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59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59화
159화
* * *
내 의견은 곧 레이칸 왕국의 부족장들에게 전해졌다.
국왕과 대전사가 부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갑과 을의 관계가 명확하고, 그들이 나에게 줄 수 있는 것도 몇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해서는 가진 모든 걸 팔아야만 했다.
그런 상황에 내가 내건 조건들은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하지만 이런 내 태도에 대한 의혹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직접 난민들을 떠안아야 할 탈론은 나와 따로 자리를 마련해 내 속내를 물어왔다.
“그저 전설에 나온 마족의 보주나 영웅들의 무기란 것이 탐나지는 않으실 테고.”
탈론은 내가 아스카의 보주나 영웅들의 무기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확고한 그 믿음에 문득 탈론을 시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대영주 수준의 영토 혹은 작위를 받은 가신들은 탈론 말고도 더 있다.
자크론도 그렇고 로크도 그렇다.
하지만 탈론은 그중에서도 분명 특별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능력을 말하는 게 아니다.
탈론은 드래고니안이라는 희귀 종족의 일원으로서 동족들을 위해 헌신하며 북부의 대영주로서 북부를 잘 다스리고 싶은 명확한 욕심이 있었다.
나처럼 자리에 대한 책임감을 크게 느끼는 부류의 사람인 것이다.
“마법사로서 호기심일 수도 있지 않나?”
“감히 전하를 재단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전하께서 실리를 추구한다는 건 옛적부터 느꼈습니다. 그러니 다니엘 경을 받아들인 것이겠지요.”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영웅이라는 명성을 얻은 내가 굳이 암살자를 받아들이고 별도로 활용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실리를 추구하시면서도 의외로 재물에는 관심이 없으시기도 하지요.”
탈론은 좀 더 나에 대한 이야기를 이었다.
보통 실리적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재물에 대한 탐욕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까지 재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언뜻 모순적인 듯 보이지만, 이는 실리 자체를 중시하기보다는 전하의 목표가 실리를 통해 이룰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탈론의 눈동자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 모습에 작게 미소가 그려졌다.
성장했다.
무력이야 내가 승급권으로 높인 것이지만 탈론은 이와 별개로 대영주로서 나름대로의 안목을 기른 상태였다.
“그럼 내 목표가 뭐일지도 알고 있나?”
슬쩍 던진 물음에 탈론은 미간을 좁혔다.
내 질문에 대한 답을 몰라서가 아니라, 알지만 차마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에 내 미소는 짙어졌다.
그것 자체가 정답에 근접했다는 의미였으니까.
“로스니아 제국의 황제와 같은 목표를 갖고 계시지요.”
탈론은 직접적으로 내 목표를 언급하는 대신에 빌헬름과 내 목표가 같다고 간접적으로 이야기했다.
“그래.”
나는 그에 수긍했다.
뭐, 목표가 같다고 해서 거기에 대한 접근 방법까지 같지는 않았다.
빌헬름은 야망이 큰 인간이었다.
잔혹한 성정에 딱히 능력이 좋지도 않지만 제국의 혈통을 잇는 몸으로서는 야망을 가진 것 자체가 큰 자질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빌헬름은 그 야망에 너무 눈이 멀어버린 상태였다.
대륙의 패권을 논할 수 있는 최강국의 군주로서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걸 짓밟고 유린하고자 했지만 이는 전략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만약 내가 빌헬름으로 빙의했더라면 야망을 최대한 숨긴 상태로 각국을 은밀히 무너트리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욱 이번 일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레이칸 왕국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약한 상태입니다.”
탈론은 정론을 말했다.
상대의 사정을 봐주는 것도 상대가 나름대로의 힘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 레이칸 왕국은 예상보다도 더 취약한 상태였고 우리 왕국에는 조금의 위협도 될 수 없었다.
그럼 그냥 무시해 버리면 된다.
하지만 나는 굳이 출혈을 감수하고 이주를 받으려 하고 있었다.
“내 목표를 이루는 데 가장 위협이 되는 상대가 어디라고 생각하나?”
“그야 로스니아 제국이나 타국의 군주들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탈론의 물음에 나는 오답 판정을 내렸다.
가이스트란 놈들이 아니었더라면 실제로 그렇게 됐을 것이다.
게임만으로 이 세계의 전부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고려해도 나에게 주어진 정보는 무척이나 가치가 있었으니까.
더구나 타르타로스에게 받은 시스템의 존재 역시 큰 도움이 되어주었고.
하지만 가이스트의 개입과 마족의 등장은 내가 아인 네패스가 되어 처음 세웠던 견적을 빗나가게 만들었다.
“그럼 어디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마족.”
“마족 말씀입니까?”
탈론은 잘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놈들은 이미 인류에게 패했습니다. 물론 그때 마족이 보여준 힘은 놀라웠지만, 그건 놈이 비정상적으로 강했던 거 아니겠습니까?”
“자신할 수 있나? 다른 마족은 그에 못 미칠 거라고?”
