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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156화 (156/250)

VVIP 영주님의 품격 156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56화

156화

* * *

차츰 시간이 흐르며 대륙 서부의 전란은 대략 세 개의 세력으로 구분되었다.

하나는 단신으로 최대의 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로스니아 제국.

압도적인 인구와 경제, 군사 등 무엇 하나 약한 부분이 없는 로스니아 제국이었다.

그러나 로스니아 제국은 빌헬름이 죽어버리면서 전쟁을 수행하기에 앞서 황제의 자리를 둔 혼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누군가는 군주가 되어서 제국을 이끌어야 하지만 빌헬름은 내전에서 형제들을 거의 다 죽였기에 마땅한 인물이 없던 것이다.

그나마 살아남은 황가의 핏줄이라고 한다면 빌헬름의 숙청을 피해서 도망친 소수밖에 없는데, 그중 누군가를 황제로 세우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모두 제국을 떠나 타국으로 망명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제국의 혼란을 수습한 것은 카시안 공작이었다.

제국 최강, 혹은 인류 최강의 기사라는 거창한 칭호로 불리는 카시안 공작은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제국 귀족들을 규합시켰다.

그렇다고 해서 정복 전쟁에 나설 수준은 아니었으나 일단 제국의 방비를 단단하게 굳히고 새로운 황제를 옹립할 시간을 만들 수는 있었다.

먼저 선전 포고를 날린 자신감을 생각하자면 처참한 꼴이었지만 말이다.

두 번째 세력은 빌헬름을 죽이고 제국과 영원히 척을 지어버린 4명의 군주들이었다.

연회장에서 빌헬름을 적대한 군주는 모두 다섯이었으나 레이칸 국왕이 죽었기에 그들의 사정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애초에 무모하게 빌헬름을 죽인 건 정면에서 제국을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니까.

‘크라이더 국왕과 프레시아 공작. 거기에 보로미르 공작과 하이덴 국왕이라…….’

게임에서 유저의 아군으로 제국에 함께 맞섰던 군주들이 주축이 된 동맹이 설마 피의 연회의 배후였을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었다.

어쩌면 게임 스토리가 좀 더 진행되었으면 마족과 더불어 새로운 최종 보스로 부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다행인가?”

아예 모르는 미지의 세력이 아니라 게임에서 아군으로 등장했던 이들이다.

나는 각 군주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뿐만 아니라 그들의 휘하 영웅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

물론 정보를 모아서 더 알아보기는 해야겠지만 낯선 상대인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이렇듯 두 세력이 전란의 원인이라면 나머지는 여기에 휘말려버린 기타 국가들이었다.

주로 약소국들로 구성된 집단으로, 이들은 지금 큰 혼란을 겪고 있었다.

아직도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이웃 국가들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상황.

게다가 힘이 부족하므로 무언가를 안다고 해서 대처하기에도 마땅치 않았다.

“대략 이러한 상황인데 혹시 좋은 의견이 있나?”

내 물음에 네일은 난색을 보였다.

제일 위험한 건 분명 로스니아 제국이다.

괜히 전 국가를 상대로 선전 포고를 했던 게 아니라는 듯 로스니아 제국은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다른 두 세력이 힘을 합쳐도 로스니아 제국을 상대로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그나마 중심이 될 인물인 빌헬름의 죽음으로 선전 포고가 무색하게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들이 제일 위협적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상황이 참 더럽습니다.”

“그렇게 되었군.”

“일단 제일 궁금한 건 전하의 의향입니다. 로스니아 제국이나 황제를 죽였다는 집단. 음, 지금은 반제국 동맹 정도로 할까요? 그들과 한편이 될 생각이 있으십니까?”

네일은 일단 적군과 아군부터 구분해 두기로 했는지 다른 세력과 손잡을 생각이 있는지를 물어왔다.

확실히 혼란스러운 상황에서는 피아 식별이 우선이기는 했다.

“그건 힘들지.”

개인으로 한정하자면 원한은 없다.

오히려 상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만큼 로스니아 제국이라는 적을 무찌를 때 그들의 도움을 받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신현우로서의 내 이야기일 뿐, 아인 네패스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들은 피의 연회의 배후로서 아인의 원수이자 레일리의 원수이기도 했다.

선전 포고를 해온 로스니아 제국보다도 우선해서 섬멸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나뿐만이 아니라 레일리도 이를 납득하지 못할 테고.”

“그럼 반제국 동맹은 자동으로 적이 되겠군요.”

“어차피 레이칸 국왕을 죽인 이상 적은 맞지만.”

“그건 저들도 아직 파악하지 못했을 겁니다.”

레이칸 국왕이 죽기는 했으나 그들이 제국의 추격대에게 죽은 건지, 내 손에 죽은 건지를 반제국 동맹이 파악했을 가능성은 없었다.

