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영주님의 품격 120화
VVIP 영주님의 품격 120화
120화
“가, 감히 북부를 배신한 변절자 놈이!”
피를 한 움큼 토해 내던 로텐이 모르타르가 한눈을 판 틈을 노려 달려들었다.
그러나 모르타르는 아주 가볍게 로텐의 공격을 피해 내고는 다시 그의 안면을 후려쳤다.
콰앙!
두 번째 타격에 로텐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지휘관의 상태가 그러니 휘하 병력의 사기가 좋을 리 없었다.
“이럴 수가…….”
“말도 안 되게 강하잖아!”
기세가 넘어오자 기사들의 공격도 한층 더 매서워졌다.
북부 전사들이 하나둘씩 피를 흘리며 나자빠지고 아군이 용맹하게 상대를 몰아쳤다.
“퇴, 퇴각하라!”
그때 적측 누군가가 퇴각 명령을 내렸다.
지휘관이 아니었으나 나름 신분이 높아 보였는데 아마 로텐을 제외하면 제일 지위가 높은 인물 같았다.
그의 명령에 북부 전사들은 허둥지둥 달아나기 시작했다.
“커흑! 컥!”
이를 수습해야 할 로텐은 모르타르에게 두들겨 맞느라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모르타르는 로텐을 눈밭에 뒹굴게 만들며 주먹질과 발길질을 이어갔다.
“하, 항복이다!”
무자비한 폭력이 멈춘 건 상대의 입에서 항복이란 말이 나온 이후였다.
적들은 달아나고, 남아서 저항하던 지휘관은 항복하고.
용맹함으로 유명하다는 북부의 체면이 말이 아닌 광경이었다.
“끌고 와라!”
로텐은 곧 피투성이가 된 채 나와 귀족들 앞으로 끌려 나왔다.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질질 끌려오는 모습은 썩 보기에 좋은 광경은 아니었으나 이를 신경 쓰는 인물은 없었다.
이곳은 전장이었으니까.
상대에게 베풀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는 고통 없는 죽음이었다.
“레이칸 왕국을 끌어들인 걸 알고 있다.”
게일 남작이 앞으로 나가 로텐에게 말했다.
“놈들의 병력은 어디 있지?”
“죽여라.”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다.
로텐은 살기가 번들거리는 눈동자로 우리를 훑었다.
“하지만 너희도 이곳에서 살아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이걸 가만히 듣고만 있을 리 없었다.
기사들이 앞으로 나서 로텐을 향해 매질을 쏟아냈다.
거의 실신할 때까지 때린 뒤 게일 남작이 다시 물었다.
“레이칸 왕국의 병력은 어디 있나?”
“너희도 다 눈밭에 파묻힐 것이다.”
로텐의 눈동자는 여전히 표독스러웠다.
다시 한번 폭력이 가해지는 동안 나와 수뇌부는 고민에 빠졌다.
레이칸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는 건 알지만 그들의 움직임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북부에 있는 마법사 협회의 협력을 얻고는 있으나 레이칸 왕국은 마법사 협회의 눈과 귀가 닿지 않는 곳이었다.
애초에 말이 왕국이지 타국에서 외면하고 방치하는 오지였으니까.
“고작 4천 정도라면 신경 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녀석들이 기습이라도 해온다면 낭패를 보게 될지도 모르네.”
“설마 북부 연합까지 깨졌는데 무리해서 공격을 해오겠습니까?”
귀족들은 과연 레이칸 왕국의 군대가 우리를 공격해 올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일단 머릿수부터 압도적으로 차이가 났다.
북부 연합이 형편없이 깨져버리면서 동맹의 전력조차 크게 약화했으니 잘하면 그냥 후퇴할 가능성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만 믿고 마음을 놓을 수는 없고 어디에 있는지 모를 적을 계속 경계하는 건 매우 피곤한 일이다.
가능하면 최대한 빠르게 적을 찾아내 무찌르는 쪽이 최선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기도 하고.’
