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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VIP 영주님의 품격-121화 (121/250)

VVIP 영주님의 품격 121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21화

121화

* * *

“이런 제기랄!”

간신히 포위망을 빠져나온 마팔은 아군의 피해를 확인하고는 이를 갈았다.

절반이 넘는 전사들이 함정에서 나오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상태였다.

그나마 빠져나온 전사들도 자잘한 부상이나 체력 저하 등 많은 문제를 갖고 있었다.

“레이칸 왕국의 대전사로서 씻을 수 없는 치욕이군!”

전 대륙을 뒤흔든 내전은 레이칸 왕국에도 어느 정도 피해를 주었다.

그러나 레이칸 왕국은 그를 쉽게 극복해 냈다.

약육강식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레이칸 왕국에서 왕이 죽으면 다음으로 강한 자가 왕이 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물론 누가 가장 강한지를 두고 다툼이 좀 있기는 했다.

비겁한 암수가 동원되기도 하면서 잠깐의 혼란기를 거쳤다.

그러나 곧 승자가 정해지고 레이칸 왕국은 평화를 되찾았다.

그 평화라는 게 남들이 보기에는 열악하기만 할 뿐이었지만.

‘북부를 가질 좋은 기회였는데.’

레이칸 왕국은 오래전부터 크레시안 왕국의 북부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북부인들은 제 딴에는 척박하고 험한 땅이라며 이야기하지만 레이칸 왕국에서 보기에는 그만하면 충분히 풍족했다.

그래서 북부 연합이 접촉해 왔을 때 레이칸 왕국은 아주 좋아했다.

남부 연합을 꺾고 그 과정에 북부의 전력도 줄어들면 자신들이 북부를 침공해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실제로 마팔에게 중요한 임무는 남부 연합을 상대하는 것보다 북부를 빼앗는 것이었다.

마팔이 제 역할을 해낸다면 레이칸 왕국의 국왕이 직접 친위대를 이끌고 북부를 점령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는 그 계획을 전혀 실행할 수 없었다.

‘대전사로서 임무에 실패하다니.’

마팔은 지금껏 실패를 몇 번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더욱 절망스러웠다.

타고나기를 매우 강건하였으며 지금의 국왕에 가장 가까운 전력을 지녔다고 평가되어 왔으니까.

실제로 지금의 국왕 또한 마팔에게 훗날을 약속해 줄 정도로 그의 입지는 매우 탄탄했다.

그런데 그게 무너지게 생겼다.

“모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면 좋을지 말해 봐라.”

그래도 마팔은 이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저, 대전사님. 그전에 한 가지 알아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한 전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에 마팔은 호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대부분의 전사들은 강인했지만 똑똑하지는 못했다.

레이칸 왕국은 특히 이 부분이 두드러져서 머리가 명석한 사람이 몇 안 되었다.

그러나 눈앞의 전사는 그 명석한 인물 중 하나였다.

지금껏 많은 조언을 받았고 그 조언들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기에 마팔은 그를 신뢰했다.

“그게 뭐지?”

“어떻게 저희의 위치가 발각된 겁니까?”

그의 이야기에 마팔이 눈을 부릅떴다.

생각해 보니 자신들은 아주 철저하게 위치를 숨긴 채 이동하고 있었다.

정면에서 북부 연합과 남부 연합이 붙을 때 후방으로 이동하기로 했으니 은밀하게 이동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상대는 그들의 이동을 알아차리고 매복하고 있었다.

알아차린 건 그럴 수 있다.

어딘가에 정찰병들을 보내놔서 머릿수로 어떻게 감당하면 불가능한 건 아니니.

그러나 그들을 포위했던 병력의 숫자는 아무리 봐도 본대였다.

남부 연합의 본대가 여기에 있다면 지금 북부 연합의 군대는 뭘 하고 있다는 말인가?

“가능성은 둘 중 하나입니다. 북부 연합이 이미 패배하고 정보를 실토했거나…….”

“처음부터 북부 연합은 남부 연합과 한통속이었고, 우리를 끌어들였다고?”

“그렇습니다.”

마팔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무리 그래도 먼저 도움을 청하러 온 입장에서 그러겠냐마는 근거 없는 소리도 아니었다.

레이칸 왕국에 제일 이를 가는 상대는 북부 연합이었을 테니까.

그들이 어쩌면 처음부터 남부 연합과 짜고 자신들을 함정에 빠트렸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남부 연합과 싸우기 전에 자신들의 정보를 먼저 노출해 둘의 싸움을 유도하고 어부지리를 취하려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면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적어도 남부 연합이라는 공통의 적 앞에서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했다.

경계는 하되 하나의 편이 되어 싸워야 압도적인 규모를 가진 남부 연합과 대항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상대를 의심해야 할 상황에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진실을 확인하려면 북부 연합의 상태를 살펴야 합니다.”

“만약 놈들이 배신한 게 맞고, 함정을 판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면?”

부하 전사는 이번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사방에 적을 두게 되면 지금으로선 대항하는 게 불가능했다.