제국에서 그런 정보를 미주알고주알 알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신들의 황제를 죽인 상대인데 제 손으로 원한을 갚지 못했다는 걸 어떻게 떠들겠는가?

대외적으로 레이칸 국왕의 죽음은 황제를 죽인 일에 대한 제국의 응징으로 공표되었다.

물론 제국 내부에서는 진실을 아는 자들이 진범을 찾아내려고 할 테지만 그게 공론화될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희로서는 반제국 동맹을 이용할 여지가 남아 있는 셈이지요.”

“일단 손잡고 나중에 배신하자는 건가?”

정석적인 대응이었지만 난 이에 대해서 고개를 내저었다.

크라이더 국왕은 나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협조를 구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내가 준비한 계획에 끼어들어 빌헬름을 죽였다.

이는 그가 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뭐, 제국 연회장에서 처음 본 상대를 신뢰한다는 것 자체가 말은 안 되지만, 그들의 세력에 내가 편입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칫 이용당하다 버려지는 게 내가 될지도 모르니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이미 그들의 동맹은 견고한 데 반해서 나는 별다른 안면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제국에 맞서려면 그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 네패스 왕국의 국력만으로는 로스니아 제국의 상대가 될 수 없으니까요.”

변방의 작은 영지를 왕국 두 개까지 키워냈으나 역시 제국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약소국들은 어찌 생각하지?”

“그들은 일단 아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니면 점령하든가.”

약소국들을 상대로 한 네일의 생각은 나와 동일했다.

로스니아 제국도, 반제국 동맹도 지금 나로서는 쉽지 않은 상대였다.

그렇다면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약소국들을 먼저 노리는 게 나았다.

“하지만 그 또한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여러 국가들이 한꺼번에 긴장 상태로 돌입한 현재, 군대를 외부로 움직이는 건 왕국 내부의 경계가 허술해진다는 걸 의미했다.

내가 타국을 공격하면 타국에서 왕국을 침공해 올 수도 있는 것이다.

네일이 상황이 더럽다고 말한 게 이 때문이다.

마치 처음 내전에서 4파전이 있었던 것처럼 수많은 세력이 얽혀서 행동하는 게 어려웠다.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만든 천하삼분지계도 이러한 것이었고.

“어쩌면 이번 전쟁은 이번 세대에 끝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네일은 최악의 경우를 이야기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들이 승부를 가리지 못한 채로 수십 년 이상을 지속하는 것.

그렇게 되면 전쟁은 명분도 사라지고 목적도 상실한 채 그저 떠밀려 유지될 뿐이다.

그러다가 후대에 의해 조용히 끝날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계속 끝나지 않은 채 이어질 수도 있었다.

“당연히 그런 상황은 피해야지.”

전쟁이 오래 유지되어서 좋을 사람은 군수물자를 팔아서 배를 채우는 이들밖에 없었다.

전쟁에 미쳐버린 게 아니고서야 어느 군주도 이런 상황을 반기지는 않을 것이다.

‘위니스도 그러는 걸 원하지는 않을 테고.’

결말을 내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게 싸움을 끌어봐야 대륙 통일이라는 목표는 요원해지기만 할 뿐이다.

하다못해 제국처럼 전쟁을 오래 이끌어갈 여력이라도 있다면 장기전도 나쁘지 않을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마족 세력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를 노릇이었고.

“그럼 약소국 쪽부터 일단 공략해 보지.”

점령을 하든 동맹을 맺든.

그곳부터 차차 공략하며 상황을 주도해야 할 거 같았다.

“일단 가까운 쪽부터 정리해야 할 거 같은데.”

“가까운 쪽이라면 두 개가 있습니다만.”

네일은 지도에 나와 있는 약소국 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말하는 약소국은 네일이 생각하는 지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레이칸 왕국부터 정리할 생각이다.”

“레이칸 왕국 말씀입니까?”

네일은 잠시 내 의중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에 빠졌으나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듯했다.

그럴 만도 한 게, 이제 레이칸 왕국에는 별다른 미래가 없었다.

이름 있는 전사들도 나에게 모두 죽고 국왕이던 크리슈나 레이칸마저 목숨을 잃었다.

왕이야 다시 뽑으면 된다고 해도 지금껏 그들이 잃은 전사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한동안 존재감이 없다고 봐도 좋았다.

그러나 나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이 기회에 레이칸 왕국을 아예 정리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레이칸 왕국은 공격하기엔 마땅하지 않다는 걸 알지 않으십니까? 설령 로스니아 제국이라도 레이칸 왕국을 침공하지는 못할 겁니다.”

혹한의 땅에 들어가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었을 뿐더러 병력이 많든 적든 의미가 없었다.