북부를 얻어도 북부의 전력을 제대로 쓰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위에 붙어있는 레이칸 왕국을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쪽에서 레이칸 왕국을 직접 공격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상대가 국경을 내려온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이번에 레이칸 왕국의 군대를 해치우면 북부도 안전해지겠지.’
그러면 북부의 군대를 자유롭게 끌어다 쓸 수 있다.
그래서 상대가 달아날 때도 애써 추격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실질적으로 추격할 능력이 없던 것도 있지만 그들을 애써 잡아서 죽여봐야 왕국의 전력이 감소할 뿐이었다.
우웅!
그때 마나 파장이 일어났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보고에 나를 비롯한 마법사들의 얼굴에 미소가 서렸다.
* * *
레이칸 왕국의 군대를 찾기 위해 남부 연합은 주변에 수색대를 파견했다.
그리고 그중에 탈론이 있었다.
- 제 동족은 마을에서 잘 안 나오려고 하지만 북부는 자급자족할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탈론은 아인을 설득해서 직접 병력을 지원받아 수색대를 이끌기로 했다.
아인을 설득한 방법은 자신이 북부 출신이라는 것과 북부에 드래고니안들만 아는 길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북부에 사는 사람들조차 존재를 잘 모르는 이 길은 드래고니안과 그들이 믿는 소수의 협력자만 이용할 수 있었다.
“이런 장소가 있다면 진작 알려주지 그랬나?”
수색대에 포함된 다니엘은 길의 정체를 목격하고는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전쟁에 앞서서 정보를 얻기 위해 북부를 뒤졌지만 다니엘과 암살자 출신 기사들은 이 길을 찾아내지 못했다.
실제로 그럴 만도 했다.
보통이라면 찾아올 일이 없는 험한 협곡 아래에 눈으로 파묻혀서 숨겨져 있는 얼음 동굴이라니.
설령 이곳의 존재를 알더라도 목숨을 걸고 내려와야 하는 위험천만한 길이었다.
그나마 탈론은 쉽게 들어올 수 있는 방향을 알았으나 어려운 건 매한가지였다.
덕분에 따라온 마법사들은 이미 기진맥진이었다.
“말로 알려준다고 찾을 수 있는 길이 아니지.”
다니엘은 반박할 수 없었다.
선두에서 길잡이를 자처한 탈론이 아니었다면 아무리 설명을 들었어도 제대로 찾아낼 수 있었을지 의문이었다.
만일 그렇다고 해도 상당한 시간이 낭비되고 어느 정도 피해도 있었을 것이다.
“내 동족 중에서도 이름난 전사들만 이용하는 통로다. 게다가 내부는 미로처럼 되어 있어서 초행이면 길을 잃기 딱 좋지.”
“그런데 이 통로로 어떻게 레이칸 왕국의 군대를 찾아낼 거지?”
“군대가 이동할 수 있는 길은 결국 정해져 있다. 가까운 출구를 알려줄 테니 그곳에서 주변을 살피면 한 곳은 나오겠지.”
탈론은 곧 출구마다 수색대를 나눠서 내보냈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 탈론이 직접 맡고 있던 곳에서 레이칸 왕국의 군대를 찾아낼 수 있었다.
“마법사.”
“바로 보내겠습니다.”
마법사는 곧장 예정된 좌표로 마나 파장을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본대로부터 이동을 시작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탈론은 그동안 흩어졌던 수색대를 모두 불러들이고 상대를 살폈다.
‘좀 강해 보이는 녀석이 있는데?’
선두에서 레이칸 왕국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상대.
상당히 거리가 있고 직접 싸워보지 않고서야 정확한 실력을 확인하는 건 어려웠다.
하지만 그러한 것을 감안해도 만만치 않게 여겨지는 상대가 있었다.
‘저 녀석이 예전에 봤던 마팔이라는 놈인가?’
탈론은 오래전 겪었던 일을 떠올렸다.
레이칸 왕국은 보통 찾아가는 사람이 없기에 소문이 들려올 일도 드물었다.
그러나 드래고니안들은 과거 레이칸 왕국과도 접촉해 보려 한 적이 있다.