“그건…….”
탈론은 대답하지 못했다.
말릭이 유달리 강했던 건 맞지만 그건 인류와 마족의 전쟁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마족들이 모두 가이스트에게 힘을 받았다면 말릭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인 마족이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말릭을 마족의 최소 기준으로 잡고 있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마족의 숫자가 몇인지는 모르겠지만, 전면전을 걸어오지 않는 거로 봐서 지금의 인류에게 승리를 장담할 정도의 머릿수는 안 될 것이다.
대략 마족이 서른 정도만 있어도 인류에게 여유롭게 승리하리라 생각되니 그에 못 미치는 수준이 아닐까.
‘그런데 여기에 변수가 생겼단 말이지.’
마족들은 사트리안 왕국에 나타나서 아인츠발트와 충돌했다.
그곳에 신성수가 있던 것도 아닌데 구태여 아인츠발트를 들쑤신 이유가 뭘까?
아무리 가이스트의 개입으로 마족들이 비정상적으로 강해졌더라도 아인츠발트는 이 세계에서 최강의 존재.
절대 가볍게 접촉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는 아인츠발트와 충돌해서 입는 피해보다 이를 통해 얻을 이득이 크다고 봐야 했다.
그렇기에 나는 마족에 대한 위험도를 최대한으로 높여 보고 있었다.
전력이 확실한 로스니아 제국이나 그에 못 미칠 것이 분명한 다른 국가보다는 전력을 알 수 없는 마족이 나에게 최대 고비가 될 테니까.
“하지만 마족과 관련된 문제라면 우리 왕국만이 아니라 전 인류가… 아…….”
탈론은 인류의 단합을 말하려다가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전 이전까지는 인류가 힘을 합쳐서 마족과 맞서 싸운다는 게 너무 당연한 인식이었다.
그렇기에 마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그러나 이미 승리해서 잔당에 불과한 마족을 두고 인류가 단합할 수 있을까?
내전으로 서로 창칼을 겨누고 거듭해서 국가끼리의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지금?
“더는 종족의 싸움이 아니군요. 그래서 레이칸 왕국의 부족들을 받아주시려는 거고.”
탈론은 마침내 모든 상황을 이해했다.
내가 왜 레이칸 왕국에 남아 있는 것들에 관심을 가졌는지도.
왜 무리해서라도 부족들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한 건지도.
“하지만 북부의 대영주인 몸으로서는 달갑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대로라면 레이칸 왕국의 모든 부족이 움직이게 될 텐데, 예상보다 인원이 너무 많습니다.”
탈론은 대영주였고 그 자리를 준 건 나였다.
하지만 그게 탈론이 나를 위해 간이고 쓸개고 줘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왕과 영주의 차이란 건 결국 누가 더 지닌 힘이 크냐는 것이었으니까.
“북부의 사정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예산은 내가 마련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다.”
“문제는 예산만이 아닙니다. 몇 개 부족도 아니고 레이칸 왕국의 주민을 사실상 통째로 옮겨 오는 일입니다.”
탈론은 절박해 보였다.
만약 이대로 내가 레이칸 왕국에 있는 부족들을 몽땅 이주시키기로 한다면 탈론에 대한 북부의 민심이 박살 날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그 보주나 무기를 대가로 식량이나 자금을 지원해 주는 쪽이 어떻습니까?”
탈론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효율을 따지자면 지금 말하는 쪽이 훨씬 낫다.
그렇지만 이는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을 조건이었다.
그들이 바보도 아니고, 당장 뭐 좀 쥔다고 해서 그게 영원할 리 없다는 걸 알 테니까.
그럼 그때 누가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줄까?
그들이 레이칸 왕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남아 있던 건 전설 때문만은 아니다.
소속될 수 있는 나라가 있다는 것.
그게 아예 난민이 되어버리는 것보다는 낫기 때문이다.
“그걸 받아들일 리가 없지. 나라가 없는 게 어떤 처지인지는 경도 잘 알지 않나?”
드래고니안 출신인 탈론은 이를 부정하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네패스 왕국도 인간들의 나라니까.
종족 구성원은 절대다수가 인간이며 드래고니안은 소수 종족으로서 붙어있는 것뿐이다.
그나마 탈론이 대영주가 되었으니까 예전처럼 숨어 살지 않아도 되나, 그마저 북부에 국한되는 이야기다.
드래고니안들은 탈론과 함께가 아니라면 다른 지역으로 나가지 않았다.
“전 레이칸 왕국에 동정심을 가질 생각은 없습니다.”
“동정하는 게 아니야. 대가는 크고 솔직히 효율은 꽝이라고 해도 좋지만, 나에게는 그것들이 필요해.”
아스카의 보주나 영웅들의 무기에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러나 최대의 위협이라고 할 수 있는 마족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이고 약탈하는 방법도 있지 않습니까? 찝찝하기는 하지만 고려할 여지는 충분합니다.”
