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5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57화
157화
【 레이칸 왕국 】
탈론의 동의를 받은 뒤 내 제안은 왕국 전역의 영주들에게 전달되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레이칸 왕국 부족들의 이주를 위해서 영주들로부터 재물과 차별 철폐 등의 지원을 약속받은 대신 로베른 왕국의 영토를 주겠다고.
어차피 그 영토들을 내가 계속 가지고 있는 것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거듭된 내전과 전쟁으로 귀족들의 숫자가 너무 많이 줄어든 바람에 영토를 관리하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아무리 내 직할령이라고 해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방치되는 땅이어서야 이렇게라도 써먹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뭐, 이런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겠지만.”
이득은 이득이고 인식은 인식이다.
레이칸 왕국에 대한 원한도, 북부에 대한 차별도 이것으로 모두 사라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계기가 될 사건으로서 이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귀족들의 행동이 달라지면 아랫사람들은 자연히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만약 차별로 인한 사건이 발생할 경우, 영주들은 차별을 한 이들을 대상으로 벌을 주게 될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면전에서 대놓고 차별을 자행하는 행동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영주들은 자신의 땅에서는 얼마든지 법을 집행할 권리가 있었으니까.
신분제 사회에서 귀족에게 밉보일 짓을 할 수 있는 간 큰 이들은 절대 흔치 않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아니라 눈치가 보여서 사리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분간은 소란스러울 겁니다.”
네일은 이번 일로 생기게 될 소란을 걱정하는 듯했다.
“어차피 작은 소란이야.”
하지만 진짜 큰 소란은 왕국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기에 지금 내 행동에는 나름대로 명분이 실릴 수밖에 없었고.
영주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왕국의 안전이 위험한 상황에서 감정을 내세울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일단 살고 보는 게 우선이니까.
“사절단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부적으로 준비를 갖췄다면 당연히 외부적으로도 행동에 나서야 했다.
레이칸 왕국에 보낼 사절단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는데, 험지로 들어가는 만큼 인선을 신경 쓸 필요가 있었다.
“일단 두 사람 정도는 꼭 필요하겠지.”
한 명은 북부의 대영주인 탈론이었다.
레이칸 왕국의 부족들이 이주한다고 해도 너무 멀거나 기후의 차이가 큰 다른 지역보다는 북부에 몰릴 확률이 높으니까.
그곳을 다스리는 대영주인 탈론이 직접 가서 설득하는 쪽이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탈론 본인의 언변은 둘째로 보더라도.
“다른 한 명은 누구입니까?”
“그야 뻔하지.”
나는 손을 들어 나 자신을 가리켰다.
서글픈 일이지만 부족들을 확실히 흔들고, 이번 일이 전적으로 국왕인 내 뜻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는 직접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하다못해 친척이라도 있었다면 명령이라도 내렸겠지만, 나도 그렇고 레일리도 이제는 서로밖에 남지 않은 사이였으니까.
“그 험한 땅에 직접 가시겠다는 겁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나도 할 수 있다면 이번에는 피하고 싶었다.
내전에서 북부 원정에 나섰을 때도 꽤 고생을 했지만 레이칸 왕국은 그보다 더 험할 테니까.
그러나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준비 좀 해주게.”
내가 왕이 되고서도 계속 나서는 게 절대 내 야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 권한을 대신 행사할 만한 마땅한 대리인이 없다는 것.
이는 우리 왕국이 가지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였다.
‘제국과 별로 다르지도 않은 상황이야.’
빌헬름이 죽고 나서 그 막대한 군사력과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발이 묶여버린 제국과 같은 상황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첩을 들이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그 외척을 이용하는 것이지만.
‘레일리가 그리 좋아하지는 않겠지만.’
이런 생각을 말했다가 한 대 맞는 건 아닌지 심히 걱정되었다.
* * *
‘생각보다 더하군.’
그로부터 약 보름이 지났을 때, 나는 탈론을 비롯해 일부 기사들과 함께 레이칸 왕국을 지나고 있었다.
레이칸 왕국은 어째서 그토록 악명을 가지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잘 알려주었다.
하루에 한 번씩은 반드시 불어주는 눈보라.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땅인데 바람마저 심하니 어지간해서는 살아갈 수 없었다.
이는 사람뿐만 아니라 동식물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먹을 것이 부족하여 레이칸 왕국의 인구는 항상 일정 수준을 넘을 수 없었다.
‘레이칸 국왕이 제 무력을 팔 수밖에 없었겠군.’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니까 더했다.
이러한 곳에서 전사들만 수천.
그 전사들에게 딸린 식솔들을 생각하면 수만 명을 먹여야 살려야 하는 게 레이칸 국왕이라는 자리였다.
