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3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35화
135화
【 카슨 공작의 몰락 】
카슨 공작가와의 전쟁을 앞두고 로베른 왕국 남부와 동부 대영주들에게 서한을 보냈다.
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철저하게 카슨 공작에게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였다.
이를 통해 내가 그를 심판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명분을 강조하고 카슨 공작에게 동조해 나를 적대한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협박도 가했다.
마지막으로 나의 손을 잡고 카슨 공작을 처단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이를 잊지 않고 보답하겠다는 말로 내용을 마무리했다.
다른 지역 대영주들에게 어느 편에 설지를 결정하라고 압박한 것이다.
하지만 딱히 그들의 답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아무리 카슨 공작의 잘못이 명확하다고 해도 내가 카슨 공작가를 무너트리면 자신들의 안위가 불투명해진다는 걸 그들이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라파엘 백작처럼 나에게 고개를 숙일 생각이 아니라면 대영주들은 카슨 공작에게 협력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잠깐 고민은 하겠지.’
대영주들에게 잠시 망설임을 주는 것만으로도 서한의 가치는 충분했다.
어차피 전쟁을 오래 끌고 갈 생각은 없었으니.
다음 날 해가 밝자마자 북부와 중부를 향해 곧장 3만의 군대를 움직였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북부에는 루시우스와 탈론, 모르타르와 자크론이.
적의 주력이 있는 중부는 내가 로크와 릴리아나를 데리고 직접 움직였다.
경계 지역에 있는 울창한 숲에서 유일하게 군대가 이동할 만한 넓은 길을 두고 대치가 벌어졌다.
양측의 사기를 비교하자면 당연히 우리가 훨씬 앞서 있는 상태였다.
전쟁의 명분을 가졌고 지금껏 패배한 적이 없는 데다, 규모나 무장 상태에서도 카슨 공작가에 비해 우위였다.
반면 카슨 공작가는 위의 것들이 부족하고 거기에 라키아의 공백까지 떠안고 있는 상태였다.
최강이라고 불리던 검사의 죽음으로 분명 흔들림이 생겼을 것이다.
“우리의 땅을 노리는 침략자를 반드시 막아야 한다!”
명분에서 밀리는 카슨 공작가가 내세울 건 나라와 영토를 지켜야 한다는 지극히 원론적인 주장이 다였다.
이는 귀족에게 있어서는 중요했지만, 휘하 장병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장병들이 우려하는 건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에 이루어질 잔혹한 약탈뿐일 테니까.
나로서는 이 부분을 긁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모두 들어라!”
양측의 군대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직접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내 군대야 말할 것도 없고 카슨 공작 측의 군대도 모두 조용해졌다.
일국의 군주가 직접 나서서 무슨 이야기를 꺼낼 건지 의문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카슨 공작은 자신의 기사인 라키아 경을 보내 나를 암살하려 했으며 명예로운 귀족 펠트 남작을 무참히 살해했다.”
나는 그들의 앞에서 다시 한번 카슨 공작이 저지른 죄를 나열하며 이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카슨 공작 쪽에서는 즉각 반발했다.
“라키아 경은 명예로운 사람이다! 암살 따위를 할 사람이 아니다!”
“저건 모두 우리의 왕국을 빼앗으려는 침탈자의 거짓 명분이다!”
그들은 내가 라키아에게 누명을 씌웠다고 주장하며 이 전쟁이 그저 내 야망에 의한 것이라고 병사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이는 병사들은 해명을 믿는 태도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라키아는 왜 나에게 잡혀서 처형당했는지, 펠트 남작은 또 어쩌다 죽었는지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제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죄 없는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지.”
잘 훈련된 병사들은 영주에 대해 높은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게 뻔한 상황에서도 그 충성심이 유지될까?
“잘못은 카슨 공작이 저질렀는데 그대들의 뒤편에 숨어서 나오지 않는군.”
얼굴이 보일 정도의 거리는 아니지만 분명 이야기를 들은 카슨 공작은 분노할 것이다.
그는 최고 지휘관이며 안전한 곳에서 보호받는 게 당연한 입장이었다.
개인의 무력이라고 해봐야 제 몸 하나 지켜낼 수준에 불과할 테니 선봉에 서서 군대를 이끌 수는 없었다.
“잘못을 저지르고 뒤에 숨는 주인을 위해 그대들이 목숨을 버리는 게 맞는가?”
“현혹되지 마라! 간사한 술책이다!”
“그대들의 우려를 알고 있다. 카슨 공작은 분명 지휘관들을 시켜 이 싸움에서 패배하면 그대들의 재산과 가족들을 잃게 될 거라 말했겠지.”
정곡을 찔렸는지 일순간 적들 사이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하지만 이건 사실 어느 영주들이나 하는 이야기이기에 특별할 것도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앞에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다. 이 전쟁이 끝나도 약탈은 없다.”
나에게는 고작해야 일개 병사들의 재산을 뺏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었다.
