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25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25화
125화
【 준동 】
내전의 종식 소식은 북부를 넘어 왕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마법사 협회는 각 지부와 통신 거점을 통해 빠르게 이 사실을 퍼트렸고, 불과 하루 만에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만드는 저력을 보였다.
그날 지역을 막론하고 되돌아온 평화에 대한 환호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길고 긴 축제가 시작되었다.
축제의 이유는 다양했다.
내전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걸 축하하는 사람, 승리를 거둔 아군을 축복하는 사람, 그냥 축제를 열 구실이 필요했던 사람 등등.
각자가 저마다의 이유로 축제를 열고 이를 즐겼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랬다.
내전을 끝낸 지금, 나에 대한 민심은 최고를 달리고 있었고, 이때만큼 즉위식을 치르기 적당한 때는 없었다.
그래서 축제의 분위기를 그대로 이어받아 상당히 이르게 즉위식이 치러졌다.
남부 연합은 해체되었다.
내가 즉위하면서 수장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고, 모두가 내 아래에 들어온 이상 더는 서로의 지역을 나누는 게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그럴 뿐이었다.
기존 남부 연합에 속했던 영주와 다른 지역 영주 사이의 분위기가 완전히 같을 순 없었으니까.
결국에는 연합이라는 이름만 사라졌을 뿐 남부와 다른 지역 영주들의 우호적인 기류는 여전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를 조금 견제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귀족들 간의 균형이 너무 일방적이기 때문이다.
“각 지역 영주들의 봉토를 재정리하겠다.”
본래라면 나눠 준 영지를 다시 회수한다는 건 어지간해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럴 만한 실책을 저지르거나 사정이 있는 게 아니고서는.
그렇지만 내전과 새로운 왕조의 탄생은 어지간한 일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영주들도 이를 반대하지 않았다.
실제로 내전의 결과로 인해 이게 꼭 필요한 영주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떤 영주라도 기존보다는 넓은 영토를 약속했기에 반대할 명분도 마땅찮았다.
가문 대대로 다스려온 땅을 유지하고 싶은 영주가 있다면 이를 받아들여 주변의 영지를 더해 주고, 다른 영토를 원한다면 그쪽으로 옮겨주었다.
이 과정은 꼭 필요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바쁜 일이었다.
발표는 빠르게 이루어졌지만, 영지를 옮기는 동안 일어난 여러 사건 사고들로 몇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고 나서야 왕국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아직 바쁠 일이 남아있어요.”
왕비로서 내 곁에서 업무를 함께 보던 레일리는 남아있는 서류들을 가리켰다.
“왜 이렇게 사람이 없지?”
분명 이곳저곳에서 사람을 뽑아댔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사람을 뽑더라도 방대한 업무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몇 명이 있어도 부족할 테니까요.”
전쟁으로 죽은 귀족과 망한 가문이 너무 많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거기에 한몫했던 입장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너무 힘들어.”
고작 왕국 하나만 해도 이 꼴인데, 절대군주를 목표로 대륙 통일을 하려면 과연 감당해야 할 일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내 야망을 꺾는 게 격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지 염려될 정도였다.
“좀 쉬실래요?”
피로를 호소하자 레일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휴식을 권해주었다.
그러나 그런 레일리의 행동은 나에게 섬뜩한 두려움을 줄 뿐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일이 힘드니까 쉬라고 권유하는 단순한 행동이지만, 그 뒤에 숨겨진 그녀의 욕망에 이미 수차례 당한 뒤였기 때문이다.
이대로 내가 쉬겠다고 말하고 침실로 향한다면 레일리는 분명 내 뒤를 쫓아올 것이다.
침실을 잠그는 것도 통하지 않는다.
어디서 구했는지 레일리가 침실의 열쇠를 소유하고 있었다.
기사들로 막는 방법도 있지만, 왕비를 기사들을 통해서 내쫓으면 그건 관계를 파탄 내겠다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니까.”
“아…….”
애써 태연한 척 웃어 보이자 레일리의 얼굴에 진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다행히 위험한 고비를 한 번 넘긴 거 같다.
‘진짜, 반년이나 지났는데도 왜 이렇게 바쁜 거야?’
엉망이 된 나라를 안정화한다는 게 재물만 푼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바로 정복 전쟁을 계획했던 날 비웃는 것처럼 산적한 문제가 너무 많았다.
왜 머리 좀 쓴다는 영웅들이 내 이야기에 질색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마냥 우습게 봤는데.’
위니스에게 받았던 보주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았다.
병력의 체질 개선 문제로 자금을 아낌없이 퍼부은 끝에 이미 말라버렸으니까.
덕분에 6티어 승급권은 다시 엄두도 내지 못할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런 와중에 마법 연구까지 하려니까 진짜 미치겠군.’
최근 플레턴으로부터 협박을 당하고 있었다.
갑자기 나에게 비전 마법의 개발을 서두르라는 독촉이었다.