종족 모두가 희귀하고 이로 인해서 배척이나 노림을 받을 수 있기에 안전한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레이칸 왕국에 접촉했던 노력은 전부 허사였다.
어렵게 살아가는 그들은 자신들의 것을 나누는 데 인색하였고, 도리어 드래고니안들을 노리고 함정을 팠다.
눈치 빨리 이를 파악했던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으나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당시의 사건으로 드래고니안들은 레이칸 왕국이라고 하면 지금도 이를 갈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레이칸 왕국에서 만난 상대의 이름을 기억해 두었고, 그중에 마팔이 있었다.
‘레이칸 왕국의 대전사.’
탈론은 마팔과 대면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상대는 강했다.
명백하게 자신보다 더한 강자였다.
물론 활을 쓰는 만큼 상대의 강함이 어떻든 기습과 저격으로 승리를 쟁취해 낼 수 있으나 정면으로는 일말의 승산조차 없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수준의 강자가 남부의 카이로스 백작이었다.
둘의 전력은 엇비슷했다.
그러나 마팔은 보다 과거에 만났고 당시에 매우 젊었다.
지난 세월 당연히 좀 더 힘을 키웠을 테니 어쩌면 카이로스 백작 이상의 수준에 올랐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나 또한 그때보다 강해졌다.’
아인에게 정체 모를 약을 받은 이후로 탈론은 자신의 수준이 크게 올라왔다는 걸 알았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그때의 복수를 꿈꿔 볼 만했다.
“본대는 어디에 있지?”
“거의 다 왔다고 합니다.”
마법사는 본대로부터 온 연락을 정리했다.
탈론은 지도를 펼쳐 주변의 지형을 살폈다.
마침 적을 정면에 두고 매복하기 좋은 장소가 하나 있었다.
적을 포위하기에도 괜찮은 지형이었다.
“근처에 매복하기 좋은 장소가 있다. 이 자리에서 매복하고 놈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포위하면 반드시 이길 거야. 본대에 전달하도록.”
탈론의 뜻에 따라서 매복이 진행되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동하던 레이칸 왕국의 군대는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게 되었다.
“쏴라!”
위에서 떨어지는 화살과 마법에 레이칸 왕국의 군대는 화들짝 놀랐다.
“매복이다! 서둘러 빠져나가라!”
군대를 이끌고 있던 마팔은 신속하게 매복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포위망이 완성된 상태였다.
마팔은 그 순간 아군의 패배를 확신할 수 있었다.
쐐액!
하지만 그것이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마팔은 양손에 대검을 하나씩 들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상대를 베어나갔다.
푸확!
“컥!”
자신 있게 앞을 막았던 기사는 몇 번 검을 맞대 보지도 못하고 몸이 둘로 나뉘며 목숨을 잃었다.
아인에게서 받았던 좋은 갑옷이나 방패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타악!
그 순간 루시우스가 마팔을 향해 쇄도했다.
카앙!
‘큭!’
마팔과 일검을 주고받은 루시우스는 바로 표정을 굳혔다.
손에서 느껴지는 압박이 로크가 전력으로 휘두른 대검을 막아낼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차이가 있다면 로크는 양손을 모두 쓰고 상대는 한 손으로 대검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체격도 그렇고, 말도 안 되는 힘이다!’
기사로서 루시우스는 자신의 키가 작다고 여겨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루시우스보다 머리가 두 개 이상은 더 컸다.
‘혼자서는 막을 수 없어!’
루시우스는 몇 차례 공격을 받아내며 뒤로 물러났다.
일대일 승부로는 전혀 승산이 없고 아군이 도와주기를 바라야만 했다.
다행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매복에 빠진 적들은 포위당한 상태로 섬멸당하고 있었으니 조금만 버티면 되었다.
하지만 마팔 역시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같잖은 짓을!”
마치 폭풍이 이는 것 같은 거친 검격이 이어지며 루시우스를 마구 몰아붙였다.
보통 기사보다 월등한 루시우스의 장비들이 망가져 나가기 시작했다.