나와 맞서 싸운 적 귀족과 기사의 재산만 빼앗아도 아랫사람들에게 나눠 줄 몫은 충분하게 나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을 공격하는 건 더 말도 안 된다.
사람이야말로 최고의 재산인데 자신의 재산이 될 상대를 파괴하는 건 멍청한 짓이니까.
“우리는 침략자가 아니다. 로베른 왕국을 위협하는 사교도를 물리치고자 국경을 넘었고 간악한 카슨 공작을 벌하고자 이 자리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다른 영주가 나와 같은 이야기를 한다면 도리어 아군의 사기가 꺾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전투가 끝나면 약탈은 당연히 뒤따르는 보상이었으니까.
그렇지만 나는 이로 인한 불만을 채워줄 능력이 있었다.
명예를 충족시킬 수 있고 재산을 베풀어줄 수 있으니 약탈을 금지해도 불만이 나오지 않는다.
만일 이를 반대하고 약탈을 시도하는 자라면 애초에 내 통제가 먹히지 않는다는 뜻이니, 나로서도 그런 자를 밑에 둘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전투 중 언제라도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자는 받아주겠다.”
마지막 선언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적들을 충분히 흔들었으니 이대로 전투를 개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돌아가려는 순간, 카슨 공작가 쪽에서 내보낸 사람이 있었다.
철컹!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나타난 거구의 기사.
척 보아도 만만치 않은 기세를 가진 그는 무장을 갖춘 채 말을 몰고 앞으로 나왔다.
나 때문에 떨어진 사기를 회복하기 위해서 기사들의 결투를 요구하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아군 기사들은 각자의 무기를 고쳐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뽑아달라는 듯 나를 향해 맹렬한 시선을 보냈다.
그 자신감에 마음이 흐뭇해졌다.
“모두 자신감이 넘치는군.”
공에 대한 보상이 확실한 내 성정은 지난 시간 동안 익숙해지고도 남았을 터.
재물을 원해서든 명예를 원해서든 기사들은 욕망에 따라 자신의 실력을 키워왔다.
그리고 그를 위한 기회를 놓칠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대들 모두 기회를 양보해 줘야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번에는 그들에게 기회를 줄 수 없었다.
카슨 공작은 기사를 내보내 결투를 신청하는 것으로 사기를 올릴 계획이겠지만 이는 최악의 선택이었다.
내가 직접 나갈 생각이기 때문이다.
병사들을 내세우고 뒤에 숨었다고 카슨 공작을 조롱한 상황에서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직접 나갈 생각입니까?”
“말릴 생각인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로크가 다가왔다.
근위기사단장이라는 직책에 있는 만큼 표정이 좋지 않았다.
“무모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게 가장 효과가 좋지. 그리고 상대의 실력은 대충 알고 있다.”
앞으로 나온 덕분에 거리가 좁혀져 상대 기사의 영웅 정보를 볼 수 있었다.
3티어.
나름 지역에서 명성을 떨칠 기사지만 나를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4티어라면 고민을 해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렵지 않은 상대야.”
“그럼 꼭 승리하십시오.”
내 뜻을 꺾지 못하리란 걸 알아차린 로크는 승리를 빌어주는 걸 택했다.
같이 전장을 누빈 경험이 있기에 가능한 믿음이었다.
나는 다시 말을 돌려 앞으로 나갔다.
설마 내가 나올 줄은 몰랐는지 카슨 공작가의 기사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마법사란 사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직접 결투에 나서는 경우를 생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결투는 기사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일개 기사의 결투 신청을 국왕인 내가 받아들일 이유도 없으니.
“국왕이 직접 나왔다고?”
“마법사가 전면에 나와?”
나와 기사의 거리가 좁혀지고 결투 분위기로 흘러가자 카슨 공작가 병사들이 다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을 이끄는 카슨 공작과 내가 너무 비교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이러다가 내가 죽거나 잡히기라도 하면 모든 게 무너지게 될 테니 다른 영주라면 이 방법을 알아도 쓸 수 없다.
만약 그런 짓을 하면 오히려 미련하다거나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테니.
하지만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직접 결투에 응하는 건 사기를 올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명성이 자자한 네패스 국왕 전하를 직접 상대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카슨 공작님 휘하 부단장 베너드 자작입니다.”
먼저 결투를 신청했다가 상대를 보고 거절할 수는 없는 일.
카슨 공작의 기사는 싸울 각오를 굳히고 결투에 앞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그리고 마상용 창을 치켜들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반드시 이겨야만 했다.
“아인 네패스. 네패스 왕국의 국왕이자 마법사다.”
나도 짧지만 내 이름을 밝혔다.
이런 부분에서의 예절 하나하나가 또 귀족이나 기사들에게 인상 깊은 모습이 되는 법이니까.
“그럼 가겠습니다!”
베너드 자작이 말의 고삐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난 그를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시작 전에는 얼마든지 예절을 차리고 명예를 존중해 줄 수 있어도 실전에서는 그럴 수 없다.