나는 업무를 이유로 이를 미루려고 했으나,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빛에 차마 그러지 못했다.
플레턴이 그렇게까지 행동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건강에 문제가 생긴 건가.’
처음에만 해도 가볍게 운을 뗀 정도였던 플레턴의 태도가 달라질 원인으로는 건강 문제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마이어드 후작만 해도 세 달 전에 세상을 떠난 상황이고.
게다가 자크론도 최근 들어서 보면 이전과 태도가 많이 달라져서 염려되는 부분이 많았다.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륙은 넓었다.
아주 더럽게 넓어서 무수한 국가들이 난립해 있었다.
과거에는 마족의 영역이었던 땅마저 인류의 영토에 편입되어 예전보다도 넓어졌다.
그 모두를 점령하려면 앞으로 걸릴 시간은 절대 짧지 않을 것이다.
‘뭐, 한탄해 봐야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그저 노력과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 * *
업무를 보던 레일리는 문득 아인의 인기척이 들리지 않기 시작한 것을 알아차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아인은 의자에 앉은 그대로 잠에 빠진 상태였다.
레일리는 그런 아인의 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건강에 지장이 있지 않을까?’
아인은 지나칠 정도로 일에 몰두했다.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고 해도 보통은 전조에 있던 것들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대의 편제와 운용법.
나라의 기틀이 되는 법.
이런 것들을 바꾸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인은 싹 다 바꾸고 있었다.
보통이라면 반대에라도 부딪혀서 제동이 걸릴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지금 아인의 왕권은 그야말로 절정을 달리고 있었으니까.
내전을 종식한 영웅이자 젊고 강력한 마법사.
협회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받으며 귀족들 역시 대부분 아인의 편이었다.
시간이 지난다면 다른 생각을 품는 이들이 나올지 모르나, 지금 당장은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 절대권력을 지닌 상태였다.
‘이 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레일리는 아인의 야망을 아는 사람이었고, 곧 그가 정복 전쟁을 개시하리라 여겼다.
실제로도 준비는 차근차근 진행되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인은 서두르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정복 전쟁의 야망을 숨긴 채 왕국을 재건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반년 만에 꽤 괜찮은 성과를 냈으나 레일리는 그 점이 의아했다.
아인은 과할 정도로 이 왕국의 안정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전쟁으로 이득을 본다면 어지간한 반대를 누를 수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왕으로서의 책임감일까?’
레일리가 아는 한 아인은 책임에 민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도 조금 과한 느낌이었다.
레일리는 왜 아인이 침묵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 *
푸욱!
가슴을 파고든 칼날은 자비 없이 살갗을 갈라냈다.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는 온기가 남은 뜨끈한 핏물로 두 손을 흠뻑 적셨으나 이를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는 거침없이 칼날을 움직여 흉부에서 무언가를 적출했다.
“보아라.”
사내는 몸을 돌려 자신이 꺼낸 것을 사람들 앞에 드러냈다.
그건 방금 뽑아낸 심장이었다.
역겨운 광경 앞에서도 사람들은 시선을 피하거나 사내를 나무라지 않았다.
오히려 환호했다.
“심장은 우리 모두의 몸에 있다. 위대한 생명의 근원이며 우리의 목숨을 부지해 주는 것이지.”
사내는 광기 젖은 미소와 함께 심장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으적.
비릿하고 물컹한 느낌이 사내의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한입 크게 심장을 뜯은 먹은 사내는 대소하며 남은 것을 사람들의 무리를 향해 던졌다.
사람들은 자신의 앞으로 날아온 심장을 향해 달려들어 짐승처럼 이를 뜯어 먹었다.
“비록 하나의 생명이 사라졌으나 이로써 우리는 두 개의 생명을 얻게 되었다. 그러니 어찌 기쁘지 않은가? 하나의 생명이 희생하는 것으로 수십의 생명을 구하였으니.”
사내는 고개를 돌려 죽은 이의 시신을 보았다.
“그렇다면 희생된 이는 어찌 되는가?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못한 채 망자가 되는가? 아니다. 우리의 자비로운 신께서는 자신의 몸을 바쳐 희생한 자를 위하여 새로운 영광을 내려주신다!”
사내의 외침과 함께 그의 주변으로 핏방울이 모여들었다.
그 피는 곧 시신을 향해 흘러들어 갔고, 얼마 뒤 시신은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죽은 이의 몸이 움직이는 광경에 곳곳에서 탄성과 기도문이 흘러나왔다.
“오오! 위대하신 아스카시여! 거룩한 희생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증명한 우리의 형제에게 영광을 내려주소서!”
“신이시여! 영광을!”
“아스카시여!”
광기에 휩싸인 이들은 연신 자신들의 신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 사이 이리저리 움직이던 시신은 어느새 몸을 일으켜 뻥 뚫린 흉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형제의 생환을 축하한다!”
사내는 두 팔을 활짝 벌려 상대를 끌어안았다.
