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VVIP 영주님의 품격-129화 (129/250)

VVIP 영주님의 품격 129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29화

129화

【 타오르는 불길】

로베른 왕국의 서부를 다스리는 대영주는 라파엘 백작 말고도 한 사람이 더 존재했다.

넬슨 후작.

마족과의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작의 자리에 오른 그는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망나니였다.

“푸하하하!”

아침 댓바람부터 술자리를 연 넬슨 후작은 시원하게 웃어젖혔다.

내전으로 보기 어려워진 음악가들과 외국에서 수입까지 해온 비싼 명주들 그리고 아름다운 무희들이 넬슨 후작의 연회를 꾸며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요즘처럼 술맛이 좋았던 적이 없다!”

“맞습니다!”

넬슨 후작의 술친구로 시작해 현재는 가신이 된 빈센트가 맞장구를 쳐주었다.

몰락한 귀족 출신인 빈센트는 재빠른 눈치로 넬슨 후작의 비위를 잘 맞춰주고 있었다.

“오! 빈센트, 너는 그 이유를 아는 것이냐?”

“그야 라파엘 백작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정답이다!”

넬슨 후작은 무희가 입에 넣어주는 과일을 씹고는 유쾌하게 웃었다.

라파엘 백작은 넬슨 후작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둘은 겉으로는 손을 잡은 상태였지만 사실 배후에는 끊임없는 암투를 벌이고 있었다.

편하고 즐겁게 살고 싶은 넬슨 후작으로서는 짜증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스스로 충신이라 칭하는 잔소리꾼들도 라파엘 백작은 위험하다고 떠들어대며 넬슨 후작의 머리를 아프게 했었다.

그런데 그 라파엘 백작은 사교도들의 발호로 추태를 보였다.

고작 사교도 따위에 당한다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니만큼 넬슨 후작은 라파엘 백작뿐만 아니라 그를 경고한 가신들을 모두 비웃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위험하다던 늙은이가 고작 사교도 따위에 쩔쩔매는 꼴이라니!”

넬슨 후작은 라파엘 백작의 무능함을 근거로 자신에게 쓴소리하던 가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전부터 거듭된 숙청이지만 이번 숙청은 의미가 남달랐다.

자신조차 부정할 수 없던 위험한 상대가 사실은 별게 아니란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서 더는 넬슨 후작에게 잔소리할 수 있는 사람이 남지 않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군. 고작 그런 것들 하나 정리를 못 하다니.”

넬슨 후작의 시선이 연회장의 한구석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수치심으로 얼굴을 붉히고 있는 젊은 여성이 한 명 있었다.

일반인과 다른 종교적인 상징이 들어간 복장은 그녀의 신분이 신관임을 알려주었다

“귀족의 기부금이 없으면 입에 풀칠도 못 하는 것들인데 말이야.”

한때 종교 국가가 건국될 정도로 종교의 힘이 막강했던 시대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강력했던 시대는 스스로 넘어졌고 마법사 협회가 설립된 이후부터는 어떤 귀족도 종교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눈에 보이고 실용적인 마법이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종교의 명맥이 끊이지 않고 있는 건 그들이 빈민들의 구제에 나서며 민심에 나름 도움을 주는 덕분이었다.

“이봐.”

“네. 후작 각하.”

넬슨 후작의 부름에 신관은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그런 반응에 넬슨 후작은 가학적인 미소를 지었다.

빈민의 구제.

말은 좋지만 결국에는 돈 없는 것들한테 매달리는 것만이 종교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돈이 있는 사람은 마법사나 권력자를 찾지 종교를 찾지 않으니까.

병들고 나약한 이들만이 종교에 귀의해 내세를 약속받지만, 넬슨 후작은 이를 모두 허상이라 생각했다.

“좋은 자리잖아. 그럼 웃어야지.”

그런 넬슨 후작에게 얼마 전 거슬리는 일이 일어났다.

그의 영지에 있는 어느 신전에서 빈민과 고아들을 돌보는 데 돈이 부족하니 재정적인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예전부터 숱하게 거절해 온 제안이었고 이번에도 당연히 거절하려 했지만, 이번에 한해 넬슨 후작은 생각을 바꿔야 했다.

제법 미모가 괜찮은 신관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다.

넬슨 후작은 그녀가 자신의 시중을 들어주는 대가로 재정의 지원을 약속했다.

그 시중이란, 당연히 그와 잠자리를 함께하는 것이다.

신께 귀의한 몸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모욕이었다.

“신관. 신은 존재하나?”

“당연합니다.”

넬슨 후작의 물음에 신관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신의 심판도 있나?”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는 건 당연하니까요.”

“크크큭! 개소리!”

넬슨 후작은 손에 들고 있던 유리잔을 신관을 향해 내던졌다.

잔에 들었던 내용물은 그대로 신관의 얼굴에 뿌려졌다.