압도적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는 쪽이 사기를 올리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라이트닝 플레어!”
짧은 번쩍임과 함께 쏘아진 번개가 베너드 자작이 타고 있던 말을 새까맣게 태워버렸다.
베너드 자작은 재빨리 말에서 뛰어내려 몸을 지켰으나 낙마의 충격이 큰지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그래도 실력 있는 기사답게 고통을 참고 자세를 회복했지만, 이미 내가 다음 마법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마나 블래스트!”
콰콰쾅!
“크억!”
흡사 폭풍을 연상시키는 충격파에 베너드 자작이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나 쓰러져 있을 틈도 없었다.
뒤이어 온갖 마법들이 쏟아져 베너드 자작을 휘몰아쳤다.
지켜보는 이들이 안쓰럽게 여길 정도로 그는 처참하게 패했다.
“와아아아!”
내 압도적인 승리를 목격한 아군의 사기는 더할 나위 없이 높아졌고 베너드 자작의 참패를 목격한 카슨 공작가의 사기는 더 나빠졌다.
“젠장! 돌격! 전군 돌격하라!”
이대로 사기가 완전히 꺾이면 뒤가 없다는 걸 깨달은 카슨 공작은 무리해서 공격 명령을 내렸다.
본래라면 철저하게 방어로 일관해야 했겠지만, 이대로 병사들에게 무력함과 두려움이 새겨진다면 무슨 수를 써도 이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린 공격 명령은 분명 옳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옳은 명령이 반드시 승리로 돌아오는 건 아니었다.
“전군 총공격이다!”
“카슨 공작에게 철퇴를! 네패스 왕국에 영광을!”
나 역시 대응해서 공격 명령을 내렸고 양측의 군대는 격렬하게 충돌했다.
전장의 지형은 우리에게 불리했다.
울창한 숲이라는 제약이 기사단의 발목을 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카슨 공작가에 앞서는 부분은 기사단만이 아니었다.
협회에서 지원받은 마법사들의 공격이 숲을 파괴하며 일대를 휩쓸었다.
카슨 공작가에도 마법사들이 있었지만, 머릿수나 질적인 면에서 크게 밀렸다.
‘고티어 마법사는 대부분 협회 소속이니까.’
네패스 왕국에서는 협회가 지역마다 지부를 건설하며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고 있었다.
반면 타국의 마법사는 여러 개의 조직으로 난립했고 이는 협회에 비해 손색이 있었다.
우웅!
그때 전장 전체에 거대한 마나 파장이 전달되었다.
거기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기에 내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걸쳐진 상태였다.
* * *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카슨 공작은 휘하 마법사로부터 일대에 마법 신호가 사용되었다는 말에 바짝 긴장했다.
상대인 아인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법사로서 대단한 경지에 올랐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눈앞에서 카슨 공작가에서 손꼽는 기사인 베너드 자작을 단신으로 쓰러트리는 위용을 보여주기도 했으니 절대 경시할 수 없었다.
“주변을 샅샅이 살펴라!”
카슨 공작의 지시에 따라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흩어져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어떠한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카슨 공작 전하.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제대로 확인한 게 맞는가? 아직 확인하지 못한 위협이 있을지도 모른다.”
“확실합니다.”
기사의 보고에도 카슨 공작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무리한 공격은 예상할 수 있던 것처럼 나쁜 결과를 내고 있었다.
양쪽의 소모전 양상이지만 병력이 부족한 카슨 공작에게 이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병사들의 수준이나 마법사의 화력에서 밀려 아군의 피해가 더 크게 나고 있었다.
“좋지 않군. 이 이상은 피해가 커지겠어. 군사들을 물려라.”
“괜찮겠습니까? 먼저 군사들을 물린다면 사기에 악영향이 끼칠 겁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병사들을 계속 잃을 수는 없다.”
카슨 공작에게는 아직 믿을 만한 구석이 남아있었다.
바로 남부와 동부의 대영주들이 이끌고 오기로 한 지원군이었다.
이미 양쪽으로부터 네패스 왕국과의 전쟁에 협력해 주겠다는 약속까지 전달받은 상황.
내전으로 언제나 전쟁 준비가 되어있던 만큼 시간이 오래 걸릴 리도 없었다.
지금쯤이면 양쪽의 대영주들 모두 경계 지역에 거의 근접했을 것이다.
“서둘러 후퇴를…….”
“카슨 공작 전하!”
그때 휘하의 마법사가 카슨 공작을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
“콘라드 후작이 통신을 보냈습니다!”
“콘라드 후작이?”
콘라드 후작은 남부의 대영주였다.
중부를 직접 압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에 카슨 공작으로서는 가장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대였다.
“무슨 소식이지?”
“그게…….”
마법사는 쉽게 말하지 못한 채 진땀을 뺐다.
그런 마법사의 모습에서 불길한 예감이 든 카슨 공작이 마법사를 다그쳤다.
“어서 대답해라!”
“콘라드 후작이 지원을 취소하고 회군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