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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124화 (124/250)

VVIP 영주님의 품격 124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24화

124화

* * *

“남부 연합이 몰려옵니다!”

기사의 보고를 받은 로우번 백작의 눈이 서슬 퍼렇게 빛났다.

처음에만 해도 남부 연합이 바로 자신들을 칠 줄 알았다.

동맹의 배신으로 혼란에 빠져있는 만큼 노리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우번 백작가는 열심히 적들을 방비하랴, 그 와중에 몰래 계획을 꾸미느라 바쁘기 그지없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고도 과연 제때 준비를 마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남부 연합은 레이칸 왕국군을 먼저 추격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북부 연합은 한숨 돌릴 틈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로우번 백작도 준비를 모두 끝마칠 수 있었다.

“계획대로 움직인다.”

로우번 백작의 지시에 그의 가신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지막으로 로우번 백작은 항복의 뜻을 담은 편지를 믿을 수 있는 기사에게 맡겼다.

“이것을 반드시 네패스 대공에게 전해라.”

“제 목숨을 걸고 해내겠습니다.”

그날 밤이 찾아오자 임무를 맡은 기사는 은밀하게 아군의 진영을 벗어났다.

로우번 백작이 미리 준비한 비밀 통로를 이용했기에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홀로 중요한 임무를 맡은 것에 기사가 느낀 부담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들키지 않도록 신중하게 이동한 끝에 기사는 남부 연합의 진영에 도착했다.

“웬 놈이냐!”

남부 연합을 상대로는 모습을 드러내야 했기에 기사는 곧장 포박당했다.

그는 저항하지 않은 채 순순히 투항하고 자신을 붙잡은 이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네패스 대공 전하를 뵙게 해주시오. 그분께 전해야 할 서신이 있소.”

서신이 있단 말에 그를 포박한 이들이 품을 뒤져서 편지를 꺼냈다.

로우번 백작의 인장이 찍혀 있는 편지였다.

곧 보고를 받은 귀족이 뛰쳐나와 인장의 진위를 살피고 다시 기사의 신원을 확인했다.

북부에서 나름 명성을 가진 기사였던 덕분에 확인은 신속하게 이루어졌고, 귀족은 로우번 백작의 편지를 가지고 아인을 찾았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아인이 측근들을 이끌고 기사를 찾아왔다.

* * *

“위대한 영웅 네패스 대공 전하를 뵙습니다!”

내가 나타나자 로우번 백작가에서 왔다는 기사는 큰 소리로 나를 찬양하고는 바닥에 머리를 찧어댔다.

본래대로라면 제 주인에게도 하지 않을 정신 나간 행동.

하지만 로우번 백작가를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에게 자비를 얻어야 했다.

그렇기에 보는 사람이 처절하다고 느낄 정도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편지는 확인했다.”

로우번 백작이 보낸 편지는 나에게 맞선 것에 대한 사과와 자비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여기까지라면 솔직히 아무런 영양가가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뒤에 적힌 필스톤 백작가를 없앨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는 것은 꽤 솔깃한 제안이었다.

명색이 대영주 가문 중 두 곳이 함께하는 터라 공성전 준비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와 마법사 협회가 나서서 성을 부수는 건 쉽겠지만 적이 격렬하게 저항할 경우 분명 아군의 피해도 상당히 나올 테니까.

“그런데 대체 왜 로우번 백작이 필스톤 백작을 배신하려는 거지?”

“그 이유는…….”

기사는 차근차근 로우번 백작의 생각을 전달해 주었다.

그 와중에 필스톤 백작을 아주 간악하고 무도한 작자로 만들고 로우번 백작은 잘 포장하는 게 말솜씨가 아주 좋은 기사였다.

특히 무력보다 언변이 좋은 게 더 관심이 갔다.

로우번 백작이 편지를 보낼 때 이런 부분도 고려했을 테지만, 그래도 꽤 인상 깊었다.

실력도 북부에서의 명성을 생각하면 괜찮은 거 같았고.

‘꽤 괜찮은 영웅이군.’

가문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는 영웅이다.

로우번 백작가를 필스톤 백작가와 같이 없애려고 한다면 절대 거둘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하나로 로우번 백작가를 살려줄 수는 없지.’

얌전히 항복한 세력이라면 모를까, 우리와 검을 맞댄 상대까지 살려주는 건 말이 안 됐다.

로우번 백작가에 눈에 띄는 인재가 더 있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보류였다.

‘문제는 대영주가 필요하다는 건데.’

현재 이 왕국에 남아있는 대영주는 고작 넷.

나와 레일리 그리고 북부 연합의 필스톤 백작과 로우번 백작뿐이었다.

그마저 둘은 적으로서 죽여야 할 처지다.

내가 왕으로 즉위하여 각 지역을 다스릴 대영주를 뽑으면 되겠지만 거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한둘도 아니고 모든 가신들이 대리인을 내세울 수는 없다는 것.

영지를 제대로 다룰 줄 아는 이가 반드시 필요했다.