“그럼 당장 벌을 내려봐라! 너희의 잘난 신에게 제발 날 벌해 달라고 기도해 보라고!”

넬슨 후작의 행동에 빈센트는 웃음을 터트렸다.

마족과의 전쟁이 끝나고 지난 2년.

넬슨 후작은 온갖 패악을 일삼았지만, 그에게는 단 한 차례도 벌이 내려진 적이 없었다.

“죽으면 벌을 받아? 지옥에 떨어져? 웃기지 마라! 사후 세계 같은 건 없어! 그런 건 마음이 나약한 놈들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라고.”

신관에게 다가간 넬슨 후작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이대로 너를 욕보이고 시체를 들개의 먹이로 던져주더라도 신벌 따위는 내리지 않는단 말이다.”

신관은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의 남자에게 비참하게 당하게 될 자신의 운명이 두려웠으나 돈을 지원받지 못한다면 죽어갈 이들이 수두룩했다.

게다가 거부할 경우 분노한 넬슨 후작이 어떤 보복을 할지도 알 수 없었기에 그녀는 이 자리에 나와야만 했다.

우당탕!

그때 연회장 문 너머에서 소란이 일었다.

“뭐냐? 어떤 새끼가 소란이야!”

넬슨 후작은 신경질적으로 바깥을 향해 소리쳤다.

그 외침에 좌우로 문이 열리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기사가 안으로 뛰쳐 들어왔다.

“넬슨 후작 각하!”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행색에 넬슨 후작은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을 받았다.

“무슨 일이냐?”

“구, 국경이 뚫렸습니다!”

기사의 보고에 연회장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넬슨 후작가가 있는 땅은 로베른 왕국의 서부였고 그들이 맞대고 있는 국경은 하나뿐이었다.

과거 크레시안 왕국이라 불렸고 이제는 네패스 왕국이 된 곳.

기사는 지금 그곳의 국경이 뚫렸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개소리야? 갑자기 국경이 왜?”

“네패스 왕국이 침략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넬슨 후작은 소리를 버럭 지르며 기사의 멱살을 잡았다.

내전으로 사분오열된 대영주들이 하나의 국가에 맞선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다들 네패스 왕국의 다음 행보를 두려워하며 이를 경계했다.

그러나 지난 반년 동안 네패스 왕국은 국정을 돌보며 내전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에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국가들은 안심했다.

내전의 피해를 모두 회복하려면 들어갈 재화의 양이나 시간 모두 엄청났으니까.

아무리 빠르게 내전을 끝냈다고 한들, 적어도 수년 동안은 외부로 활동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허를 찔린 것이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빈센트는 흥분한 넬슨 후작 대신 기사에게 물었다.

“적의 병력은? 병력은 얼마나 되지?”

“확인된 건 3만입니다!”

3만이라는 말에 빈센트는 눈앞이 노랗게 변했다.

로베른 왕국 서부의 군대를 모두 끌어모아도 그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미 국경이 뚫렸는데 3만이라고?”

아무리 방심했다지만 그래도 국경을 비워둘 수는 없는 일.

내전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국경에는 상당한 숫자의 군대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의 침략을 대비하기 위해 요새를 비롯해 온갖 물자가 비축된 상태였다.

적이 침략했다고 해도 지역의 영주들이 이를 대비해서 힘을 합칠 시간을 벌 수 있도록.

그러나 지금 기사의 보고에 의하면 국경은 이미 뚫린 상태였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말이 안 되잖아!”

빈센트는 딱 한 번 국경의 방비를 본 적이 있었다.

그 규모는 정말 엄청나서 상대가 3만이 아니라 5만이 몰려와도 열흘은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적들이 왔다는 보고도 없이 바로 국경이 뚫리다니?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라, 라파엘 백작가가…….”

“라파엘 백작가?”

“라파엘 백작가가 국경을 열어줬습니다!”

기사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이에 빈센트는 다리에 힘이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라파엘 백작가가 내통했다면 국경이 단번에 뚫린 것도 수긍이 되는 이야기였다.

적을 막아야 할 병력이 되레 길을 열어준 꼴이었으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미친 게 아니고서야 국경을 왜 열어?”

넬슨 후작은 여전히 기사의 말을 믿지 않았다.

타국의 군주가 어떤 야심을 품고 있는지 어떻게 알고 국경을 열어준단 말인가?

겉으로는 달콤한 보상을 약속해도 일이 끝난 다음에는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데.

그러니 제정신이 박힌 이라면 절대 국경을 열 수 없었다.

“사실입니다. 사교도 때문에 감당이 안 된다고 지원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는 그걸 받아들였단 말이냐?”

국경은 두 대영주의 군대가 함께 상주해서 지키고 있었다.