“안전을 생각하면 이대로 퇴각해서 레이칸 왕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전사들을 반이나 잃고 그냥 돌아가자?”

“북부 연합의 배신이 있었다고 하면 모두 납득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럼 배신의 증거라도 가져가야 하지 않나?”

책임을 피하려면 북부 연합의 배신에 대한 확실한 물증이 필요했다.

하지만 부하 전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왜지?”

“저희의 정보가 노출된 것 자체가 북부 연합이 실수를 했든 배신을 했든 둘 중 하나를 저질렀다는 의미가 되니까요.”

“그렇군.”

마팔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이 당한 것의 책임을 북부 연합에 뒤집어씌운다면 자신의 잘못은 없게 된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추궁 정도는 받게 되겠지만 아군에게 배신당한 걸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북부 연합과 함께 행동했던 것도 아니고 정보만 노출되었다면 자신으로서는 어쩌지 못할 문제니까.

“역시 자네는 똑똑해.”

패전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마팔은 마음의 부담을 덜고 안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처받은 자존심이 회복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

남부 연합에게 한 방 먹이거나 적어도 북부 연합에게만이라도 한 방 먹여주어야 했다.

“북부 연합을 찾아라.”

* * *

“몸 상태는 어떻지?”

“아무래도 근육이 상한 모양입니다.”

전투가 끝나고 뒷정리가 진행되는 동안 루시우스의 상태를 살폈다.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으나 팔을 잡으며 통증을 호소하는 모습을 봐서 치료가 필요할 거 같았다.

“바로 치료하지.”

플레턴에게서 배운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

루시우스를 제외하고도 부상자가 많았지만 마나를 다 써서라도 반드시 치료를 해야 했다.

이 험한 환경에서는 부상자를 달고 다니는 것 자체가 고단한 일이니까.

참전하지는 못해도 제 발로 걸어 다닐 수는 있어야 했다.

“꽤 능숙해졌구나.”

플레턴이 내 마법을 높이 평가했다.

실제로 원래는 잘 쓰지 않던 마법이었지만 기사들의 훈련 방식을 바꾸고 시합을 하면서 부상자가 속출한 터라 지금은 치유 마법에도 익숙해졌다.

플레턴에게서 가장 먼저 배운 마법치고 숙련도는 제일 낮기는 했지만.

‘부상자가 있어야만 쓸 수 있으니까.’

치유와 마나 쇼크는 둘 다 대상이 있어야만 제대로 쓸 수 있는 마법이었다.

그런데 거듭된 전투에서 부상자는 많이 나와도 나에게 치료를 받으려는 이들은 극히 적었다.

중상이라면 모를까 가벼운 상처를 영주인 나에게 보이는 건 부담스럽게 느끼고 피하는 것이다.

꼭 상처를 보이라고 신신당부를 해도 어지간하면 그냥 넘기는 경우가 비일비재해서 숙련도를 높이기 매우 어려웠다.

그나마 시합 때는 상처를 입는 게 바로바로 보이니까 억지로 치료할 수 있었지만.

“이 마법을 다른 마법사에게 가르치는 건 안 되겠죠?”

나 말고 다른 마법사들에게 가르치면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할 거 같아서 제안해 봤지만 플레턴의 표정이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비전 마법이 왜 비전 마법인가?

제자, 그중에서도 후계자가 아니라면 전수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리 나라도 마법사 협회의 비전 마법을 멋대로 푸는 건 부담스러웠다.

기껏 끌어들인 협회에서 반발할 가능성이 크니까.

“글쎄다. 하나 정도라면 못 할 것도 없는 건 아닌데…….”

그런데 표정과 달리 플레턴의 입에서는 긍정적인 이야기가 나왔다.

그 모순된 행동에 의아함이 들었다.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결국 마법사에게 가르치려는 건 군대를 강화하기 위함이 아니더냐?”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치유 마법을 모든 마법사에게 전달하면 대규모로 힐러를 양성하게 되는 거니까.

“효과적인 수단을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그러한 용도로 쓰이지는 않았으면 한다.”

“결국 제 군대가 강해져야 마족도 토벌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플레턴은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리 나에게 마족의 토벌을 맡겼다고 해도 그 역시 협회의 원로로서 나름의 선은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계속 반대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끝까지 설득해야지요.”

쓰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이 마법을 배운 마법사들을 운용한다면 전력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었으니까.

휘하 병력의 사망률도 크게 줄어들 것이다.

“설득이라.”

“스승님께서 동의해 주시지 않으면 원로 회의를 설득해 봐야 할 테고요.”

나에게는 이제 플레턴에게만 매달릴 이유가 없었다.

협회의 다른 원로들에게도 압박을 넣을 수 있었으니까.

“그래. 너라면 그렇겠지.”

“비전 마법을 공개하는 대가로 협회에 큰 보상을 약속드릴 수는 있습니다.”

마법사 협회에 막대한 지원금을 줄 수 있었고, 보주를 구해 주거나 누군가에게 작위를 내리는 것도 가능했다.