‘힘도 힘인데 장비가 너무 좋잖아!’
루시우스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장비의 격차에 경악했다.
상대의 장비는 아인에게서 받은 것보다도 월등하게 좋았다.
단순히 명품 정도가 아니었다.
이 정도라면 전설에서 나올 법한 이름 있는 무구여야만 이해할 수 있었다.
“끝이다!”
루시우스의 빈틈을 발견한 마팔은 그대로 대검을 내리찍었다.
이 일격에 상대가 죽으리라 확신했다.
쩌정!
바로 그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마팔의 대검을 후려쳐서 궤도를 비틀었다.
보통의 화살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묵직한 충격에 마팔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화살에 이 정도 힘을 담아낸다고?’
마팔은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을 받았다.
게다가 자신의 공격을 정확하게 저지하는 것.
화살이 날아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전투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파악하고 예측해서 쏜 것이라고 봐야 했다.
‘위험하다.’
반드시 찾아내서 죽여야 할 상대.
그러나 소란스러운 전장 한복판에서 그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마팔은 침착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내가 퇴로를 열어야 해!’
마팔의 대검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루시우스는 열세를 깨닫고 몸을 피했지만 그 때문에 마팔이 날뛰는 걸 막을 수 있는 이가 없었다.
“내가 레이칸 왕국의 위대한 대전사 마팔이다!”
마팔은 기합과 함께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십여 명의 기사들이 나자빠지고 포위망에 구멍이 뚫렸다.
“마팔 님을 따라라!”
“이쪽이다! 모두 마팔 님의 뒤를 쫓아라!”
포위망이 뚫리기 시작하자 레이칸 왕국의 군대가 한 방향으로 몰렸다.
그들은 포위망을 벗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싸웠고, 생각보다 거센 그들의 저항에 기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 *
‘저건 또 무슨 괴물이야?’
실시간으로 포위망이 뚫리는 광경을 보는 건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아무리 급조한 매복과 포위망에 이전 전투의 체력 소모 등 악영향이 있다지만 내 군대는 정예였다.
더구나 기사 중에는 고티어 전투형 영웅들도 배치되어 있었는데 고작 한 명에게 그들이 밀려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꼭 카이로스 백작 같군.’
상대가 보여주는 용맹은 카이로스 백작을 떠올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부상당한 상태로도 그렇게 날뛰며 마이어드 후작가에 극심한 피해를 줬던 이가 카이로스 백작이었다.
내가 카이로스 백작이 부상을 입기 전의 전력을 정확히는 모르나 4티어에서도 최상위권이라고 평가해 줄 만했다.
같은 4티어였던 루퍼스가 부상을 입은 카이로스 백작보다도 약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런데 지금 저 상대 역시 그랬다.
4티어인 루시우스를 손쉽게 몰아붙이는 게 충분히 4티어 최상위권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5티어일지도 모른다.
“저쪽, 만만치가 않구나.”
자크론도 상대를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그런 거 같습니다. 루시우스 경이 패퇴할 줄은 몰랐는데.”
죽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루시우스는 기사단 내 최고 실력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단장인 로크와 동급으로 여겨지며 때때로 로크와의 대련에서 승리를 따낼 때도 있었다.
그런 루시우스의 패퇴에 아군 기사들도 당황한 눈치였다.
“그래도 걱정되지는 않습니다만.”
그 카이로스 백작도 결국에는 죽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황은 같았다.
매복과 포위를 한 것치고 예상보다 아군의 피해가 크기는 했으나 그뿐이다.
결국 피해를 따지면 적들이 많았고 전력 차이는 더욱 벌어졌다.
게다가 나에게는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반드시 죽일 수 있는 한 수가 있었다.
끼리리릭!
팽팽하게 시위를 당긴 탈론이 달아나는 레이칸 왕국군의 뒷덜미를 붙잡았다.
콰앙!
한 번에 두 명을 꿰뚫고 바닥까지 꽂히는 무시무시한 위력의 화살.
오늘따라 탈론의 활이 유난히 매서웠다.