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53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53화
153화
신호를 받은 이들은 신속하게 행동했다.
곧장 마구간으로 달려가 각자의 말을 확보하고 퇴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돌발 행동에 제국 기사들의 방해가 있었으나 루시우스는 무자비한 칼질로 방해하는 적들을 해치웠다.
“루시우스 경!”
“전하!”
그렇게 퇴로가 확보되자 연회에 참석했던 아인이 로크, 탈론과 함께 빠져나오는 광경이 보였다.
“상황은 나중에 설명하겠다! 일단 이곳을 벗어나는 게 먼저다.”
아인의 명령에 기사들은 충실하게 따랐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예정과 다르다는 건 이미 눈치챘기에 안전히 퇴각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게 네패스 왕국의 기사단은 가장 먼저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 *
네패스 왕국의 도주 이후로도 각국의 군주들은 제국을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들은 혼란이 일어난 순간부터 퇴로를 찾아 헤매었지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적아를 구분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타국의 기사단과 뒤섞였기 때문이다.
각국의 기사들은 서로를 경계하느라 시간을 끌어야 했고 제국의 기사들과 전투도 벌어지며 혼란에 빠졌다.
“생각보다도 더 혼란스럽군.”
크라이더 국왕은 이런 기사들의 반응을 보며 혀를 찼다.
어느 정도 예견된 상황이기는 했으나 이 자리에 모인 군주들이 모두 그와 뜻을 함께하는 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속한 군주의 숫자는 다섯 명에 불과했고, 이 자리에 참석한 군주는 그 세 배에 달했으니.
상황을 모르는 10여 개의 세력들이 혼란을 일으켰고 신속하게 대응하려던 군주들의 발목을 붙잡았다.
“네패스 국왕은 벌써 빠져나간 건가?”
그런데 이 소란스러운 와중에 아인과 네패스 왕국 기사단의 모습은 벌써 보이지 않았다.
크라이더 국왕은 그 신속함에 감탄했다.
혼자서 500명이나 되는 기사단을 이끌고 온 탓에 제국의 기사들은 물론 타국의 기사단도 그 앞을 쉽게 막지 못한 것이다.
물론 미리 도망칠 생각을 하고 대비한 덕분도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보통 기사들이 아니군.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크라이더 국왕의 물음에 곁에서 움직이던 레이칸 국왕이 눈을 흘겼다.
빌헬름의 선전 포고 소식을 듣기 직전까지 레이칸 국왕은 아인을 그저 마팔을 죽인 군주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조차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빌헬름의 정보를 듣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아인은 매우 위험한 존재였다.
그리고 동시에 든 의문.
과연 네패스 왕국에서 위험한 존재가 아인뿐인 걸까?
레이칸 국왕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일부러 과거의 사건을 들먹이며 아인을 공격하는 행동을 취했다.
“하나같이 만만치 않더군.”
멋모르고 달려들던 빌헬름이야 멍청하기 짝이 없어서 거론할 가치도 없으나 아인은 레이칸 국왕의 움직임에 최소한의 반응을 했다.
경계할 시간은 충분히 주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법사의 몸으로 이를 반응하는 건 절대 쉬운 게 아니었다.
더구나 아인은 마법사들이 흔하게 사용하는 마나 실드 하나에만 의지하지 않았다.
미리 챙겨뒀던 건지 마법사인 주제에 단검을 꺼냈고, 거기에 특별한 마법적 조치를 취했다.
마법사지만 근접 상황에서도 제 몸을 지키기 위한 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마법이 펼쳐지는 속도가 기습에 대비할 수 있을 정도로 기민하기까지 했다.
그것만으로도 여타의 군주들보다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데, 자신의 손바닥에 상처를 낸 기사와 드래고니안 궁사까지 있었다.
“듣기로 네패스 국왕의 기사들이 제국 기사들과 대련을 해서 3전 전승으로 이겼다더군.”
크라이더 국왕은 거기에 말을 보탰다.
“그 상대 중에 하이록 백작과 그랜트 백작도 있었다고 하니 보통이 아니지.”