“거리는 얼마 되지도 않는데 움직이지를 못하니 갑갑합니다.”
로크는 눈을 뒤집어쓴 채 하소연하듯 심경을 토로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동안에는 괜히 움직였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기에 땅을 파고 바람을 막는 등 버티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걸음이 느려졌고 코앞을 이동하는 데도 한세월이었다.
“어쩌면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많이 소요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이칸 왕국에 와봤다는 탈론도 이 상황에서는 뾰족한 수를 내지 못했다.
드래고니안들은 과거에 레이칸 왕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방문.
레이칸 왕국 내부에 있을지 모를 숨겨진 통로 같은 건 알지 못했다.
“상관없다. 왕국의 상황을 계속 보고받고 있으니까.”
이 험한 땅을 돌아다니기 위해서 나 역시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휘하의 마법사들을 가능한 많이 동원해서 거점을 설치해 가며 왕국과 주기적으로 통신을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면 예정보다 시간이 걸려도 왕국의 상황을 전달받고 안전을 확인하는 건 아무 지장이 없었다.
마법사들 입장에서는 매우 피곤한 노릇이었지만.
“그리고 이번 일이 잘되면 북부에 있는 병력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을 테니까. 할 만한 일이지.”
레이칸 왕국의 붕괴는 결국 북부의 전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으로 이어진다.
언제 침범해 올지 모르는 레이칸 왕국의 전사들을 걱정하며 수천의 병력이 묶이는 것보다는 이런 고생을 해서라도 배후의 위협을 뿌리 뽑는 게 훨씬 나았다.
“충분히 남는 장사야.”
“남는 노동력으로 농사도 더 할 수 있으니 괜찮겠군요.”
탈론은 이 상황이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듯했다.
동족들뿐 아니라 북부에 산적한 문제들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음?”
그때 갑자기 탈론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눈보라 너머를 살폈다.
“뭔가가 오고 있습니다.”
“응? 지금 눈보라가 오고 있는데?”
탈론의 이야기에 나는 당황하며 바깥을 살폈다.
가시거리도 나오지 않고 바람 소리에 인기척마저 묻힌 상황이었다.
이런 날씨에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는 존재가 있을까?
웬디고처럼 두꺼운 가죽을 지닌 녀석이라도 레이칸 왕국에서는 서식하기 힘들어할 정도인데.
“지상이 아니라 지하입니다.”
긴장한 눈으로 주변을 살피던 탈론은 곧 상대의 위치를 찾아내고는 바닥을 힘껏 내리찍었다.
그러자 쌓여 있던 눈밭의 일부가 금이 가며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런. 바로 밑에 통로가 있었군.”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탈론이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했다면 기습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하를 거니는 통로가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우리가 자리를 잡은 곳 바로 밑일 줄은 전혀 몰랐으니까.
타악!
탈론은 활을 갖고 드러난 통로로 먼저 몸을 날렸다.
뒤이어 기사들도 아래로 내려갔고, 우리는 통로 너머에서 접근해 오는 한 무리의 부족과 마주할 수 있었다.
“네패스 왕국의 사절단인가?”
“그렇다. 그대들은 누구지?”
“난 레이칸 왕국의 부족장 중 한 사람인 마하레트다. 사절단을 안내하기 위해서 왔다.”
미리 소식을 전달하기는 했기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고생했을 전령에게 미안할 뿐.
“우리가 이곳으로 오는 걸 용케 알았군?”
하지만 탈론은 눈보라 속에서 우리 위치가 발각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상대를 떠봤다.
“그나마 이쪽이 편한 길이니까.”
이에 마하레트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 대꾸에 탈론도 반박할 말이 없었는지 입이 막혔다.
이 땅에서 오래 살아온 레이칸 왕국의 전사가 우리보다 지형을 잘 아는 건 당연했으니까.
실제로 우리가 그나마 알고 있던 편한 길을 통한 것이기도 하고.
“외지인의 행동은 뻔하다. 정보가 없는 이상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마하레트의 이야기에 탈론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하지만 이 땅에 타국의 군주가 발을 디딘 건 뻔하지 않군.”
마하레트의 시선이 탈론에게서 나에게로 옮겨졌다.
“살면서 우리의 왕을 제외한 다른 왕을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예의를 갖춰라.”
“아, 그렇지. 타국의 군주를 대한 경험이 없어서 실례했군.”
부족장이라고 하면 레이칸 왕국에서는 손꼽히게 높은 자리였기 때문인지 마하레트는 높은 사람을 대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보였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상황이었다.
외부의 손님이라고 오는 사람 중에서 부족장이 예의를 취해야 할 상대는 없었을 테니까.
“부족장 마하레트입니다.”