레이칸 국왕이 빌헬름의 목을 직접 칠 정도로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 역시 제국의 보복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탈론이 다스리는 북부의 영토만 해도 드래고니안들이 이용하는 비밀 통로처럼 숨을 곳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런 곳에 몸을 피한 채 침략자들이 동사하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레이칸 왕국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굳이 군사들을 보내는 것만이 전쟁은 아니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레이칸 왕국을 공략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군사를 보낼 수는 없더라도 사람 몇 명을 보내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으니까.

“사절단을 보낼 거다.”

“사절단 말씀이십니까?”

사절단이란 말에 네일의 눈이 반짝였다.

내가 무엇을 노리는지를 이해한 것이다.

“하긴. 대전사도 또 죽고 레이칸 국왕마저 죽었으니 지금 많이 혼란스러울 시기로군요.”

레이칸 왕국은 외적을 걱정하지는 않겠지만 내부적으로 시끄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무엇을 제시하실 겁니까?”

내가 노리는 것.

그건 바로 레이칸 왕국의 내분이었다.

“이주.”

네일의 물음에 나는 가볍게 한 단어를 내뱉었다.

레이칸 왕국은 오래전부터 북부의 영토를 탐내고 있었으니까.

지금 그들을 이끌어 나갈 레이칸 국왕이 부재한 틈을 노려서 레이칸 왕국의 여러 부족들을 회유할 것이다.

그들도 자신들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을 테니까 내가 먼저 내미는 손길을 쉽게 내치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한 부족이라도 움직이면 각 부족에 내분을 일으키는 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울 것이고.

“북부에서 반기지는 않을 겁니다. 레이칸 왕국과는 사이가 많이 나쁘지 않습니까?”

네일은 곧장 문제점을 짚었다.

바로 전까지 칼을 휘두른 상대를 왕국에 받아들이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마냥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해묵은 원한이 쉽게 풀리지는 않겠지만 감정을 잠시 접을 정도의 대가를 줄 수는 있지.”

“대가라고 하시면? 전쟁을 앞두고 국고를 비울 수는 없습니다.”

“대가가 꼭 물질적인 것일 필요는 없지.”

* * *

“으음.”

탈론은 내 제안을 듣고는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비록 나의 기사이기는 하지만 북부의 대영주로서 탈론도 고려할 게 많았으니까.

게다가 일족을 신경 써야 할 처지이기도 했고.

“나쁜 제안은 아닙니다.”

한참 숙고한 탈론의 대답이었다.

크레시안 왕국이었던 시절 북부는 레이칸 왕국을 상대하기 위해 방파제와 같았다.

다른 지역의 귀족들은 북부를 거의 신경 쓰지 않았으며 적당히 이용만 해왔다.

그러나 북부는 이를 거부할 수 없었다.

어쨌든 크레시안 왕국이라는 세력 아래에 들어가 있는 쪽이 레이칸 왕국에게 잡아먹히는 쪽보다는 나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부인들의 삶이 평온했던 건 아니다.

다른 지역으로부터 많은 차별을 받아왔으니.

나는 기존에 있던 그 차별들을 없애줄 것을 약속했다.

“하지만 말만으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이미 북부에는 오래전부터 다른 지역에 대한 원한이 새겨졌으니까요. 이제 와서 북부에 해왔던 부정적인 것들을 막는다고 하셔도 그 원한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지원도 해줘야겠지.”

그저 말뿐인 공수표가 아니다.

레이칸 왕국에서 넘어올 부족들의 이주에 대한 지원은 별도로 해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재정에 조금 부담이 오지만, 이는 어느 정도 감당할 수 있는 선이었다.

“게다가 이게 꼭 나쁜 이야기는 아니야.”

이주라고 하지만 사실상 레이칸 왕국을 흡수하는 일이었다.

가뜩이나 내전에 끼었다가 절반에 달하는 전사들을 잃었는데 이번 일로 남은 것들까지 날아갔으니…….

여기서 남은 부족마저 쪼개진다면 레이칸 왕국은 아예 지워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원수가 사라지는 것이기에 기뻐할 일이었다.

게다가 북부에 대한 차별을 완전히 없애는 건 내 치적으로 삼기에도 좋았고.

물론 다른 귀족들로서는 그리 달가운 이야기가 아니겠으나…….

“귀족들도 로베른 왕국의 영토를 얻을 기회를 날리고 싶지는 않겠지.”

난 이번 일에 협조해 줄 귀족들에게 내줄 수 있는 영토를 충분히 갖고 있었다.

로베른 왕국의 점령은 거의 나 혼자 이뤄낸 성과였고 과거 남부 연합이나 중부의 귀족들은 별다른 이득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이때 내가 해당 영토들과 이권을 미끼로 삼는다면 그들로서도 해볼 만한 일이 될 것이다.

차별을 없애는 데 필요한 건 올바른 관념이나 해묵은 원한을 씻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눈앞의 이득이란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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