“과연.”
직접 그랜트를 상대한 레이칸 국왕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비록 육체에 의지하지 않는 마법사라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수단의 차이일 뿐 아인은 훌륭한 기량의 전사였다.
더구나 휘하 기사들 역시 만만치 않았다.
“우리가 만든 이 혼란이 만들어낸 영웅인가.”
“그렇게 좋아할 때인가?”
레이칸 국왕이 미소 짓는 모습을 본 프레시아 공작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한때 대영주였던 그들은 이 혼란을 통해서 각국의 군주로 거듭날 수 있었고, 이는 예상한 바였다.
그러나 아인의 존재는 그들의 예상에 없었다.
“크레시안 왕국에서 그런 인물이 나올 줄이야. 게다가 이번 일에도 제일 크게 관여한 인물은 결국 그 아닌가?”
프레시아 공작은 아인을 크게 경계했다.
국경을 접했다고는 하나 실제로는 인접국이라 보기도 어려운 네패스 왕국이었다.
그런데 그런 곳의 새파란 군주가 황제의 의중을 꿰뚫어보고, 심지어 죽일 계획까지 세웠다.
위험을 알게 된 자신들이 그 계획을 빼앗아 빌헬름을 처치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자신들을 상대에게 노출시킨 상황이기도 했다.
“차라리 이 자리에서 그도 처치하는 게 최선이었을 텐데.”
“황제 하나로도 골치 아픈데 그런 무모한 일을 하는 건 불가능하지.”
크라이더 국왕은 프레시아 공작의 말에 고개를 내저었다.
그라고 아인의 위험성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빌헬름이라는 명확한 위험을 앞두고 아인이라는 변수를 포함시키는 건, 자칫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두 마리 모두 놓치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 수도 있었다.
“맞는 말이다.”
레이칸 국왕도 그에 동의했다.
만약 아인과 휘하 기사들이 그 상황에서 빌헬름을 구하려고 행동했다면 이렇게 쉽게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연회장에서 자신들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동행은 여기까지 하지. 이제 각자 돌아가야 할 때로군.”
대화가 이어지는 사이 그들은 원하던 장소까지 이동하는 데 성공했다.
황제를 죽이고 빠져나오는 건 함께였지만 각자의 왕국으로 돌아가는 건 이제부터 개별적으로 해내야 할 일이었다.
비록 뿔뿔이 흩어지는 위험은 감수해야 했지만 제국의 추격을 벗어나려면 이게 최선이었다.
“그럼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나도록 하지.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프레시아 공작이 먼저 움직였고 다른 군주들도 각자의 왕국을 향해 흩어졌다.
그중에서 레이칸 국왕은 가장 작은 행렬을 이끌고 있었다.
“쓰읍.”
타국의 군주들이 사라지자 레이칸 국왕은 인상을 찡그리며 자신의 팔을 살폈다.
상황이 워낙 급해서 응급 처치만 해뒀는데 생각보다 자상이 깊었다.
‘마지막에 방심하다니. 오랜만의 전투에 감을 잃은 건가?’
필립 후작은 절대 만만치 않은 상대.
비록 허점을 드러내 손쉽게 승리를 쟁취했다지만 마지막까지 얕잡아봐선 안 되었다.
그로 인해 이렇듯 상처를 입은 데다 타국 군주들마저 사라졌으니 제국을 빠져나가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병력이 적은 만큼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으나 레이칸 왕국의 전사들은 기본적으로 기마술이 형편없었다.
애초에 험지에 살면서 말을 몰아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모는 것에 능한 이들은 마족과의 전쟁에 참가해 본 이들뿐이었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레이칸 국왕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전사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왕국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평소 그들을 지독하게 괴롭혔던 혹한의 기후가 도리어 그들을 지켜줄 방패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아직 제국의 영토.
병력이 많은 것도 아니니 최고 전력인 레이칸 국왕의 부상은 심각한 문제였다.
“괜찮다. 당분간 이 팔은 못 쓰겠지만, 그렇다고 제국 놈들 따위에게 당하지는 않을 테니.”
