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61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61화
161화
【 제국과의 협상 】
찝찝한 의문이 남았지만 일단 아스카의 보주와 영웅의 무기에 걸린 봉인을 전부 풀어버렸다.
어차피 넘겨받기로 한 물건이기에 거리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흠.”
탈론은 예리한 안목으로 봉인이 풀린 무기들을 살폈다.
그리고 고개를 내저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예리한 건 놀랍지만 그뿐입니다.”
탈론은 루안이 만들어 준 활과 어느 영웅이 쓰던 활을 직접적으로 비교했다.
“제 쪽이 더 낫습니다.”
“그런 거 같군.”
장비 정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영웅들이 남긴 무기는 하나같이 네임드 장비였지만 그 정도 수준의 장비야 나도 얼마든지 갖고 있었다.
루안 말고도 일국 최고의 장인이라면 네임드 장비를 만들 능력은 되니까.
명품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굳이 고집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가치는 있을 겁니다.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 공법이나 다른 종족의 비전으로 만들어졌을 테니.”
“루안이 좋아하겠군.”
루안의 특별한 능력을 생각해 보면 영감을 받기에는 충분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무기들은 전부 루안에게 보내는 걸로 결정되었다.
“그럼 남은 건 보주인데.”
나는 아스카의 보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기분 나쁜 핏빛을 내뿜는 게 확실히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색상의 빛을 발하는 보주는 처음이었다.
[아스카의 보주]
게다가 아스카의 보주는 장비 정보가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껏 시스템의 재화로만 사용되던 보주였기에 독특하기는 했다.
‘보통 보주는 아니란 거군.’
어디에 쓸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관심이 가기는 했다.
마법사 협회에 보내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었고.
“마하레트.”
내 부름에 마하레트는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던 과거의 기억을 보고 봉인의 장소를 알아냈다.
거기에 이곳에 남아 있던 봉인까지 싹 풀어버렸으니 마하레트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것이다.
“혹시 지금이라도 이의가 있나?”
“아닙니다.”
하지만 마하레트는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부족들의 미래를 얻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나도 아직 혼란스러운 건 마찬가지니, 혹시 뭔가를 알게 되면 알려주도록 하지.”
“아, 알겠습니다.”
그런 마하레트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 조금이나마 짐을 덜어주었다.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그렇게 레이칸 왕국에서의 일은 마무리되었다.
실무적인 부분이나 예산 마련 등 사후 처리가 한참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건 복귀하고 나서 해야 할 일이니.
우웅!
그런데 마하레트의 안내를 받아 레이칸 왕국을 빠져나오던 도중 마법사들로부터 급한 연락이 도착했다.
하긴 뭐라도 일이 터질 만한 시기이기는 했다.
로스니아 제국이 움직이든 반제국 동맹에 속하는 국가들이 움직이든 약소국들이 움직이든.
그러나 나에게 온 연락은 그런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부고라고?”
마나 파장을 해석하다가 그만 목이 메었다.
마법사 협회에서 누군가의 죽음을 전달해 왔다.
* * *
마법사 협회의 분위기는 정숙했다.
누구 하나 쉽게 행동하지 않았고 작은 담소를 나누는 경우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이번에 죽음을 맞이한 인물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플레턴.
나의 스승이자 마법사 협회의 원로이며, 그중에서도 집행관이라는 직책을 가진 협회의 큰어른.
나는 일국의 군주가 아니라 제자로서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장례식을 주도하는 건 남부 협회의 지부장인 가이트였다.
그는 내 물음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저 여느 때와 같이 잠드셨다고 들었습니다.”
노구인 플레턴의 곁에는 그를 보조해 줄 마법사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이 가이트에게 전달해 준 말에 의하면, 플레턴은 평상시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다른 날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똑같은 일과를 보내었고, 굳이 꼽자면 조금은 이르게 잠자리에 들었을 뿐.
그리고 아침에 늘 일어나던 시간에 나오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서 방에 들어가니, 잠자던 모습 그대로 죽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군요.”
호상이라고 하면 호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누가 그걸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을까?
그저 애도할 뿐이다.
“얼마나 머무실 겁니까?”
가이트는 나에게 얼마나 장례식에 있을 거냐는 물음을 추가했다.
제자에 후계자다.
본래라면 내가 주관해서 도맡아도 이상하지 않은 게 이 장례식이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국왕이라는 신분이 발목을 붙잡았다.
시간을 길게 낸다고 해도 기껏해야 몇 시간뿐이었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였으니까.
“죄송합니다.”
