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4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47화
147화
“못 들은 걸로 하마.”
충격적인 이야기에 자크론이 정색을 하며 몸을 돌렸다.
난 달아나려는 자크론을 재빨리 붙잡았다.
“궁금해서 물어본 거 아니십니까?”
“이딴 일인 줄은 몰랐단 말이다.”
“이미 듣고 이제 와서 그러셔도 곤란합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일이고.”
선전 포고를 할 사람은 어디까지나 빌헬름이다.
난 그 자리에서 빌헬름을 처단하겠다는 생각이고.
보복은 크게 우려되지 않았다.
빌헬름을 제거하면 로스니아 제국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남지 않으니까.
“저라고 초청받은 자리에서 그런 짓을 하고 싶어서 하겠습니까?”
“명분을 상대가 준다는 건 무슨 의미냐?”
“황제가 어지간히 또라이여야지요.”
측근들에게 빌헬름이 정복 전쟁을 준비 중이며 대대적인 선전 포고를 할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하나같이 안색이 창백해졌다.
굳이 미리 말해 주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이거였다.
이 이야기를 알면 절대 이 행렬을 따라가고 싶어 하지 않았을 테니까.
“젠장! 난 돌아가마.”
“그럼 반역입니다.”
나도 나름 목숨을 걸고 가는 길이었다.
빌헬름의 경계가 가장 허술할 거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쉽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로스니아 제국 한복판에서 황제를 죽이는 일.
우두머리인 빌헬름을 처치하면 로스니아 제국도 다시 혼란에 빠져 보복 전쟁이 이어질 가능성은 낮으나 그곳에서 살아 나오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그래서 마법사 협회에 공문을 보낸 것이다.
로스니아 제국에서 탈출하기 위해.
“얌전히 따라오시지요.”
“씹! 괜히 물어봐서…….”
자크론이 사나운 눈초리로 로크를 보자 로크는 몸을 움찔했다.
딱히 로크가 잘못한 건 아니지만 자크론의 성질머리는 나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감당할 수 없었다.
내 스승이라는 위치 때문이다.
왕의 스승을 누가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자자, 힘 쓸 무대는 이곳이 아니니 아껴두시지요.”
“하아! 그런데 너무 무모한 계획 아니냐? 네 말대로 황제 쪽에서 실수를 하고 우리가 죽이는 데 성공한다고 하자. 그렇다고 무슨 수로 제국을 빠져나온단 말이냐? 협회가 무슨 도움이 된다고?”
자크론의 의문은 타당했다.
마법사 협회의 순간 이동 마법이 유용한 건 사실이지만 로스니아 제국 한복판에서 이를 준비할 틈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초청을 받은 게 저희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타국의 군주들을 말하는 것이냐?”
“선전 포고를 받는 건 다 똑같을 테니까요.”
서로가 돕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빌헬름이 사살되면 타국에서 온 그들도 위험에 처하는 건 똑같다.
그렇다고 로스니아 제국에 붙을 상황은 아니니 자연스럽게 나를 도와주게 될 것이다.
뭐,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고 확신할 수는 없으니 별도의 수단을 취한 상태였지만.
“후우. 그런데 대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냐? 선전 포고를 하지 않으면?”
“그럴 일은 없습니다.”
선전 포고를 하지 않는 빌헬름이라니.
그런 건 나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그게 빌헬름이란 녀석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때는 내가 그러도록 만들면 된다.
처음 하는 일도 아니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고.
* * *
우리는 한참을 움직여 마침내 로스니아 제국의 영토에 발을 들였다.
이곳까지 오는 길은 영 쉽지 않았다.
현재 네패스 왕국은 북동부 일부 지역이 로스니아 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나 그곳은 정상적인 육로가 아니었다.
망령의 협곡이라고 불리는 대륙에서 알아주는 험지 중 한 곳이었으니까.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통과하기 힘든 장소이기에 우회를 해야 했고, 타국의 국경 지대를 거쳐서 로스니아 제국으로 들어와야 했다.
당연히 절차라거나 여러모로 귀찮은 일이 많았다.
그나마 로스니아 제국에 입국하는 건 수월했다는 게 다행일까?
빌헬름은 자신의 선전 포고를 원활하게 하려고 적극적으로 편의를 봐주라는 지시를 내린 상태였다.
덕분에 우리는 귀빈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지만…….
“시선이 만만치 않습니다.”
500명의 기사와 200명의 수행원.
그 수행원들도 내가 구성한 인원들은 전부 싸우는 법을 아는 자들이었다.
당연히 로스니아 제국의 시선이 고울 리 없었다.
“기사단을 통째로 끌고 오다니.”
“한번 붙어보자는 건가?”
상당한 규모에 당황했는지 제국의 영토를 지나는 내내 영주와 그들의 군대들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은근한 시비가 붙기도 했다.
어느 영주의 성에서 하룻밤 쉬기로 했는데 그 영주의 기사들이 내 기사들을 건드린 것이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던 상황이었고 대비도 해놨지만.
