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48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48화
148화
【 제국에서 】
“그러니 친선 대련을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빌헬름을 생각해 얌전히 넘어가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래도 제국에서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하이록은 온갖 단어를 붙여가며 복수를 위한 친선 대련에 아름다운 뜻을 부여했다.
특히 화합이라는 말에는 절로 웃음이 나와서 참느라 고역이었다.
“괜찮은 생각 같군.”
하지만 이런 생각과 달리 하이록의 친선 대련 요청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제국의 진짜 정예를 볼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럼 바로 준비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동의하자 하이록은 곧바로 대련을 위한 준비에 나섰다.
어차피 장소 같은 거야 다 마련된 상태였고 규칙을 정하는 게 중요했다.
이에 대해 몇 가지 이야기가 오고 갔고 총 3번의 대련을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3번이라…….’
홀수인 이상 반드시 승패가 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상대를 해치는 건 안 되지만 어느 정도 부상을 입히는 건 어쩔 수 없이 허용되고, 여기에 항의할 수 없다는 내용도 덧붙여졌다.
“어떤 기사들을 내보낼 생각인가?”
“네패스 국왕 전하를 모시는 일이니만큼 직접 나설까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하이록은 꽤 큰 수를 띄웠다.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고 한 것이다.
거기에 두 명 중 한 사람으로는 같은 백작의 작위를 가진 그랜트를 내보내겠다고 말했다.
“그랜트라…….”
한쪽에서 씩 웃는 기사의 모습이 보였다.
‘재미있겠네.’
마지막으로 다른 기사의 얼굴도 확인한 뒤 내 기사들을 돌아봤다.
“참가하고 싶은 사람 있나?”
당장이라도 앞으로 나서고 싶어 하는 기사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러나 가장 의욕을 보이는 인물은 정해져 있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릴리아나였다.
대련에 나올 상대를 살피던 릴리아나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그랜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좋아. 릴리아나 경이 그랜트 백작을 맡는 걸로 하지.”
난 그런 릴리아나의 요청을 수락했다.
실제로 나도 릴리아나가 적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5티어 영웅이랑 겨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랜트의 정체는 제국에 있는 5티어 영웅 중 하나였다.
흑검의 그랜트라고 불리며 기형적인 형태의 새까만 검을 다루는데, 릴리아나의 실력을 향상시키는 데 좋은 제물이 되어줄 것이다.
“하이록 백작의 상대는 루시우스 경으로 하지.”
릴리아나는 자원을 받았지만 루시우스는 지명으로 골라냈다.
상대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루시우스는 딱히 나설 생각이 없었던 거 같으나 지명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은 누구로 하시겠습니까?”
5티어 영웅인 그랜트나 4티어 영웅인 하이록과 달리 마지막 상대는 겨우 3티어였다.
4티어 영웅이 이 자리에 더 없는 것도 아닌데 3티어를 내보낸 걸 보면, 한 번은 져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아닐까 싶었다.
실제로 순서는 3티어를 제일 마지막에 배치했으니까.
앞선 두 경기를 잡고 한 번쯤은 던져주겠다는 의미로 보였다.
“마지막은…….”
기사를 호명하기 전 잠깐 고민했다.
어차피 승패는 앞선 두 경기에서 결판이 날 가능성이 높았기에 마지막은 사실 그리 의미가 없다.
그러나 자존심은 그런 곳에 있는 법이다.
여기서 내가 마지막에 승리를 원한다면 제일 이상적인 선택은 로크를 내보내는 게 맞았다.
반대로 질 생각이라면 실력이 떨어지는 기사를 내보내면 되고.
그러나 난 둘 다 고르고 싶지 않았다.
“빅터 경.”
나조차도 승패를 예측할 수 없는 호명에 모두 조금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빅터는 분명 뛰어난 기사이지만 릴리아나나 루시우스처럼 단장을 맡고 있는 이들과 비교하면 분명 손색이 있었으니까.
“저를 고르신 겁니까?”
“자신 없나?”
“기회를 주신다면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그럼 문제없군.”
그렇게 모든 기사가 정해지자 첫 대련을 위해 그랜트와 릴리아나가 앞으로 나섰다.
“이거 아름다운 여성과 승부를 하게 되었군.”
그랜트는 긴장조차 하지 않은 여유로운 걸음으로 릴리아나에게 다가갔다.
릴리아나는 그런 그랜트의 손에 들려 있는 기형적인 형태의 흑검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때? 지금이라면 순서를 바꿔줄 수 있는데. 나보다 뒤에 나올 하이록 백작이 더 약하다고?”
“잔말이 많군.”
그랜트가 뒤에 있는 하이록을 가리키며 깐죽거리자 릴리아나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명백하게 자신을 얕보는 태도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고 나서도 그렇게 나불거릴 건가?”
“이런. 기껏 기회를 준 것인데.”