되살아난 시신 역시 사내를 마주 안아주었다.
기적과도 같은 광경 앞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때로는 실신해서 정신을 잃었다.
“사제장님.”
그때 소란스러운 군중을 헤치며 사내와 같은 검은 로브를 차려입은 자가 앞으로 나왔다.
사제장이라 불린 사내는 그의 등장에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일입니까?”
“군대가 성지를 포위하고 있습니다.”
보고를 받은 사제장은 잔혹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까? 그 영주도 참 멍청하군요. 얌전히 머리를 숙였다면 부사제장의 지위 정도는 줬을 텐데.”
사제장은 이 장소에 위치한 이들을 훑었다.
너무 많아서 다 헤아리는 것도 힘들 정도로 많은 이들.
주변의 마을에서 있는 대로 모은 신도들의 숫자는 1천을 상회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기사까지 동원했을 영주의 군대를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사제장은 자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숫자는 고작 1천에 불과할지 모르나 그들의 목숨은 1천을 훨씬 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죽음으로부터 돌아온 영광스러운 희생자에게는 특별한 힘이 존재했다.
“아스카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여! 지금 성지의 바깥에 거짓된 신을 섬기는 자들이 왔나이다.”
사제장의 외침에 사람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달라졌다.
환희와 쾌락에 절어 있던 이들은 하나같이 살벌하고 흉포한 얼굴로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껏 우리는 그들에 의해서 희생되었습니다. 귀족이니 뭐니 하며 그들은 우리를 짓밟고 유린해 왔습니다. 우리의 가족과 친구, 연인이 그들에게 죽었습니다.”
사제장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며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의 손짓과 발짓 하나하나에 사람들은 슬퍼하고 괴로워했으며 분노를 불태웠다.
“과거의 우리였다면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사제장은 두 팔을 활짝 펼치며 선언했다.
“우리는 강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스카의 축복이 함께합니다. 우리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오오! 위대한 아스카시여!”
“진정한 신이시여! 우리에게 구원을!”
“자아, 여러분! 거짓된 신을 섬기는 자들에게 아스카께 받은 영광을 보여주십시오! 신의 축복을 받은 여러분의 힘으로 저들을 심판하는 겁니다!”
사제장의 외침에 사람들은 투지를 한껏 불태웠다.
영주의 기사나 무장한 병사들은 일개 농민이 당해낼 수 없는 전력이었다.
멀리서 화살만 쏘아도 무력하게 쓰러져야 했고, 기사라도 달려드는 날에는 건장한 청년조차 맥없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이가 빠지고 머리가 쇠한 초로의 노인이라 할지라도 더는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자신들에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스카를 위하여!”
“신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광기에 찬 신도들의 행진이 시작되었다.
성지라 불린 영역의 바깥에는 수백의 병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달려 나오는 신도들을 보며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중이었다.
하지만 이내 광기에 차서 달려드는 신도들을 마주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이런 미친!”
병사 한 명이 자신에게 달려드는 농민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정확하게 심장을 꿰뚫었으나 농민은 멈추지 않았다.
콰작!
마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농민은 심장이 꿰뚫린 상태로 낫을 휘둘러 병사에게 상처를 입혔다.
“으아악!”
피를 본 병사는 당황하며 주춤거렸다.
창에 꽂힌 농민이 자신을 향해 괴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그러한 일은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고, 병사들은 달려드는 이들을 감당하지 못해 밀려나기 시작했다.
“이놈들이 미쳤나!”
머릿수가 많다고 한들 무장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대에게 병사들이 무너지자 지휘를 맡은 기사는 어이가 없었다.
고작 농민에게 당해서야 훈련을 맡았던 그의 체면이 바닥에 처박히기 때문이다.
이에 열받은 기사는 직접 검을 뽑아 앞으로 나섰다.
“이 멍청이들아! 반란을 저지른 놈들을 신속하게 진압해라! 이렇게 말이다!”
기사의 검이 번쩍이자, 그에게 달려들던 이들이 목이 베인 채 쓰러졌다.
하지만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목이 떨어져 나간 이들이 자신의 목을 주워 들고는 다시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 터무니없는 광경에 기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게 대체 무슨?”
기사는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찌 목을 베인 사람이 다시 움직일 수 있단 말인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도무지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기사는 지금 자신이 꿈을 꾸는 것이라 착각했다.
그렇게 무방비가 된 기사를 향해 광기에 찬 신도들이 달려들었다.
“끄아아악!”
자신을 물어뜯고 짓이기는 고통에 기사는 그제야 이것이 꿈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기사는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갔으니.
“크크크큭!”
여유로운 발걸음과 함께 나타난 사제장은 그 광경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제일 큰 위험 요소였던 영주의 군대조차 더는 자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의 야망을 이뤄줄 행보가 마침내 시작된 것이다.
“아스카시여! 그대의 광영을 이 세계에 드리우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