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60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60화
160화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제단 주변의 무기들이 공명음을 내는 걸 들은 직후 눈앞에는 제단의 풍경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대신 내 앞에는 본 적 없는 이들이 모여 있었다.
종족도, 복장도, 장비도 모두 제각각인 이들이었다.
‘이건 대체?’
그들이 서 있는 주위의 풍경은 처참했다.
거대한 싸움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곳곳이 무너진 폐허 속에 죽어 나자빠진 시신도 드문드문 보였다.
지금껏 전투를 해오며 익숙해진 광경이었지만 미간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봐!”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스쳐 갔다.
순간 나를 부르는 줄 알았으나 상대의 몸은 내 몸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다.
마치 내가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이상한 일이었지만 상대는 나를 인식하지 못한 듯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대신 그는 폐허에 걸터앉아 있는 이에게 다가갔다.
“싸움은 어떻게 됐어? 아스카는?”
나를 통과한 건 피로해 보이는 수척한 인상의 사내였다.
복장이나 별다른 무기가 없는 걸로 봐서 마법사로 보였다.
기이한 건, 그의 입에서 아스카라는 마족의 이름이 나왔단 것이다.
“싸움은 끝났다.”
마법사의 물음에 폐허에 앉아 있던 이가 대꾸했다.
마법사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무성의한 태도였지만 마법사는 이를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끝나다니? 이겼다는 거야?”
“그래. 우리의 승리다.”
“와우!”
긍정적인 대답에 마법사는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했다.
그러나 자신과 달리 다른 이들의 표정이 전혀 밝지 않자 이상함을 느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분위기가 왜 이래? 그 끔찍한 마족을 이긴 거잖아? 그러면 당연히 기뻐해야지.”
마법사의 말에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자 마법사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표정을 굳혔다.
“뭐가 문제야?”
“심장을 찌르고 목을 베어봤지만 숨이 끊어지지를 않는다.”
“뭐?”
마법사는 기겁했다.
“아무래도 불사신이 된 거 같아.”
“그런 게 어디 있어? 불사라니?”
마법사는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면 지금 놈은?”
“아인츠발트가 붙잡고 있다.”
그때 걸터앉아 있던 이에게서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아인츠발트.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유추할 수 있었다.
이건 기억이었다.
아마 영웅들과 아스카가 최후의 결전을 벌인 직후의 기억.
“혼자서?”
“온전하게 부활하려면 시간이 필요한 거 같더군. 그러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건 다행이지만 언제까지? 아인츠발트도 한계는 있어. 돌아가면서 죽인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이어질지 알고…….”
“그래서 너를 기다리고 있던 거다.”
그 말과 함께 모두가 마법사를 주목했다.
마법사는 자신에게 집중된 시선에 당황한 듯했다.
“나?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그런 이상한 마법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라고.”
“안다. 네놈이 제일 자신 있는 건 그런 사술이 아니라 봉인이니까.”
“알면서 왜?”
“물리적으로 죽일 수 없다고 해도 봉인하는 건 가능하겠지.”
“죽지 않는 녀석을 봉인한다니, 그런 건 해본 적 없는데.”
“안 되면 되게 해라. 우리로서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없으니까.”
그들은 마법사를 닦달했다.
마법사는 억울해했지만 그도 피치 못할 상황임을 깨달았다.
영웅들의 상태가 좋지 않았으니까.
“너, 왜 아까부터 나를 안 보는 거야?”
마법사는 심각해진 얼굴로 자신과 대화를 하던 이를 불렀다.
그러자 비로소 그의 고개가 마법사에게로 향했다.
그는 붕대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다.
마법사는 그 모습을 보고 경악했다.
“너 눈이…….”
“목숨도 걸었다. 눈이라면 충분히 싼 값이지. 그리고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사지는 멀쩡하잖냐?”
그 말에 마법사는 당황하며 영웅들을 한 명씩 살펴봤다.
영웅들의 상태는 하나같이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정말로 두 눈만 잃은 게 전부인 영웅이 양호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앞을 못 본다는 게 갑갑하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더는 싸울 일도 없다. 일상생활이야 익숙해지면 어떻게든 되겠지. 내 감각이 얼마나 예민한지는 잘 알지 않나?”
영웅은 마법사가 자신을 걱정하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써서 말하는 듯했으나 마법사가 받은 충격이 크다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마법사도 그의 마음을 아는지 이를 악물며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아인츠발트는?”
“그놈은 멀쩡하다. 아스카의 숨통을 끊은 것도 녀석이었지. 하여튼 대단한 놈이야. 이 싸움이 끝나고도 멀쩡하다니. 검술이 신의 영역에 이르렀다는 게 빈말이 아니라니까?”
