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58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58화
158화
레이칸 왕국의 모든 것.
고작해야 회합장 한쪽에 새겨져 있는 벽화를 표현하기에는 원대한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이를 말한 마하레트도, 이 소리를 들은 부족장들도 표정에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로선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는 듯이.
그래서 조금 호기심이 들었다.
“모든 것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의미지?”
“여기에는 선조들이 왜 혹한의 대지에 내몰렸는지, 후손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이칸 왕국의 역사이자 정신이지요.”
마하레트의 설명을 듣고 벽화를 살폈다.
레이칸 왕국의 선조라고 추정되는 이들이 무언가와 맞서는 내용이 벽화의 시작이었다.
아래에는 상황을 설명하는 듯한 글도 함께 적혀 있었는데 세월에 손상되어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다.
“오래전 큰 전쟁이 있었습니다. 아주 사악하고 강한 마족 하나가 이 대륙을 지배하며 모든 종족들을 위협했다고 하지요.”
하지만 마하레트는 손상된 글의 내용을 알고 있었는지 막힘없이 설명을 해주었다.
“그 마족의 이름은 아스카입니다.”
“아스카라고 하면 사교에서 유명한 그 아스카교를 말하는 건가?”
아스카교라면 로베른 왕국에서 세를 확장하려던 전적이 있었다.
모든 사교도가 아스카교는 아니지만 사교도 중에서도 이름이 있고 마족과 엮여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이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스카교는 역사적으로 크게 위세를 떨친 전적이 있어 다른 사교도와는 위험성이나 영향력이 남달랐다.
“맞습니다. 선조들께서는 그 아스카와 맞섰으나 놈의 힘은 너무나도 강했지요.”
벽화에는 아스카에게 패배하는 레이칸 왕국 선조들의 모습이 이어졌다.
“하지만 선조들은 포기하지 않으셨지요. 이 혹한의 땅까지 내몰린 뒤에도 아스카를 물리치기 위하여 힘을 키웠으며 각 종족의 영웅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마하레트가 벽화의 한 곳을 가리켰다.
영웅들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그림이 있었다.
그들이 다양한 종족이라는 걸 반영한 것처럼 외모는 모두 제각각이었다.
찬찬히 영웅들의 모습을 살피는데 그중 유독 한 영웅의 모습이 내 눈길을 끌었다.
구릿빛 피부에 백발을 가진 검사였다.
‘뭔가 익숙한 외모인데?’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자 마하레트에게 해당 영웅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영웅의 이름이 뭐지?”
내가 가리킨 영웅을 확인한 마하레트가 눈에 이채를 띠었다.
“그 영웅의 이름은 아인츠발트. 요정족의 검사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내가 유일하게 따로 지목한 영웅에게서 익숙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실제로 외모가 닮았다는 생각을 해서 지목한 것이었지만.
구릿빛 피부와 하얀 머리색, 거기에 여러 무기 중 검을 쓴다는 특징이 모두 내가 알던 게임 속 아인츠발트와 일치했다.
“아인츠발트는 검술이 신의 영역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검 한 자루만 들고 단신으로 수백의 마족을 토벌했을 정도죠.”
아인츠발트에 대한 설명을 마친 마하레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느껴지신 게 있으셨습니까? 딱히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닌데.”
요정이라는 종족은 드래고니안처럼 희귀하지만 그뿐이었다.
벽화에 기록된 영웅 중에는 그보다 더 희귀하거나 지금은 멸종되어 사라진 종족까지 존재했으니까.
그렇다고 아인츠발트의 외모가 다른 영웅에 비해 눈에 띄는 것도 아니었고.
“아니, 그냥 궁금하더군.”
하지만 아인츠발트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는 없었기에 그냥 얼버무렸다.
대신 벽화를 다시 자세히 살폈다.
아스카교도 그렇고 아인츠발트 역시 실존하는 영웅이다.
이 둘의 이름이 정확히 거론되는 것을 보면서, 이를 단순히 전설로 치부할 수는 없었다.
이 벽화는 분명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습니까?”
내 대답에 마하레트는 의구심이 남아있는 듯했으나 이를 추궁해 오지는 않았다.
“계속 이야기를 하자면 아스카는 영웅들과 오랜 세월을 싸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명의 한계를 맞이하게 되었지요.”
수명의 한계.
영웅 전설에 나오는 악당치고는 굉장히 현실적인 문제였다.
마족이라고 해서 영원히 사는 건 아니고, 이만큼 강했다면 어느 정도 나이도 있었을 테니까 그럴듯한 내용이지만.
덕분에 벽화에 대한 신뢰도도 올라갔다.
“아스카는 죽음을 극복하고자 여러 방안을 찾았고, 그 부산물이 지금 사교도에게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군.”
아스카교의 특징은 살아 있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그 목숨을 나누는 것이다.
그 지나치게 이질적인 특성으로 마법이 아니라 주술로 불리기는 하지만 엄연히 마법의 한 갈래였다.
“하지만 아스카는 결국 죽은 것 아닌가?”
“아닙니다. 아무리 늙었더라도 아스카는 강했고 연구 역시 나름대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아스카는 죽음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하지요.”