“네패스 왕국의 군주인 아인 네패스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잠깐 형식적인 인사가 오갔다.
정말 양쪽 모두 최소한의 예의만 갖춘 느낌이 팍팍 났다.
어쩔 수 없는 게, 두 국가의 사이는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내가 일국의 군주니까 저렇게라도 예의를 차리는 거지, 탈론 혼자 왔다면 과연 이런 대접이나마 해주었을지 의문이다.
“전령에게 듣기로 우리에게 이주를 제안하러 왔다고 하던데, 맞습니까?”
마하레트의 안내를 받아서 이동하는데 그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대놓고 용건을 확인하는 게 정상적인 예법은 아니었으나, 상대가 레이칸 왕국이었기에 그러려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대로다.”
“의외군요.”
“무엇이 말이지?”
“지금 우리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다면 가만히 내버려둬도 위협이 될 수 없다는 걸 알 텐데.”
마하레트는 솔직하게 레이칸 왕국의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러니까 내가 내민 제안도 유효하지 않겠나?”
그래서 나도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그 역시 한 명의 부족장으로서 내가 이주를 권할 상대이자 회유해야 할 대상 중 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렇지요. 소식을 듣고 부족장들 모두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으니.”
“반응이 괜찮았나?”
“자존심을 내세울 게 아니라면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지요.”
제안은 이주였으나 실제로는 내 백성이 되라는 이야기였고, 내 지배를 받으란 말이었다.
레이칸 국왕이 건재할 때라면 이를 거절하는 의견이 강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다 알고서 제안한 거니까.
“하지만 모두가 받아들이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라고 처음부터 이 땅이 좋아서 남은 건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마하레트의 말에서 묘한 뉘앙스가 느껴졌다.
이 혹한의 땅을 벗어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이런 내용은 사전에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가서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겁니다.”
그러나 마하레트는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주지 않은 채 나와 사절단을 안내했다.
그렇게 한참을 이동한 끝에 우리는 꽤 넓은 곳으로 빠져나왔다.
그곳은 동굴이었는데 꽤 깊은 장소였고 개미굴처럼 여러 곳으로 이어진 통로가 있었다.
“이곳은 여러 부족이 모이는 회합장입니다.”
“신기한 지형이군.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곳인가?”
“그럴 리가요. 오랜 세월 선조들이 피땀 흘려가며 만든 장소입니다. 지상에서는 도무지 살기가 어려우니까.”
마하레트가 푸념하듯 말했다.
이런 장소를 인간의 힘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잠깐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이걸 좋아서 만든 게 아니란 사실에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들의 선조가 어쩌다 이런 땅에 내몰리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절대 원해서 이 땅에 들어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왔군.”
주변을 돌아보는데 부족장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그런데 조금 의외인 부분이 있었다.
레이칸 국왕의 자리가 무력으로 정해지는 것도 그렇고, 마하레트도 제법 젊은 외모를 하고 있어서 육체적 전성기인 이들이 부족장일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 나타난 부족장들은 의외로 거동이 힘든 연로한 이들이 많았다.
“레이칸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네패스 왕국의 군주시여.”
부족장들이 나를 향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군주인 내가 이들 전부를 상대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 대표를 찾았다.
“대표가 누구지?”
“저입니다.”
그에 손을 든 인물은 우리를 안내해 준 마하레트였다.
솔직히 여기서는 조금 당황했다.
대표라고 할 정도면 나름 위세가 있을 텐데 직접 길 안내에 나선 것이었으니.
“다른 부족장들은 보다시피 거동이 힘들어서 제가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하레트도 이런 사실을 짐작했는지 설명을 해주었다.
“의외군. 부족 제일의 전사들이 부족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틀린 말은 아닙니다. 원래는 그랬지요.”
“원래는?”
“기존의 부족장들 대부분은 마족과의 전쟁에 나갔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에 자리를 맡았던 이들이 아직까지 그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지요.”
“실력 있는 전사가 나오지 않았나?”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설명이었다.
마법사들은 나이가 많을수록 뛰어나지만 전투형 영웅의 기량은 일정 수준이 넘으면 하락할 수밖에 없으니까.
설령 이전 세대의 부족장들이 죽었다고 해도 곧 젊은 전사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보통일 것이다.
실제로 마팔이나 레이칸 국왕 그리고 로톤이라는 이도 그리 고령이 아니었고.
“나오기는 했지만 굳이 부족장에 앉히지는 않았습니다.”
“왜지?”
“지금부터 그걸 설명드리겠습니다.”
마하레트와 부족장들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회합장의 한쪽에 새겨져 있는 벽화가 보였다.
“저곳에 우리 레이칸 왕국의 모든 게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