영웅은 경탄하며 말했다.
아인츠발트는 각 종족의 영웅들이 모인 곳에서도 독보적인 활약을 펼친 듯했다.
게임에서 보여준 힘을 생각하자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다.
말릭 같은 상식을 벗어난 힘을 가진 마족을 보고서도 나는 아인츠발트가 더 강하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아. 일단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렇지만 봉인이란 건 영원하지 못해. 게다가 죽지 않는 녀석이니까 그 속에서 수명이 다 되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어떻게든 해보겠다고 말하면서도 마법사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나는 아마 그가 이 일의 결말을 어느 정도 짐작했으리라고 여겼다.
그리고 곧 다시 풍경이 변했다.
“답은 저주다.”
아스카의 봉인을 위해서 온갖 도움을 받아가며 연구에 매진했던 마법사는 며칠 밤을 지새워 답을 가져왔다.
수척해졌던 인상은 더욱 초라해져 이제는 상거지와 다를 게 없었다.
“저주?”
마법사의 이야기에 영웅들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봉인할 방법을 찾아오라고 했더니 그 답이 저주라니?
“아스카 녀석이 연구했던 기록 중에 이런 마법이 있더군, 자신이 가진 상태를 상대에게도 전염시키는 마법이. 이걸 편의상 저주 마법이라고 하자고.”
“그래서 그게 무슨 답이지?”
“불사인 놈을 봉인해 봐야 그 봉인은 언젠가 깨져. 내부적 문제이든 외부적 문제이든.”
마법사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 영원토록 봉인을 지켜낼 불사의 파수꾼이 필요한 거야.”
마법사는 이 저주를 통해서 불사의 몸인 아스카와 파수꾼을 묶어버릴 계획이었다.
어차피 아스카는 죽지 않는 몸이고, 이 저주를 사용하면 파수꾼 역시 죽지 않는 몸을 만들 수 있었다.
즉, 죽지 않는 상대의 봉인을 위해서 누군가는 영원토록 봉인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끔찍한 답이었지만 영웅들로서는 최선이기도 했다.
천재지변이든 아스카의 힘을 악용하려는 누군가에 의해서든 먼 훗날에라도 봉인이 깨진다면 대재앙이 일어날 테니까.
이를 확실하게 막아낼 방법은 누군가가 영원토록 봉인을 지키는 방법이 유일했다.
“잘됐군. 그 파수꾼 역할은 내가 하지.”
하지만 그 무게를 알고서도 돌아온 대답은 환희였다.
영웅들은 당황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나타난 아인츠발트가 마법사의 이야기를 듣고는 자발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아인츠발트! 너 대체 언제?”
“아니, 그보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왜 파수꾼을 해?”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닌가? 거기에 나만큼 확실하게 그 일을 수행할 사람도 없다.”
아인츠발트는 자신의 검을 두드렸다.
신의 영역에 이르렀다고 평가받는 자신의 검술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예전부터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요정족은 각자 어떠한 소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존재라는 사상이 있지. 예전에는 그것이 아스카를 무찌르는 거라 믿었지만…….”
아인츠발트는 영웅들을 둘러봤다.
“너희의 희생 덕분에 일이 생각보다 쉽게 끝났다. 소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오히려 이제야 소명다운 소명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게 그렇게 쉽게 할 말인 줄 알아? 얼마나 긴 세월을 남아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그래.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지, 수명을 넘는 삶을 강제로 살아야 한다는 건.”
아인츠발트는 영웅들의 말에 쓰게 웃었다.
당장은 여유를 보이지만 훗날에는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걸 자신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내 소명이라면 기꺼이 그리하겠다. 그게 우리 요정족의 의무이자 명예니까.”
영웅들은 끝내 아인츠발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들이 아는 한 가장 강하기에 누구보다 봉인을 잘 지켜낼 수 있었고, 그렇기에 아스카의 힘 따위에 휘둘릴 가능성도 없었으니까.
게다가 대부분 상태가 엉망이 되어버린 영웅들과 달리 아인츠발트는 별다른 부상도 없었다.
“너에게만 모든 부담을 지우지는 않겠다. 어떻게든 불사를 해주할 방법을 찾아볼 테니.”
마법사는 고결한 영웅을 위해서 반드시 다른 답을 찾아내겠다고 다짐했다.
영웅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리고 또 풍경이 변했다.
사트리안 왕국의 거대한 산맥에 영웅들은 몇 개의 마법을 설치했다.
안개를 불러들여 봉인의 장소를 감추고 접근해 오는 모든 존재를 혼란시키게 했다.
적아를 구분할 수 있는 마법이 아니었기에 파수꾼이 된 아인츠발트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리고 있어. 반드시 다른 방법을 구해 올 테니까.”