일단 가장 위협적인 상대였던 필립 후작을 죽인 건 의미가 있었다.
제국의 다른 이름 있는 기사들이 자신을 추격한다고 해도 하나 정도라면 감당할 수 있었으니까.
“상대가 제국이 아니라면 어떤가?”
그런데 은밀하게 제국을 벗어나려던 레이칸 국왕을 가로막는 무리가 있었다.
벌써 제국의 추격대가 나타나리라 예상하지 못한 레이칸 국왕은 깜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네패스 국왕?”
그리고 경악했다.
레이칸 국왕과 그의 전사들을 맞이한 건 제국의 추격대가 아니라 네패스 왕국의 기사단이었다.
* * *
“운이 좋았군.”
다행히 레이칸 국왕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앞선 자리에서 각국의 군주들이 흩어지게 되리란 예상을 하기는 했으나 이를 확신할 수는 없었다.
보통은 흩어져서 각국으로 돌아가는 게 정석이겠지만, 혹시 저들의 동맹이 생각보다 끈끈하다면 함께 한쪽을 돌파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반신반의하며 레이칸 왕국이 떨어져 나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지금 이 순간을 노린 것만 같군.”
내가 모습을 보이자 레이칸 국왕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신은 없었다. 난 그대들의 동맹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이게 무슨 짓이지? 제국의 추격대가 쫓아올 상황에서 우리끼리 피라도 흘리자는 건가?”
“필요하다면.”
제국의 추격대도 만만치 않은 문제지만, 어차피 빌헬름이 죽은 이상 그들은 정복 전쟁을 일으킬 원동력을 상실했다.
이제는 비어버린 옥좌의 주인을 놓고 다시 내전의 수렁으로 끌려들어 갈 것이다.
제국을 상대하기 위한 저들의 동맹 역시 그걸 위한 계략을 준비해 뒀을 테니.
그렇기에 지금은 제국보다 나도 존재를 모르던 군주들의 동맹을 파악해 둘 필요성이 있었다.
“원하는 게 뭐지? 설마 과거의 일로 내 목이라도 바라는 건가? 이 상항에서?”
“연회장에서와 달리 조금 초조해 보이는군?”
무모하게 나를 공격하던 모습을 보여줬던 레이칸 국왕이 지금은 긴장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는 대단한 전사였다.
아마 마족을 제외하면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 중 하나일 것이다.
더구나 정치적인 안목이나 수완도 어느 정도 있는 듯하고.
하지만 지금은 그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회장에서 그가 팔을 다치는 걸 봤으니까.
기사단만 500명에 다른 수행원까지 700명이나 되는 내 병력 앞에서 팔을 다친 그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는 상대에 불과했다.
“쯧! 그래, 네패스 국왕. 칼자루는 그대한테 들려 있군. 적어도 지금은 말이야.”
“상황을 빨리 파악해서 좋군. 피차 급한 건 마찬가지니까 질문 하나만 하지.”
레이칸 국왕이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덕분에 나도 시간을 많이 아낄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래, 뭐가 궁금하지? 우리 동맹이 언제 만들어졌고 구성원이 누구인지가…….”
“마족과 내통해서 피의 연회를 일으키고 각국의 내전을 촉발한 게 그대들인가?”
난 레이칸 국왕의 쓸모없는 신변잡기를 끊어내며 핵심을 찔렀다.
내가 굳이 레이칸 국왕을 붙잡은 건 이 질문을 위해서였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레이칸 국왕뿐 아니라 내 기사들마저 당황했다.
“그게 무슨? 당황스럽군.”
내 물음에 레이칸 국왕은 진심으로 당황스럽다는 듯이 얼굴을 짚었다.
그러나 과연 그게 연기인지 아닌지는 판단할 수 없었다.
물증 같은 건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내 속에서는 이미 결론이 내려진 상태였다.
이들이 아니라면 그런 일이 가능한 세력이 있을 리가 없으니까.
일찍부터 대영주들을 의심했고 범인으로 지목한 바 있는데, 그 대영주에서 지금은 군주로 성장한 게 이들이다.
