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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162화 (162/250)

VVIP 영주님의 품격 162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62화

162화

* * *

플레턴의 장례식에 다녀온 뒤 나는 다시 네패스 국왕으로서 내 일에 집중해야 했다.

우선해야 할 건 레이칸 왕국 부족들의 이주를 위한 실무적인 부분과 재정적인 지원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로스니아 제국과 접촉할 필요가 있었다.

“로스니아 제국과 말입니까?”

약소국들을 먼저 정리할 계획이던 내가 갑자기 로스니아 제국에 관심을 보이자 네일은 당황하며 난색을 표했다.

“그들이 저희의 요청을 받아주겠습니까?”

로스니아 제국은 서부의 모든 국가들에 선전 포고를 날린 상황이었다.

그러면서도 황제인 빌헬름의 죽음이라는 큰 악재로 인해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고.

“아예 거부하기에도 좋은 상황은 아니지 않나?”

만약 로스니아 제국이 게임에서 그랬던 것처럼 전쟁 중이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로스니아 제국은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큰 진통을 겪고 있었다.

카시안 공작이 제국 최강이라는 명성을 통해서 혼란을 최소화하고는 있지만, 황제의 공백을 계속 내버려둘 수는 없으니까.

누군가는 그 자리에 올라야 하는데 마땅한 상대가 없었다.

게다가 만약 황제의 자리에 오를 이가 선전 포고를 취소해 버린다면 그 후폭풍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하긴, 제국에서 오히려 반길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타국 군주의 대화 요청은 오히려 제국에서 반길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빌헬름을 죽이려고 했던 군주들과 같은 편도 아니었으니까.

대화의 여지 자체가 없는 그들과는 상황이 달랐다.

“그럼 일단 사절단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대화를 나누려고 하십니까?”

“로스니아 제국의 혼란을 해결할 만한 명분을 줄 거다.”

내 이야기에 네일의 표정이 쩍 굳어졌다.

“그런 짓을 하면 자칫 전쟁이 일어날 텐데. 아니, 국왕 전하께서 그걸 모르실 리 없지요.”

다행히 네일은 금방 상태를 회복했다.

내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런 말을 꺼냈을 리 없다는 걸 파악한 것이다.

하지만 얼굴에 남겨진 의문만큼은 어찌하지 못했다.

“무엇을 얻으려고 하십니까?”

“로스니아 제국이 축적해 온 부.”

“재물 말씀입니까?”

“혼란을 가라앉힐 가치가 있는 정보라면 외면할 수 없겠지.”

황제의 부재로 인한 혼란이 문제지, 로스니아 제국이 가진 막강한 군사력이나 경제력은 아직 흔들림이 없었다.

쉽게 흔들릴 만한 것도 아니고.

100만의 군대라거나 어떤 국가도 범접하지 못할 천문학적인 재력은 로스니아 제국이 수백 년이나 쌓아온 것이니까.

‘게다가 이걸로 로스니아 제국을 방패막이로 쓸 수도 있으니까.’

마족들과 아스카의 존재.

그 불확실한 변수를 내가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감수해야 할 위험이 너무 컸다.

하지만 이번 일이 잘 되면 로스니아 제국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 먼저 마족과 싸워줄 것이다.

* * *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로스니아 제국과 협상할 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로스니아 제국은 타국의 군주가 해온 대화 제의를 쉽게 받아들여 주었다.

내가 내건 미끼가 큰 탓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직접 마주하고 싶었습니다.”

한 가지 의외인 건 협상에 나선 인물의 대표가 카시안 공작 본인이라는 사실이었다.

제국 최강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동시에 인류 최강의 기사라고도 표현되는 영웅.

이를 증명하듯 카시안 공작의 영웅 정보는 지금껏 내가 봐왔던 그 어떤 영웅보다도 훌륭했다.

[영웅 정보]

이름 : 레반 카시안

국적 : 로스니아 제국

소속 : 카시안 공작가

유형 : 전투형

등급 : 5티어

칭호 : 불세출의 대기사

스킬 : 검술(5), 지휘(5), 기마(5), 격투(5), 난전(5), 단검술(5), 방패술(5), 창술(5), 궁술(5), 기습(5)

10개의 스킬 전부 숙련도가 최고 수치였다.

설령 6티어 영웅이 있다고 해도 과연 이보다 더 좋은 숙련도를 보여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는 부족한 부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한없이 무결에 가까운 기사라고 할 수 있었다.

“나를 만나고 싶었다?”

“그렇습니다.”

그런 카시안 공작이 나를 직접 보고 싶었다는 말에는 의문이 들었다.

차라리 대련에서 활약했던 릴리아나를 보고 싶었다고 한다면 이해라도 하련만.

마법사이자 일국의 군주의 위치에 있는 내가 왜 그의 흥미를 끌었는지 알 수 없었다.

“제국 최강의 기사가 나를 보고 싶었다니, 그 이유가 궁금해지는군.”

“대외적으로 제국은 레이칸 국왕을 스스로 처치했다고 발표했지요.”