“네패스 대공 전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제 주인이신 로우번 백작은 대공 전하를 위하여…….”

내가 잠시 말없이 고민하고 있자 기사가 냉큼 입을 열었다.

혹시라도 내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나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닌 듯하군.”

난 좀 더 기사를 애태우기로 했다.

실제로 대영주씩이나 되는 이의 처우를 멋대로 결정하기에는 곤란하기도 했고.

한밤중임에도 내 명령에 따라서 금세 회의가 열렸다.

곤히 자고 있던 귀족들은 그 모습 그대로 회의에 나온 것에 당혹스러워했지만 소식을 전달받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이 모든 게 대공 전하의 위광이 아니겠습니까?”

“아부는 됐고. 로우번 백작의 처우를 어떻게 하는 게 좋겠나?”

내 물음에 귀족들도 고민에 빠졌다.

본래대로라면 그대로 죽여야 했으나 대영주의 공백이란 게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은 내심 그 대영주 자리에 자신을 꽂아주기를 원하겠지만 난 원칙을 스스로 어길 생각이 없었다.

군주로서 자신의 왕도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면 신뢰에 금이 가기 때문이다.

“항복을 받아준다고 해도 다른 귀족처럼 작위를 몰수하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목숨을 살려주는 것만으로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대부분은 살려는 주되 그 이상을 들어줘선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나마 온건한 이가 어느 정도 재산을 줘서 내쫓자는 정도였고.

하지만 머리가 돌아가는 이들은 다른 의견을 꺼냈다.

“네패스 대공 전하께서는 내심 생각해 둔 바가 있으십니까?”

게일 남작은 바로 내 의견부터 확인했다.

그제야 신나서 입을 열던 귀족들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지금 이 나라에 대영주가 몇 명 없지. 그런데 북부마저 다 죽으면 누가 남을까?”

“확실히 그렇습니다.”

게일 남작은 잠시 고민하더니 다시 의견을 꺼냈다.

“로우번 백작은 북부에 오랜 세월 있던 이입니다. 분명 대영주로서 능력은 있겠지만, 반란의 위험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이미 북부의 대영주로 오랜 세월 이 땅을 다스려온 인물이 로우번 백작이었다.

그의 영향력은 북부 곳곳에 미칠 테니 그대로 북부에 남겨두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자칫 반란의 불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작으로 강등시킨 다음에 다른 지역에서 대영주 대리를 맡기는 게 합당해 보입니다.”

“다른 지역에 적응해서 일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유능한 귀족이라도 다른 지역으로 가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귀족들이 가진 강한 힘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이었으니까.

“북부에 남기기에는 위험성이 크니까요.”

하지만 게일 남작은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북부에 남겨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에 다른 귀족들에게 찬성하는지를 물었고, 그들은 숙고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게일 남작의 의견이 좋은 거 같습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게일 남작의 말대로 하시지요.”

의견은 빠르게 모였다.

나는 편지를 전한 기사를 다시 만나서 내 뜻을 전달했다.

기사는 실망스러운 기색이 없진 않았으나 그래도 완전히 나쁘지는 않다고 여겼는지 이를 수긍했다.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돌아가서 내 뜻을 전하도록.”

곧 기사는 내 답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리고 다음 날까지 우리는 휴식을 취하다가 이튿날 새벽 기습을 감행했다.

로우번 백작과 약속한 때, 약속한 장소였다.

로우번 백작은 일부러 경계를 허술히 해두었고, 우리는 손쉽게 성벽을 뚫고 침입할 수 있었다.

필스톤 백작가가 대응에 나서려고 했지만 로우번 백작의 군대가 그들을 공격하며 이를 막았다.

“필스톤 백작가를 해치워라!”

“로, 로우번 백작가가 배신했다!”

로우번 백작가의 배신에 필스톤 백작가는 빠르게 무너졌다.

포로로 잡힌 로우번 백작가의 장남 로텐 필스톤이 이 광경을 봤다면 피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뭐, 이제는 인질로서의 가치마저 사라진 자신의 목숨을 걱정하는 게 더 중요하겠지만.

‘원한을 산 상대를 살려둬야 할 이유는 없지.’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지금처럼 내가 크게 아쉬울 게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

전투가 얼마나 진행되었을까?

내성을 돌파하다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이동하는 귀족을 한 명 발견할 수 있었다.

필스톤 백작이었다.

“로우번 백작가가 배신했다니, 다 같이 죽기라도 하자는 건가?”

“그대만 죽지 않겠나?”

기사들을 거느리고 다가가자 필스톤 백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대가 네패스 대공인가?”

“아니.”

난 필스톤 백작의 물음을 부정했다.

모든 게 명확해진 지금은 겸손도, 겸양도 필요 없었다.

“이제는 대공이 아니지.”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한 필스톤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이를 부정하지는 못했다.

이 크레시안 왕국에서 더는 나에게 맞서는 자가 없었으니까.