이 마법에는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했으니까.

“됐다. 비전 마법에서 일반 마법으로 풀어줄 테니까.”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플레턴이 아무런 대가도 받지 않고 일반 마법으로 공개하겠다는 말에 당황했다.

나와 협회는 결국 서로가 이득을 보는 윈윈 관계에 가까웠다.

굳이 일방적으로 뭔가를 내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싸우는 데 쓰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이 마법은 사람을 살리는 힘이다. 애초에 독점하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였어.”

플레턴도 내심 이 마법을 비전 마법으로 등록한 것에 불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에 난 눈을 반짝였다.

“혹시 더 공개하고 싶은 마법이 있으십니까?”

“쓰읍.”

다른 마법도 얻어갈까 싶어 관심을 보였다가 플레턴의 눈총만 받게 되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실제로 이 마법은 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요긴하게 쓰이게 될 테니까.

플레턴이 허락해 준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마법을 협회가 독점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넌 비전 마법을 안 만드느냐?”

“아직 전 젊지 않습니까?”

“마법사로서는 이미 충분하다. 네가 협회를 생각한다면 협회에 너만의 마법 하나 정도는 내놓아야지.”

“네패스 마법 이론은 풀어서 보내드리지 않았습니까?”

“네가 만든 마법은 아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비전 마법이라고 하면 비전인데 플레턴이 딱히 반기지도 않았고.

“한 번 너만의 마법을 만들어보거라. 그것도 꽤 좋은 경험이 될 테니까.”

“시간이 나면 해보겠습니다.”

플레턴은 내가 마법사로서도 역사에 족적을 남기기를 기대하는 듯했다.

재능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한두 개가 아니라 아예 여러 비전 마법을 만들어서 마법사 협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게 실제로 가능했으니까.

단지 내가 거기에 흥미가 없었을 뿐.

“그럼 난 이만 가서 쉬마.”

“편히 쉬십시오.”

부상자의 치료가 모두 끝나고 잠깐 휴식에 들어갔다.

두 차례의 전투를 마친 이들은 일단 하루를 푹 쉬기로 하고 야영을 준비했다.

“레이칸 왕국의 군대는 어디로 움직이고 있지?”

야영지 설치가 완료되는 동안 레이칸 왕국 군대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포위망을 빠져나간 그들은 뒤에 꼬리를 달고 있었다.

탈론을 비롯해 추격에 자신 있는 기사들과 정보를 전달해 줄 마법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경로를 봤을 때 북부 연합 쪽으로 향하는 거 같습니다.”

“북부 연합과 합류할 생각인가?”

보고에 의하면 레이칸 왕국의 군대는 퇴각했던 북부 연합과 합류하려는 것으로 보였다.

가능하면 병력의 우위를 살려서 각개격파하는 쪽이 좋겠지만 오늘은 더 이상 전투를 진행하는 게 불가능했다.

아무리 정예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체력에는 한계가 있었으니까.

괜히 무리해서 추적했다가는 오히려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일단 추적만 계속하고 있게.”

* * *

그러나 레이칸 왕국 군대의 움직임은 곧 예상하지 못한 사태를 불러왔다.

그로부터 약 사흘이 지났을 무렵, 적들을 추격하고 있던 도중에 생각지도 못한 보고가 들려왔다.

“레이칸 왕국의 군대가 북부 연합을 공격했다는 소식입니다.”

“뭐라고?”

레이칸 왕국의 군대가 동맹군을 공격했다는 소식에 막 마시고 있던 차를 흘리고 말았다.

그 정도로 어이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둘이 정말 진심으로 힘을 합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계산에 의해 동맹을 맺은 것이겠지만 동맹은 동맹.

그들이 동맹을 맺은 원인이었던 우리가 멀쩡히 남아있고 서로의 전력이 깎인 상태에서 배신이 나오리라고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아니, 대체 왜?”

아무리 모든 전장의 변수를 계산할 수 없다고 해도 이건 너무 당혹스러웠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레이칸 왕국의 군대가 북부 연합을 공격한단 말인가?

“북부 연합에서는 어떻게 대응했지?”

“생각지 못한 기습이었기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습니다. 꽤 큰 피해를 본 모양입니다.”

북부 연합은 전혀 생각지 못한 배신에 그대로 당하고 말았다.

당했다고 해서 완전히 세력이 꺾인 건 아니지만 동맹의 배신은 그만큼 충격적일 것이다.

“그럼 레이칸 왕국의 군대는?”

“아무래도 이대로 왕국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건 안 되지.”

이유야 어쨌든 레이칸 왕국의 군대는 절대로 그대로 돌려보내선 안 되었다.

반드시 이 북부에서 전멸시켜야 했다.

동맹까지 뒤통수쳤다고 하니까 오히려 좋았다.

“혹시 함정일 가능성은 없는지 확인해 보라고 전하고 추격대를 편성한다.”

둘 다 해치우고 북부를 손에 거머쥘 절호의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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