“그래. 믿겠다.”
아인츠발트는 봉인의 장소를 떠날 수 없었다.
그와 아스카를 연결하는 저주는 일정 반경을 벗어나면 효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자칫 아스카가 남아 있는 상태에서 아인츠발트 혼자만 죽게 되는 최악의 경우를 피하기 위해 아인츠발트는 이 산맥에 남아야 했다.
“빨리 돌아가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고.”
영웅들은 아인츠발트만 봉인의 장소에 남겨둔 채 등을 돌렸다.
그들은 약속대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바깥의 사정은 그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아스카라는 거대한 존재가 최후를 맞이하자, 그 빈자리를 두고 다시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아스카의 추종자들과 마족들이 날뛰었고 영웅들은 이를 막기 위해 평생을 써야 했다.
이미 아스카에게 심각한 부상을 입었던 영웅들은 이 전쟁을 버텨내지 못했다.
최후까지 살아남은 건 마법사가 유일했다.
마법사는 영웅들의 장비를 비롯해 유품을 모으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혹한의 땅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떻게든 봉인을 풀기 위해 평생을 매달렸다.
하지만 아무리 연구를 해보아도 아스카의 불사를 깰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게다가 이 사실을 아인츠발트에게 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봉인이 있는 장소를 다시 찾은 적이 있는데 그곳의 안개가 그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펼친 마법의 제어권이 넘어갔다고?”
범인의 정체는 아스카였다.
녀석은 봉인된 상태에서도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고 안개를 자신의 수족으로 삼았다.
“안 돼!”
오랜 연구로 몸이 망가진 마법사는 그 사실에 절망하며 죽어갔다.
세상을 구해낸 영웅들의 일대기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처절한 광경이었다.
* * *
“전하?”
탈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법사의 최후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탈론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길고 긴 기억이었다.
그러나 마치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던 것 같기도 했다.
“내가 어떻게 된 거지?”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니 갑자기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탈론의 설명에 내 시선은 마하레트를 향했다.
“과거의 풍경을 봤다. 벽화 속 영웅들의 이야기였지.”
“무슨?”
뭔가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내 말에 마하레트가 오히려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모르겠습니다. 그런 건 전혀 모릅니다.”
“모른다고?”
“전해져 오는 말도, 벽화의 글귀에도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실제로 탈론이나 다른 이들은 아무것도 보거나 느낀 게 없는 거 같았고.
그러면 오직 나만 봤다는 이야기인데, 이들과 나에게 무슨 차이가 있다고?
“외부에서 마법사를 데려왔을 때 이런 일은 없었나?”
“전혀 들은 바 없습니다.”
내가 마법사라서인가 했지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나에게만 과거의 기록이 보인 것일까?
“정확히 무엇을 보신 겁니까?”
“제법 많은 것들이었지.”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너무 긴 내용이었다.
하는 수 없이 최대한 간결하게 줄여서 설명해 주자, 마하레트가 입을 떡하니 벌린 채 소리쳤다.
“봉인이 있는 장소를 아셨단 말입니까?”
“그래.”
알아도 안개 때문에 들어갈 수 없고, 이제는 산맥이 통째로 무너진 상황이지만.
“그럼 여기에 걸려있는 마법도?”
마하레트의 시선이 아스카의 보주와 영웅들의 무기로 향했다.
내가 봤던 풍경에는 확실히 저것들도 있었다.
걸려있는 마법에 대한 이해도, 이를 해주하는 방법도 알 수 있었다.
마법사가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보여줬으니까.
“이렇게인가?”
가장 가까이에 있는 무기에 손을 얹고 마나를 흘려보냈다.
순차적으로 특정한 파장에 맞추자, 이윽고 무기에서 다시 기이한 공명음이 들렸다.
스르릉.
그리고 무기가 저절로 뽑혀 나왔다.
나로서는 조금 벅찬 크기의 무기였던지라 곧장 내려놔야 했지만.
“이럴 수가. 정말로 뽑다니.”
마하레트는 그 광경에 넋이 나간 듯했다.
육체 능력으로 나보다 월등한 수많은 영웅 중 누구도 이 무기를 뽑지 못했다고 한다.
그럴 만도 했다.
걸어놓은 봉인의 원리는 실력 좋은 마법사라면 알아차릴 만했으나, 이를 풀 수 있는 특정한 파장까지 알 방법은 전혀 없었으니.
지금 나처럼 과거의 기억을 보지 않고서야.
‘근데 왜 나한테만 보인 거지?’
마법사가 남긴 과거의 기억 어디에도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이 역시 매우 중요한 부분일 텐데도.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