심지어 오랜 골칫거리였던 레이칸 왕국마저 큰 피해를 주었으니 민심도 얻은 셈이다.

레일리의 존재에 비하자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바보 같은 짓을 했더군. 필스톤 백작.”

“무슨 말이냐?”

“레이칸 왕국을 끌어들이고 민심이 어찌 돌아갈지 모르지는 않았겠지?”

북부는 다른 지역에 이용당해 방파제로 내몰렸지만 결국 그들에게 창칼을 겨눈 건 레이칸 왕국이었다.

당연히 레이칸 왕국에 대한 적대감이 높은데 북부 연합의 대영주들은 그 레이칸 왕국군을 불러들였다.

실제로 배신을 선택한 로우번 백작이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내건 명분도 그것이었다.

필스톤 백작가가 레이칸 왕국을 불러들이며 크레시안 왕국 귀족으로서의 긍지를 더럽혔다는 것.

실제로는 승산이 없으니 배신한 것이지만, 남들에게 로우번 백작의 배신은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그런 것이니까.

“애송이가 왕위를 앞두고 눈에 보이는 게 없군! 이 방자한 놈아, 한낱 남작에 후계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았던 놈이 왕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필스톤 백작은 아인 네패스가 가진 몇 없는 약점을 찔러댔다.

남작 역시 영주로서 매우 높은 귀족이지만 오등작 중에서는 최하위.

더구나 아인은 나이만 젊은 게 아니라 레일리나 게일 남작, 네일과 같은 철저한 교육이 되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필스톤 백작의 말은 힘이 없었다.

“그 자격 없는 놈에게 모두 당했으면서.”

남부, 동부, 중부, 서부, 북부까지.

다섯 개 지역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지금 자격을 지적하는 건 생떼를 쓰는 것일 뿐이다.

“애초에 자격은 증명하는 것이지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다. 난 증명했고 그대는 증명하지 못했지. 그뿐이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던 필스톤 백작의 미간을 꿈틀거렸다.

“그렇다면 증명해 주마!”

필스톤 백작이 칼을 들고 나에게 달려들었다.

대영주라고 하지만 북부는 척박한 땅.

귀족이라고 해도 자신을 단련하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필스톤 백작의 장남인 로텐 필스톤도 뛰어난 전사였다.

필스톤 백작은 이미 전성기를 지난 나이지만 그 역시 젊었을 때는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라이트닝 플레어.”

그러나 필스톤 백작의 칼날은 나에게 닿지 못했다.

근처에 있던 기사들이 나설 것도 없이 내가 날린 마법이 필스톤 백작에게 적중하며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커헉!”

필스톤 백작은 피를 쏟아내며 나가떨어졌다.

“배, 백작 각하!”

“백작 각하를 지켜야 한다! 어서 길을 뚫어라!”

남은 이들이 어떻게든 필스톤 백작을 데리고 달아나려고 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그의 기사들은 사력을 다해 덤볐지만 압도적인 전력 차이는 뒤집을 수 없었다.

새벽이 지나 해가 다시 떠올라 북부를 밝혀주었을 때 이미 필스톤 백작가의 이름은 지워진 뒤였다.

“보아라!”

난 새벽 내 치열한 싸움을 벌인 병력을 한데 모아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직접 필스톤 백작가의 깃발을 끌어 내린 뒤 네패스 가문의 깃발을 걸어서 높이 올렸다.

마침 불어온 바람 덕에 깃발은 보기 좋게 펄럭였다.

“필스톤 백작가는 사라졌다! 이제 이 북부 역시 우리의 땅이 되었다!”

지금까지 언제나 있던 승리 선언.

그러나 이번에는 그 무게가 남달랐다.

“드디어…….”

누군가는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쳤고.

“끝났어. 이제야…….”

누군가는 지난 내전의 아픔을 비로소 떨쳐낼 수 있었다.

“이에 지금 이 자리에서 나, 아인 네패스의 이름으로 선언하겠다!”

쿵!

기사들이 발을 들었다가 힘껏 내리찍었다.

쿵!

하지만 시작은 기사였으나 이를 이어받는 건 모두였다.

귀족들은 체통을 생각해 행동하지 않았으나 그들도 벅찬 얼굴은 같았다.

쿵!

협회의 마법사들도 분위기를 따라주었다.

쿵!

“크레시안 왕국의 내전은 모두 끝났다!”

승리 선언에 이은 종식 선언.

병사들은 아주 잠깐 환호를 억눌렸다.

벅차오르는 감정에 목이 메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내 어느 때보다 거대한 함성이 북부 전체를 뒤흔들었다.

“우와아아아!”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고!”

“네패스 대공 전하 만세!”

“만세!”

환호인지 괴성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흥분한 외침이 한참을 이어졌다.

지시에 따라 형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함성이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우리를 찾아올 것이다.”

나는 약속했다.

새로운 시대가 올 거라고.

그러나 거기에는 어떠한 시대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있었다.

왜냐하면, 그 시대가 이들을 위한 시대라고는 약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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