죽음의 극복.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믿을 수 없는 허무맹랑한 전설이다.
그러나 앞선 부분들이 역사에 기반한 높은 신뢰성을 가졌고 사교도의 주술을 생각해도 나름대로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타르타로스의 절대군주가 언제 타르타로스에 가게 되었는지는 모르나, 그런 거대한 세력을 키우려면 평범한 사람의 수명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다른 세계에도 불사가 존재한다면 이 세계에도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지 않을까?
“다행스럽게도 아스카보단 영웅들이 한발 더 빨랐습니다. 녀석이 진정한 불사를 갖기 전, 영웅들은 아스카를 쓰러트리는 데 성공했죠.”
아스카라는 마족이 승리했다면 지금 세계처럼 인류가 마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역사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불완전하게나마 완성된 불사로 인해서 영웅들은 아스카의 숨통을 끊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대신 어느 땅에 아스카를 봉인하고 파수꾼을 배치했죠.”
아스카의 봉인과 파수꾼.
게임을 통해 이 세계를 접한 나로선 아인츠발트가 떠오르는 게 당연했다.
“혹시 그 장소가 어딘지도 나와 있나?”
아인츠발트가 등장하는 장소가 사트리안 왕국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봉인이 있는 장소 역시 그 근처일 것이다.
“장소에 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혹여 아스카의 힘을 탐한 이들이 흔적을 쫓을까 봐 찾을 수 없는 곳에 봉인하고 장소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하레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그저 역사이자 전설일 뿐, 어째서 레이칸 왕국의 후손들이 이 땅에서 살아야 하는지를 이해시켜 주고 있진 않았다.
아마 이다음에 그 내용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훗날 아스카가 봉인에서 깨어날 가능성이 있었기에 선조들은 별도의 대비를 해두었습니다. 그게 바로 이 땅에 잠들어 있는 아스카의 보주와 영웅들의 무기지요.”
아스카의 보주, 거기에 영웅들의 무기라…….
설마 레이칸 왕국에 그런 물건들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스카가 전설대로 대단한 마족이라면 그 보주도 꽤 특별할 것이고, 영웅들의 무기란 것도 나름대로 흥미가 갔다.
혹시 루안이 만든 장비보다 더 뛰어난 게 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루안에게 영감을 줄 만한 장비라면 나름대로 효용이 있을 테니.
“저희들은 이 내용을 기억하고 아스카의 보주와 무기들을 지키는 의무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을 떠나기 어렵지요.”
“내용은 기억하고 있으면 되고 보주나 무기는 옮기면 충분하지 않나?”
하지만 후손들이 먹을 것 하나 구하기 어려운 땅에서 계속 살아갈 결심을 한 것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마하레트 역시 내 의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여유롭게 답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법이지요. 이 땅에서 벗어난다면 그땐 누가 이것들을 기억하려고 들겠습니까? 게다가 보주와 무기들에는 특별한 마법이 걸려 있어서 바깥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마법이?”
“네. 혹시나 마법사의 도움을 받으면 될까 싶어서 몇 세대 동안 외부의 마법사를 초빙한 일도 있었지만, 어느 마법사도 해내지 못했다고 하지요.”
마법에 대해 알려주는 마하레트의 목소리에는 짙은 무력감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 땅을 벗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이었다.
“역사는 알겠군. 그런데 부족장이 노인들인 것이 그것과 무슨 상관인가?”
“얼마 전에 아스카의 보주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금까지 돌멩이나 다름없던 보주에 빛이 서렸지요. 불길한 핏빛이 말입니다.”
순간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아인츠발트가 있을 사트리안 왕국에서 마족들이 목격된 것도 얼마 전이었으니까.
“수백 년 동안 없었던 일이 갑자기 벌어진 것에는 이유가 있을 터. 저희는 왕국의 전사 대부분을 대륙 각지로 보내야 했습니다. 정말 아스카가 부활했는지 알아야 했으니까요.”
“그래서 젊은 전사가 없던 거군.”
그나마 남아 있던 건 레이칸 국왕과 그 호위가 전부였겠지만 그들은 나에게 죽었다.
그러면 지금 레이칸 왕국에는 최소한의 전사조차 남아 있지 않다는 소리였다.
“네패스 국왕 전하께서 해주신 이주 제안은 무척 반갑습니다. 하지만 아스카의 보주에 빛이 돌아온 지금, 저희는 선조들이 남긴 의무를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수백 년 동안 우리를 묶어뒀던 의무에 계속 희생되는 것 역시 끔찍한 일이지요.”
마하레트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내부 회의 결과 부족장들은 전사들에게만 의무를 부여하고 남은 부족원들은 이주시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습니다. 즉, 이주를 받아주신다고 해도 전사들은 내드릴 수 없습니다.”
전사들을 뺀다면 남는 건 노인과 여성 그리고 아이들이 전부일 것이다.
제일 중요한 노동력을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짐이 될 이들만 떠안아야 한다는 것.
확실히 이건 그리 달가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를 들은 탈론의 표정도 좋지만은 않았고.
“그런데도 저희에게 해주신 이주 제안이 유효합니까? 네패스 국왕 전하.”