“책망하려는 게 아닙니다. 곧 돌아가실 거라면 이걸 챙겨가십시오.”
가이트가 보따리 하나를 꺼내놓았다.
“이건?”
“플레턴 원로님의 모든 비전 마법입니다.”
그 말에 깜짝 놀랐다.
“이게 전부 말입니까?”
보통 비전 마법이라면 그 마법사가 일생을 바쳐서 만든 마법을 이야기한다.
물론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마법도 있기에 재능이 출중한 마법사라면 비전 마법이 반드시 하나는 아니다.
그렇지만 플레턴은 이미 나에게 두 개의 비전 마법을 전수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것과 별개로 이만한 숫자의 비전 마법이 있다니?
많은 마법을 익히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비전 마법이 이토록 많을 줄은 몰랐다.
‘단순히 협회에서 보고 익힌 마법인 줄 알았는데.’
새삼 플레턴이 얼마나 뛰어난 마법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 플레턴조차 결국에는 4티어에 머무는 게 한계였으니까.
그런데 처음부터 위니스가 내준 특전으로 5티어에 있는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웃기지 않을 정도의 불합리였다.
“하지만…….”
마법사라면 탐날 수밖에 없는 물건이었지만 선뜻 받기에는 꺼려졌다.
이건 플레턴이 지금껏 내준 마법들과는 달랐으니까.
그런 내 마음을 짐작했는지 가이트가 설명을 덧붙였다.
“원로님께서 자신이 죽으면 전달하라고 하신 겁니다.”
“스승님께서 말입니까?”
따로 전달하라고 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플레턴이 직접 선별해서 골랐을 테니까.
조심스럽게 보따리를 받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전달해 드릴 게 있습니다.”
보따리의 묵직함과 부피에 놀라고 있는데 가이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플레턴 원로님의 뒤를 이을 차기 원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차기 원로?”
차기 원로라는 말에는 조금 당황했다.
협회 원로의 자리는 그냥 나이가 많다고 내주는 게 아니었다.
실력이 분명해야 했고, 그에 걸맞은 성과 역시 내야 했다.
“그걸 왜 나에게 말하는 겁니까?”
결정적으로 협회의 원로는 협회에서 알아서 선출해야 할 일이었다.
내가 협회를 장악했다고 하지만 내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는 건 아니니까.
필요할 때 도움을 받는 협력 관계였지, 내가 마음대로 원로를 결정할 권한 같은 건 없었다.
“플레턴 원로님께서 지목한 다음 원로가 네패스 국왕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만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이건 아예 예상을 벗어난 거였으니까.
그러나 왜 그런지는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플레턴은 정말로 내가 협회를 완전히 이어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에이든이라는 협회의 영웅처럼.
“그게 가능합니까?”
그러나 내가 귀족의 길을 포기하고 협회에 투신한 몸이라면 모를까, 일국의 군주로서 이런 제의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협회의 다른 원로들이나 마법사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니까.
“실력도, 업적도 충분합니다.”
그러나 가이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플레턴 역시 그런 반발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을 테니까.
그에 마땅한 명분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국왕 전하는 지금도 협회에 이름을 올린 마법사입니다. 원로에 준하는 실력과 업적도 있으니 다른 이들에게는 이를 반대할 명분이 없습니다.”
국왕이라는 위치상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없겠으나, 원로직 자체를 받기에는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게 가이트의 설명이었다.
“이 나이에 원로가 된 경우가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만, 원로라는 게 딱히 나이 제한이 있는 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장 젊은 원로라고 해봐야 40대는 되어야 했지만, 가이트는 딱히 명시된 규정이 있는 게 아니라며 가볍게 받아쳤다.
암묵적인 룰은 명분이 될 수 없었으니까.
게다가 국왕이라는 내 신분은 분명 협회 입장에서는 꺼림칙하지만 반대의 근거가 될 수는 없었다.
대놓고 여기에 반대를 하는 것 자체가 부담이기 때문이다.
그냥 귀족도 아니고 일국의 군주를 상대로 싸움을 거는 건 아무리 원로라도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특히 협회의 본부가 있는 네패스 왕국의 군주인 나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원로 선출이 지명제는 아닐 텐데. 다른 후보에게 제가 밀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를 반대하는 건 부담스러워도 다른 사람을 지지하는 건 원로 입장에서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도 그 정도 권력은 있었으니까.
“다른 후보라고 해봐야 수준 차이가 크니까요.”
그러나 가이트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른 후보들의 이름을 말했다.