“그래서 어떻게 되었지?”
자고 일어났을 때 이미 상황은 종료된 뒤였고 나는 서면으로 보고를 받았다.
“아무리 제국이라고 해봐야 변방 영지의 기사단일 뿐입니다.”
보고를 올리는 기사는 빅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도 일을 크게 벌릴 생각은 없기에 말단 기사끼리 싸움을 붙였다.
뭐, 빅터는 나이는 젊어도 말단은 아니지만 제국의 기사가 이러한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그 결과 그들은 완전히 박살이 났고.
‘단장이라도 데려왔어야지.’
빅터가 아니라 다른 쪽에 시비를 건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에는 쉽게 눈에 들어오는 여성인 릴리아나를 노렸지만 빅터를 노린 것보다도 멍청한 짓이었다.
릴리아나는 자신에게 덤벼든 상대를 곱게 접어주었다.
접힐 수 없는 방향으로.
그래도 목숨에는 지장이 없다고 하니 딱히 외교적 문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황제가 부른 손님을 일개 변방 영주가 건드렸다고 해도 문제가 될 사안이고.
“그럼 신경 쓸 필요 없겠군.”
그렇게 사소한 사건 하나를 지나 우리는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네패스 왕국과의 국경에서 가까운 로스니아 제국 남부 지방에 있는 성이었다.
아무렴 적진 한복판인 제국의 수도까지 들어가는 건 군주들도 내키지 않을 테니까.
“네패스 왕국의 아인 네패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다시 보는군.”
그곳에서 우리를 반겨준 건 익숙한 얼굴인 하이록이었다.
“제국까지 오시는 길은 어떠셨습니까?”
“날이 무더운 시기라서 그런지 날벌레가 좀 꼬이더군. 그것 빼고는 무탈했네.”
날벌레라는 게 말 그대로의 벌레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들었는지 하이록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그는 서둘러 나를 안내하고 급한 발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했다.
아마 내가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조사해 볼 생각일 것이다.
“각자 편히 쉬게. 어차피 시간은 꽤 걸릴 테니까.”
하이록이 자리를 비운 동안 난 바짝 긴장해 있는 기사들을 다독였다.
제국의 황제인 빌헬름을 죽이겠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대륙 각지에서 초청을 받은 군주들이 모이는 것이니만큼 시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황제인 빌헬름 또한 아직 남부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제국에 들어오면서 보게 된 것들 때문일 것이다.
“과연 제국은 만만치가 않은 거 같습니다.”
로크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빌헬름과 친동생이 일으킨 내전은 주로 로스니아 제국 북부에서 벌어졌다.
그 결과 제국의 남부는 내내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고 그만큼 풍요로웠다.
기사들은 변방의 기사들이라 그리 대단한 실력이 아니었지만 장비는 충분히 훌륭했고, 거기에 식량과 재물 역시 풍부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런 곳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면 부담되는 게 당연했다.
나 역시도 빌헬름을 죽일지언정 제국과 전쟁을 치를 마음은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체급 차이가 현격하니까.
“그러니 더욱 성공해야지.”
어차피 가만히 내버려두면 선전 포고를 한 빌헬름에 의해서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여기서 빌헬름을 처치해야만 했다.
* * *
“끄응!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저질러서는!”
아인이 말한 날벌레 이야기에 의문을 느끼고 행적을 조사한 하이록은 곧 변방의 기사들이 괜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알아냈다.
고작해야 기사단 사이에서 벌어진 자존심 싸움 같은 거였지만 문제는 국왕이 포함된 일행이라는 것.
이는 자칫 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물론 선전 포고를 앞둔 상황에서 외교 문제를 걱정하지는 않으나, 행여 상대가 불쾌함을 느끼고 난리를 피우면 빌헬름의 목적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빌헬름이 각국의 군주들을 불러 모아 선전 포고를 한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하이록도 이를 쓸모없는 행동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실속이 있든 없든 그들의 군주이자 황제인 빌헬름이 원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황제를 받드는 입장에서는 이 목표가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그래도 이겼다고 하니 네패스 국왕도 이를 문제 삼지는 않을 겁니다.”
가신의 보고에 하이록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어쨌든 기사단끼리 붙은 시비의 승자는 네패스 왕국이었으니 이를 항의할 가능성은 낮았다.
그러나 이는 아무리 변방이라지만 제국의 기사가 패배했다는 이야기.
제국민으로서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이게 기쁜가?”
“죄송합니다.”
사납게 일그러진 하이록의 얼굴을 본 가신은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애초에 네패스 국왕도 그래.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만한 숫자의 기사단을 끌고 온 거지?”
무장한 기사의 숫자만 자그마치 500명이었다.
제국에서도 기사가 500명이라고 하면 절대 적게 볼 수 없었다.
“호위는 마음대로 편성해도 된다고 했지만, 저 정도라면 왕국 기사단을 거의 다 끌고 온 수준인데. 무력시위라도 하는 건가?”
