나에게 계속 지원을 해주고는 있었지만 가이스트의 행보는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그런데 위니스가 이렇게 호언장담할 정도라면 타르타로스에서도 작정하고 움직이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전면전은 아니라도 국지전 정도는 일어날 거야.”
“너도 나서는 건가?”
“그래. 갚아줘야 할 빚이 생겼거든.”
빚을 언급하는 위니스가 눈동자에 한기가 스쳐 갔다.
“그러니 다음에 우리가 만나는 일이 있다면 둘 중 하나일 거야. 네가 이 대륙을 통일했거나 죽어서 신현우의 몸으로 깨어났거나.”
“네가 전쟁에서 죽는다는 경우는 없는 모양이군.”
위니스가 말한 두 경우 모두 나에게 변화가 일어났을 때였다.
가이스트라는 세력을 상대로 국지전에 나서는 위니스는 자신의 안위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에게서는 자신의 실력에 대한 강한 확신이 느껴졌다.
“당연한 소리를. 게다가 이번 일의 책임자는 아주 대단하신 분이거든.”
위니스는 타르타로스의 수뇌부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꺼냈다.
이번에 국지전에 관련해서 움직이는 인물은 타르타로스라는 세력 내에서도 손꼽힐 정도의 거물인 모양이었다.
회사 직급으로 이사라는 명함을 달고 있는 위니스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상대는 사장쯤 되는 게 아닐까?
“본래라면 이 정도 규모에 나서실 분이 아닌데. 뭐, 이쪽에서 희생자가 나왔으니.”
“죽은 사람이 타르타로스 내에서도 대단한 존재인가?”
위니스의 말을 들어보면 타르타로스에서 상당히 분노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무심코 던진 질문에 위니스가 묘한 미소를 보였다.
“그런 건 상관없어.”
“응?”
“감히 타르타로스를 공격하고 피를 보게 만들었다는 것.”
스산한 목소리에 소름이 쭈뼛 올라왔다.
“설령 말단이라도 타르타로스의 이름을 내건 몸인 이상, 그 목숨의 주인은 오직 위대하신 절대군주 한 분뿐이지.”
위니스가 다시 광신도의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 피해를 끼쳤는데 가만히 넘길 리가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번에는 적잖이 놀라야 했다.
위니스 혼자 감정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말단의 죽음으로도 타르타로스라는 거대한 세력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으니까.
분위기를 봐서 희생자는 간부급은 안 되어 보이는데.
예전에 이야기했던 실리보다 자존심의 문제인 것일까?
“뭐, 지금 너와는 관계없는 이야기니까 이 주제는 여기서 끝내자고.”
위니스는 내가 두 세력에 대해 더 묻는 걸 막아버렸다.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지금 나는 두 세력이 어떻게 싸울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처지가 아니었으니까.
아스카에 대한 것과 레이칸 왕국에서 봤던 기억들에 대해 물어야 했다.
그나마 아스카에 대한 건 위니스가 데려온 아인츠발트에게 물을 수 있을 테니, 우선해야 할 건 레이칸 왕국에 대한 이야기였다.
“레이칸 왕국에서 아스카의 보주와 영웅들의 무기를 입수한 일이 있는데, 그때 이상한 걸 봤어.”
“이상하다니?”
“과거의 기억을 봤거든.”
“과거의 기억?”
나는 그때 내가 봤던 것들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위니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마법 자체야 어렵지 않지만, 너한테만 보였다고?”
나는 위니스의 어렵지 않다는 말에 당황했다.
혹시나 싶어서 마법사 협회에도 해당 일에 관해서 물어봤지만 제대로 된 답변은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위니스는 그 정도 마법은 이곳에서 충분히 가능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마법사 협회를 제외하면 체계적으로 지식을 전수해 오는 마법사 집단은 극히 드문데도.
“마법사 협회에서도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정도 마법을 쓰려면 이 세계에서는 5티어 수준은 되어야 할 테니까.”
“5티어?”
고대의 마법사는 생각보다 수준이 뛰어났다.
물론 나름대로 영웅이라 불리는 위치에 있었으니까 이해는 되지만, 내가 봤던 장면에서는 그 정도 수준이리라고는 짐작할 수 없었다.
‘실전된 지식인가.’
협회라고 모든 마법에 대해서 기록된 건 아니었으니 완전히 납득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흠. 알았어.”
그때 갑자기 위니스가 눈을 빛냈다.
“알았다고?”
“이쪽 담당하는 녀석에게 물어보니까 답이 나오네. 네 몸이 문제였어.”
도대체 언제 물었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바로 내 앞에 있으면서 위니스는 어딘가에 있는 다른 존재와 대화를 나눈 모양이었다.
“몸이라니?”
“우리의 고객이셨던 초대 네패스 남작 말이야. 알아보니 거기에 기억을 남겼던 고대 마법사의 후예라고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