자신을 포함한 각 지부의 지부장들과 원로의 제자 몇 명이었다.
“업적도 내세우기 어렵고.”
마지막으로 원로들이 선출된 건 마족과의 전쟁 직후였다고 한다.
거기서 전쟁에서 공을 세운 이들이 모두 빠졌으니, 이후 후보들이 내세울 업적은 그리 대단한 게 없었다.
오차드와 말릭을 토벌하고 마족들에 대한 단서를 얻은 내가 업적으로 그들을 찍어누르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거의 확정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플레턴도 여기까지 계산을 마치고 나를 지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원로가 된다고 해도 딱히 원로다운 일은 못 할 텐데.”
“앞으로 하실 일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가이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말하는 앞으로 할 일이란 게 마족의 토벌이라는 건 바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플레턴이 나에게 바라는 게 그것이었으니까.
협회를 이렇게 쥐여 주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고.
“지금의 명성만 유지해 주십시오. 그것만으로 에이든의 뒤를 잇기에는 충분합니다.”
마법사 협회장.
가이트는 나에게 그 자리를 이야기했다.
* * *
“후우…….”
아인이 돌아가자 가이트는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플레턴의 제자 중 한 사람이자, 굳이 따지자면 아인의 사형이 되는 입장에서 해야 할 일을 한 셈이지만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기존 협회의 원칙에서 벗어나는 것 자체는 자신 역시 동의했고, 그로 인해 얻은 것도 크지만 아쉬움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정치 같은 건 안 맞다니까.”
아인이 그나마 플레턴의 제자라는 위치를 고수해 줘서 다행이지, 일국의 군주를 두고 서로 높임말을 쓰는 상황도 우습기 짝이 없었다.
뭐, 아인이 이제 원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면 지부장에 불과한 자신에게 말을 높여줄 일은 없겠지만…….
‘또 모르지.’
언젠가 자신의 제자가 아인이 내세운 사형제라는 명분에 당해서 부려먹혔던 일을 떠올리며 가이트는 혀를 찼다.
아인은 특이한 인간 군상이었다.
귀족으로 태어났음에도 귀족이라는 위치보다는 그때그때 주어진 자리를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태생부터 모든 게 정해지는 귀족답지 않은 일이었다.
“흠.”
그러던 중 가이트의 시선은 아인과 달리 자리를 지키고 있는 티아라를 향했다.
아인은 자신이 오래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처지이기에 반대로 티아라에게는 최대한 자리를 지켜달라는 부탁을 하고 떠난 상태였다.
‘저쪽도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지만.’
티아라 역시 원로의 제자라는 입장이지만 지금 그녀는 마법사답지 않았다.
입고 있는 복장만 해도 그랬다.
아인이야 일국의 군주니까 아무리 장례식장이라도 어느 정도 꾸미는 건 피할 수 없었고, 오히려 군주치고는 별로 안 꾸미는 편이었다.
그러나 티아라는 이 자리에 마법사로서 참석했는지 귀족으로서 참석했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다만 이는 비단 티아라만의 변화는 아니었다.
아인과의 협력 이후로 협회는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고 일을 하지 않던 원로나 지부장의 제자 등 재능 있는 젊은 마법사들에게 많은 돈이 풀리게 되었다.
그렇게 돈을 준 건 학업에 충실하고 스트레스를 잘 풀라는 의미였으나 젊은 마법사들은 돈을 쓰는 것 자체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용돈을 꼬박꼬박 챙겨주니 평소에 먹고 싶던 것, 사고 싶던 것에 눈길이 가는 건 당연했으니.
“정말 모르겠군.”
가이트는 과연 이것이 옳은 현상인지에 대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젊은 마법사들이 사치에 물드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 때문에 용돈을 더 받거나 직접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런지 예전에 비해서 성취도 조금은 더 높아진 느낌이었다.
학문에 대한 순수한 탐구심이 사라지는 건 찝찝했지만 결과가 좋으니 뭐라고 지적하기에도 애매한 것이다.
“뭐, 이런 것도 시대의 변화라면 변화겠지.”
플레턴은 협회의 변화가 언젠가 기존의 협회를 바꾸리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를 시대의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여기고 있었다.
오히려 전통을 고집하는 게 문제가 되리라는 말에 가이트도 내심 동의하는 바였고.
“그나저나 그분은 뭘 하고 계시려나?”
가이트는 문득 협회를 떠난 벨로스의 행적이 궁금해졌다.
누구보다 원칙과 전통을 고수했던 벨로스가 지금 협회의 모습을 보면 아마 난리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