릴리아나의 살벌한 물음에 그랜트는 아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럼 날 상대하기로 한 걸 후회하지 말라고, 레이디?”
철컹!
그랜트가 본격적으로 전투태세를 갖추자 사나운 기백이 릴리아나는 물론 주변을 압도하는 게 느껴졌다.
어딘가 헤프고 실없어 보이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나운 맹수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릴리아나는 그 앞에서 전혀 흔들림 없이 자세를 유지했다.
“좋은 눈이군.”
양쪽의 준비가 모두 끝나자 대련을 알리는 신호가 떨어졌다.
그랜트는 신호와 동시에 정면으로 쇄도했다.
카카카캉!
그랜트가 휘두르는 기형검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발을 연상케 했다.
발톱을 연상시키는 형태의 칼날이 실제로 발톱을 휘두르는 듯한 궤도로 휘둘러졌다.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숱하게 봐온 광경이기에 익숙했다.
“훌륭해!”
일격의 교환으로 그랜트는 대번에 릴리아나의 실력을 파악하고 미소 지었다.
보통이라면 처음 상대하는 기형검에 당황할 법도 한데 릴리아나는 아주 매끄러운 동작으로 이를 받아냈다.
이는 기형검을 보는 것만으로 어떤 형태의 전투 방식을 취할지 이미 읽어냈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맹수나 몬스터와 싸운 경험이 풍부하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었다.
“하도 전쟁이 많아서 그런지 사람 이외의 상대를 경험하는 기사는 드물지!”
그랜트는 연달아 기형검을 휘두르며 릴리아나를 몰아붙여 갔다.
하지만 릴리아나는 좌우로 몸을 움직여 기형검의 범위를 벗어나고는 도리어 그랜트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촤악!
몇 번의 공방 끝에 처음으로 유효타가 들어갔다.
릴리아나의 스타폴이 그랜트의 몸을 스치며 생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공격에 성공한 걸 기뻐할 틈도 없이 그랜트의 공격이 매섭게 몰아쳤다.
작은 생채기 따위 안중에도 두지 않는 맹수 같은 움직임이었다.
채채채챙!
릴리아나는 정신없이 몸을 움직이며 그랜트의 공격을 받아쳤으나 점차 그랜트에게 몰리는 모습이 보였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무기라서 힘든 건가?’
그랜트의 기형검도 그렇고 전투 방식도 그렇고, 다른 기사들을 상대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아무리 릴리아나가 천재라도 기본적으로 자신보다 높은 티어의 영웅을 이기는 건 어려운 일.
저번에는 라키아를 이겼으나 그것만으로 릴리아나가 자신보다 높은 티어의 영웅을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쩌엉!
“응?”
그러나 이내 이변이 일어났다.
계속해서 몰리던 릴리아나가 어느 순간 반격에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마치 거짓말처럼 서로의 입장이 역전되었다.
처음 빅터와 겨뤘을 때가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무슨?”
릴리아나는 그랜트의 빈틈을 정확하게 찔러내었다.
아마 그랜트 자신조차도 그 존재를 잘 몰랐을 약점을 이미 모두 파악해 낸 모습이었다.
“뭐 하는 거냐, 그랜트!”
그랜트가 밀리는 모습을 보이자 하이록이 당황하며 그랜트를 불렀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그랜트는 필승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
“똑바로 해라! 네가 지면 안 된단 말이다!”
“알고 있다고!”
그래도 과연 5티어 영웅답게 그랜트도 순순히 당해주지는 않았다.
기형검을 크게 휘둘러 릴리아나를 떨쳐낸 그랜트는 자세를 바로잡고 사나운 눈으로 릴리아나를 노려보았다.
“지금부터 제대로 상대해 주지.”
그랜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어느새 그랜트의 기형검은 더욱 사납고 광폭한 기세로 릴리아나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검격 한 번에 실린 힘이 어찌나 흉흉한지 맞지도 않은 공격에 바닥이 갈라지고 공기가 찢겨져 나갈 정도였다.
동시에 어마어마한 살기가 터져 나와 숨이 막히게 만들었다.
“상대가 보통이 아니군요.”
루시우스는 그랜트의 맹공을 보며 몸을 떨었다.
“마치 마팔을 보는 거 같습니다.”
“아마 비슷하겠지.”
그랜트의 실력은 레이칸 왕국의 대전사 마팔과 비교할 만 했다.
그때 마팔을 꺾은 건 탈론이지만, 활을 주 무기로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기사의 대련에 탈론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헉헉!”
어느 순간 릴리아나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랜트의 폭풍처럼 몰려드는 공세에 릴리아나의 체력이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잘 버텼다, 레이디! 하지만 여기까지야.”
그랜트는 그런 릴리아나에게 쉴 틈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릴리아나가 힘들어하면 할수록 더욱 난폭하고 맹렬한 공격을 날려댔다.
그 일방적인 상황에 누구나 릴리아나의 패배를 생각할 수밖에 없을 때였다.
