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38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38화
138화
* * *
힐리스 백작의 명령을 받은 기사들은 카슨 공작의 경계를 뚫고 은밀히 네패스 왕국의 진영으로 향했다.
그러나 카슨 공작 역시 이를 예상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마법사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거나 의심스럽게 주변을 순찰하는 등 의심할 만한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마주한 힐리스 백작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는 부분도 간과할 수 없었다.
“어디를 가는 거지?”
카슨 공작이 미리 배치해 둔 기사들이 앞을 가로막자 힐리스 백작의 기사들은 흠칫 놀라더니 재빨리 서로를 돌아봤다.
그들은 눈짓으로 서로의 뜻을 확인한 뒤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일이 목숨이 위험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고, 어쩌면 카슨 공작이 미리 대비했을지 모른다는 것 역시 알았다.
힐리스 백작이 아무런 증표를 주지 않은 게 그 때문이었으니.
‘단 한 명만이라도 살아서 도착하면 된다.’
재빨리 달아나는 그들의 모습에 카슨 공작가의 기사는 눈이 뒤집혀서 소리쳤다.
“쫓아라! 절대 놓쳐선 안 된다.”
야심한 시각에 때아닌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지형에 익숙한 카슨 공작가의 기사들은 달아나는 힐리스 백작가의 기사들을 쉽게 잡아냈다.
이에 따라잡힌 기사는 무기를 들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사로잡혀 봐야 죽는 결말밖에 없다는 걸 알기에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필사의 각오에도 불구하고 함정에 빠진 이들은 카슨 공작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헉헉!”
그러나 한 기사는 달랐다.
재빠른 발을 가진 것으로 동료 기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던 길리어드는 동료들과 달리 카슨 공작가의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이는 방향을 잘 잡은 행운이 따른 덕분이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지형이 험한 곳으로 이동했기에 적의 숫자도 많지 않았고 추격자들도 험한 지형 탓에 그를 제대로 쫓지 못했다.
하지만 길리어드의 행운도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그가 도망친 것을 알아차린 카슨 공작가는 사냥개와 군마를 동원해 미친 듯이 뒤를 쫓아왔다.
“빌어먹을 놈들!”
자신 하나를 잡기 위해서 벌 떼처럼 뒤를 쫓아오는 것을 본 길리어드는 욕설이 치밀었다.
자신들은 어디까지나 지원해 주러 온 입장일 뿐인데 도리어 카슨 공작가에게 공격받는 처지가 되었으니 너무 억울했다.
애초에 지원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나까지 잡히면 끝장이다!’
동료들이 죽는 모습을 확인하지는 못했으나 자신에게 몰린 숫자를 통해 그들의 죽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목숨이 걸린 상황이라도 인간의 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길리어드는 카슨 공작가의 추격대에 뒤를 잡히고 말았다.
‘아직 좀 더 가야 하는데!’
쫓기느라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이동한 거리에 비해서 목적지와 그리 가까워지지 못한 상태였다.
길리어드는 바로 뒤까지 따라온 추격대를 보며 절망했다.
“죽어라!”
카슨 공작가의 기사가 말을 몰며 길리어드에게 달려들었다.
길리어드는 그가 내지르는 창을 피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러나 그것을 기뻐할 틈도 없이 다른 기사들이 길리어드를 둘러쌌다.
‘여기까지구나!’
길리어드는 힐리스 백작의 명령을 완수하지 못한 것에 한탄하며 검을 들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힐리스 백작 역시 이 상황을 예상하고 카슨 공작가를 철저히 경계할 거란 사실이었다.
아무런 증표도 없는 이상 그들은 기껏해야 탈영병밖에 되지 않을 터.
카슨 공작이 힐리스 백작을 공격할 명분은 만들 수 없었다.
푸욱!
“커억!”
그때 카슨 공작의 기사 한 명이 단말마와 함께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뒹굴었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길리어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시커먼 복장을 한 자들이 카슨 공작의 추격대를 공격해 왔다.
“이놈들은 뭐야?”
“저놈부터 죽여!”
기습을 당한 카슨 공작가의 기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그중에서 눈치 빠른 이가 길리어드를 죽이라고 소리쳤다.
그 의미를 이해한 기사들은 우선 길리어드부터 해치우기 위해 매섭게 달려들었다.
번쩍!
그때 갑자기 밝은 빛이 터져 기사들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길리어드 역시 이 갑작스러운 빛에 시력을 잃었다.
그러나 길리어드는 본능적으로 원래 있던 장소에서 벗어나며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렸다.
카슨 공작가의 기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길리어드가 있던 자리를 향해 마구잡이로 공격을 날렸다.
어느 정도 시력이 돌아왔을 때 길리어드는 진땀을 흘리며 주변을 돌아봤다.
자신을 죽이기 위해 그렇게 끈질기게 따라오던 카슨 공작가의 기사들이 모두 나자빠져 있었다.
“그대들은 혹시 네패스 왕국의 사람들인가?”
길리어드는 조심스럽게 검은 복장을 한 이들에게 물었다.
솔직히 복장이 매우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야심한 시간을 틈타서 활동하려 했다면 나름 이해할 구석은 있었다.