이어지는 카시안 공작의 설명에 그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이칸 국왕 역시 만만찮은 수준의 영웅.

카시안 공작 이전까지 내가 본 영웅 중 최강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실제로 팔을 다치지만 않았어도 제국에서 그를 죽일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실 겁니다. 우리보다 한발 앞서 레이칸 국왕을 죽인 자가 있다는 사실을.”

“그랬나?”

하지만 나는 이를 바로 긍정하지는 않았다.

과연 나를 의심할 만한 합리적인 근거가 제국에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럼 누가 레이칸 국왕을 죽인 거지?”

“상대는 아주 압도적인 숫자의 전력으로 레이칸 국왕과 그를 지키던 전사들을 해치웠더군요. 뛰어난 마법사도 있었고.”

“그거야 당시 제국에 있던 군주들 대부분이 그렇지.”

내가 과할 정도로 많은 기사들을 데리고 제국에 들어갔던 건 사실이지만 다른 군주들이라고 절대 경호를 허술하게 하지는 않았다.

빌헬름의 야망을 몰랐어도 로스니아 제국과 동맹이거나 우호적이었던 국가는 드무니까.

그러니 각국의 군주들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위를 배치해 뒀던 상태였다.

“레이칸 국왕도 예외는 아닙니다. 비록 레이칸 왕국에 마법사는 없다지만 그 전사들의 실력이 낮지 않다는 건 국경을 접하고 있는 네패스 왕국의 국왕 전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요.”

그러나 카시안 공작은 이런 가벼운 말에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이미 심중에서 나를 범인으로 확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니 묻겠습니다. 제국이 혼란스러웠던 그때, 그 틈을 노려서 레이칸 국왕을 해친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시안 공작은 단도직입적으로 이유를 물어왔다.

빌헬름이 각국을 상대로 선전 포고를 했다가 도리어 죽어버린 그 난장판 속에서 레이칸 국왕을 죽인 이유가 무엇이냐고.

“연회장에서 나와 레이칸 국왕 사이에 충돌이 있었단 사실은 알고 있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돌아가신 황제 폐하께서도 그 일 때문에 레이칸 국왕을 부르려고 하셨다가 변을 당하셨지요.”

카시안 공작은 당시 현장에 없었으나 필요한 정보는 모두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럼 이유도 어느 정도 알 텐데? 레이칸 왕국은 국경을 넘어 멋대로 군대를 보냈으며 내전에 끼어들었다. 게다가 예전부터 북부를 호시탐탐 노렸고.”

“그게 제국에서 도망치던 도중에 굳이 레이칸 국왕을 죽였어야 할 이유란 말입니까?”

카시안 공작은 내 말에 전혀 수긍하는 기미가 없었다.

레이칸 국왕과 나의 충돌 자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시기는 좋지 않았으니까.

“당연히 그게 전부는 아니지.”

내가 레이칸 국왕을 노린 결정적인 이유는 그런 감정적인 문제나 그의 부상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그런 것들이 없었다면 쉽게 레이칸 국왕을 노리지 못했겠지만 핵심은 그에게 할 질문이 있던 것 때문이었으니까.

“나 역시 제국에 의해 선전 포고를 맞은 국가의 군주야. 그런데 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고 생각하나?”

카시안 공작은 무언가 다른 사정이 있으리라는 걸 알아차렸으나 그게 뭔지는 유추하지 못했다.

그에 난 웃으며 그에게 답을 말해 줬다.

“제국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네.”

“거래라.”

카시안 공작은 의문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제국은 풍요로웠다.

황제의 공백이라는 문제가 있었지만 그건 제국 내부에서 해결해야 할 일.

당연히 내가 제시할 만한 거래 조건은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잠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해서 제국이 만만하다고 착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알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야.”

로스니아 제국 공략은 내가 쓴 무과금 공략에서도 핵심이었다.

과금 하나 하지 않고 그들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몇 번이나 실패를 맛보아야 했으니.

절대군주를 했던 6개월의 시간 중에서 로스니아 제국을 상대하는 데 쓴 시간이 절반은 되었다.

“제국의 저력은 안다. 오히려 알고 있으니까 거래를 하려는 것이고.”

“흠. 일단 들어보겠습니다.”

내 이야기가 흥미를 끌었는지 카시안 공작이 관심을 보였다.

“뭘 원하십니까? 그리고 뭘 주실 겁니까?”

“명분.”

“명분?”

명분이란 말에 카시안 공작이 머리를 갸웃거렸다.

로스니아 제국과 명분은 그리 친한 단어가 아니었으니까.

특히 빌헬름은 그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존재였고.

“복수의 명분을 주지.”

“하?”

이어지는 내 말에 카시안 공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국은 충분히 명분을 갖추고 있습니다. 감히 황제 폐하를 시해한 존재들을 토벌하는 데 더 이상의 명분이란 게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가당치도 않다는 카시안 공작의 말에 난 고개를 내저었다.

