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37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37화
13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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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의 전투가 마무리되고 며칠의 휴식이 이어졌다.
바로 들이쳐도 충분히 이득을 볼 수는 있겠으나 일부러 시간을 만든 것이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사기를 위해서였다.
북부에서의 승전 소식과 콘라드 후작의 회군 소식이 연달아 이어지며 아군의 사기는 이제 더 올라가기도 힘들게 됐다.
이미 승리를 입에 담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으니.
다만 너무 자만하는 것은 좋지 않기에 지휘관들을 따로 불러내 방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이미 지휘관들도 승리를 의심하지는 않았으나 최소한의 피해로 승리해야 한다는 목표에는 동의해 주었다.
두 번째 이유는 상대에게 두려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아군의 승리 소식이 전해졌다면 반대로 상대에게는 패배 소식이 전해졌을 터.
더구나 북부는 카슨 공작의 기반이 있는 땅이었다.
이 중부에 있는 카슨 공작의 군대도 고향이 북부인 병력이 상당할 터.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이 적에게 넘어간 상황에서 중부의 전선을 지켜야 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맞이해야 할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모두 고생이 많았네.”
야심한 시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의 막사를 찾아왔다.
그들은 서부에 터를 잡은 신관들로 콘라드 후작을 직접 만나 설득한 고마운 이들이었다.
“콘라드 후작을 잘 설득해 주었더군.”
“어디 제 능력이겠습니까? 아랫것들을 생각해 주는 그분의 자비심과 국왕 전하의 인품 덕분이지요.”
신관들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
비록 직접 남부 경계와 중부를 오가며 고생을 한 처지지만 이번 전쟁에 그들이 끼친 영향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한 지역의 대영주를 회유한 활약은 무력으로 한 지역을 점령한 것보다도 더 월등한 전공이었다.
비록 나를 따르는 이들은 아니지만 포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대들이 성공적으로 일을 해줬으니 이번에는 내가 보답해 줘야 할 차례겠지.”
이들은 절대 공짜로 콘라드 후작을 설득하러 간 것이 아니었다.
자칫 잘못하면 목이 잘려 나갈 수도 있는 위험한 여정을 뭐 하러 나섰겠는가?
콘라드 후작의 신실한 마음을 믿어서?
그런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들도 대영주인 콘라드 후작의 사정을 모르지는 않았다.
신에 대한 믿음은 믿음이고 개인의 영달은 별개의 문제.
콘라드 후작이 권력과 가문을 지키고자 이들을 해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도 직접 나선 건 내가 그럴 만한 대가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약속대로 새로운 신전의 건설과 고아원 설립 등 지원을 아끼지 않도록 하지.”
낡고 좁은 신전 대신에 번듯하고 큰 신전을 지어주는 것과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의 설립, 마지막으로 빈민들을 위한 대규모 지원책.
이전에도 충분히 지원을 해주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신관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큰 규모의 지원이었다.
실제로 국왕인 나의 말에도 처음 들었을 때 의심부터 했을 정도다.
“국왕 전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한데…….”
대표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늙은 신관이 묘한 눈빛을 보냈다.
“어째서 저희에게 이런 지원을 해주시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무슨 의미지?”
“국왕 전하께서는 콘라드 후작과 다르게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분 아닙니까.”
신관은 내 정곡을 찔렀다.
그의 말대로 나는 애초에 신을 믿지 않았다.
지구에 있었을 때도 그렇고, 이 세계에 와서도 온갖 기상천외한 일을 경험하고 있지만 신에 대한 믿음은 생기지 않았다.
위니스의 존재는 따지자면 외계인이지 신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타르타로스 역시 거대한 외계인 집단 같았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러나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따로 해준 일이 없었다.
그래서 이 늙은 신관이 어떻게 나를 파악했는지 궁금해졌다.
“신자라면 신관과 마주하면서 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리 없으니까요.”
“좋은 지적이군.”
이 신관과 마주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만났을 때 콘라드 후작의 성향을 이용해 그를 설득해 달라고 말을 전했었다.
내가 직접 나선 이유는 신관의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인 만큼 나도 성의를 보여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아랫사람을 보내서 말을 대신 전달하는 정도였다면 신관들도 절대 직접 움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귀족이 종교를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아나?”
“마법과 같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 물음에 늙은 신관은 즉답했다.
그는 어째서 종교가 마법사들에게 밀렸는지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입으로 신의 존재를 떠들어봐야 눈앞에서 일어나는 마법이 더 위대하게 보이는 건 당연했다.
권력자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시켜 주는 건 어디까지나 힘이지 민심이나 신의 권위는 아니었으니까.
“그래. 종교에는 마법과 같은 보이는 힘은 없지.”
그러나 이성과 과학으로 중무장한 현대 지구에서도 종교를 믿는 사람은 많았다.
젊은 층에는 종교를 불신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는 추세라고 하지만 어쨌든 21세기까지 잘 성행했고 나라에 따라서는 22세기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어째서일까?
단순히 종교가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해서?