그리고 양측의 군대가 맞붙을 장소에 카슨 공작가를 공격할 세력이라면 뻔한 것이었다.
“넌 누구지?”
“나는 힐리스 백작 각하의 기사인 길리어드다. 네패스 국왕 전하께 전달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그럼 증거를 보여라.”
상대가 증거를 요구하자 길리어드는 순간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힐리스 백작의 우려는 타당했지만, 상대가 그것을 이해해 줄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증거는 없다. 자칫 카슨 공작에게 발각될 경우를 대비해 맨몸으로 왔다.”
“그럼 지금 신원도 불분명한 상대를 국왕 전하께 안내하라는 건가?”
“대신에 귀중한 정보를 가져왔다!”
길리어드는 힐리스 백작에게 머리 아프도록 들었던 정보들을 떠올렸다.
지금으로선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정보를 전해 들은 검은 복장을 한 이들은 서로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보는 진짜로군.”
“어떻게 아는 거지?”
순순히 수긍하는 상대의 모습에 오히려 길리어드가 당황했다.
말을 하는 자신조차 과연 이것으로 될지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상대는 이를 쉽게 믿어주었기 때문이다.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우리가 이미 확보한 정보와 일치하니까.”
툭 내뱉어진 대답에 길리어드는 경악했다.
자신들이 지원군으로서 합류해 얻은 정보를 네패스 왕국이 알고 있다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네패스 왕국이 카슨 공작가의 사정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게 보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카슨 공작가가 패배하리라는 힐리스 백작의 생각이 옳았음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 * *
힐리스 백작이 보낸 기사가 찾아온 순간, 나는 더는 지체하지 않고 총공격을 명령했다.
이렇게 서두르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힐리스 백작이 나와 접촉한 것을 알아차린 카슨 공작이 어떤 짓을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무언가 행동을 취하기 전에 내가 먼저 칼을 뽑았다.
이른 새벽부터 내려진 갑작스러운 명령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신속하게 공세에 나섰다.
“힐리스 백작이 바보가 아니라면 내 뜻을 알아차릴 테지.”
이 시점에 갑작스럽고, 또 다소 무리한 공격이었다.
차근차근 외부를 무너트리고 기사단을 투입하는 게 아니라 가진 병력을 모두 동원한 상황.
적의 시선을 붙잡기 위한 행동이었다.
힐리스 백작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게 자신에게 보내는 신호라는 걸 모를 리 없었다.
이를 알아들었는지 전투가 어느 정도 진행되자 상황에 변화가 생겼다.
“후문! 후문으로 이동해라!”
“갑자기 무슨 소리야? 눈앞에 적이 있는데!”
카슨 공작가의 군대가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정면에서 몰려오는 내 군사들을 상대하다 말고 허둥거리며 뒤를 살피기 시작했다.
힐리스 백작의 명령에 따라서 그가 이끌고 온 지원군이 회군에 나섰기 때문이다.
전투 도중에 아군이 달아나는 광경을 목격했으니 혼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했다.
“동부 놈들이 도망치고 있잖아!”
“이 배신자들이!”
절호의 기회가 온 이상 이를 놓칠 순 없었다.
즉시 마법사들을 모아 한쪽 벽에 폭격을 퍼부어서 무너트렸다.
흐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두르느라 나도 마나가 고갈되어 휘청거릴 정도였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아군의 배신에 이어 벽이 무너지자 카슨 공작의 병사들은 그대로 넋이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져 있던 이들.
그나마 믿고 있던 지원군마저 뒤통수를 친 순간, 그들이 지리멸렬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도, 도망쳐!”
“어디를 가는 거냐? 모두 자리를 지켜라!”
“적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닥치고 싸워라! 도망치는 녀석은 용서하지 않겠다. 커헉!”
병사들을 다독이던 카슨 공작가의 지휘관 한 명이 등 뒤를 찌르는 병사의 창에 당해 쓰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혼란에 빠졌던 이들은 지휘관의 부재를 목격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군이 모두 달아나니 용맹한 이들도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혼자 남는 건 개죽음에 불과했으니까.
공포와 두려움이 전염되고 불과 반나절 만에 카슨 공작의 군대는 사라지고 말았다.
대부분이 도망쳐서 벌어진 일이었다.
“카슨 공작은 찾았나?”
“이미 도망친 거 같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카슨 공작의 신변은 확보할 수 없었다.
일찌감치 흐름이 좋지 않음을 알아차리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이를 예상하고 따로 빼둔 병력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카슨 공작을 놓치고 말았다.
“딱히 갈 곳도 없을 텐데.”
그러나 카슨 공작은 절대 이를 기뻐할 수 없을 것이다.
북부는 북부대로 점령당하는 중이었고 이제 중부마저 잃었다.
동부와 남부의 대영주들은 이미 그를 배신했으니 카슨 공작은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었다.
그가 잡히는 건 시간문제였다.
* * *
“내 군사들이,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이 사라지다니!”
기사들과 탈출에 성공한 카슨 공작은 악몽 같은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2만의 군세와 200명이 조금 안 되는 기사를 거느렸던 카슨 공작이었다.