“옮기지 못하게 조치가 되어있다는 건 약탈에 대한 대비도 나름대로 되어있다는 의미 아니겠나?”
후손들이 악용이라도 할까 봐 봉인의 위치조차 알려주지 않았다는 이들이다.
그런데 힘으로 이를 약탈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그에 대한 대비 역시 되어있지 않을까?
설령 그런 게 없더라도 이걸 확인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렇다고 가정하고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후우, 알겠습니다. 뜻은 확고하신 거 같군요. 그럼 예산은 어떻게 마련하시려는 겁니까?”
“거기에도 레이칸 왕국의 도움이 조금 필요하지.”
내 계획을 이야기해 주자 탈론은 당황한 눈치가 역력했다.
그러나 이게 도움이 될 거라는 건 부정하지 못했다.
“설마 그것까지 계산한 겁니까?”
“아무렴. 레이칸 왕국도 그 정도는 해줘야지.”
사전에 논의되지 않은 내용이지만 눈앞에 이주라는 미끼를 이미 던진 상태였다.
아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한 이전과 달리 눈앞에 그 희망을 보여준 이상 마하레트나 부족장들은 이를 절대 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긍정적인 말을 먼저 해준 것이고.
“협상은 원래 이런 거야.”
내가 만약 이를 먼저 요구했다면 레이칸 왕국은 고민을 좀 더 했을 것이다.
어쩌면 받아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간절함이 자극받은 지금은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부족합니다.”
그때 탈론이 눈을 빛냈다.
예산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고 생각보다 더 큰 이득을 볼 수 있더라도 이는 나와 네패스 왕국의 이익.
탈론과 북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북부에 지원해 줄 액수나 인력을 구체적으로 보장해 주십시오. 그 전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 말을 안 했으면 대영주를 바꿔야 하나 고민했을 거야.”
내 이야기에 탈론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처음부터 거기까지 해줄 각오를 하고 왔다는 걸 이제 안 것이다.
“민망하군요. 나름대로 전하와 언성을 높일 각오도 했는데.”
“내 쪽에서 당연히 해줘야 하는걸.”
“세상이 꼭 당연한 이치로만 움직이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나는 경들에게 인색했던 적이 한 번도 없어.”
“유념하겠습니다.”
그렇게 탈론과의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 * *
“이야기가 모두 잘 풀렸다니 다행입니다.”
다음 날 마하레트는 탈론이 별다른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걸 보고 더욱 반가워했다.
부족장들의 얼굴도 밝았다.
한편으로는 찝찝해하는 구석도 있었지만.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이주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실무자들을 통해서 협의하도록 하지.”
“물론입니다. 이번에는 저희 쪽에서 찾아가겠습니다.”
직접 찾아오겠다는 말에서 마하레트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럼 내가 제시한 조건은 받아들이기로 했나?”
“당연합니다. 부족장 모두 동의했습니다.”
마하레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지금 볼 수 있나?”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좀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셔야 합니다.”
마하레트는 개미굴처럼 뻗어 있는 통로 중 으슥한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회합장의 불빛이 전혀 닿지 않았는데 어두울 뿐 아니라 바깥처럼 춥다는 느낌이 들었다.
“특이하군.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은데 더 추워지고 있으니.”
완만한 경사지만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고 있기에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이칸 왕국은 기후상 지상이 더 추울 수밖에 없으니까.
“오직 이곳만 그렇습니다.”
마하레트가 안내한 통로의 끝은 초라했다.
화려한 무언가 대신에 은은한 횃불과 몇 명의 전사들만 있었으니까.
그런데 전사들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레이칸 국왕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하나같이 덩치가 크고 굳센 이들이었다.
‘3티어.’
영웅 정보를 통해서 전사들을 살피자 전원이 3티어였다.
그들은 허가받지 않은 침입은 절대 허용치 않겠다는 듯이 매서운 시선을 보내왔다.
‘처음으로 경계가 삼엄한 것을 보는군.’
우리가 손님으로 오기는 했지만 전사들이 빠져 있어서 그런지 레이칸 왕국은 상당히 허술한 느낌을 보여줬었다.
그러나 이곳만큼은 그런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통과 자체는 까다롭지 않았다.
부족장들과 이미 협상이 끝나서인지, 우리가 다가가자 바로 물러나 줬으니.
“저게 마족 아스카의 보주입니다.”
그렇게 경계를 지나자 보인 건 작은 제단이었다.
그곳에는 특이하게도 시뻘건색을 뽐내고 있는 성인 머리만 한 크기의 보주가 있었다.
그리고 제단의 앞에는 여러 무기가 꽂혀 있었는데, 아마 영웅들이 남긴 무기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보다 색이 더 진해졌군요.”
보주를 살핀 마하레트가 인상을 굳혔다.
변화가 좀 더 일어난 모양이었다.
이전의 상태를 모르기에 대충 수긍하고 좀 더 가까이 접근했다.
우웅!
그 순간 갑자기 제단 주위의 무기들에서 기이한 공명음이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