아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건 어딘가에 소속되어 안정감을 얻길 원하기 때문이다.
한 영지를 다스리는 약소 영주들도 대영주에게 매달리고 싶은 법인데 그보다 힘이 없는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그러나 가진 것 없는 이들이 어딘가에 소속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차별을 두지 않는 곳은 오직 종교뿐이다.
그들은 신도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힘을 가지는 집단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처럼 콘라드 후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에는 성공했지. 힘이란 건 원래 각기 쓰임이 있는 거야.”
늙은 신관은 내 이야기에 잠시 고심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국왕 전하.”
“고된 길을 온 사람들에게 내가 배려가 없었군. 야영지에서의 잠자리가 편치는 않겠지만 부디 편히 쉬기를 바라네.”
늙은 신관은 다소 급하게 대화를 마치고 막사를 나갔다.
그런 늙은 신관의 모습에 과연 허투루 나이를 먹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위험한 사람입니다.”
아인과의 만남이 끝나고 바깥으로 나온 신관 일행 중 한 젊은 신관이 주변을 살핀 뒤 나직이 입을 열었다.
그저 뒤에서 나누는 대화를 지켜본 것만으로 그의 등은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알려진 모습과 달리 그는 절대 선한 인물이 아닙니다. 반드시 멀리해야 합니다.”
“그럼 빈민들은 어찌 구제할까?”
젊은 신관의 경고에 늙은 신관은 핀잔으로 답했다.
현재 그들에게 가장 많은 지원을 해주는 사람도, 줄 수 있는 사람도 모두 아인이었다.
“콘라드 후작이 있지 않습니까? 그는 신을 믿지 않는 국왕보다 훨씬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젊은 신관은 아인을 두려워했다.
분명 아인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줄 사람이지만 동시에 절대 가까이해선 안 될 부류였다.
어쩌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용당하고 버려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늙은 신관은 그의 말을 부정했다.
“콘라드 후작의 재산은 무한하더냐? 그것이 남부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임을 모르더냐? 남부의 재물로 서부 사람들을 구제하는 건 그들의 원망을 사는 일일 뿐이다.”
“그건…….”
젊은 신관은 말문이 막혔다.
확실히 콘라드 후작의 신실한 마음을 이용하는 것도 옳은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늙은 신관의 말대로 그의 재산은 결국 남부의 재산이었다.
다른 지역의 재산을 가져와 사람들을 구제한다고 한들 어딘가에는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이 생기게 될 것이다.
재물은 절대 무한하지 않았으니까.
“네패스 국왕은 좋은 사람은 아닐지언정 뛰어난 사람임은 분명하다. 그는 힘에 우열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쓰임이 다르다는 걸 이해하고 있어.”
지금껏 늙은 신관은 아인과 같은 이를 본 적이 없었다.
태생부터 모든 걸 누리고 태어난 귀족이나 왕족들은 대부분 오만하며 신분이 낮은 이들을 천하게 여기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아인은 그들에게도 나름의 힘이 있으며 이를 이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분명 위험한 사람이지만 그를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동시에 늙은 신관은 아인의 행보가 여기서 멈추지 않으리라는 걸 눈치챘다.
힘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은 그것을 쓰는 것에도 능하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신전으로서는 아인의 영향력에서 빠져나가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어떻게든 맞춰서 살아가는 수밖에.
“앞으로도 바쁘겠구나.”
그러나 말과 달리 늙은 신관의 표정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어디선가 짙은 피 냄새가 몰려오는 거 같았다.
* * *
선제 퇴각과 북부의 패퇴 소식이 중부에 있던 카슨 공작가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그런 와중에 유일하게 좋은 소식이 도착했으니, 바로 동부의 대영주가 보낸 지원군의 합류였다.
“이리 와주어서 고맙네.”
카슨 공작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지원군을 이끌고 온 힐리스 백작을 반겨주었다.
그러나 열심히 군대를 이끌고 지원에 나선 힐리스 백작은 카슨 공작가의 처참한 상황을 눈치채고 표정이 얼어붙은 상태였다.
‘콘라드 후작이 지원을 취소하고 북부는 전선이 밀린 데다 아가스 백작이 전사했다?’
카슨 공작 혼자서는 네패스 왕국의 상대가 되지 못하리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는 바였다.
그러나 그 격차가 이 정도로 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리 라키아라는 든든한 버팀목이 죽고 나서 시작한 전쟁이라지만 카슨 공작가의 상황은 너무 심각했다.
‘이래서야 패전이 정해진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힐리스 백작은 자신이 그만 사지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슨 공작과 휘하 병력들은 자신들을 무척 반겨주고 있었지만, 그 반김 자체가 힐리스 백작에게는 부담으로 다가왔다.
카슨 공작만으로는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으니 지원군에 저토록 의지하는 것 아니겠는가?
“우선 안으로 들어가지.”
카슨 공작은 힐리스 백작을 대접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 와중에 아직 자신의 힘이 건재하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이미 진실을 아는 힐리스 백작은 불편하기만 했다.