이 왕국의 북부와 중부가 모두 그의 땅이었다.
그러나 아인과 충돌하고 채 한 달이 흐르기도 전에 카슨 공작은 자신이 가진 것 전부를 빼앗겨야 했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초라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기사 20명이 전부였다.
기사들의 표정 역시 처참했다.
다른 무엇보다 북부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곳에는 그들의 가족들이 있었는데 지금으로서는 생사를 확인하는 일조차 불가능했다.
“라키아 경만 남아있었더라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카슨 공작은 라키아를 떠올리며 절규했다.
언제나 그에게 긍정적인 소식만을 전달해 주었던 로베른 왕국 최고의 검사.
그러나 그는 자신이 내린 임무에 나섰다가 상대에게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카슨 공작은 라키아의 죽음을 볼 수도, 시신을 돌려받을 수도 없었다.
“공작 전하.”
그때 기사가 조심스럽게 카슨 공작을 불렀다.
“어디로 가는 게 좋겠습니까?”
“가다니, 내 영지를 두고 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카슨 공작의 물음에 기사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카슨 공작의 상태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자신들끼리 머리를 맞대었다.
그러다 한 기사가 화전민 마을을 추천했다.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그곳은 내전을 피해 정착한 이들이 불법으로 지은 곳이었다.
카슨 공작가에서는 이미 그들에 대해서 알고 있었으나 어차피 작은 마을이기에 무시하던 상태였다.
“그게 좋겠군.”
지도에도 없는 마을이라면 쫓아오지도 못할 것이다.
잠깐 몸을 의탁하기에는 괜찮은 장소였다.
물론 화전민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겠으나 그들이 화전민들의 사정을 봐줄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마을로 이동하던 도중 카슨 공작은 의외의 무리와 맞닥뜨렸다.
“헉! 카슨 공작 전하!”
다름 아닌 달아난 패잔병의 무리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인인 카슨 공작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뒤 일단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치던 도중에 설마 자신들의 영주와 만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놈들! 감히 명령도 없이 달아났겠다! 군법에 따라서 목을 쳐야겠지만, 이번은 사정이 급하니 봐주마! 당장 따라붙어라!”
카슨 공작의 불호령에 패잔병들은 당황하며 눈치를 살폈다.
일개 패잔병에 불과한 그들은 네패스 왕국으로부터 쫓길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항복하기에는 포로 생활을 하게 되거나 그대로 처분될지 모르기에 달아나고 있었지만.
그러나 카슨 공작과 합류한다면 쫓길 이유가 생기는 상황이었다.
“못 본 척해 드릴 테니까 그냥 갈 길 갑시다!”
“뭐, 뭐라고?”
패잔병들을 이끌고 있던 하급 지휘관이 카슨 공작을 향해 소리쳤다.
그 외침에 카슨 공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작해야 백인대장 정도로 보이는 이가 감히 공작인 그의 명령을 거부하고 반말을 한 것이다.
기사들도 그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섣불리 공격할 수도 없었다.
비록 패잔병이라고 하나 나름대로 전쟁에 잔뼈가 굵은 이들이고, 무엇보다 수가 월등했기 때문이다.
후방에 있던 하급 지휘관은 자신 휘하의 병력을 그대로 챙겨서 달아나는 중이었기에 그들 무리는 100명에 가까웠다.
“댁이랑 같이 가면 쫓기기밖에 더하겠어?”
“감히!”
기사들이 검을 뽑으려고 하자 패잔병들도 창을 겨눴다.
아무리 머릿수에서 앞서더라도 병사들이 기사들을 당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대로 상잔을 벌인다면 분명 카슨 공작 쪽이 승리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죽거나 다치지 않고 승리할 자신은 없었다.
쫓기는 와중에 흔적을 남기는 것도 문제였다.
“우린 고향으로 돌아갈 테니까 댁도 알아서 살길을 찾으라고!”
“저, 저놈들을 당장 죽여라! 모반이다!”
카슨 공작의 명령에 기사들은 움찔했다.
기사들은 이대로 얻을 것이 없는 싸움에 나서는 게 옳은지 고민했다.
그러나 카슨 공작의 명령을 마냥 거부할 수도 없었다.
한편 자신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들은 병사들의 눈에도 살기가 줄줄 흘렀다.
카슨 공작의 잘못으로 패잔병으로 전락한 그들의 분노는 절대 작은 것이 아니었다.
퓻!
그때였다.
패잔병 무리에서 쏘아진 화살 한 발이 카슨 공작의 곁에 있던 기사의 목을 꿰뚫었다.
“죽여라!”
“으아악!”
직후 충돌이 시작되었다.
누군가의 공격이 시작된 순간 양측은 이성을 잃고 격렬하게 싸워댔다.
화살을 당겼던 병사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어둠 속으로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한 건 했군.’
그는 이 상황에 남몰래 미소 지었다.
동료들과 함께 첩자로 파견되어 카슨 공작가의 병사가 된 지 벌써 반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별다른 공을 세우지 못해서 걱정이었는데 마지막에 대박이 터졌다.
카슨 공작이라는 월척을 낚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