왕실을 제외하고 각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세력을 가졌던 이들이란 말이다.
더구나 아무리 내가 선전 포고를 미리 알렸더라도 게임에서는 메인 빌런으로 활약했던 빌헬름을 단숨에 죽인 존재들이다.
과연 이들이 아니라면 피의 연회나 이후의 내전을 일으킬 수 있던 세력이 또 존재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그건 불가능했다.
이런 국가를 초월한 대영주들의 세력이 나올 다른 가능성이라면 타르타로스나 가이스트 같은, 이 세상 바깥의 존재들이 개입하는 경우밖에는 없으니까.
“대체 왜 그렇게 생각하지?”
“각 나라에서 힘을 가진 대영주들이었고, 피의 연회로 왕가가 몰락하며 그 자리를 차지해 군주가 되었다. 심증으로서 가장 의심받기 좋지.”
“듣고 보니 나름 일리는 있군.”
레이칸 국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내 나를 비웃었다.
“하지만 다른 군주라면 몰라도 나는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레이칸 왕국의 국왕 자리는 오직 전사가 실력으로 증명하는 자리니까. 혹시 내 실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나?”
확실히 내 추측에서 유일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레이칸 국왕이었다.
타국의 군주들과 달리 레이칸 왕국은 척박한 땅으로, 그곳을 다스리는 군주는 오직 무력으로 정해진다.
권력을 탐해서라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다른 군주들과는 사정이 다른 것이다.
“그대의 말대로 레이칸 왕국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지.”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나는 이들이 제일 의심스러웠다.
레이칸 왕국이라는 예외는 어차피 나름대로 설명할 방법이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그대는 레이칸 왕국답지 않게 정치적이군, 크리슈나 레이칸.”
내 말에 레이칸 국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군주로서 왕국의 안위를 살피려면 무력만으로는 안 된다.”
“그러니까 의심스러운 거다. 분명 다른 군주들은 제국을 견제해야 할 이유도, 피의 연회를 일으켰어야 할 이유도 있지. 예외라고 한다면 레이칸 왕국뿐이지만…….”
원래 집단이란 게 모두가 같은 사연과 목적으로 구성되는 건 아니다.
각자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동맹을 맺거나 배신을 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레이칸 왕국이 필요한 건?
간단하다.
어째서 그들이 크레시안 왕국의 북부를 침공했는지를 생각하면 어려운 문제는 아니니까.
“약소국이자 혹한의 땅에서 살아가는 그대들이라면 용병처럼 움직이지 못할 이유가 없지.”
타국의 군주들에게 적당한 대가를 제시받았다면 정치적인 레이칸 국왕으로서 이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그것참.”
나의 이야기에 레이칸 국왕은 고개를 내저었다.
“고작 그따위가 근거가 된다고…….”
“그러면 반대로 묻지. 그대들이 아닐 가능성이 있나?”
가진 건 심증뿐이다.
그렇지만 그런 심증이 생긴 이유는 오직 이들만이 거기에 해당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럴 계기도 능력도, 오직 이들에게만 있었다.
“없겠지. 상식을 갖고 생각해 보면 다른 경우의 수 따위는 존재할 수 없어.”
제국의 황제를 포함해서 각 나라의 군주들이 죽었는데 그 배후에 이름도 정체도 모르던 조직이 있다?
창작물에서라면 흔한 이야기겠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점조직으로 활동하는 비밀스러운 결사대가 각 나라를 좌지우지한다는 건 상상으로나 가능한 일일 뿐.
집단을 유지하는 데 제일 중요한 건 결국 자본과 경제력이다.
위니스에게 받은 막대한 양의 보주조차 왕국의 내실을 다지는 데 모두 날려버리면서 그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지금도 네일은 과로로 고생하고 있었고.
“하…….”
내 반문에 레이칸 국왕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끝내 그의 입에서 이를 부정하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나름 머리를 굴리는 사람이니 알 것이다.
다른 대답은 나올 수 없다는걸.
“그래, 네패스 국왕. 그대의 말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