훙!
“어?”
갑자기 그랜트의 기형검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베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 자리에 있던 릴리아나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랜트는 당황했다가 급하게 시선을 돌렸으나 이미 릴리아나는 그랜트의 품속 깊이 파고든 상태였다.
처억!
릴리아나의 검이 그랜트의 목에 겨누어졌다.
한순간에 뒤집어져 버린 승부에 그랜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고, 그를 응원하던 제국의 기사들도 하나같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분명 그랜트가 몰아붙이고 있던 상황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째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것 같았다.
‘어떻게 한 거지?’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릴리아나가 도대체 무슨 수로 저런 움직임을 선보였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방금 봤나?”
혹시나 하고 탈론에게 묻자 탈론은 고개를 내저었다.
“특별한 기술 같은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언제 저런 걸 익힌 거지?”
놀라기는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껏 릴리아나가 저런 기술을 쓰는 걸 아무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대체 어떻게?”
그랜트는 멍하니 릴리아나를 보았다.
“역시 나불거릴 생각인가?”
릴리아나의 반문에 그랜트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패배는 인정해야지. 내가 졌다.”
“와아아아!”
그랜트의 패배 선언에 내 기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워낙 순식간에 상황이 뒤집어졌기에 모두 당황했지만, 이걸로 우리가 먼저 앞서 나간 건 분명했다.
더구나 상대의 최고 실력자로 추측되는 이를 이겼으니 더욱 기쁠 수밖에.
“레이디가 직접 개발한 기술인가? 놀랍군.”
“아니, 이건 내 기술이 아니라 라키…….”
“이름은 뭐지? 혹시 짓지 않았다면 내가 지어줘도 될까?”
그런데 대련에서 패배한 그랜트는 오히려 릴리아나에게 흥미를 느꼈는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그 와중에 기술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하려던 릴리아나였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혹시 원래 릴리아나의 기술이 아닌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도 딱히 저런 기술을 쓰는 상대는 본 기억이 없었다.
“그랜트, 이 자식아! 네가 지면 어떡하냐?”
“응? 하하하,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 너한테 부탁해야지.”
하이록의 외침에 그랜트는 멋쩍게 웃더니 릴리아나에게 윙크를 날리고 뒤로 물러났다.
하이록은 그런 그랜트를 타박한 뒤에야 앞으로 나섰다.
스르릉.
루시우스는 그런 하이록의 앞에 섰다.
채앵!
신호가 떨어지자 이번에는 두 기사 모두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흔한 기사의 검술을 익힌 루시우스는 주도권을 쉽게 놓치려 하지 않았고, 그건 하이록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 기세를 잡으며 맹렬하게 몰아붙였던 그랜트와 릴리아나의 대련과 달리 두 사람은 팽팽하게 백중세를 이루었다.
“아직 젊은 거 같은데 제법이군.”
“그런 말은 자기보다 약한 상대에게 해야 하지 않나?”
하이록이 가볍게 신경을 긁자 루시우스가 이를 받아쳤다.
“게다가 그쪽은 앞으로 늙어갈 처지이니 평생 나보다 약하겠지만.”
이어지는 루시우스의 도발에 하이록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루시우스 경이 저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지?”
난 그런 루시우스의 모습을 보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지금껏 봐온 가장 기사다운 인물이 루시우스였다.
그런데 지금 루시우스의 언행은 기사다운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물론 이런 대련에서는 어느 정도 상대를 도발하는 게 허용되지만 루시우스답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그때 로크의 시선이 어딘가로 돌아갔다.
그런 로크의 뒤를 좇다가 나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루시우스의 기사단으로 편성된 인물 중에 저런 언행을 할 만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라이언 경.”
내 부름에 라이언은 흠칫 몸을 떨었다.
로크나 빅터가 근위기사단에 온 것과 다르게 라이언은 근위기사단으로 오지 않았다.
대신에 루시우스를 단장으로 새롭게 편성한 기사단으로 빠졌다.
“이번에는 저 아닙니다.”
“그 말을 믿으라고?”
라이언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부정하자 로크가 바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애초에 묻는 게 아니라 이미 확신범이었다.
단장의 자리에 있는 루시우스에게 대범하게 굴며 저런 말을 가르칠 사람은 수백 명의 기사를 통틀어서도 라이언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진짜 아닌데. 억울합니다!”
“그럼 누군데?”
라이언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으나 답을 내지 못했다.
라이언이 생각해도 자신 말고는 짚이는 상대가 없었던 것이다.
“라이언 경, 이런 말을 알고 있나?”
“어떤 말입니까?”
“주변에 이상한 사람이 없으면 본인이 가장 이상한 사람이라는 말.”
“그런 건 못 들어봤습니다만?”
“경이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런 모양이지.”
난 로크에게 신호를 보냈고 로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지겠습니다.”
참된 기사 루시우스를 오염시키다니.
처벌받아야 마땅한 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