별다른 도움도 되지 않을 부양해야 할 인구들을 떠맡을 수 있겠느냐는 물음.
거기에 마하레트는 별다른 기대도 없다는 듯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왔다.
그럴 만도 했다.
이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부담만 되는 일일 뿐이었으니까.
기존에 생각할 수 있던 몇 가지 이점도 지금으로서는 거의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었다.
‘레이칸 왕국의 위험성이 사라졌으면 군사를 빼도 상관없으니까.’
레이칸 왕국에 이주를 제안해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득은 북부를 지켜야 할 병력을 빼내서 운용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러나 현재 전사들이 모두 왕국을 비워버린 레이칸 왕국은 이미 위협이 될 요소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확실히 부담되는 이야기로군.”
몇 개 부족만 받아서 내분을 일으키려던 내 계획은 실패한 셈이고 받아내야 할 이주민의 숫자는 예상을 벗어났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어떤 군주도 이를 받아들일 리 없지요.”
마하레트는 딱히 실망한 모습이 아니었다.
이주를 제안한 건 나지만 사실상 레이칸 왕국에서 매달려야 할 처지였으니까.
그러니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전혀 고려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당장의 세대에서는 젊은 남성들이 없으니 분명 부담이 될 것이다.
게다가 노인들은 훗날에라도 무언가를 기대할 수 없는 존재니까.
그러나 여자와 아이들은 다르다.
“내전은 우리를 피폐하게 했지만 동시에 일손이 부족하게도 만들었지.”
나는 위니스에게 받은 보주를 통해 왕국에 막대한 자금을 풀었다.
그러나 전쟁을 위해 군사들의 모집과 훈련에도 소홀할 수는 없었고 젊고 생산력이 뛰어난 이들은 군대에 몰린 상태였다.
그렇기에 현재 왕국의 상황은 넘치는 일거리에 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적은 처지였다.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혼인에 나설 걸 약속하고 네패스 왕국의 법을 따르겠다고 맹세한다면 이주 제안은 여전히 유효하다.”
뜻밖의 말이었는지 마하레트가 눈을 부릅떴다.
놀라기는 탈론도 마찬가지였다.
“전하, 그건…….”
직접적으로 받아야 할 탈론이 난색을 표하려 했으나 손을 들어 막았다.
아직 이야기가 끝난 건 아니었고, 이 자리에서 모든 속내를 밝힐 필요는 없었으니까.
“물론 수만을 한꺼번에 받아들일 만큼 넉넉한 상황은 아니지.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할 테고, 그것으로도 장담하기 힘들다.”
미래를 생각하고 투자하기에는 당장 감당해야 할 부담이 너무 크다.
우리 왕국의 사정이 다른 국가들보다는 낫다고 하지만 로스니아 제국을 빼면 어느 나라나 힘든 처지였으니까.
레이드를 통해 몬스터의 부산물을 구하더라도 대부분 장비 제작에 다 쓰이는 형국이고.
이번에 로스니아 제국에서 빠져나오는 일로 협회에 빚도 져버렸다.
그렇다고 다른 곳 예산을 줄일 수도 없었다.
군대의 육성처럼 절대 그만둘 수 없는 분야도 있고, 지원 사업처럼 할 때는 괜찮아도 그만두면 후폭풍이 될 분야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존재했다.
로스니아 제국.
대륙 서부의 패권국으로서 긴 세월 동안 부를 축적해 온 나라.
모두가 힘든 지금 시기에도 로스니아 제국만큼은 여전한 부유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돈을 마련할 방법은 있다. 일단 예산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것들은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고.”
“정말 가능하십니까?”
마하레트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내전이 있기 전을 기준으로 봐도 그만한 여유가 있는 국가는 드물 텐데 마족과의 전쟁과 연이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상황이었으니.
그러나 나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계산이 섰다.
로스니아 제국은 혼란을 겪고 있다.
선전 포고를 하고서도 공세가 아니라 수세를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하지만 그런 로스니아 제국이라도 언제까지 침묵만 할 수는 없었다.
황제가 살해당한 상황에서 체면치레는 어떻게든 해야 할 테니까.
나는 그 등을 떠밀어줄 수 있었다.
그리고 꼭 해야만 하는 상황이기도 했고.
‘아스카의 보주와 영웅의 무기라…….’
마족들이 아인츠발트와 부딪쳤고 아스카의 보주가 영향을 받았다.
언젠가 마족들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던 나로서는 이 단서를 절대 놓칠 수 없었다.
털썩!
마하레트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부족들의 이주를 받아주신다면, 그 은혜는 절대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다. 방금 이야기한 보주와 영웅들의 무기란 걸 넘겨받고 싶군.”
노골적인 제안에 마하레트가 순간 흠칫하는 반응을 보였다.
내가 과할 정도로 그들의 전설에 관심을 보인다는 걸 느낀 것이다.
“왜 그렇게 이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는 역사이지만 외지인에게는 그저 허무맹랑한 전설에 불과할 텐데.”
분명 그렇다.
남들이 보기에는 그저 전설일 뿐이다.
나도 아인츠발트의 이름과 벽화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집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