“무서워서가 아니겠습니까?”
가신은 아인이 기사단을 통째로 끌고 온 게 제국의 저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하이록은 그 말에 공감하지 않았다.
일견 그럴듯하게 들릴지도 모르나, 제국이 나쁜 마음을 품는다면 500명이 아니라 1천 명을 데리고 오더라도 죽이는 게 가능했으니.
제국의 힘을 정확히 모르거나 더는 동원할 능력이 없어서 그런 거라면 모르겠지만, 지금껏 알려진 아인의 행보와는 맞지 않았다.
‘타국의 인물이라지만 그 나이에 변두리 영주가 두 개의 왕국을 통일한 군주가 되었다. 절대 그런 소심한 인물은 아닐 거야.’
하이록은 아인이 충분히 영웅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래 봐야 감히 로스니아 제국의 적수가 될 수는 없겠지만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고민이 많은 모양이군.”
그때 누군가가 하이록의 뒤로 다가왔다.
하이록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가 상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랜트 백작이었군. 깜짝 놀랐잖나.”
“내가 뭘 놀라게 했다고.”
그랜트는 하이록과 더불어 제국 남부의 대영주 중 한 사람이었다.
“이야기는 대충 들었다. 네패스 왕국의 국왕이 기사단을 통째로 끌고 왔다지?”
“그래. 그리고 변방 영주의 기사들과 시비가 붙은 모양이야.”
“그럴 만도 하지. 감히 제국의 영토에서 그렇게 많은 숫자의 기사들을 끌고 다니는데, 제국민이라면 성질이 나지 않고 배기겠나?”
그랜트는 변방 기사들의 심정에 공감했다.
“이게 개인적인 감정으로 어찌할 문제가 아니란 거 알지 않나.”
하이록은 그런 그랜트의 말에 묘한 불안감이 들었다.
두 사람은 동년배로 옛날부터 진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으나, 주로 그랜트가 사고를 치고 하이록이 휘말리는 역할이었다.
“난 언제나 개인적이야. 그대도 익히 알겠지만.”
“설마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곧 황제 폐하께서도 오실 텐데.”
하이록은 필요하다면 기사단을 총동원해서라도 그랜트를 막을 생각을 했다.
그런다고 막아질 그랜트는 아니었지만.
‘이 빌어먹을 악우 놈!’
그랜트는 제국에서도 이름을 널리 떨치고 있는 기사 중 한 사람이었다.
하이록 역시 남부에서는 알아주는 실력자였으나 그랜트에게는 다소 손색이 있었다.
“그냥 폐하를 기다리면서 가볍게 여흥이나 할 생각이네.”
“여흥?”
“제국의 자존심을 되찾아야 하지 않겠나?”
“그런 거라면…….”
다행히 그랜트가 원하는 게 크지 않았기에 하이록은 안심할 수 있었다.
썩 좋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그랜트를 붙잡아두는 것으로는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대련을 신청하면 되는 거겠지?”
적당히 친선 대련이라는 명목으로 양쪽의 기사단이 공식적으로 붙으면 될 듯했다.
“고맙네, 친구.”
자신의 목적을 성공적으로 달성한 그랜트는 환하게 웃으며 하이록을 안아주었다.
하이록은 그런 그랜트의 행동에 질색했으나 힘에서 밀려 억지로 안겨야 했다.
“제발 좀! 이런 짓은 하지 말라니까.”
“흐하하하. 그런데 괜찮은 상대는 있나? 너무 시시하면 재미없는데.”
“뭐, 몇 명 정도 있기는 한데 누구를 출전시킬지는 네패스 국왕의 마음에 달려 있지.”
“혹시 저쪽에서 친선 대련을 거부한다면?”
“아마 그러지는 않을 거야.”
하이록은 아인이 이 대련을 거부할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그도 그럴 게, 이미 승리를 거둬서 한참 기세가 올라 있을 상황이고 아인 휘하의 기사들은 제국 밖에서는 보기 힘든 정예였으니까.
나름대로 승리에 대한 자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에 쉽게 거부하기도 어려웠다.
“두 국가의 화합을 위해서라는 명분을 대면 어찌 거절하겠나.”
“화합이라.”
그랜트는 화합이란 말에 피식 웃었다.
이 자리에 각국의 군주들을 불러들인 이유가 선전 포고를 위해서인데 화합이라니.
“좋아. 그럼 부탁하네.”
“넌 대가나 준비해 둬.”
“물론이지. 원하는 거라면 뭐든 말만 하게. 친구에게 주는 건 뭐든 아깝지 않으니까.”
호탕한 그랜트의 말에 하이록은 머리를 굴렸다.
그가 늘 휘둘리면서 그랜트를 가까이하는 건 그만큼 얻을 게 많기 때문이었다.
그랜트도 그 사실을 알고 기꺼이 하이록에게 의지하는 것이었고.
두 사람은 그렇게 기묘한 공생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