좋은 음식과 술, 아름다운 미녀들이 그에게 붙었으나 이 모든 것이 죽기 전 마지막 만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연 이대로 카슨 공작가를 지원하는 게 옳은 건가?’
특히 콘라드 후작의 회군은 힐리스 백작의 마음을 크게 뒤흔드는 요소였다.
콘라드 후작이 바보가 아닌 이상 카슨 공작가를 버려도 괜찮은 이유가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그건 분명 지금의 자신처럼 카슨 공작가와 손을 잡고 불확실한 승리에 몸을 담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자자, 중부까지 오느라 피곤했을 텐데 오늘은 편히 쉬도록 하게.”
대접이 끝나고 힐리스 백작은 숙소로 안내되었다.
제법 신경 써서 꾸민 티가 나는 좋은 숙소였지만 그런 것들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힐리스 백작은 곧장 사람들을 물리고 마법사를 호출했다.
“카슨 공작가의 상황이 예상보다 심각하다. 이대로 카슨 공작가의 편을 들었다가는 네패스 왕국에 다 같이 죽게 될지도 모른다.”
힐리스 백작의 이야기에 마법사의 표정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 또한 콘라드 후작가의 소식과 북부의 패전에 대해서 들은 상태였다.
“그, 그럼 혹시 회군하실 생각입니까?”
“필요하다면 그래야겠지.”
“카슨 공작이 순순히 보내줄까요?”
“그렇지 않으면 네패스 왕국을 두고 우리끼리 싸우기라도 하겠느냐?”
힐리스 백작은 카슨 공작이 그런 미친 짓을 할 리가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막상 최후를 앞둔 카슨 공작이 무슨 짓을 할지는 힐리스 백작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대책을 논의하고 싶었다.
“우선 동부에 연락해야겠다. 가신들과 이 일을 의논해야겠어.”
“알겠습니다.”
마법사는 가까운 통신 거점으로 연락을 넣었다.
그렇게 새벽 내내 힐리스 백작과 동부의 연락이 이어졌다.
아침이 되자 힐리스 백작은 바로 카슨 공작을 찾았다.
“잠깐 이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전장이 될 장소를 미리 둘러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에 카슨 공작으로서는 이를 반대할 명분이 없었다.
손쉽게 카슨 공작의 허가를 받은 힐리스 백작은 기사들과 함께 순찰에 나섰다.
그는 커다란 원을 그리듯이 움직였고 순찰이 끝난 뒤에 시작점으로 돌아와 한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미리 지시를 받은 기사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카슨 공작가의 미행이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아군의 진영에서 미행이 있었다는 말에 힐리스 백작의 표정이 처참하게 변했다.
카슨 공작이 자신이 갑자기 달아나거나 네패스 왕국과 내통을 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미행을 붙인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만큼 카슨 공작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의미였다.
“제기랄.”
고작 전선을 순찰하는 것에 미행이 붙을 정도라면 간밤에 통신도 도청했을지 몰랐다.
어딘가에 마법사를 숨겨두거나 통신 거점 인근에 마법사를 배치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호를 다르게 하기는 했습니다.”
힐리스 백작의 마법사도 도청을 염려하고 별도의 신호를 사용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걸 카슨 공작가에서 모른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밤새도록 통신을 사용한 것 자체가 의심스럽게 보일 만한 상황이었고.
“전 병력의 경계 태세를 최고로 높여놔라. 카슨 공작가를 믿지 말고 기회가 생긴다면 이곳을 빠져나간다.”
“그런 기회가 오겠습니까?”
“전투 도중에는 빈틈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힐리스 백작의 이야기에 기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설마 전투 이전에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도중에 빠져나가겠다는 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위험천만한 행동이었고 명예롭지도 않았다.
그러나 힐리스 백작은 지금이 앞뒤 가릴 처지가 아니란 것을 알았다.
이대로 네패스 왕국과 충돌하게 된다면 동부마저 그들에게 집어삼켜지고 말 것이다.
“만약을 위해 우리가 퇴각할 거라는 사실을 네패스 왕국에 전달해야 한다.”
힐리스 백작은 자신의 기사들을 돌아봤다.
“누가 나를 위해 목숨을 걸겠느냐?”
“제가 나서겠습니다!”
“아닙니다!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해내겠습니다!”
어느 기사가 잽싸게 대답하자 다른 기사들도 질 수 없다는 듯이 열정을 보였다.
힐리스 백작은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기사들을 선발했다.
“서한이나 증표는 주시지 않으십니까?”
“만약 너희가 발각될 경우 카슨 공작이 우리에게 검을 휘두를 명분이 된다. 그럴 바에야 네패스 왕국에게 공격받더라도 전투 도중에 달아나는 쪽이 낫다. 후퇴하는 상대를 굳이 쫓지는 않겠지.”
힐리스 백작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기사들에게 아무런 증표도 주지 않았다.
그 대신 기사들에게는 몇 가지 정보를 외우도록 지시했다.
바로 현재 카슨 공작가의 상황을 담은 군사 정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