물론 선전 포고를 먼저 날린 건 로스니아 제국이었지만 이들이 그런 걸 신경 쓰지 않으리라는 건 내가 잘 알았다.

대륙 정복이란 것 자체가 어디 명분으로 될 일은 아니었으니까.

기껏 내세울 거라면 번영하는 제국의 깃발 아래에 대륙을 통일해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것 정도?

물론 상대 입장에서는 들을 가치도 없는 헛소리이자 선민사상에 불과했다.

“그건 제국민들이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이들이 그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 반제국 동맹이 존재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제국의 야망을 경계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힘을 합쳐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로스니아 제국이 다시 야망을 드러낸다면 그들은 뭉쳐서 이에 저항할 것이다.

그렇기에 로스니아 제국은 빌헬름의 복수가 아닌 다른 명분이 필요했다.

“그러나 내가 줄 명분은 다르다.”

“어떻게 말입니까?”

“로스니아 제국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로스니아 제국이 옳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명분이지.”

나는 피의 연회의 배후이자 내전을 촉발시킨 반제국 동맹의 존재에 대해 카시안 공작에게 설명했다.

“그게 무슨!”

당연하게도 카시안 공작은 경악했다.

인류가 마족의 손을 잡았다는 건 천하의 빌헬름이라도 하지 못할 일이니까.

정확히는 마족 따위와 손을 잡은 오점을 남기기 싫어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쪽이겠지만.

“황제인 빌헬름의 복수를 천명해 봐야 민심은 움직이지 않아. 즉위한 지도 아직 얼마 되지 않았고 평판이 좋지도 않았으니까.”

제국민들은 대륙 정복이라는 야망에는 긍정했을지 모르겠으나 그게 빌헬름에게 없던 민심까지 만들어줄 수는 없었다.

실제로 빌헬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건 강력한 군사력과 야망을 가진 기사 계급이니까.

제국의 다른 이들은 그저 서열에 따라서 빌헬름을 옹립한 중립파에 가까웠다.

“하지만 피의 연회로 선대 황제를 죽게 만들고 내전으로 대륙을 혼란하게 만든 무리라면 이야기는 다르지.”

로스니아 제국은 명분을 가질 수 있었다.

빌헬름에 대한 복수가 아니라 인류의 복수를 대행한다는 명분을.

피의 연회와 내전으로 인한 모든 죄악을 상대에게 물어서 어떤 잔혹한 짓을 하더라도 손가락질받지 않게 될 것이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그렇겠지요. 하지만 이를 보증할 수 있습니까?”

“가능하다.”

카시안 공작의 물음에 나는 흔쾌히 긍정해 주었다.

내가 레이칸 왕국에 가서 마하레트와 협상한 부분 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레이칸 국왕이 반제국 동맹의 일원이며 그들이 마족의 편에 섰다는 걸 증명할 것.

다행히 외부의 침입이 없는 레이칸 왕국에는 관련된 기록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레이칸 왕국 입장에서도 딱히 잃을 건 없으니까.’

마족 아스카와 싸웠던 선조들을 둔 몸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이 되겠지만, 레이칸 왕국은 이미 이주에 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주를 간절히 바라는 것 자체가 선조들이 부여해 온 과도한 의무에 대한 반발심으로 볼 수 있었고.

하긴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리 명예로운 일을 했다지만 선조들의 행동으로 인해서 고통받은 건 그 혹한의 대지에 남아야 했던 후손들이니까.

그나마 국적조차 없는 난민이 되는 길보다는 레이칸 왕국이라는 울타리가 나았으니까 지금까지 버텼지.

하지만 이제는 그 울타리에 집착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내가 그들을 받아주기로 했고, 그들에게 남겨져 있던 기록과 보주, 무기들까지 모두 회수했으니.

“이거면 되겠나?”

레이칸 국왕이 반제국 동맹의 군주들과 나눈 협정서를 보여주자 카시안 공작의 눈이 크게 떨렸다.

이 협정서에는 반제국 동맹의 군주들이 레이칸 왕국에 식량과 생필품을 지원해 주겠다는 서명이 있었다.

내전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아무 도움도 주지 않던 레이칸 왕국에 그들이 뭔가를 해줬다는 것 자체가 의혹을 가지기에는 충분했다.

“좋습니다. 지금 우리로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군요.”

카시안 공작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는 뛰어난 수완과 명성으로 제국의 혼란을 틀어막고 있었으나 빌헬름의 선전 포고는 내내 그의 발목을 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있다면 빌헬름을 지워버리고 인류를 배신한 이들에 대한 징벌이라는 명분을 내세울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차기 황제가 누가 되더라도 대륙 정복이라는 야망을 발현할 기회이기도 했다.

“그럼 그 대가로 무엇을 바라십니까?”

“재물. 가능하면 많을수록 좋겠지.”

카시안 공작이 의욕을 보였기에 나 역시 환하게 웃었다.

서로의 패를 확인했으니, 이제야말로 본격적으로 협상을 시작할 때였다.

“얼마까지 생각하나?”

제국의 재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확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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