구역이 조금 다르지만 수만의 군대가 드나들 통로는 정해져 있었고, 그곳은 공동 담당이었다.

한쪽이 길을 열어주려고 해도 다른 쪽이 막을 수 있는 것이다.

“라파엘 백작가가 공격을 했답니다.”

“미친…….”

넬슨 후작은 이 악몽 같은 현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시간을 벌어야 할 국경의 병력이 이미 당해버렸고 영주들을 모을 시간도 없었다.

게다가 정황을 들어보니 라파엘 백작이 배신한 모양인데, 이러면 도움을 요청할 상대도 없단 소리였다.

“그 미친 늙은이가 기어코!”

소리치던 넬슨 후작은 문득 한기가 들었다.

뒤를 돌아본 그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신관과 눈을 마주쳤다.

어떤 감정도 내보이지 않고 절제된 눈빛이었으나 넬슨 후작은 이를 보자마자 전신에 소름이 쫙 끼쳤다.

정말 자신에게 신벌이 떨어진 기분이었다.

* * *

3만의 군대를 이끌고 나선 친정의 첫 번째 전투는 시시하게 끝이 났다.

국경을 지키던 라파엘 백작가의 군대가 협력을 해준 덕분에 넬슨 후작가의 방해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법사들을 회유해 둔 덕분에 국경의 소식이 전달되는 것도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쉽게 국경이 뚫리다니.”

이 상황에 놀랐는지 로크가 혀를 내둘렀다.

휘하 기사들도 어안이 벙벙한 느낌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정말 마법 같군요.”

“다 고생해 준 이들이 있는 덕분이지.”

마법사 협회의 지원을 받아서 병력 일부를 라파엘 백작가로 침투시키고 백작과 가족들을 붙잡았다.

이후 가족들을 인질로 삼아서 백작에게 가짜 서한을 작성하도록 강요하고, 이를 통해 국경을 넘을 명분을 만들었다.

당연히 국경지대를 지키고 있는 병력은 연락받은 내용이 없다며 비켜주지 않았으나, 이는 쉽게 속일 수 있었다.

직접 말을 타고 라파엘 백작가까지 왔다 갔다 할 수 없으니 마법사의 마나 파장으로 답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마법사들이 나에게 협력하는 이상 국경의 병력은 이 서한의 진위를 의심하지 못했다.

“변수도 없었으니 운도 좋았고.”

혹시 사교도의 전력이 예상을 웃돌거나 마족이 나타났을 때를 대비해 자크론과 탈론 등 최고 전력을 따로 침투시켰다.

하지만 돌아온 답변에 의하면 마족의 모습은 마지막까지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아예 이곳에 없는 건지 상황이 좋지 않아 떠난 떠난 건지 모르겠지만, 로베른 왕국의 서부를 점령하는 데 위협 요소는 모두 사라진 셈이다.

이제는 일방적인 유린뿐이었다.

“그러니 그 노력이 헛수고가 되지 않도록 우리가 열심히 할 차례야.”

“물론입니다.”

근위기사단장 로크의 신호에 수만의 군대가 질서정연하게 흩어지기 시작했다.

라파엘 백작가의 다른 영지를 점령할 군대와 넬슨 후작가를 침공할 군대.

그리고 다른 지역의 대영주가 혹여나 관여하지 못하도록 이를 관측하고 견제하기 위한 부대도 준비된 상태였다.

휘하 부대는 정확한 사정을 알지 못했다.

대외적으로 명분 삼은 사교도 토벌을 위한 도움 요청을 사실로 믿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넬슨 후작가를 공격하는 건 사교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고 둘러댄 상태였다.

그리고 이는 실제로 사실이 될 예정이었다.

마침 넬슨 후작은 패악을 부리며 악명을 크게 쌓아놨기 때문에 이를 의심할 사람도 많지 않았다.

‘덕분에 편했지.’

미리 침입해 있던 암살자 출신 기사들은 이를 이용해 넬슨 후작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그 덕분에 바닥에 떨어진 민심은 사교도의 준동을 앞당기게 만들었다.

사교도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한 것에는 내 도움도 있던 것이다.

그들 자신조차 몰랐겠지만.

‘이로써 전쟁은 시작되었다.’

타국을 침공하는 일은 내전과는 명백히 달랐다.

국경을 넘는 명분은 만들었으나 전쟁의 명분은 아직도 없었다.

이에 따라 몇몇 이들은 나를 반대하기도 할 것이다.

왕국의 재정이 넉넉한 것도 아니고 내전으로 인한 피해가 모두 회복된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어떤 명분과 도리를 내세우더라도 눈앞의 성과에는 빛이 바래질 수밖에 없다.

승리를 거듭하고 이전처럼 충분한 보상을 제공해 줄 수 있다면 이 기세는 들불처럼 번져 나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미 그를 위한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이 불길은 절대 꺼지지 않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